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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14) 나는 누구로 살아가고 있는가 – 정체성의 신학
살아가는 방식이 정체성…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결정한다
정체성 질문
나는 나를 누구로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나는 같은 사람인가? 정체성은 ‘나’라는 인식인 동시에 타인이 나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나는 나를 무엇으로 규정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더 나아가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내가 실제 삶에서 나를 타인에게 표현하고 있는 나가 언제나 같은가? 내가 생각하는 나, 타인이 규정하는 나, 내가 표현하는 나, 이 셋의 미묘한 불일치가 정체성의 위기를 낳는다.
정체성의 문제는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로 타인에게 인식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정체성의 규정은 동일성과 차이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나와 유사한 것과 나와 다른 것을 통해 자기를 규정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진행되고 성취된다. 정체성은 하나의 요소가 아니라 복합적인 요소들로 구성된다. 정체성은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을 지닌다.
일반적으로 정체성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는 타인과 나누는 상호작용에 달려 있다. 혹은 넓은 의미의 환경과 문화에 달려 있다.” “정체성은 타인들이 우리의 몸에 새겨 넣은 특성들의 집합으로, 대개 우리의 출신과 운명에 관한 견해들의 총체이다.”(파울 페르하에허) 정체성은 끝없이 타자와의 문제를 제기하며, 나와 타자 사이의 근본적인 틈새와 차이를 담고 있다.
우리에게 타자란 누구인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타자는 누구인가? 타자로서의 하느님, 타자로서의 사람들, 또 하나의 타자로서의 나 자신. 우리의 정체성은 이 셋의 관계에 따라 규정되고 구성된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의 사회적 정체성은 여러 요소로 구성된다. 젠더와 민족과 국가와 인종적 요소들이 있다. 한 개인은 다양한 사회적 정체성을 갖고 산다. 한 개인 안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등이 복합적으로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체성이 서로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선택과 결단의 자리에서 더 고려해야 할 정체성이 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항상 우선적 고려의 대상이 되는가? 일종의 종교적 정체성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성적 정체성, 민족적 정체성, 국가적 정체성, 인종적 정체성, 계급적 정체성을 뛰어넘어 우선성을 갖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에게 신앙은 삶의 자리에서 일차적이거나 중심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이차적이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또는 삶의 한 장식품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체험하고, 닮고 재현하는 일이다. 신앙은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며, 이 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성사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신앙인의 정체성은 종교적 행위와 관습에 익숙해지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닮고 재현하는 데에 기초한다. 오늘날 신앙을 말하고 신앙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정작 그들의 모습과 태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찾기가 점점 어렵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외형적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실제적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경우가 많다. 외적 신앙생활(종교생활)은 하고 있지만, 실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신앙의 방식이 아니라 세속의 논리(자본과 권력의 논리)로 살아가는 경우다. 정체성의 분열과 괴리다.
나는 사제로 살아간다
사제의 정체성은 부르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사제의 정체성은 직무적으로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참여한다는 것과 사목자라는 특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신학적 관점에서의 정체성을 묻기보다는 일반적 관점에서 묻고 싶다. 사제는 누구인가? 사제는 무엇보다 예수의 제자를 자처하는 사람이다. 예수의 제자로 살고자 하는 이 시대의 사제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예수와 늘 일치해 있어야 하고, 그래서 누구보다 더 예수를 닮은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그런데 이 시대의 사제에게서 예수의 모습을 발견하기보다는 때때로 종교권력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슬픈 일이다.
나를 봐도 그렇다. 사람들이 정말 나를 보고 예수를 떠올릴 수 있을까. 내가 하는 말, 내가 하는 행동, 내 삶의 모습 속에서 사람들은 예수의 그 어떤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까. 아, 저 사람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서 확실히 세상 사람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사람들이 나를 보고 느낄까? 부끄러운 일이다.
성경의 개념들을 사용하고 교회 전통 안에서 전해진 신앙의 말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또한 미사를 집전하고 성사를 거행하고 있지만, 정작 예수를 닮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는 못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사용하는 말들과 용어들은 신앙적이지만 구체적 내 삶은 예수를 닮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정작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다. 삶이 종교적이긴 하지만 복음적이지는 않다는 느낌이다. 아픈 일이다.
내가 ‘나’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체성은 고유성이기도 하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나의 사유 방식과 행동방식은 무엇인가? 나는 자신의 사유, 감정과 정서, 욕망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정확하게 이해하며 성찰하고 있는가? 나의 삶은 고유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셰익스피어) 나는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는 내 삶을 어떤 문장으로 서술하고 있는가? 나는 어떤 문장을 쓰고 있는가? 내가 쓰는 문장의 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는 무엇인가? 명사는 존재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동사는 행위다. 나는 어떤 행위들을 하며 살고 있는가? 형용사는 성격과 특성이다. 나는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가? 부사는 동사와 형용사를 수식한다. 진정한 정체성은 언제나 부사에 있다.
내가 어떤 명사(신분, 지위)인지, 내가 어떤 동사(행동과 일)와 관련이 있는지, 내가 어떤 형용사(특성)로 수식되는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가 나를 거룩하게 하지 않는다.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내가 ‘어떻게’(부사) 내 직무와 일을 수행하는가에 있다. 성직자, 신학자라는 명사가 나를 거룩하게 하지 못한다. 미사를 거행한다고, 신학을 연구한다고 거룩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나의 거룩함을 결정한다.
살아가는 방식이 정체성이다. 삶의 자세와 태도가 진정한 정체성이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15) 삶이 하나의 이야기가 될 때 – 이야기 신학
복음이 ‘살아있는 이야기’로 선포되면 말씀 실천으로 이어진다
자기를 말하는 일
신부로 살면서 자기를 말하는 순간이 많아졌다. 강론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자기의 생각과 경험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물론 자기를 말하는 것과 자신을 내세우는 것은 서로 다르다. 신학생 시절 하느님을 앞세우고 자신을 뒤에 두어야 한다는 말을 귀따갑게 들었다. 교만의 죄와 겸손의 미덕에 대해 숱하게 말하고 들었다. 자기를 말한다는 것은 하느님보다 자신을 앞세운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신의 정직한 생각과 느낌을 먼저 성찰한다는 맥락이다. 자기 생각과 자신의 정직한 느낌을 말하지 않고, 객관적이라는 명분 안에서 추상적이고 당위적인 말을 반복하는 것만큼 지겨운 일도 없다. 말의 힘은 화려한 수사와 매끄러운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발화되는 말 안에 그 사람의 정직한 생각과 느낌과 체험이 들어있다면, 그 말은 살아있는 말이 된다. 오늘의 세상 안에 공허한 말들, 추상적인 말들, 윤리적 당위의 말들, 죽어있는 말들이 너무 많이 떠돌고 있다.
공적 이야기 안에 사적 이야기를 집어넣는 것은 선포를 왜곡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공적 서사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흔히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공적 서사가 실제적인 힘을 갖기 위해서는 나의 이야기와 결합해야 한다. 어떤 공적 주제에 대한 개인의 생각과 체험을 정직하게 말함으로써 듣는 사람들이 그 개인을 매개로 그 주제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또 한편으로 나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와 결합해야 한다. 개인의 생각과 체험은 편파적이고 일방적일 수 있다. 그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공동체의 생각과 경험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과 복음을 선포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하느님과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공적 서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공적 서사가 진정으로 살아있는 선포가 되기 위해서는 나의 이야기와 교회 공동체의 이야기를 포함해야 한다. 즉, 하느님의 이야기와 교회 공동체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만날 때 진정한 복음 선포가 이루어진다. 살아있는 이야기로 전달될 때 우리는 복음을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느끼고 몸으로 실천할 수 있다.
