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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헤르만 헤세(1877~1962)
■ 게으른 정원사의 즐거움
[즐거운 정원]
생각에 잠겨 텅 빈 꽃밭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걷다 보면 정원 북쪽 가장자리에 아직도 누르스름한 빛을 띠고 쌓여 있는 눈이 보인다. 아직 봄이 올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들판과 시냇가의 가장자리, 그리고 경사진 언덕에 자리 잡아 따사로운 햇살을 받은 포도밭 가장자리에는 벌써 갖가지 초록의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다. 또 초원에는 노란 꽃들이 즐거우면서도 수줍은 듯 풀숲에 빼꼼이 모습을 드러낸 채 피어 있다.
벌거벗은 화단들은 사람들이 쟁기질하고 씨를 뿌려주기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
일요일과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과 자연에 친근감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제 다시 좋은 시절이 왔다.
사람들은 은빛 버들가지를 꺽어다 방안에 꽃아 둘 것이다.
지난겨울은 얼마나 황량했던가, 길고 어두운 다섯 달 동안이나 우리는 정원 없이 지냈다.
채소밭은 생명이 충만해져서 반짝이는 푸른빛을 띤 상추들이 자랄 것이다.
우리는 파헤쳐진 땅을 다시 평평하게 고르고, 끈을 매 놓은 대로 예쁘장하고 반듯하게 줄을 긋는다. 화단에 어떤 색과 모양의 꽃들을 심을지 미리 나눠 놓았다가 씨앗을 뿌린다. 하늘색과 흰색을 여기저기에 심고, 미소 짓는 듯 한 붉은색 꽃을 그 사이에 흩트려 심을 것이다. 이쪽은 물망초로, 저쪽은 레세다 꽃으로 화려하게 가장자리를 다듬는다. 햇빛이 반짝이는 여름이 되면 그곳에 탁자를 갖다 놓고 앉아 우유가 조금 들어간 커피를 아끼지 않고 마셔야지, 또 가벼운 식사에 곁들여서 포도주를 마실 생각을 하며 저쪽 채소밭 한켠에 무를 심을 곳을 눈여겨 둔다.
정원을 가꾸면서 마치 자신이 창조자가 된 듯한 즐거움과 우월감이다.
재배 식물들 가운데는 좋은 것들도 있고 나쁜 것들도 있다. 힘을 절약하면서 피어나는 것이 있는가하면, 자신의 힘을 마구 낭비하면서 풍성하게 열리는 식물도 잇다. 우쭐하며 자기만족에 도취된 식물이 있는가 하면, 다른 것에 기생하며 사는 r서들도 있다. 어떤 식물들은 그 종이나 생명력이 고루하고 평범하다 못해 활기조차 없는 것이 있는가 하면, 마치 당당한 신사처럼 즐거움에 젖어 피어나는 것들도 있다. 그런 것들 가운데는 좋은 이웃도 있고 나쁜 이웃도 있다. 다정한 식물이 있는가 하면 혐오스러운 식물도 있다.
어떤 식물은 아무런 제약 없이 마구 거칠게 피어난다. 그런 것들은 아무런 규칙도 없이 제멋대로 생명을 누리다 죽어 가고 만다. 또한 빈약하여 손해를 보는 식물도 있다. 그것들은 불쌍하게도 굶주리고 창백한 모습으로 힘겹게 생명을 유지해 가느라 애쓴다. 어떤 식물들은 열매를 생산하고 증식하면서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풍성하게 성장해가고, 어떤 식물들은 힘들여 애써 가꾸어야만 겨우 종자를 남기는 것들도 있다.
나는 늘 그렇게 정원에서의 여름이 너무도 빠른 속도로 조급히 왔다가 지나가 버리는 것이 놀랍고 염려스럽다. 겨우 몇 달밖에 주어지지 않은 여름의 짧은 시간 동안 화단 안에서는 여러 식물들의 삶이 지나간다.
정원에서는 모든 생명의 짧은 순환이 다른 어느 곳에서 보다도 더욱 빠르고 명확하게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내 작은 정원에 봄이 온 것을 기뻐하면서 콩과 샐러드, 레세다, 겨자 따위의 씨앗을 뿌린다. 그리고 앞서 죽어간 식물들의 잔해를 거름으로 준다. 그러면서 그 죽어간 것들을 돌이켜 생각하고, 앞으로 피어날 식물들에 대해서도 미리 생각해 본다. 다른 모든 이들처럼 나도 이 절서정연한 자연의 순환을 자명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비밀스럽고 아름다운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하는 이따금의 순간, 내 마음속에는 땅위의 모든 창조물 가운데 유독 인간들만이 이와 같은 사물들의 순환으로부터 어딘지 제외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물들의 덧없음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을 위해서 개인적이고 개성적인 특별한 무언가를 갖고 싶어 하는 욕구가 너무도 기이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보덴 호숫가에서]
나는 여태껏 내 소유의 정원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나는 정원에 땔감과 정원용 도구들을 넣을 헛간을 지었다. 조언을 해주는 농부의 아들과 함께 길을 만들고 화단의 구획을 정비했으며, 여러 종류의 나무들도 심었다.
