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수보살
“제2의 부처님 칭송받은
대승불교 최고의 논사”
+++++++++++++++++++++++++++
● 용수의 생애
CE 150~250사이에 생존, 활동하였던
“대승불교 최고의 논사”,
심지어는 “제2의 부처”로 칭송되고 있는
중관철학자
용수(Na-ga-rjuna)의 삶에 대해서
신뢰할만하게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티베트의 문헌에 의하면
용수는 남인도의 브라만가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죽을 것이라는 예언으로 인해
용수의 부모는 그를 불교사원으로 출가시켰다.
이후 즉시 건강이 회복된 용수는
북인도의 나란다(Nalanda)로
불교공부를 하러 이주하였다고 한다.
한편 중국의
구마라집(鳩摩羅什)이 기록한
〈용수보살전〉의 내용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육체적 쾌락에 탐닉한 용수는
친구 셋과 함께 왕의 궁녀들을 유혹하였으나
발각돼 친구들은 죽고 용수만 살아남게 되었다.
여기서 용수는
욕망 추구의 허망함을 깨닫고
불가에 귀의, 경전연구에 전념하게 되었으나
지적교만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반야경이 비전(秘傳)되고 있는
용궁으로 가게 돼
참다운 지혜에 이르게 됐고,
‘용수’라는 이름도
용궁과 관련된 이러한 전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 파사현정의 틀로서 연기
그러나 용수의 생애에 대한 전설적 일화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무릇 고대의 철학자의 저술에 대하여
항상 제기되는
실제 저작여부와 관련된 논란에도 불구하고
모든 불교학자들이 인정하는
용수의 저술은〈중론송〉이다.
중국에서는 중론송의 요약본
이라고 할 수 있는〈십이문론〉과 함께
그의 제자 아리아제바의 〈백론〉등
3가지 론을
소의경전으로 한 삼론종이 생겼으며
그 핵심은 이른바
‘파사현정’이라는 한 구절로 압축될 수 있다.
‘파사현정’이란
“삿된 견해를 내려놓음이 곧 진리의 드러냄”
이라는
단 한가지 일(一大事)일 뿐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용수가 사용한 파사의 논리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다.
다행히 용수는
중론의 귀경게(歸敬偈)에서
“망상을 쉬게 하고 행복을 가져오는
이 연기법을 가르쳐주신
정각자, 제일의 설법자이신 그 분께 절한다”
라고 하면서
스스로 명백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즉 불교의 핵심교리인 연기가
바로 불교 내.외를 막론하고,
그리고 모든 시대적 맥락을 떠나
잘못된 이론들
즉 제 망상을 깨뜨리는 ‘파사의 틀’인 것이다.
그렇다면
용수가 그처럼 강조하고 있는
연기법이란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득도 후
처음으로 설하셨다는 연기는 다음과 같다.
“이것으로 인해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생김으로 저것이 생기며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지느니라.”
이때 이것과 저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부처님은 전혀 특정하지 않았고,
마치 수학의 교환법칙을
‘x+y=y+x’라고 할 때
‘x’와 ‘y’가 특정한 수가 아니라
임의의 수를 의미하는 ‘변항’이듯이
위의 연기법에서 이것과 저것 역시
여러 종류의 개념쌍을 의미할 수 있다.
다만 연기에 있어서는
교환법칙의 x와 y처럼
완전히 임의의 존재가 아니라
상호의존적 관계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삿된 견해를 버리면 곧 진리 드러난다는
파사현정 논리로 연기의 원리를 설명해
중론은 “현대 학문서도 응용 가능한 논리”
문제는
앞에서 부처님께서 설하셨다는
존재구조로서
연기법이 순환적 정의
내지는
순환논법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꿔 말해
불교의 핵심교리인 연기는
논리적 관점에서 볼 때는 정당화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당화가 불가능한 연기를 갖고
상대방의 망상을 깨뜨릴 수 있을까.
여기서 용수의 파사전략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핵심이 드러난다.
즉 연기법이란
‘중생’이 세상을
분별(분할)하고 조합하면서
삼라만상을 만들 때
피할 수 없이 행하게 되는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은 이 구조를,
즉 정당화 될 수 없는
상호의존적 구조를 모르고
삼라만상이 마치
그 어떤 내적 실체가 있는
독립적 존재인 것처럼 착각,
즉 존재투사의 망상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용수가 중론에서 행한 모든 논쟁은,
예외 없이,
상대방이 바로
연기구조에 의해서 생긴 개념들,
존재들에 대하여
마치 실체(自性)가 있는 듯 착각하고
그 어떤 주장을 해올 때
바로 연기구조의
정당화 불가능성을 이용하여
논파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즉 상대방의 주장을 모순으로 몰아가는
귀류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귀류법은 제대로 사용된다면
논리학적으로 완벽한 논파방식이다.