공적 서사에서 자기를 말하는 것이 중심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필수적이다. 자신의 정직한 질문과 자기 이야기가 없는 모든 말과 글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물론 자기를 말하는 일에는 자기 정당화, 자기 미화, 자기 확인 욕망, 과장과 확대의 위험이 있다. 이 위험을 늘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모든 말과 글에는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그 사람의 생각과 해석이 담겨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직하게 자기를 말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반성하고 성찰한다는 의미다. 자기를 말한다는 것은 타자와 하느님을 진정으로 만나기 위해 먼저 자기를 개방한다는 뜻이다.
이야기로서의 성경
학문적 관점에서 보면, 성경 안에는 신학적 차원과 역사적 차원과 문학적 차원이 포함되어 있다. 성경을 학문적으로 공부할 때 성경 신학, 성경의 역사적 비평, 양식 비평과 편집 비평 등의 용어를 자주 접한다. 성경 안에는 신앙적 진리와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서술이 서로 섞여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성경은 이야기다. 성경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이야기, 하느님과 함께하는 교회 공동체의 이야기, 하느님을 체험한 개인들의 이야기다. 성경은 추상적이고 신학적인 개념을 설명하지 않는다. 성경은 체험과 삶의 이야기다.
성경이 이야기라는 사실이, 우리가 성경을 문학 비평의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경학자의 일이다. “성경의 이야기를 좀 더 온전히 이야기로서 즐기는 법을 배울 때 그들(성경 저자들)이 우리에게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위험할 정도로 중요한 역사의 영역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던 바를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된다.”(로버트 알터) 성경은 우리 신앙인에게 언제나 살아있는 이야기로 다가온다. 성경의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 이야기와 지금 나의 이야기와 만날 때 살아있는 말씀이 된다.
자기를 말하고 기록하는 일 – 자서전적 삶
자기를 말하는 것과 자신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미묘한 차이가 있다. 구술성과 문자성은 비록 결이 다르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 글로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은 말로써 자기를 이야기할 수 있다. 자기를 말한다는 것, 자기 생애를 말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당사자에게 일종의 ‘존재 확인’이 된다. 자기의 말을 갖지 못해서, 자기 삶을 이야기화하지 못해서 소외되고 잊혀 가는 사람들이 구술 작가들의 문자화와 다큐멘터리 작가들의 영상과 녹음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최현숙의 저서 「할배의 탄생」과 「할매의 탄생」, 김재환의 다큐멘터리 ‘칠곡 가시나들’) 말과 이야기는 존재의 탄생을 의미한다. 존재는 말과 이야기로 자기를 드러낸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이야기한다.”(유호식)
자기 삶을 기록한다는 것, 자기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 자기의 생각과 감정과 욕망을 기술한다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자서전적 글쓰기다. 모든 글쓰기는 자서전적 요소를 담고 있다. 소설가 이청준은 소설 「자서전들 쓰십시다」에서 글쓰기는 “자기 삶의 근거를 마련하려는 일종의 복수심”에서 출발한다고 고백한다. 자기 글쓰기는 자기 삶을 텍스트화해서 이해하는 행위다. 자신을 말하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먼저 스스로를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모습을, 자기의 삶을 냉정하게 살펴보고 거짓 없이 서술할 수 있어야 한다. 정직한 자기 고백은 그 고백의 행위만으로도 상처를 위로하고 자기를 구원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찰과 고백이 구원과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진정한 구원은 하느님만이 이루시는 일이지만 말이다.
정직한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
누구나 자기의 생각과 감정과 욕망을 말하고 쓰는 시대를 살고 있다. 블로그나 페이스북 등을 통해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말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서전적 서술의 과잉이다. 자기 서술을 통해 인정 욕망을 충족하려는 시대다. 정직한 자기 서술에 머물기보다는 꾸밈과 과장과 거짓 서술로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더, 진솔하고 소박한 이야기가 필요한 시대다. 말과 글로 서술된 이야기보다 몸과 삶으로 표현하는 이야기가 더욱 그리운 시대다. 삶 그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인간은 서사적 존재다. 삶은 이야기다. 문제는 어떤 이야기인가에 달려있다. 화려한 이야기보다 진솔한 이야기가 힘을 갖는다. 정직한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어떤 이야기를 말하고 쓰고 살고 있는가?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16) 신앙의 시선으로 읽기 - 읽기의 신학
신앙의 눈으로 보는 것은 ‘가엾은 마음’으로 바라보는 일
읽는 즐거움
늘 읽어왔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적어도 나에게 산다는 것은 읽는 일이었다. 나에게 익숙한 동사는 ‘읽는다’와 ‘걷는다’이다. 모두가 잠든 밤늦은 시간,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 ‘아, 참 행복하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저녁 무렵 동네를 산책하는 일은 또 얼마나 평안한 즐거움인지. 물론 ‘사제로 살아서 이런 호사를 누리는구나’ 하는 미안함도 있다. 가끔 상상한다. 더 늙어, 요양원에 누워 걷지도 못하고 읽지도 못하는 시간이 온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할 것인지. 그저 건강히 살아, 읽고 걷다가 며칠만 누워 있다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생의 운명은 주님의 몫이니, 내 생의 마지막 모습을 내가 선택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읽기의 주된 대상은 책, 신문, 잡지라는 텍스트다. 오늘날 사람들은 유튜브와 시청각 매체를 좋아한다. ‘읽기’보다는 ‘보기’와 ‘듣기’가 대세인 시대다. 얼핏 생각하면 읽기와 보기는 인간의 시각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비슷할 수 있지만, 텍스트를 읽는 것과 영상을 보는 것은 분명 다르다. 나는 활자와 인쇄 매체를 사랑하는 옛 시대 사람이다. 전자책보다는 종이라는 물성을 더 좋아한다. 물론 인터넷을 통한 글 읽기도 좋아한다.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글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블로그를 통해 사람들의 글을 읽었다.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과 정서를 엿볼 수 있었다. 블로그 읽기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사유와 정서를 읽었고, 삶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타인의 글을 읽는 일은, 비록 간접적인 방식이지만, 그를 만나고 경험하고 이해하는 일이다. 몸의 행동반경이 좁은 나에게 블로그 읽기는 체험과 이해의 확장을 뜻했다. 요즘은 페이스북을 더 많이 읽는다. 블로그의 글은 시간의 숙성과 성찰의 과정을 거친 것들이 많다. 페이스북의 글은 시간적 민첩성과 정서적 반응의 성향이 더 강하다. 물론 블로그에서든 페이스북에서든 나는 소위 말하는 ‘눈팅족’이다. 블로그와 페이스북은 적어도 나에게는 자신의 글을 쓰는 장이라기보다는 타자의 글을 읽는 장이다. 대화와 커뮤니케이션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이기적 읽기의 공간이라는 뜻이다. 저마다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 일은 이승의 생에서 내가 누리는 작은 즐거움이다.