갓길로는 달리아 꽃을 재배했고 가로수 길도 하나 내었다. 그 양편으로는 보기 좋은 수백 그루의 해바라기가 늘어서서 자랐고, 발치에는 붉은색과 노란색을 띤 수천 송이의 니켈라 꽃들이 피어 있었다.
집에서 쓸 많은 양의 땔감을 직접 톱질하고 도끼질을 해서 마련했다. 멋진 일이었고 배울 점도 많았지만 종내에는 노예가 된 것처럼 힘든 일이 되고 말았다. 농부가 된다는 것은 놀이처럼 재미로 할 때는 멋있는 일이지만 습관이 되고 점점 더 일이 많아져 의무가 되어버리면 그 즐거움은 사라져 버린다.
[잃어버린 주머니칼]
나는 어제 주머니칼을 잃어버렸다. ~~~이 사소한 분실로 나는 엄청나게 우울해지고 말았다. 오늘도 나는 감상에 빠져 있는 나 자신을 비웃으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그 잃어버린 칼 생각으로 가득했다.
나는 내가 소유하고 있던 물건에 유별나게 애착을 갖고 집착하는 습관이 있다. 그런 자신을 책망하기도 하고 고쳐 보려 노력도 했지만 아직 그 어리석은 버릇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그뿐인가 내 몸에 맞춰진 오래된 옷이나 모자, 지팡이 등 과 헤어져야 할 때, 오래 살았던 집을 떠나야 할 때 나는 늘 불안해하다 심지어 통증마저 느낀다.
내가 쓴 책들이 꽤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상당히 만족스러운 생활이었다. 호수 위에 보트를 띄워놓고, 아내는 첫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 거창한 계획을 하나 세우고 있었는데, 온통 그 계획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것은 집을 짓고 정원을 꾸며보자는 생각이었다. 땅은 벌써 사놓았고 말뚝도 박아놓았다. 그 부지 위를 거닐 때면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꾼다는 행위의 아름다움과 품위에 엄숙해지곤 했다. 그것은 이곳에 영원히 초석을 놓고 나와 내 아내, 아들을 위해 고향과 안식처를 마련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집 설계는 완성되었고, 정원도 내 머릿속에서 점차 그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정원 한가운데는 넓고 긴 길이 나 있고 우물과 밤나무와 우거진 초원이 있었다. 당시 내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
그 사이에 나는 정원을 꾸며 나무도 심고 집도 지었다. ~~~잠깐씩 여행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나는 매일 정원에서 몇 시간씩 보냈다. 수년 동안 해마다 땅을 파고 나무를 심고 씨를 뿌리고 물과 거름을 주고 과일을 수확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원 일을 직접했다.
한때 여행을 자주 다니는 시기가 있었다. 보덴 호숫가의 아름다운 집이 더 이상 나를 편안하게 해주지 못했던 시절, 나는 정원을 돌보지도 않고 내버려둔 채 세상을 두루 돌아다녔다.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 아내는 우리가 살던 집과 마을을 떠나는 것에 찬성했다. 커가는 아이들에게는 학교와 그밖에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끼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지만 사실은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 이제는 무의미해졌으며, 그 집에서 행복과 안락을 얻으리라 던 내 꿈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꿈을 이제 땅에 파묻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스위스의 도시 근교에 우람한 태고의 고목들이 우거진 오래된 어느 멋진 정원에서 나는 습관처럼 다시 봄과 가을의 모닥불을 피웠다(1912~1919년까지 스위스 베른의 멜헬뷜베크에서 헤세의 가족은 집을 하나 얻어 세들어 살았다).
