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 총재의 항일 투쟁(抗日闘争)
◆ 내가 국민학교 졸업할 때 식장에서 대웅변을 했어요. 서장 군수들을 앞에 놓고 일본놈들 보따리 싸 가지고 가라고 하면서 들이 깠어요. 국민학교 학생 때부터 그래 놓으니…. 그래서 경찰서장한테 붙들려 가서 담판한 사람이라구요. '이런 이런 내용이 옳지 못한 데 이런 경우에 가만 있겠느냐?이래 가지고 그때부터 레테르가 붙은 거예요. (1972.10.14)
◆ 선생님은 일제말에 왜놈 형사들한테 무수히 고문을 받았습니다. 나라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일본에서 지하운동을 했습니다. 김구 선생을 협조하기 위해 상해에도 연락하고 별의별 일을 다했습니다. (1969.05.18)
◆ 선생님이 왜정 때, 그때는 한참 일본 천황의 모가지를 떼겠다고 했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서 고문을 받았는데, 제일 힘든 것이 뭐냐 하면…. 한번 해보라구요. 각목을 갖다 여기에 놓고…. 왜정 때는 군대에서 신는 가죽구두가 있었다구요. 징을 박아 가지고 짜박짜박 하는 가죽구두로 밟는 거라구요. 그건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거라구요. 알겠어요? (1972.10.14)
◆ 내가 왜정 때에 학교에 다니면서 왜놈들하고 싸운 사람 이예요. 여러분은 모르지만, 현해탄을 건너와 가지고 부산서부터 안동까지 차바퀴 밑에 붙어 가지고 상해임시정부까지 파송하는 그런 일도 했습니다. 붙잡혀 들어가서 입만 벌리게 되면 70명의 동지가 모가지가 날라가는 거라구요. 그런데 대답을 안 한 거라구요. 약속했으면 그 약속을 이행하는 사람이예요.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해서 하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죽기 전에는 입을 안 열었다구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1972.11.13)
◆ 왜정 때, 내가 12시간 가까이 고문을 받고 피를 토한 적도 있었고, 15분 동안 사람을 미치게 하는 평생 잊지 못할 그런 고문도 받았습니다. 이것을 12시간 받으면서도 기적적으로 살아 나왔습니다. 맞으면서도 뒤로 벌렁벌렁 나자빠지고, 죽은 피가 주루룩 쏟아지도록 매를 맞으면서도 `쳐 봐라! 그 몽둥이가 부러지나, 내 뼈가 부러지나' 하며 견뎌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큰 시련이었습니다. (1969.11.23)
◆ 선생님도 감옥에 들어가서 맞고 고문당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참는 데는 여자가 애기 낳는 이상 힘주고 참았다구요. 나 그렇게 생각한다구요. (1992.02.05)
◆ 선생님은 때때로 공자나 석가가 고문을 당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그들이 주리를 틀어대는 고문을 당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 궁금해요. 인두로 지졌으면 어떠했을까요? 아주 궁금합니다. (1966.12.21)
◆ 감옥에 들어갔을 때 고문받고도 죽지 않는 방법을 연구했어요. 그거 가르쳐 줄까요?
고문할 때는 반드시 피를 흘리고 가야 돼요. 물 먹이고 그런다구요. 물 먹이는 거 알아요? 그리고 배나 어디나 꽉꽉 밟아요. 밟는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그걸 견디기 위해서는 관장을 하고 나가야 돼요. 오줌 대신 뒤로 전부 다 뽑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숨통을 뚫어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피를 내고 가야 됩니다. 피를 내면 파괴가 안 벌어진다구요. 폭발되지 않아요. 째지지 않아요. 그러니 피를 내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나 지혜의 왕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너무 피곤하게 되면 코피가 나지요? 코피가 안 터지면 뇌출혈이 되는 거예요. 코피 나는 것은 그 방지책이예요. 고단하게 될 때 혈압이 높아지는 것을 알기 때문에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고문당할 때는 반드시 숨통을 만들기 위해 피를 흘리고 가야 돼요. 그러니 입술을 깨물든가 혓바닥을 깨물든가 해서 피를 흘리고 구멍을 뚫어 놓고 가야 됩니다. 그런 것을 내가 가르쳐 줘 가지고 많은 사람을 구했습니다.
(1990.10.14)
◆ 한번밖에 없는 생애인데 왜 빚을 지고 가는가. 빚을 지우고 가야지. 선생님은 열네 시간을 계속해서 고문을 받아 봤다. (1970.08.08)
◆ 선생님은 무골충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수많은 고문을 당하며 피를 토하면서도 하나님을 위로해 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망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뼈가 없는 사나이가 아닙니다. (1970.12.27)
◆ 나는 신앙길에서 반대하는 것을 배워 보지 못했습니다. 들어 보지도 못하고 배워 보지도 못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서도, 피를 흘리는 자리에 들어가서도 하나님께 날 도와 달라고 기도를 안 한 사람입니다. 피를 토하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피를 흘려 가지고 하늘에 선사한 사람이라구요. '내가 피를 흘렸다고 불쌍히 보지 마시오. 나는 아직까지 용기 있는 사나이기 때문에 당신에게 협조를 할 뿐 협조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세계 인류를 나를 위하듯이, 나 대신 그들을 생각해 주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나 비참하니까 도와주소서' 이런 기도 안 한다구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날 좋아하는 것 같다구요. (웃음. 박수) (1974.07.29)
◆ 그리고 별의별 수난과 고문을 받으면서도 동지를 한 분 더 구하기 위해 입을 안 연 사람입니다. 이런 전부가 누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가 아니예요. 남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살아 나온 내가 지금에 와서 통일교회 문선생 해 가지고 자리를 잡아 가지고 편안히 살자 하는 생각은 없습니다. (1972.09.10)
◆ 선생님이 왜정 때 감옥에 들어가 고문 받고 있을때 누이동생이 죽었습니다. 그건 순전히 선생님 때문에, 탕감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1969.02.02)
◆ 한국이 일본 정권하에 있었을 때, 선생님은 몇 번이나 유치장에 끌려 들어갔다. 이곳 토오쿄오(東京)에 와 있을 때에도 한 달에 한번은 경찰서에 불려 갔다. 그 경찰서는 다까다노바바(高田馬場) 거리의 와세다대학(早稻展大學) 쪽에서 오른편에 있다. (1965.10.08)
◆ 일본은 나와 원수입니다. 왜정 때 나는 일본의 고등계 형사들한테 무참히 고문받았던 장본인입니다. 그때 내가 한마디 하면 수백 명치 생명이 왔다갔다할 수 있는 자리에서 독하디 독한 싸움을 했던 사나이입니다. '일본놈' 하게 되면 어금니를 악물고 배때기를 째는 데 선두에 서려고 했던 사나이입니다. 그러나 일본이 망해 피난가는 데 있어서 그 원수를 불러 보따리 싸서 도망가게 해준 사람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것 가지고 그들을 수습한거구요. (1971.11.06)
◆ 일본은 선생님에게 대하여 용서받지 못할 적입니다. 일본의 기관으로부터 고문당한 것을 선생님은 평생 잊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나쁜 방향으로 끝내서는 안돼요. 그것을 알기 때문에 선생님은 선생님의 말 한마디면 목이 날아갔을 악랄한 수십 명의 일본 사람들에게 짐을 정리하여 모두 일본으로 돌아가게 해 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은혜를 후손이 갚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보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라구요. 일본 식구들이 누구보다도 선생님을 존경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역사의 인과관계(因果關係)라는 것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1992.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