사람과 세상을 읽는다
읽기는 소극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대화다. 읽기는 저자와 독자, 텍스트와 독자의 대화다. 또 한편으로, 읽는 행위 안에는 언제나 읽는 사람의 생각이 투입된다. 읽기는 일종의 해석이다. 왜 읽기라는 대화와 해석을 나는 좋아하는가? 나에게 읽기는 삶과 인간에 관한 관심과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삶과 인간을 알고 싶어 읽는다. 세상의 모든 텍스트는 인간과 삶을 알려주는 텍스트다. 문학과 철학과 사회과학의 텍스트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연과학의 텍스트 역시 인간과 삶에 관한 이해를 확장해준다고 나는 믿는다. 인간과 삶에 관해 정색하고 쓴 글뿐만 아니라, 신문과 잡지의 시답잖은 것 같은 기사 역시 인간과 삶에 대한 진실을 때때로 더 많이 알려주기도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닥치는 대로 읽는다.
‘읽는다’는 동사는 다양한 함의를 갖는다. 읽는 행위 안에, 보고 듣고 관찰하고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이 포함된다. 읽기는 공부다. 학문의 세계에서 많이 읽는 사람을 못 당한다. 읽기는 관심이다. 타자를 읽는다는 것은 그에 대한 관심이다. 세상을 읽는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관심이다. 읽기는 사랑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을 읽고 세상을 읽는다. 관심과 사랑이 없는 사람은 읽지 않는다.
사람과 세상을 읽는 일은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읽는 일이 아니다. 말과 행동 뒤에 숨어 있는 마음을 읽는 일이다. 문자와 표지 너머의 행간을 읽는 일이다. 생의 이면과 세상의 이면을 읽는 일이다. 사람을 읽는 일은 결국 마음을 읽는 일이며, 세상을 읽는 일은 감춰진 이면을 읽는 일이다. 한편으로, 사람과 세상을 읽는 일은 세상 속의 기쁨과 즐거움, 아픔과 슬픔을 읽는 일이다. 아픔과 슬픔을 읽는 일은 읽기의 윤리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읽기는 결국 타자와 세상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를 읽는 일이다. 세상을 읽고, 타자를 읽고, 나를 읽는다.
교회와 신앙의 현실을 읽는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시대의 징표를 읽는다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듣는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자세와 태도를 성찰하는 말이다. 선교와 사목의 현장인 세상을 정확히 읽을 때 교회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는 의미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현실에 대해 교회는 관심과 사랑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세상의 징표뿐만 아니라 교회와 신앙의 현실을 정직하고 정확하게 읽는 일이 필요하다. 세상을 향한 관심과 사랑뿐만 아니라 교회와 신앙의 실재(reality)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요청된다는 의미다. 교회와 신앙은 추상적 개념(idea)이 아니라 언제나 구체적 실재다. 오늘의 교회가 사회교리나 사회적 사목의 맥락에서 세상을 읽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읽는 일에는 소홀한 느낌도 든다. 반성과 성찰은 뼈아프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읽기의 거룩함
읽기는 그 자체로 거룩하지 않다. 누가 읽느냐, 무엇을 읽느냐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즉, 읽는 주체와 읽는 대상이 중요성과 거룩함을 좌우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언제나 문제는 ‘어떻게 읽고 있는가’, ‘어떤 시선으로 읽는가’이다. 명사와 동사가 거룩함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부사가 거룩함을 표현한다. ‘열린 마음으로’ 읽을 때, ‘편견 없이’ 읽을 때, ‘정확하게’ 읽을 때, ‘식별하며’ 읽을 때, ‘정직하게’ 읽을 때, ‘따뜻한 마음으로’ 읽을 때, ‘공감하며’ 읽을 때, ‘공명하며’ 읽을 때, 바로 그때 읽기는 거룩한 행위가 된다. ‘읽는다’는 동사를 수식하는 부사가 무엇인가에 따라 읽기의 거룩함은 그 농도가 달라진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읽는다. ‘신앙의 시선으로’ 읽는다. 교회와 신앙인의 읽기를 표현하는 말이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신앙의 시선으로 읽는다는 것은 교리와 윤리적 규범의 틀로 읽는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태도로 읽는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읽는다는 것은 ‘가엾은 마음’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마르 6,34)
연민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십자가의 슬픔에서 우리는 배운다. 슬픔은 슬픔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구원은 슬픈 응시와 기억하고 호명하는 행위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신앙인의 읽기는 슬픈 시선의 읽기다. 연민과 연대의 읽기다. 그 슬픈 읽기는 슬픔을 기억하는 행위와, 슬퍼하는 사람들과 주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행위를 포함한다. 신앙인의 읽기는 응시와 기억과 호명의 행위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18) 문학적 상상력에 대하여
신학은 인간과 삶을 이해하는 태도를 문학에서 배워야 한다
사람과 삶에 대한 호기심
늘 인간과 삶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세상 속에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항상 궁금했다. 개인적이고 실존적 관심과 취향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사람과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살아온 것 같다. 역사학을 전공한 이유도 인간을 알고 싶어서였다. 역사가 인간에 대해 가장 잘 말해 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대학교 사학과에서 배운 것은 대부분 역사적 제도에 관한 것이어서 무척 지겨워했었다는 기억만 남아 있다. 정작 어슬렁거리며 기웃기웃했던 것은 국문과 수업들과 문학책 읽기였다.
신학교에 와서 철학과 신학을 배웠다. 여전히 인간과 삶에 대한 호기심은 채워지지 않았다. 철학자들의 사유 안에서 인간과 삶의 실존적 정황을 읽어내기에는 내 역량이 한참 부족했다. 정교한 사유의 논리 안에서 벌어지는 것들이 가끔은 흥미로웠지만, 추상적이라는 인상을 지우지 못했다. 신학은 더 답답했다. 신학은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만, 신학자들의 이성적 사유 안에서 개념과 논리를 통해 추론되는 하느님은 생생한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신학이 하느님 실재(reality)보다는 하느님이라는 관념(idea)에 대한 탐구 같다는 인상을 자주 받았다. 위대한 신학자들이 설명하는 하느님, 탁월한 신비주의적 영성가들이 말하는 하느님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이 체험하고 말하는 하느님을 알고 싶었다. 개념과 논리 안의 하느님보다 현실과 맥락(context) 속의 하느님을 알고 싶었다.
알량하지만 신학을 전공한 학자로 살고 있다. 신학책들을 읽고 신학적인 글을 쓰고 있지만, 아직도 막막하다. 신학이 실재에 대한 사유와 체험에서 발생하는 구체적 개념을 다루기보다는 추상적 개념을 더 선호한다는 인상을 여전히 받는다. 성경의 이야기는 역사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교회의 교도권적 가르침은 하느님에 대한 진리를 담고 있지만, 학자인 내 시선으로 접근해도,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 신학을 통해서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인간과 삶에 대해서 알고 싶었는데, 현실의 신학은 그 소망에 가깝지 않다는 사실이 가끔 슬프다.