[잠 못 이루는 밤 들]
늦은 밤 침대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거리는 조용하고 정원에는 바람이 불어와 이따금 나무들을 흔들어놓는다. 어디선가 개가 짖고 있다. 멀리 거리에서 마차가 지나가며 내는 진동 소리를 들으며, 마차에 스프링 장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소리로 마차를 좇는다. 마차는 길모퉁이를 돌더니 갑자기 더 빨리 달려가고 잠시 후 바쁘게 굴러가던 바퀴 소리가 커다란 정적 속으로 나직하게 사라져간다. 그리고는 잠시 뒤 늦은 밤 누군가 거리를 걸어간다. 그의 빠른 발걸음 소리는 텅 빈 거리에 기이하게 울려 퍼진다. 그는 걸음을 멈추더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다시 문을 닫는다. 그러고 나자 다시 무거운 정적이 흐른다. 또다시 약간의 활기가 일어나는 듯하더니 그것도 점차 잦아든다. 마침내 모든 것이 피곤해 지고 아주 고요한 바람 소리와 벽지 뒤로 흘러내리는 아주 작은 회반죽 덩어리 소리마저 크게 들려 미세한 감각을 자극한다. 그리고 잠은 오지 않는다. 피로 때문에 눈과 머릿속 상념에 고운 베일이 덮이고 귓속으로 쉴 새 없이 흐르는 피의 움직임 소리가 들린다. 지끈거리는 머릿속에서도 섬세하고 들뜬 생명의 소리가 들리고, 혈관 속으로 일정하면서도 혼란스럽게 뛰는 맥박 소리를 느낀다.
빠르고 정신없이 흘러가는 우리의 삶 속에서 영혼이 자신을 스스로 의식할 수 있는 시간은 놀랍게도 너무나 짧다. 감각과 정신으로 지배되는 삶이 뒤로 물러서고 기억과 양심의 거울 앞에 영혼이 숨김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그런 시간은 너무나 짧다. 그런 일은 아마도 커다란 고통을 체험할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관 앞에 서 잇을 때, 아마도 병상에 누워 잇을 때나 일어날 것이다. 아니면 홀로 긴 여행을 한 끝에 다시 돌아와 처음을 맞이한 시간에 일어나겠지만, 그런 시간은 언제나 무언가로부터 방해를 받고 왜곡된다.
낮 동안 우리가 살고 잇는 감성적인 삶은 절대 순수하지 않다. 감각이 격렬하게 작용하며 분별력은 감정의 움직임, 판단하는 목소리, 미세하게 비교하는 매력, 미묘하게 용해시키는 익살의 매력까지 뒤섞으면서 밀고 나아간다.
■ 2. 작지만 반가운 손님들을 초대하기
[여름 목련나무와 난쟁이 분재]
여름이 한창이다. 벌써 몇 주 전부터 커다란 여름목련나무가 내 방 창문 앞에 꽃을 활짝 피운 채 아우성이다. 그 나무는 남쪽 지방의 여름을 상징한다. 언뜻 보기에는 느긋하고 무관심하고 느린 듯하지만, 사실은 다급하면서도 흥청거리듯 풍성하게 꽃을 피워댄다. 눈처럼 하얗고 커다란 꽃받침 가운데에는 늘 몇 개 안되는, 많아야 여덟 개 내지 열 개밖에 안 되는 꽃잎이 동시에 피어난다. 나무에는 약 두 달간 꽃이 핀다. 그동안 꽃들은 항상 같은 크기로 피어 있는 듯 보이지만 이 멋지고 커다란 꽃송이들은 피어나자마자 너무나 허무하게 지고 만다. 어느 것도 이틀이상 버티는 꽃잎이 없다. 꽃은 대개 이른 아침에 창백한 녹색을 띤 꽃봉오리로부터 피어난다. 그것은 순수한 백색이다. 마법 속에서 나타난 듯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하늘거린다.
[아름다운 세계에서 날아온 낯선 손님]
무더운 여름이 되었다. 가끔 매서운 뇌우가 몰아쳤다. 조금은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이고 줏대 없었지만 그 위력은 점점 더 커져 풍성하고 화려하게 자라던 밤나무 잎과 꽃들, 그리고 딸기가 몇 년 전부터는 남아나지가 않았다.
슈바벤 지방에 사는 화가 가이슬러는 내가 50년 전 보덴 호수에 지었던 집을 그린 소묘화를 보내왔다.
나비는 앉아서 두 날개를 포개고 있었다. 날개의 아랫부분은 매우 칙칙한 갈색 빛과 잿빛을 띠었는데, 날개를 다시 쫙 펴자 비로드처럼 부드럽고 진한 자주색이 화려하게 드러났다. 거기에는 샛노란 색 줄무늬와 푸른색 점들이 멋지게 줄지어 있었다. 그 줄무늬는 날개의 가장 밝은 가장자리 색과 물감을 칠한 듯 한 검붉은 색 사이에서 너무도 고상하고 우아하게 돋보였다. 나비는 마치 리듬을 타듯이 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부드러운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면서 머리카락만큼 가는 여섯 개의 작은 다리를 내 손 등 위에 단단히 붙여 몸을 지탱했다. 잠시 후 그 나비는 내가 놓아주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뜨겁고 밝은 햇살 속으로 날아가 저 멀리로 사라지고 말았다.
[도시로의 나들이]
은둔자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자신이 머물렀던 암자를 떠나 사람들이 사는 도시 근처로 갈 경우 자신의 행동에 그럴듯한 이유를 달게 마련이지만, 그 결과는 대개 우스꽝스러운 것이 될 뿐이다. 구두수선공이 구두수선공으로 남아야 하듯이 은둔자도 은둔자로 남아야 한다.