# 파사의 구체적인 예
그렇다면 연기구조에 의해 생긴,
즉 연생법(緣生法)이
어떻게 해서 모순적 구조에
놓이게 되는 지를 파악하는 것이
용수의 사상, 즉 파사전략을 이해하는 데에
핵심이 될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용수의 파사전략의 핵심은
서로 상호의존적 존재들과 개념들은
동일하다고도 할 수도 없고(不一),
다르다(독립적이다)고도
할 수 없기(不異) 때문이다.
이점을 인과관계와
경계의 비판을 통해 살펴보자.
먼저 인과관계는
3가지 차원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첫번째는 범주적 차원에서다.
우선 ‘원인’과 ‘결과’라는 개념쌍은
범주로서 인간은
이 개념쌍의 도움으로
하나의 전체사건의 흐름을 원인과 결과로
‘비로소’ 분할한다.
따라서 이때 원인과 결과는
상호의존적 개념들로서
결코 다르다(독립적이다)고 할 수 없다(不異).
유형적 차원에서 보면
특정한 인과관계,
예를 들어 ‘아스피린을 복용함’과
‘두통이 사라짐’이라는
두 개의 사건유형은
서로 독립적으로 도입되었다(不一).
바로 그런 이유로
자연과학은 이 두 사건 유형 간에
인과관계가 있음을
실험(관찰)을 통하여 경험적으로 확인하나
필연성에는 이르지 못한다.
여기서 유형이란
개별자로부터
어떤 추상화된 존재를 의미하며
전통적으로 불교에서는 ‘상’이라고 부른 것이다.
마지막으로 개별적 차원에서 보자.
구체적인 세계
즉 ‘특정한 시공에서 아스피린을 복용함’과
‘특정한 시공에서 두통이 사라짐’이라는
두 개의 개별적 사건의 경우에는
다시는
반복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不異).
나아가 우리는
이 세 차원이
서로 간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원인’과 ‘결과’라는 범주로
분할하기 위해서는
독립성이 요구되는 사건유형들이 전제되고,
두 사건 유형
‘아스피린을 복용함’과 ‘두통이 사라짐’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범주 차원에서
‘원인’과 ‘결과’의 분할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어서 경계의 비판에 대해 살펴보자.
불교는 어떤 면에서
경계비판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만큼
생과 사, 선과 악 등의
날카로운 경계 지음을 비판하고 있다.
용수의 중론에서는
운동의 시작과 끝, 삶과 죽음,
빛이 어둠에 도달함 등
실로 모든 경계를
동일한 방식으로 논파하고 있다.
경계를 도식적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상태 A에 있는 동안은 경계가 있을 수 없고,
B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로 경계는 없다.
따라서 용수의 상대방은
“A가 끝나고 바로 B가 시작되려는 순간이
바로 경계 c다”라고 주장하겠지만
그것은 원래의 주장의 반복에 불과할 뿐이다.
위의 경계비판의 도식을 이용하면,
중론의 귀경게에서
‘불생불멸’, ‘불래불출’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 연기와 공
흔히들 용수의 사상을
공개념과 연관시켜 이해하고,
용수 스스로
연기법과 공을 동일하게 보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사물에 내재하는
고유의 자성이 없음을
“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혹자는 공과 관련하여
“사물에 고유한 자성이 없음으로
변화가 가능하다”
는 식의 해석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물에 자성이 있다면
변화도 있을 수 없을 뿐더러,
변화의 주체
즉 자성 없이는 변화도 있을 수 없음을
간과한 단견에 불과하다.
이런 이유로 용수는 귀경게에서
‘불상부단(不常不斷)’이라고 논파한 것이다.
# 용수사상의 현대성
논파일변의 용수의 중론을 처음 읽는 독자는
그 전반적인 부정논법으로 인해
용수의 사상과 일상생활에서의
긍정적 언어적 사용을 관련짓기 위해
노력하기 마련이다.
언어의 의미와 관련하여
용수의 부정논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절된 언어가
곧바로 존재구조로 투사되는
존재망상을 용수가 비판하였지
언어의 ‘사용’을 비판한 적은 없으며,
이점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의 의미는 그 사용이다”
라는 성찰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점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더 중요한 점은
용수의 사상의 핵심이
연기구조의
진정한 이해와 응용에 있다는 점이다.
이때 연기구조란
인간이 세계를 분할하고 조합하는
한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 존재구조이고,
그것은 논파전략상
부정어법으로 표현된 ‘불일불이’의 구조를
긍정어법으로 바꾼
‘일이상의(一異相依)’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용수의 파사논리를
긍정어법으로 바꾼 연기구조는
현대의 제반 학문과 사회의
수많은 분야에서
응용이 가능한 논리이기도 하다.
이점은 용수의 인과관계 비판이
흄(D. Hume)이래 현대의 과학철학의
인과관계와 관련된 논쟁과
직접 관련지울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용수의 경계비판은
실은 수학에서의
‘실수의 연속개념’과 관련하여
독일의 수학자
데데킨트(Dedekind)가 도입한
유리수 절단의 근거문제와
완전히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 등은
아주 적은 예에 불과하다.
용수는
단순히 이해되어야 할 철학자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응용되어야 할 사상가인 것이다.
홍성기/ 아주대 특임교수
[불교신문 2293호/ 1월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