문학을 사랑하는 이유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는 학자들의 글을 많이 읽었다. 오늘날 사회학자들의 글이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을 때때로 더 많이 담고 있다. 앤서니 기든스, 지그문트 바우만의 인문사회학적 글을 좋아했다. 에드워드 윌슨과 안토니오 다마지오 같은,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인간과 삶에 대해 통찰하는 학자들의 글이 더 많은 함의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발견한다. 최근에 신학자의 글을 흥미있게 읽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요즘도 문학책을 읽는다. 다양한 경험과 다채로운 관계를 갖지 못하고 살아왔기에, 문학 읽기는 인간의 복합성과 생의 이면을 바라보게 하는 가장 큰 통로다. 골방의 서생에게 소설 읽기는 세상 읽기였다. 최인훈, 이승우, 황정은 소설가는 내 인생의 선생들이었다. “내가 아는 한 소설은 인간이 누구인지를 묻고 탐구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이상적인 장르이다.”(이승우, 「소설가의 귓속말」) 구체적인 삶의 상황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고 그 행동의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 소설 만큼 정직하게 말해 주는 것은 없다. 창세기의 이야기를 패러프레이즈(Paraphrase)한 이승우의 소설 「사랑이 한 일」은 신앙의 이름으로, 사랑의 이름으로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질문이 던져지고 새로운 각도에서 이야기는 서술된다. 그 어떤 신학적 서술보다 신앙과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담고 있다. 황정은 소설 「연년세세」는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화려한 색조를 지닌 묘사와 서술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무심히 우리의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 우리의 생은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응대일 뿐이다. 사람의 아름다움은 자기 생의 운명을 견뎌내는 방식을 통해 드러날 뿐이다. 소설을 통해 이러한 생의 진실을 배운다.
현대의 삶은 그 자체가 소설과 드라마 같아서, 예전처럼 소설을 많이 읽지 않는다. 소설의 재현 능력이 점점 상실되고 있다. 소설의 시대가 가고 영상의 시대가 오는 것 같다. 그래도 시는 꾸준히 읽는다. 행위의 재현은 영화와 드라마가 소설을 압도하지만, 감정과 정서의 미세한 숨결에 대한 탐색에 있어서 시를 능가하는 것들을 잘 찾지 못하겠다. 때때로 음악이 그것을 표현하고 재현하지만, 말이 갖는 신비한 힘을 통해 시는 자신의 본령을 지키고 있다. 시는 공감의 기쁨을 알려주는 전령이며 생의 비의(秘義)를 보여주는 지혜이다. 이성복의 시를 통해 말의 리듬과 섬세한 인식의 아름다움을 배운다. 김명인의 시 만큼, 시간의 흐름에 따르는 마음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을 다른 어느 곳에서도 잘 발견하지 못했다. 시인들은 시대의 전위(前衛)에 서 있다. 시인들은 섬세한 촉각을 가졌기에 우리보다 언제나 먼저 삶을 감각하고 시대의 징후를 느낀다. 시인들은, 그들이 가진 예지의 능력으로, 늘 우리보다 삶의 신비를 먼저 포착한다. 시인들과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거듭 절감한다.
새로운 상상력으로서 신학 - 문학적 신학
문학을 통해 우리는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의 확장과 정서적 공감과 소통을 체험한다. 생의 많은 부분을 문학을 통해 배워왔다. 글의 문학적 성취와 미학적 특성보다는 글이 보여주는 인간과 삶에 대한 어떤 통찰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문학은 언어와 상상력의 가능성과 한계, 말과 행동을 통해 살아가는 인간의 신비를 가장 잘 보여준다. 문학은 언어와 상상력에 대한 치열한 긴장을 놓치지 않으면서, 언어와 상상력을 통해 인간이 가 닿을 수 없는 곳의 신비를 최대한 드러낸다. 신학은 말과 상상력을 통해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신학은 문학으로부터 말과 상상력의 가능성과 한계를 배워야 한다. 물론 신학은 계시와 신앙이라는 고유한 영역이 있다. 하지만 신학 역시 인간이 하는 학문인 이상, 말과 상상력을 통해 수행될 수밖에 없다. 신학은 다른 학문들, 특히 문학에 대해 겸손하고 열린 태도로 배워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만나는 하느님에 대해 말하기 위해, 오늘의 삶과 인간을 탐구해야 한다. 사람과 삶의 사정을 살피고 이해하는 마음과 태도를 문학에서 배워야 한다. 삶의 총체성을 문학만큼 잘 재현한 것이 어디 있는가. 문학은 우리를 납작한 사유에서 벗어나게 하고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공감적 상상력을 확대해서 타자를 포용하고 연대하는 길로 가기 위해서 철학은 문학적이어야 한다고 리처드 로티는 주장했다. 섬세하고 열린 시선의 신학은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할까? 신학적 서술은 어떻게 공감과 연대의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19) 영화적 상상력에 대하여
하느님 신비 전하려면, 신학은 영화의 설득력과 상상력 배워야
영화에 관한 기억과 고백
나에게 영화는 무엇보다 엔터테인먼트였다. 어린 시절 시골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학생의 극장 출입이 제한되던 시절이었다. ‘문화교실’이라는 이름으로 학생에게 저렴하게 제공되었던 오락 영화는 그 시절 우리가 누릴 수 있었던 최고의 유흥이었다. 서부 활극 영화, 홍콩 무협 영화, 학생 청춘 영화는 우리의 감성과 정서를 지배했다.
극장에서 내가 선택한 영화는 주로 엔터테인먼트였는데, 텔레비전 브라운관에서 선택되어 제공되는 영화는 일종의 ‘명작영화’였다. 브라운관에서 보았던 영화들은 그 시절 우리들의 상상과 경험의 세계가 확장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활자와 텍스트가 내 지난 시절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돌아보면 영화는 늘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오락이었든 세계의 확대였든 간에 말이다.
지적 허영에서 기인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언제부터인지 영화를 인간과 삶에 관한 텍스트로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영화 서사와 감독의 통찰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당대의 문화적 지성의 유행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문화적 허세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강제되고 강요되는 것을 싫어한다. 어두운 장소에서 중단 없이 영상의 흐름에 집중해야 하는, 극장에서 영화 보기는 나에게 힘든 일이다. 내 맘대로 펼쳤다 덮을 수 있는, 이기적 독서를 사랑한다. 멈춤과 건너뛰기를 할 수 있는, 컴퓨터 파일로 영화 보기를 선호한다. 영화 자체보다는 그저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는 것보다 영화 잡지 ‘씨네 21’을 읽는 것을 더 좋아한다.
영화 보기 vs 영화 읽기
본다는 것과 읽는다는 것은 뉘앙스가 다르다. ‘보기’는 우연성과 즉흥성과 수동성의 요소를 포함하는 체험적 행위다. ‘읽기’는 주체성과 사유성과 능동성을 강조하는 성찰적 행위다. 우리는 눈앞에서 우연히 펼쳐진 행위와 사건을 그저 바라본다. 그 행위와 사건의 원인과 과정과 결과를 생각하는 것은 읽는 일이다. 현상을 보고 그 이면을 읽는다. 읽기에는 읽는 주체의 생각과 관점과 성찰이 개입되고 투입된다. 읽기는 대화다.
영화 보기와 영화 읽기는 다른 뉘앙스를 지닌다. 영화 보기는 영화의 오락성과 예술성을 체감하고 체험하는 일이다. 영화 읽기는 영화의 재현성에 초점을 둔다. 우리는 현실을 살고(보고) 있지만, 현실을 흘려보내는 경우가 많다. “영화라는 재현의 형식을 통해서 우리는 현실을 깨닫고, 직면하고, 생각하게 된다.”(정희진 「혼자서 본 영화」) 영화를 읽는다는 것은 영화를 통해 인간과 삶의 현실을 사유하고 성찰한다는 뜻이다. 감정과 정서는 일차적이고 사유와 성찰은 이차적이다. 영화 보기는 감정과 정서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영화 읽기는 사유와 성찰의 입체적 구성에 개입한다. 영화를 보고 읽는 일은 세계의 확장을 뜻한다. 오늘날 감정과 정서의 다채로움을 맛보려면, 사유와 성찰의 깊이를 강화하려면 영화를 보고 읽어야 한다.