나 자신과 내 삶에 불만을 품고서 산 위에 있는 암자를 뒤로하고 잠시 동안 사람들이 사는 도시로 갔을 때, 나에게도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나는 호기심에 새로운 것을 체험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싶은 욕심에서 도시로 나왔다. 오랫동안 오직 권태와 고통만을 맛본 후에 어쩌면 다시금 기쁨과 재미, 만족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가느다란 기대를 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나를 평가하고, 다시금 사람들과 나 자신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이 아마도 나를 향복하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래서 나는 짐 가방을 들고 도시로 떠났고, 거기 사람들이 사는 곳에 방을 한 칸 빌렸다. 여기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곳 사람들은 놀랍게도 아침에 믿기지 않는 이른 시각에 일어나 밤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갔으며, 피아노나 바이얼린을 켜고, 자주 목욕을 하고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대다수 사람들은 사업가이거나 그들에게 고용된 직원이었으며, 모두가 미쳐버릴 정도로 할 일이 많았다.
[여름 편지]
사랑하는 친구여! 너무도 멋지고 조금은 별난 이번 여름도 마침내 끝나 가는가 보네. 벌써 산들은 9월이 왔음을 알리는지 보석 같은 빛을 띠고, 너무도 명료한 자태를 보이며 공기처럼 가볍고 엷고 달콤한 코발트빛으로 빛나고 있어.
일을 하면서 몇 권의 아름다운 책을 읽었네. 그중 가장 좋았던 것은 슈티프터의 <야생화>였어.
친구여, 일주일 또는 열흘 동안 화병에 꽂힌 채 시들어가는 백일홍을 한번 관찰해보게! 그러고도 그 꽃다발이 색이 바래가면서 며칠 더 남아 있거든 매일 아주 자세히 관찰해보게! 싱싱할 때는 더할 나위 없이 강렬하고 황홀하던 색이 이제 섬세해지고 지쳐 아주 부드럽게 바래가는 것을 볼 수 있을 걸세. 그저께만 해도 오렌지색이었던 꽃이 이제는 노란색으로 변하고, 내일 모래쯤이면 얇은 청동을 입힌 듯한 회색으로 되겠지. 쾌활한 농부 같은 분위기를 띤 청적색은 그늘에라도 가린 듯 연한 청색으로 변해갈 것이고, 지친 꽃잎의 가장자리는 여기저기 주름지며 고개를 떨구겠지. 탁해진 흰빛, 그것은 증조할머니의 빛바랜 비단으로 만든 물건이나 희미해진 낡은 수채화에서나 볼 수 있는 색일 거야.
친구여, 꽃잎의 뒷면도 세심하게 들여다보게! 줄기가 꺾이는 순간 갑자기 그 꽃잎의 그늘진 면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그때 색의 유희가 일어나며 천국으로의 여행이, 점점 더 정신적인 것으로 넘어가며 죽음에 가까워지네. 그것은 화관花冠에서보다 그 죽어가는 꽃잎의 그늘진 면에서 더 향기롭게, 더 놀랍게 이루어진다네. 다른 꽃들의 세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잃어버린 색들이 기이하게 금속과 광물의 빛을 띠고, 고산지대의 암석이나 이끼 또는 바닷말에서나 볼 수 있는 청회색과 잿빛을 띤 녹색, 청동색으로 변하며 꿈을 꾼다네.
■ 3. 다시, 소중한 것들이 말을 건다
[계절의 유희]
올여름 나는 언짢았다. 대부분 굿은 날씨와 아픈 몸 때문이었고 이런저런 일들이 내 여름날을 앗아가 버렸다.
이즈음 며칠 동안 계속됐던 답답한 더위에도 개의치 않고 나는 더 자주 밖으로 나간다. 이 아름다움이 얼마나 덧없고 얼ㄴ마나 빨리 작별을 고하는지 나는 알고 있다. 이 달콤한 성숙함이 돌연 갑자기 시들고 죽어버릴 거라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는 늦여름의 이 아름다움에 대해 너무나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다!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느끼고, 모든 것을 냄새 맡고 싶다. 이 풍요로운 여름이 내 감각에 부여하는 모든 것을 맛보고 싶다.
어둠 속 저 너머에 있는 산들이 홀연 섬뜩하다. 아직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연녹색 하늘가에서 날갯짓을 서두르며 박쥐들이 나타났다가 번개처럼 사라진다.
[구름 낀 하늘]
바위틈에 조그마한 난쟁이 풀이 피어 있다. 나는 몇 시간 전부터 누워서 작은 구름조각들이 천천히 어지럽게 흩어지며 저녁하늘을 덮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기쁨은 진짜가 아닌 것처럼 들리고, 음악은 김이 빠진 것처럼 맥없이 들린다. 우울한 마음에 짓눌리다 보면,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더 나아 보이기도 한다. 때때로 이런 우울한 기분이 발작처럼 찾아오지만, 어떤 간격을 두고 찾아오는지는 모르겠다.
평소에 마음에 들었던 사람들, 집들, 색깔 그리고 소리들이 의심스러워지고 잘못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오늘 그런 날을 보낸 후 쉬고 있다.
은둔자가 간단한 경전을 읽으며 사는 것처럼, 나는 이런 것들을 수단으로 해서 살아간다.
[오래된 나무의 죽음을 슬퍼하며]
10여 년 전, 그 낯설고 유쾌하지 않았던 전쟁이 끝난 이후부터 나는 일상적인 교재를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더는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신뢰를 쌓아가며 사귀는 일을 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혼자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 대신 작은 사물들과 일상적 교류를 한다.
정원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바람과 빗속에서 흔들거리며 대견스럽게 서 있다.
나는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다가, 혹은 깊은 생각에 잠기거나 책을 읽다 피곤해지면 발코니로 나가 나를 올려다보는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기분전환을 한다.
그 나무는 며칠 전 폭풍이 몰아치던 날 부러지고 말았다. 그 나무가 꺽인 채 아직 땅에 누워 있는 것이 보인다. 아직 치우지 않은 것이다.
■4. 만약 내가 고독 속에만 머물러 있었더라면
[땅으로부터의 행복]
만약 내가 고독 속에만 머물러 있었더라면, 나는 지금껏 내 인생의 친구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나는 카사 카무치의 집을 떠나는 일도 결코 없었을 것이다.
1930년 어느 봄날 저녁에 우리는 취리히의 소위 아아취에 모여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야기가 집과 집을 짓는 일에 이르게 되었고 거기서 나는 이따금 내 마음속에 떠오르곤 하던 집을 갖고 싶다는 소망에 대해 언급했다. 그때 갑자기 친구인 B가 나를 보고 웃더니 소리치는 것이었다. 자네가 원하는 그런 집을 갖게 될 거네!
어딘가에 내 집을 갖고 한 조각의 땅을 사랑하며, 그 땅을 단지 관찰하거나 그림으로 그리는데 그치지 않고, 경작하여 식물을 재배하고 농부들이나 목장 사람들과 함께 행복을 맛보는 것, 지난 이천 년 동안 반복되어 온 베르길리우스의 <농경시>의 리듬에 참여하는 것. 그것은 내게 근사하고 부러워할 만한 행복으로 여겨졌다.
내 재산은 아니지만 평생 임대인으로서 한 조각의 땅을 갖게 된 것이다! 얼마 전 우리는 바로 그 땅에 집을 짓고 이사했다.
인생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 슬픈 것들이 있다. 그래도 때때로 꿈이 현실에서 실현되고 충족되는 가운데 찾아오는 행복이 있다.
매일 아침 나는 아틀리에의 창 아래로 양손을 뻗어 두세 개의 무화과나무 열매를 따서 먹는다. 그러고 나서 밀짚모자와 정원용 바구니, 가래, 호미, 가위 등을 들고 가을의 정원으로 나간다.
[나의 오랜 친구였던 복숭아나무]
지난밤 알프스의 열풍이 강하고 무자비하게 불어 닥쳤다. 참을성 있는 대지와 빈 들판과 정원, 그리고 말라버린 포도덩굴과 여윈 숲 위로 불어댔다. 나뭇가지와 둥치들이 휘어졌고, 바람은 장애물을 만날 때마다 쉬익쉬익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무화과나무는 서로 나뭇가지를 부딪치며 시들어버린 나뭇잎을 구름처럼 높이 소용돌이쳐 허공으론 날렸다. 밤새 시달린 나뭇잎들은 오늘 아침 깨끗이 쓸려 정원 구석구석에 그리고 바람을 막아주는 담벼락 앞에 완전히 굴복한 듯이 쌓여 있었다. 정원에 나가보니 불행한 일이 일어나 있었다. 복숭아나무 중 가장 커다란 것이 밑동이 부러진 채 포도밭 가파른 비탈 위에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번만큼은 새로 복숭아나무를 심을 수 없었다. 살아오는 동안 꽤 많은 나무를 심었으니 한 그루 덜 심는다 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내 안에서 무언가가 그 일을 거부하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또다시 새로운 생명을 키우고 삶의 바퀴를 다시 돌리는 일을 거부하며, 탐욕스런 죽음에 다시 희생물을 바치는 일을 거부하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자리는 비워두어야 한다.
[보덴 호수와 작별하며]
보덴 호숫가에 있는 작은 집을 비워주었을 때, 나는 그런 상태였다.