이야기 매체로서 영화
사람과 삶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에서 문학을 읽는 것처럼, 사람과 삶을 읽기 위해 영화를 본다. 물론 엔터테인먼트로서 영화를 더 좋아한다. 현실에서 사람과 삶의 복잡성을 견뎌내는 일은 힘들고 어렵다. 영화에서까지 그 힘듦을 연장하고 싶지 않다. 가벼운 영화를 보는 것이 즐겁다. 힘든 현실을 망각하게 해주는 판타지와 오락으로서 영화의 기능을 존중한다. 하지만 보는 영화만큼이나 읽는 영화의 유익함과 즐거움을 사랑한다. 신학교 선생 시절, 신학생들과 오랫동안 영화 읽기 수업을 진행했었다. 영화를 매개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일방적 가르침의 문화가 가득한 공간에서 평등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영화라는 매체가 도움이 되었다. 영화를 여럿이 함께 보는 일은 즐겁고 유익했다. 어두운 공간의 지루함을 견디게 했고, 공통의 이야기 주제를 제공했다. 좋은 영화 이야기는 의미와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가 된다.
현대 문화의 담론장에서 문학보다 영화가 더 많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문학 평론가 김현만큼 영화 평론가 정성일이, 여느 문학인들보다 이창동, 박찬욱, 봉준호 감독이 문화의 세계에서 더 자주 언급된다. 인간과 삶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영화가 소설(문학)보다 더 입체적이다. 재현과 풍속도라는 차원에서 영화는 소설보다 당대를 더 잘 반영(재현)한다. 근대 자본주의의 풍속도를 소설이 잘 재현한 것처럼, 후기 자본주의의 풍속도는 영화가 더 잘 재현하고 있다. “영화의 매체적 중요성은 그 대중적 파급력과 편이성에 기대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은 자본제적 삶의 양식에 얹혀 있는 볼거리사회(spectacle society), 모의사회(simulation society), 거울사회(mirror society)와 깊이 연루되고 있다.”(김영민 「영화인문학」)
영화를 보며 세상을 읽는다. 영화 ‘기생충’만큼 당대의 계급적 갈등을 정확하고 설득력 있게 보여준 매체가 어디 있던가. 장률 감독의 영화만큼 삶과 죽음의 몽환적 신비를 잘 재현하는 것이 있던가. 이창동의 영화만큼 삶의 현실과 운명의 질곡에 대한 질문을 끝까지 밀고 가는 것이 있던가.
신학의 영화적 상상력을 위하여
“나는 처음부터 영화가 상상의 여행이나 타자에 대한 사유의 도구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알랭 바디우 「알랭 바디우의 영화」) 문학이 언어와 상상을 매개로 이루어진다면, 영화는 영상과 상상을 통해 구성된다. 언어적 상상은 더 많은 여지를 갖는다. 하지만 영상적 상상은 구체성과 입체성을 확보한다. 소설의 인물과 영화의 인물은 재현의 방식과 폭이 다르다. 소설 속 인물은 작가의 묘사 안에서 그리고 독자의 상상 속에서 재창조된다. 영화 속 인물은 시나리오 작가의 묘사 안에서, 감독의 지휘와 조율 안에서, 배우의 연기와 이미지 안에서, 독자의 상상 안에서 여러 겹으로 뒤틀리고 재해석된다. 인물에 대한 복합적인 묘사와 해석을 통해, 영화는 사람에 대한 입체적 전망을 보여준다. 영화는 타자에 대한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신학은 언어와 상상을 매개로 하느님의 신비를 탐구한다. 언어적 상상이라는 측면에서 신학은 영화보다 문학에 더 가깝다. 하느님의 신비를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신학은 영화의 대중적 설득력과 입체적 상상력을 배워야 한다. 신학이 단순히 신앙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신학은 사람들이 하느님과 신앙의 신비에 관한 대화를 할 수 있게 하는 매개체여야 한다. 매체로서의 신학의 역할을 기대하고 상상한다. 한편으로 신학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입체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사람과 삶에 대한 신학의 서술은 너무 평면적이고 도식적이다. 신학적 서술의 입체성과 구체성을 위해 신학자들이 영화를 더 많이 보고 읽기를 희망한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21) 정치와 신앙 – 존재의 정치적 차원
정치 관여와 복음적 대안 제시는 교회의 책임이자 의무
신문 읽기와 뉴스 보기
나에게 신문 읽기는 세상 읽기였다. 학창 시절의 신문 읽기는 지식과 문화적 흐름을 습득하는 통로였다. 신문만 꼼꼼히 읽어도 지식인 흉내를 낼 수 있었다. 첫 본당 신부 시절, 매일 오전 자전거를 타고 가 버스정류소 매점에서 그날의 일간신문 전부를 사 와서 읽는 일은 하루의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신문을 잘 읽지 않는 나를 발견한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잠깐잠깐 접하고 있다. 포털을 통해 제공되는 뉴스를 보는 것도 싫어졌다. 요즘은 신문 사이트에 들어가서 책 소개 기사와 문화 기사와 몇몇 칼럼들만 읽는다. 하나의 신문을 펼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관한 흐름을 총체적으로 읽는 일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뉴스를 접하는 방식도 변했고, 언론이 세상을 읽어내는 역량, 즉 언론의 질도 떨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정확한 분석과 정직한 방향 제시의 기사보다, 감정과 욕망을 자극하는 기사가 더 많다. 언론이 사람들에게 건강한 문제의식과 올바른 지향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불안과 두려움의 감정을 확산하고 편견과 혐오를 조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사람들 역시 그저 뉴스를 보고 소비할 뿐이다. 무관심과 불신의 태도로 뉴스를 접하고 있다. 신문을 읽고 세상의 이면을 성찰하는 일이 사라지고 있다. 이런 모습은 우리들의 삶에서도 나타난다. 현대인은 자기 삶에만 초점을 맞추고 타인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타인은 그저 배경과 풍경으로 존재한다.
신앙의 시선으로 세상을 읽는 일은 신앙인의 책임이며 의무다. 신앙인은 성경과 신문을 함께 읽어야 한다는 신학자 칼 바르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오늘의 세상 읽기는 점점 어렵다. 복잡해지는 세상의 흐름을 신앙의 시선으로 식별하고 올바른 삶의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현대 정치의 풍경과 ‘정치적인 것’에 대하여
오늘의 대중은 이념과 가치를 지향하기보다는 감정과 욕망을 더 중요시한다. 이기적인 욕망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와 감정을 이용하고 선동하는 포퓰리즘의 결합은 최악의 정치를 낳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정체성의 정치는 부정적인 맥락에서 패거리 정치로 전락하기도 한다. 상대 정파의 정책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반대하고 거부하는 경향을 드러내며, 조직력을 갖춘 이익 집단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현상이 빈발하다. “정체성 정치의 역학은 사회를 자꾸만 더 작고 이기적인 집단들로 분열시킨다.”(프랜시스 후쿠야마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현대 세계의 문제점은 주로 경제중심주의에서 빚어진 것이다. 물질적 욕망과 이해관계의 다툼에서 야기되는 경제적 갈등이 사회의 전방위적 차원으로 확산된다. 경제적 이해관계가 공동선을 향한 정치적 행위를 압도하고 있다. 정치가 경제에 종속되고 경제는 효율 중심의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에 종속되고 있다.(「모든 형제들」 177항) 경제적 문제는 경제의 논리로 풀 수 없다. 정치적 행위를 통해 개선할 수밖에 없다. 정치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매우 숭고한 소명이고 사랑의 가장 고결한 형태다.(「모든 형제들」 180항) 하지만 오늘의 정치는 자주 희화화되고 극단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이 많은 것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치를 혐오하고 싫어한다. 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양가적이고 모순적이다. 정치적 현실과 현상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냉소적 태도를 취하거나, 아니면 지나친 감정이입과 이념적 자기동일시를 통해 과잉투쟁의 모습을 보인다. 조정과 조율로서의 정치는 사라지고 갈등과 투쟁으로서의 정치만 남아 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아리스토텔레스)이며 인간의 삶은 필연적으로 정치성을 지닌다. 현대 정치철학자들은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구별한다. 정치란 인간의 공존을 조직하는 실천과 제도의 집합이다. 정치의 전제가 되는 정치적인 것은 “모든 인간 사회에 본래부터 있으며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을 결정하는 하나의 차원이다.”(샹탈 무페) 인간 자체는 비정치적일 수 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 안에는 정치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순수하게 정치적인 존재는 없다. 정치는 언제나 관계성 안에서 나온다. “정치적인 것은 사회적 삶의 특정 부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들 사이 그리고 세계와 맺는 관계에 대한 발생적 원칙의 총체를 의미한다.”(클로드 르포르) 사람들의 공동체적 삶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복음화 사명의 정치적 차원
교회는 세상 안에서 공적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의 복음화 사명은 사회적 차원을 지닌다.(「복음의 기쁨」 176항) 교회는 정치의 자율성을 존중하며, 종교 교역자들이 정당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금하고 있지만, ‘존재의 정치적 차원’을 포기하지 않는다.(「모든 형제들」 276항) “교회에는 자선 활동과 교육 활동보다 우선하는 공적 역할이 있다. 교회는 인류와 보편적인 형제애의 발전을 위하여 모든 힘을 쏟아야 한다.”(「모든 형제들」 276항) “교회는 모든 상황 안에 육화되도록 부름받아 세상 모든 곳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현존하고 있다. 이것이 ‘가톨릭’의 의미다.”(「모든 형제들」 278항) 고통받는 사람 곁에 있어 주는 것도 애덕이며, 고통의 원인이 된 사회적 조건들을 바꾸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도 애덕이다.(「모든 형제들」 186항)
교회는 언제나 정치에 관여할 수 있고 정책을 비판할 수 있으며 신앙적 관점에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그것은 세상 안에 있는 교회의 책임과 의무이기도 하다. 문화와 윤리의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와 경제와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존엄을 위해 교회는 자신의 공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교회는 항상 정치적 행동(기도를 통한 영적 연대, 인권을 위한 정치적 캠페인과 경제적 나눔을 통한 실천적 연대, 교도권적 선언과 선포를 통한 문제 제기와 사회적 연대)을 장려해왔고, 사회교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공적 신앙 – 존재의 정치적 차원
예수께서 세례 이후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한 것처럼, 신앙인은 세례를 통해 신앙의 공인(公人)이 된다. 신앙인의 삶은 공적 삶이다. 신앙이 사적 영역에서만, 또는 종교의 장에서만 표현되고 수행되어서는 안 된다. 신앙인은 자신이 살아가는 모든 자리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실천하고 수행해야 한다.
사람이 맺는 모든 관계는 정치적이다. 그 관계 안에 힘과 권력의 기제가 작동된다는 뜻이다. 사회적 관계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 관계, 친구 관계, 부부와 연인 관계마저도 넓은 맥락에서 보면 힘의 역학 속에 있다. 다양한 힘의 역학 속에서 관계의 평등성을 추구하면서 조정하고 조율하는 것이 정치적 행위다. 삶의 미시적 영역에서도 언제나 올바른 정치적 행위가 요청된다.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를 복음적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것, 그것이 신앙인의 정치 방식이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22) 시노달리타스와 세상 읽기 – 질문하는 신앙
끊임없이 정직한 질문 던지며 ‘경청’하고, 함께 답 찾아가야
신학적 의제 설정과 교회 현실에 관한 정직한 질문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향한, ‘함께 걸어가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교구마다 위원회가 설치되고, 각 교구 차원의 시노드 과정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주변에서 듣고 있다. 교회 안에 새로운 화두가 던져졌고, 그 화두를 붙들고 씨름하고자 하는 교회의 모습이 내심 반갑다. 또 하나의 세계주교시노드 행사로 끝날지, 아니면 새로운 교회를 향한 작은 전환점이 될지, 아직은 모르겠다.
하지만 교회 구성원 전체의 참여를 유발하는 시노드 과정과 교회의 존재 양식과 행동방식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요청하는 ‘시노달리타스’라는 화두는 묘한 기대감을 갖게 한다. 시대적 요청을 담고 있는 정확한 의제를 설정하고 그 의제를 지켜나가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노력이 고맙다. 급변하는 세상과 모든 것들에 쉽게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변덕스러운 욕망의 흐름 속에서, 참다운 의제를 설정하고 그 의제를 공적 담론화해서 새로운 변화를 지향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얼마 전 ‘저널리즘 주간 행사’에서 언론인 손석희는, 언론의 중요한 역할의 하나는 사회에 필요한 의제를 설정하고(어젠다 세팅) 그 의제를 지키는 일이라고(어젠다 키핑) 말했다. 교회의 지도자 역할과 좋은 언론의 역할은 서로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노달리타스’는 경청하는 교회로의 전환을 뜻한다. 경청이란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지 식별하고자 서로에게, 우리 신앙 전통에, 그리고 시대의 징표에 귀 기울”(「편람」)이는 것이다. 성령과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은 신앙인에게 당연히 요청되는 일이다. ‘시노달리타스’라는 의제가 설정된 이유는 교회 구성원들 간의, 교회와 세상 간의 경청과 대화에 대한 강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성직자와 신자들 간의 경청과 대화를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시노달리타스’에 관한 신학적 이해와 서술, ‘시노달리타스’를 실천하기 위해 요청되는 윤리적 태도와 자세에 관한 담론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오늘의 현실 교회에서 교회 구성원들 간의 경청과 대화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오늘의 교회는 세상과의 경청과 대화, 즉 시대의 징표를 어떻게 읽고 식별하고 있는지? 본당과 교구라는 현실 교회의 장(場)에서 성직자와 신자들 간의 경청과 대화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이와 같은, 교회의 현실에 대한 정직한 질문이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정직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교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찾아가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성령께서 그 여정에 함께하면서 답을 주시지 않을까. 신학적인 설명과 윤리적 당위의 요청만큼 교회 현실에 관한 정직한 질문도 중요하다.