베른 교외에 있는 오래된 시골집으로 옮겨온 것이다.
마침내 1919년 봄, 나는 거의 7년 가까이 살았던 베른의 매혹적인 집에 작별을 고했다. 나는 루카노로 향했고, 이삼 주 동안 소렌고에 머물며 살 집을 알아보았다. 그러다가 몬타뇰라에서 카사 카무치를 발견하고 1919년 5월에 이곳으로 이사했다.
내가 옮겨온 이 마지막 집에서 지금까지 나는 12년 동안을 살았다. 처음 4년 동안은 1년 내내, 그리고 그 이후에는 따뜻한 계절에만 머물렀지만....
그 집 전체를 세낸 것도 아니고, 네 개의 방이 딸린 작은 아파트를 빌려서 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제 집을 소유하고 있는 가장도 아니었고 아이들과 일꾼들을 거느리거나 개를 데리고 다니면서 자기 정원을 돌보는 집안의 가장도 아니었다. 지금의 나는 궁색하고 빈털터리가 된 문인일 따름이었다. 우유와 쌀과 마카로니로 근근이 끼니를 대우고, 낡은 양복은 닳아서 올이 풀어질 때까지 입었으며, 가을에는 숲에서 밤을 주워와 저녁 식사로 대신하는 초라하고 어딘가 수상쩍은 이방인이었다. 이렇게 나는 지난 12년간을 카사 카무치에서 살았다. 그 정원과 집은 나의 소설<클링조어> 속에, 그리고 그 외의 내 다른 작품들 속에 나온다. 나는 이 집을 수십 차례 그림으로 그리고 스케치했다.
[정원에서 보낸 시간]
아침 7시쯤 방을 나와 밝게 햇빛이 비치는 테라스로 걸어간다. 거기에는 어느덧 잠에서 깨어난 태양이 무화과나무 그늘사이로 비쳐든다. 거친 화강암으로 만든 난간에 벌써 따스한 온기가 감돈다. 여기 나의 연장들이 놓여 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들이다. 연장 하나하나는 나와 친숙해져 나의 다정한 동무가 되었다.
나는 바구니와 작은 곡괭이를 손에 들고 햇빛이 나는 쪽으로 걸어간다.
아침의 길을 간다. 이미 꽃들이 시들어 볼품없이 되어버린 장미덤불을 지나서
계단 근처 꽃들이 피어 있는 꽃밭으로 간다.
꽃들은 바람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날씨가 변할 때마다, 알프스 열풍이 불어올 때마다
그 꽃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졸이곤 한다.
발치에 흩어져 핀 몇 송이 꽃들도 미소 짓는다
이따금 에메럴드빛 도마뱀이 햇볕을 쬐며
파란 공작 같은 목을 내놓고 탐욕스럽게 부풀린다.
지나간 먼 옛날의 유년시절이여! 정원 속에서 이 기쁨을 느끼다보니
너 또한 가을처럼 우수에 젖은 여러 해를 뛰어넘어
나에게 되돌아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구나.
종종 기억을 되살리며 아릿하면서도 달콤하게 나이 들어가는
나의 가슴을 적시는구나
여기저기 잡초들이 보인다.
통통하고 무성한 당근 이파리들의 그늘 속에서
은밀히 살찌우며 높이 자란 잡초들이다.
귀를 기울이자, 한 시간이 지나 저기 작지만
영원한 순간이 부드럽게 나를 요람처럼 흔들어 깨우는 신선한 목소리가 들린다.
집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다. 시내로 쇼핑을 나갔다 돌아온 아내의 음성이다.
나도 소리쳐 대답하고는 몸을 일으킨다.
한 줌 가득 마지막으로 손에 쥐었던 것을 내 연금술의 불속으로 던져 넣는다.
재를 거르던 체를 헛간에 갖다 두고 눈부신 햇살 속을 걸어서
구부러진 언덕길의 자갈밭을 올라가 집으로 향한다.
아내를 맞이하고 그녀가 아끼는 꽃들과 그녀의 영귀비와
키 작은 참제비고깔에 거름으로 쓸 약속한 검은 재를 한가득 그녀에게 건넨다.
나는 갑자기 열기와 피로를 느끼며 계단을 올라가 집 안의 서늘한 그늘 속으로 들어간다.
양 손을 씻고 나자 벌써 아내가 나를 식탁으로 부른다.
수프를 따라주고 시내에서 들은 이야기를 해주며
다음번에는 나와 함께 시내에 나가면 좋겠다고 한다.
내 머리가 너무 길어 등까지 내려왔으니 잘라야겠다는 것이다.
나는 결국은 사람이지 숲 속에 사는 신령은 아니지 않냐는
내가 좀 불만을 표시하자 아내는 알았다며 정원 일은 어땠는지 묻는다.