우리는 어떤 교회를 지향하는가 – 친교, 참여, 사명
교회론적 관점에서 보면, ‘시노달리타스’는 친교와 참여와 사명이라는 차원을 포함한다. 물론 이 세 차원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친교는 참여와 사명 수행의 여정에서 이루어진다. ‘삼위일체적 친교’는 신학적으로 풍요롭고 깊은 의미가 있다. 세속의 친밀성 차원으로 축소 환원될 수 없는 개념이다. ‘교회적 참여’라는 신학적 개념 역시 마찬가지다. 세속의 민주주의 시스템에서 작동되는 단순한 참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앙적 참여’는 세례를 통해 부여받은 신앙 감각과 성령께서 신앙인 저마다에게 주신 은총에 기초하고 있다. 교회는 복음화를 위해 존재한다. 복음화라는 교회의 사명 수행을 위해서 시노달리타스는 더욱 필요하다.
조금 단순화시켜 말해보자. 시노드 정신으로 살아가는 교회란 첫째, 진정한 ‘친교’가 이루어지는 교회다. 둘째, 교회 모든 구성원의 ‘참여’가 활발하고 상호존중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교회다. 셋째, 관리와 유지와 지속과 외적 성장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복음화의 ‘사명’ 수행에 온 힘을 쏟는 교회다. 본당, 교구, 가정(교회), 수도 공동체, 다양한 교회 단체들이 시노드 정신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구현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야 한다.
시노드 과정은 경청과 식별과 참여의 양상을 포함한다. “경청이 공동합의적 과정의 방법이라고 하면, 식별은 과정의 목표이고, 참여는 그 여정이다.”(「편람」) 시노드 과정에 충실한 교회란, 결국 경청과 식별과 참여가 이루어지는 교회라는 뜻이다. 본당, 교구, 가정, 수도 공동체, 교회 단체들 안에서 경청과 식별과 참여의 모습이 구현되고 있는지, 구체적이고 정직한 질문을 던지며 답을 찾아가야 한다. 또한, 자기 삶의 모든 자리에서, 자신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 안에서 ‘시노달리타스’를 실현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정직하게 질문을 던지고 겸손하게 답을 찾아갈 때,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성직주의
시노드적인 교회는 성직자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교회다. 솔직히 고백하면, 현실 교회 안에서 신자와 신자 사이에도 경청과 대화의 문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경청과 대화의 문화를 형성하는 일이다. 과연 무엇이 성직자와 신자 사이의 경청과 대화를 어렵게 하는가? 교계적 질서와 순명의 논리를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수직적인 방식으로 이해해서일까? 복음화 사명을 위한 교회적 직무를 위계적 서열과 신분적 차이로 오해하는 문화 때문일까? “식별과 자문과 협력의 공동 작업을 통하여 결정에 도달하는 과정(decision-making)과 사목적 차원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decision-taking)을 구별해야 한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 하지만 이러한 구별은 직무적 구별이지 서열적이고 신분적인 차별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직주의의 폐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신학적 차원, 교회적 차원, 성직자 양성과 교육의 차원, 교회 문화의 차원 등 다양한 차원에서 노력이 필요하다. 성직주의라는 이름붙이기(naming) 하나로 모든 문제가 축소환원되는 듯한 느낌이다. 현실 교회의 장에서 성직주의가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정직하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모든 이가 용기와 담대함(파레시아)으로 발언하도록 초대되며, 이를 통하여 자유, 진리, 사랑이 어우러진다.”(「예비 문서」)
식별과 세상 읽기
경청은 대화이며 동시에 읽기이다. 경청은 상호간의 인격적 대화이며 세상을 신앙의 눈으로 읽는 일이다. 오늘의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화적 도전과 시대적 흐름이 무엇인지 정확하고 섬세하게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의 교회 안에는 감정적 경건주의만 활발하고 지성적 식별의 능력이 부재하다고 교회 역사가 마시모 파지올리는 지적한다. 식별을 위한 신앙적 지성뿐만 아니라 세상과 문화를 읽어낼 수 있는 인문사회적 지성이 오늘의 교회 안에 절실히 요청된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23) 인정 욕망, 자기 존엄성, 신앙 공동체
교회는 오직 신앙 안에서 모든 타인을 인정·포용하는 공동체
생은 인정 투쟁의 장
인간은 타인의 관심과 인정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자기 존엄성을 확보한다. 독일의 사회 철학자 악셀 호네트의 사유를 풀어서 설명하면, 인간은 타인과의 사랑을 통해 정서적 배려를 받고, 타자와 관계 속에서 자신의 개성과 권리가 존중되고, 사회 안에서 자신의 가치가 인정될 때 행복해한다.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오규원 시인의 시집 제목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주목받고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어 한다. 자기확인 욕망, 인정 욕망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욕망이다. 세속의 기준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흔히 권력이나 돈이나 직책이나 지식 등을 가져야 하고 외적 성취를 이루어야 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런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애를 쓴다. 자신이 가진 자본(물적 자본이든 상징 자본이든)과 권력과 세속적 능력을 통해 사람들은 인정을 추구한다.
돌아보면, 나 역시 자기확인과 인정 욕망에 붙들려 살아왔다. 세속의 권력과 교회 안의 어떤 직책과 권력을 탐하지는 않았지만, 공부와 책 읽기를 통해 남과 다르다는 자기확인 욕망과 공부 잘하는 신부, 책 많이 읽는 신부라는 이름과 명예를 은연중에 추구하며 살았다. 겉으로는 고상하고 속물이 아닌 척하지만 알게 모르게 이름과 명예라는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고, 지적 성취를 통한 자기확인과 인정욕구에 얽매어 종살이하고 있었다. 외형적으로는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해왔고, 세속의 기쁨이 아닌 복음의 기쁨이 내 삶을 관통하기를 원한다고 고백해왔다. 그런데 곰곰이 내면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이름과 명예와 인정욕구라는 속물적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 겉으로는 하느님을 말하고 신앙을 언급하지만, 실제 삶과 행동에서는 여전히 하느님의 인정보다 세상의 인정과 칭찬을 추구하며 살고 있다는 뜻이다. 종교인으로 살아서 웬만한 세속의 일에서 별다른 이해관계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욕심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의식 안에 아니 실제 의식 안에서 늘 나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삶을 선택하고 행동하는 나를 목격한다. 부끄러운 일이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서 제자들은 예수를 계속해서 오해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피력한다. 세 번에 걸친 수난예고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자신의 욕망만을 말하고 예수를 따름에 대한 보상과 인정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마르 9,34) “그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마르 10,37)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마르 10,41) 인정 투쟁과 시기와 질투의 모습이다. 예수를 따르는 신앙의 길은 세속적 인정 투쟁의 여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기 존엄성을 지킨다는 것은
생은 때때로 잔인하고 운명은 자주 불공평하다. 생이라는 인정 투쟁의 장에서 많은 이들이 낙오된다. 경쟁과 투쟁의 장에는 경멸과 무시, 혐오와 배제, 굴욕과 모욕, 시기와 질투, 분노와 폭력이 난무한다.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인정에 휘둘리는 현대의 삶은 때때로 자기 부정과 자기 파괴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기적인 자기애가 아닌, 건강한 자기 존엄성을 확보하기가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능력주의가 강화되고 불평등이 자연스럽게 수용되는 시대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끊임없이 무시되고 도태된다. 세습된 자본도 타고난 능력으로 포장되는 시대에,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별다른 능력도 없는 사람이 자긍심과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기란 무척 어렵다. 자기 존중, 자기 긍정, 자부심에 관한 담론들이 많아지는 역설적인 이유다.