우리의 대화는 이내 활발해진다.
오늘 저녁에도 채소밭 전체에 혹은 일부이라도 물을 줘야 할 지 의논한다.
그것도 몇 시간씩 걸리는 일이라 쉬운 일은 아니다.
아니면 최근 내린 비로 얼마간 습기가 남아 있지 않을까 궁리한다.
그렇겠지 결론을 짓고 정원 위쪽 샘이 솟는 곳에서 따온
붉고 노란 나무딸기로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친다. ■
[Review]
헤르만 헤세(1877~1962)는 두 차례의 결혼 생활에 실패한 뒤 1931년 세 번째 여인 ‘니논 돌빈(1895~1966)’과 결혼하였다. 18세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헤세의 자유분방한 마음을 잘 이해해주었고, 마지막까지 그녀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였다. 헤세는 당시에 쉰네 살이 되었고 고국인 독일을 떠나 스위스로 망명한 상태였으며, 몬테뇰라 마을 남쪽 기슭에, 재산가인 친구가 마련해 준 1, 1000제곱미터의 땅까지 마련해 두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일생을 마칠 때까지 정원을 돌보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였고, 작품<유리알 유희>를 발표하여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책에 실린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은 1935년 여름 그의 누이 아델레의 6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쓴 것으로 언어와 음률을 시적으로 표현한 형식으로 쓴 글이다.
“귀를 기울이자, 한 시간이 지나 저기 작지만 영원한 순간이 부드럽게 나를 요람처럼 흔들어 깨우는 신선한 목소리가 들린다.
집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다. 시내로 쇼핑을 나갔다 돌아온 아내의 음성이다.
나도 소리쳐 대답하고는 몸을 일으킨다.
한 줌 가득 마지막으로 손에 쥐었던 것을 내 연금술의 불속으로 던져 넣는다.
재를 거르던 체를 헛간에 갖다 두고 눈부신 햇살 속을 걸어서
구부러진 언덕길의 자갈밭을 올라가 집으로 향한다.
아내를 맞이하고 그녀가 아끼는 꽃들과 그녀의 영귀비와
키 작은 참제비고깔에 거름으로 쓸 약속한 검은 재를 한가득 그녀에게 건넨다.
나는 갑자기 열기와 피로를 느끼며 계단을 올라가 집 안의 서늘한 그늘 속으로 들어간다.
양 손을 씻고 나자 벌써 아내가 나를 식탁으로 부른다.
수프를 따라주고 시내에서 들은 이야기를 해주며
다음번에는 나와 함께 시내에 나가면 좋겠다고 한다.
내 머리가 너무 길어 등까지 내려왔으니 잘라야겠다는 것이다.
나는 결국은 사람이지 숲 속에 사는 신령은 아니지 않냐는
내가 좀 불만을 표시하자 아내는 알았다며 정원 일은 어땠는지 묻는다.
우리의 대화는 이내 활발해진다.
오늘 저녁에도 채소밭 전체에 혹은 일부이라도 물을 줘야 할 지 의논한다.
그것도 몇 시간씩 걸리는 일이라 쉬운 일은 아니다.
아니면 최근 내린 비로 얼마간 습기가 남아 있지 않을까 궁리한다.
그렇겠지 결론을 짓고 정원 위쪽 샘이 솟는 곳에서 따온
붉고 노란 나무딸기로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친다.“<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헤세는 1904년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질 무렵에 아홉 살 연상의 여인과 결혼, 보덴 호수가 있는 ‘가이엔 호펜’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였다. 슬하에 세 아들이 태어났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헤세는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쓴 책들이 꽤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상당히 만족스러운 생활이었다. 호수 위에 보트를 띄워놓고, 아내는 첫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잃어버린 주머니칼-
헤세는 그곳에서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정원을 꾸며 나무도 심었다. 세 아들도 태어났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라면서 부부는 자녀들의 교육 문제와, 설상가상 여행을 좋아하는 헤세가 농장 일을 돌보지 않는 문제로 갈등을 겪게 되자 그곳을 떠나 스위스의 ‘베른’ 멜헬뷜메크(1912~1919)’에서 집을 하나 세내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기도 했다.
“스위스의 도시 근교에 우람한 태고의 고목들이 우거진 오래된 어느 멋진 정원에서 나는 습관처럼 다시 봄과 가을의 모닥불을 피웠다.”-잃어버린 주머니 칼-
이즈음 1923년 헤세는 정신적 고통으로 '칼 융'에게 치료를 받으며 결국 가정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그의 글 속에는 염세주의적 표현이 드러나 있기도 하다. 그 후 헤세는 스무 살 연하의 여인과 결혼했으나 4년 후에 파탄되었다.
“기쁨은 진짜가 아닌 것처럼 들리고, 음악은 김이 빠진 것처럼 맥없이 들린다. 우울한 마음에 짓눌리다 보면,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더 나아 보이기도 한다. 때때로 이런 우울한 기분이 발작처럼 찾아오지만, 어떤 간격을 두고 찾아오는지는 모르겠다.~~~평소에 마음에 들었던 사람들, 집들, 색깔 그리고 소리들이 의심스러워지고 잘못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오늘 그런 날을 보낸 후 쉬고 있다.”<구름 낀 하늘>
헤세는 세상에서 먹고사는 일로 어지럽게 사는 일이 처음부터 그의 성격에는 맞지 않았다. 정원을 가꾸는 일이 즐거웠으나 그곳에서 함께 이해하고 행복해하는 주변 사람이 없다면 의미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헤세는 농사꾼이 아닌 유명 문인으로써 정원을 가꾸는 고상한 사람으로 살기를 원했다. 이 책은 그가 젊은 시절부터 노후에 이르기까지 농장에서 보낸 수필 형태의 이야기들을 여러 편 묶어 펴낸 것으로, 헤세의 전 일생 이야기가 곳곳에 잘 드러나 있다.
헤세의 글은 섬세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평화로움이 들어 있다. 찻잔을 앞에 놓고 노을이 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처럼 약간은 우수 憂愁가 깃들어 있는 듯하다. 그는 1962년 82세의 나이로 스위스의 몬테뇰라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나비는 앉아서 두 날개를 포개고 있었다. 날개의 아랫부분은 매우 칙칙한 갈색 빛과 잿빛을 띠었는데, 날개를 다시 쫙 펴자 비로드처럼 부드럽고 진한 자주색이 화려하게 드러났다. 거기에는 샛노란 색 줄무늬와 푸른색 점들이 멋지게 줄지어 있었다. 그 줄무늬는 날개의 가장 밝은 가장자리 색과 물감을 칠한 듯 한 검붉은 색 사이에서 너무도 고상하고 우아하게 돋보였다. 나비는 마치 리듬을 타듯이 숨을 쉬었다.” <아름다운 세계에서 날아온 낮선 손님>
<더 많은 본문>
"우리는 파헤쳐진 땅을 다시 평평하게 고르고, 끈을 매 놓은 대로 예쁘장하고 반듯하게 줄을 긋는다. 화단에 어떤 색과 모양의 꽃들을 심을지 미리 나눠 놓았다가 씨앗을 뿌린다. 하늘색과 흰색을 여기저기에 심고, 미소 짓는 듯 한 붉은색 꽃을 그 사이에 흩트려 심을 것이다. 이쪽은 물망초로, 저쪽은 레세다 꽃으로 화려하게 가장자리를 다듬는다. 햇빛이 반짝이는 여름이 되면 그곳에 탁자를 갖다 놓고 앉아 우유가 조금 들어간 커피를 아끼지 않고 마셔야지, 또 가벼운 식사에 곁들여서 포도주를 마실 생각을 하며 저쪽 채소밭 한 켠에 무를 심을 곳을 눈여겨 둔다." <즐거운 정원>
“나는 내가 소유하고 있던 물건에 유별나게 애착을 갖고 집착하는 습관이 있다. 그런 자신을 책망하기도 하고 고쳐 보려 노력도 했지만 아직 그 어리석은 버릇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잃어버린 주머니 칼>
“한때 여행을 자주 다니는 시기가 있었다. 보덴 호숫가의 아름다운 집이 더 이상 나를 편안하게 해주지 못했던 시절, 나는 정원을 돌보지도 않고 내버려둔 채 세상을 두루 돌아다녔다.”<잃어버린 주머니 칼>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 아내는 우리가 살던 집과 마을을 떠나는 것에 찬성했다. 커가는 아이들에게는 학교와 그밖에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끼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지만 사실은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 이제는 무의미해졌으며, 그 집에서 행복과 안락을 얻으리라 던 내 꿈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꿈을 이제 땅에 파묻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잃어버린 주머니 칼>
“은둔자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자신이 머물렀던 암자를 떠나 사람들이 사는 도시 근처로 갈 경우 자신의 행동에 그럴듯한 이유를 달게 마련이지만, 그 결과는 대개 우스꽝스러운 것이 될 뿐이다. 구두수선공이 구두수선공으로 남아야 하듯이 은둔자도 은둔자로 남아야 한다.” <도시로의 나들이>
“나는 혼자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 대신 작은 사물들과 일상적 교류를 한다.”<오래된 나무의 죽음을 슬퍼하며>
“인생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 슬픈 것들이 있다. 그래도 때때로 꿈이 현실에서 실현되고 충족되는 가운데 찾아오는 행복이 있다.”<땅으로부터의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