건강한 자아실현, 긍정적 자기의식, 행복한 삶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긍정과 인정을 통해 건강한 자부심을 확보하며, 그 건강한 자긍심을 통해 자신의 삶을 기쁘고 즐겁게 살아갈 수는 없을까? 타인의 관심과 인정, 타인의 평가와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 세속적 관점에서 능력이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자기 개성과 능력을 사랑하고 자기를 존중할 수 있을까?
자존감은 주체 되기에서 시작된다. 자존감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인식과 경험과 행동의 주체로 살아가는 일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체험하고, 스스로 행동한다.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내가 결정하는 삶이다.”(피터 비에리) “진정한 자기 자신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자부심의 아름다움이자 위안이다.”(리처드 테일러) 주체로서의 인간은 타자와 세상을 위한 수단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 자체가 목적이 되는 사람이다. 타자와 세상이 제시하는 무엇이 되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목적이 되고 그저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신앙인은 하느님을 닮으려는 사람이다. 하느님은 다른 어떤 능력과 특성으로서 하느님인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그저 하느님으로서 하느님이다. 신앙인 역시 마찬가지다. 신앙인은 하느님과의 관계, 하느님의 인정을 통해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신앙인의 정체성과 존엄성의 기원은 오직 신앙에 있다. 그런데 과연 오늘의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인정만으로, 오직 신앙만으로 충분히 주체적 존재가 되고 또 자기 존엄성을 확보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교회와 건강한 인정 공동체
교회가 된다는 것은 신앙의 인정 공동체가 된다는 뜻이다. 교회는 신앙 안에서 모든 타인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공동체다. 타자의 건강한 관심과 인정은 고단한 생의 여정에서 우리에게 위로와 힘을 주기도 한다. 타자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상 우리는 타인의 관심과 사랑과 인정을 요청한다. 건강한 관심과 사랑과 인정은 우리를 주체 되게 하고 성장하게 한다.
모든 단체와 공동체 안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인정시스템이 작동되고 있다. 때로는 감정적 친밀성이, 때로는 혈연적 관계가, 때로는 다양한 인연의 깊이가 인정시스템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하지만 세속의 일반적 인정시스템은 대부분 자본과 권력과 능력에 기반한다. 초기교회 시절 교회 공동체는 독특한 인정시스템 덕분에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었다. 세속의 인정 방식이 아닌 오직 신앙 안에서 서로에게 관심과 사랑과 인정을 실천했다. 부자든 가난한 이든, 귀족이든 노예이든, 신앙 안에서 형제자매로 살아갔다.
오늘의 교회 공동체 안에는 어떤 방식의 인정시스템이 작동되고 있는가? 오직 신앙 안에서 서로에 대한 인정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혹시 세속의 인정시스템이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작동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올바른 인정시스템을 우리는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24) 삶, 체험, 앎
하느님 닮은 삶을 살고 체험하는 것이 앎보다 더 중요하다
머리, 마음, 몸
어쭙잖은 학자로 살고 있다. 생각하고 사유하는 것을 업으로 하고 있다. 머리를 많이 사용하고 말하기를 좋아하며 살고 있다는 뜻이다. 머리 중심으로 살다 보니 마음과 몸이 점점 빈약해진다는 사실을 요즘 자주 확인한다. 오랫동안 알량한 지식인으로 살아서, 마음으로 느끼고 몸으로 살아내는 일에 둔감해져 가는 나를 쉽게 발견한다는 의미다. 마음이 없는 공허한 지식인, 삶이 없는 위선적 지식인으로 살아온 것이 아닌지 화들짝 놀랄 때가 많다. 머리로 안다는 것, 마음으로 느낀다는 것, 몸으로 실천한다는 것의 간격과 괴리가 크다는 사실을 거듭 절감한다.
신학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명사적으로 사유하기보다 동사적으로 사유하라고 자주 강조했다. 명사, 특히 추상 명사를 중심으로 신학을 하면 아무래도 신학적 작업이 추상적이 될 위험이 많다. 동사적으로 생각하고 문장을 만들어서 사유하면, 신학적 서술이 좀 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내용을 담게 된다.
감정과 정서, 의지와 몸보다 이성과 사유에 더 많은 무게를 두고 살아왔다. ‘안다’와 ‘생각한다’, ‘느낀다’와 ‘체험한다’, ‘행한다’와 ‘실천한다’라는 동사들 사이에서 나에게 친숙한 것은 아무래도 ‘안다’와 ‘생각한다’이다. ‘머리로 안다’, ‘머리로 생각한다’를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왔다는 뜻이다. 물론 머리와 마음과 몸은 연결되어 있다. 이성과 감정과 의지 역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사람은 저마다 무게 중심을 두는 영역이 조금 다르다. 이성적 사유가 뛰어난 사람, 정서적 공감을 잘하는 사람, 의지적 실천이 훌륭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앎의 방식도 다양하다. 머리로 아는 사람, 마음으로 아는 사람, 몸으로 아는 사람이 있다. 머리와 지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체험과 삶으로 먼저 아는 사람도 있다. 어느 것이 더 낫고 좋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머리와 지식으로 아는 것이 가장 꼴찌라는 생각이 든다.
신앙, 종교, 영성
가끔 신자들에게 말한다. 종교생활보다 신앙생활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물론 신앙생활은 종교생활과 영성생활을 포함한다. 신앙, 종교, 영성은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뉘앙스를 지닌다. 우리가 흔히 ‘신앙생활 한다’고 말할 때, 종교생활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좁은 의미에서 종교생활이란, 종교적 가르침과 관습에 따라 생활하는 것을 뜻한다. 즉, 교리적 가르침을 따르고 종교 제의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영혼 없는 종교생활’, ‘신앙과 영성이 없는 습관적 종교생활’이라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서술을 가끔 사용한다. 하지만 건강한 의미의 종교생활은 신앙생활에 필수적이다. 신앙생활은 그 종교가 갖는 성스러운 이야기를 듣고 배우며, 그 종교가 시행하는 제의에 참여하며, 그 종교가 가르치는 일상의 윤리를 실천하는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앙생활이 곧 종교생활이다.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것이 영성생활이고, 집단적이고 관습적인 종교적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종교생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영성생활은 마음의 신앙생활이고, 종교생활을 몸의 신앙생활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이 가장 큰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영성생활과 종교생활은 신앙생활의 어떤 측면을 강조하는 표현일 뿐이다. 신앙생활은 머리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느끼고, 몸으로 행동하는 삶이다. 신앙은 생각과 체험과 행동, 그 모두를 포함하는 삶이다. 신앙은 앎과 체험과 행동을 포함하지만, 더 중요한 지점은 살아내는 일이다. 신앙은 삶이다.
하느님 - 앎, 체험, 삶
이번 학기 신학생들과 삼위일체 신관을 공부했다.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학자들의 현란한 사유들을 이해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하느님에 관한 앎(지식, 인식), 하느님 체험, 하느님을 닮은 삶은 긴밀히 연결된다. 전통적인 삼위일체 신학은 하느님에 관한 사변적인 앎만을 다루는 경향이 있다. 하느님에 대해 신학적으로 사유하고, 하느님에 관한 교리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느님을 어떻게 체험하는가? 하느님 체험은 환시와 환청을 통한 특별한 체험인가? 하느님 체험은 내면의 영적 체험인가? 탁월한 신비주의적 영성가들만 하느님 체험을 하는가? 평범한 신앙인들의 하느님 체험은 무엇인가? 하느님에 관한 앎은 신학자들이, 하느님 체험은 신비주의적 영성가들이 전문가인가?
성경과 교리와 신학을 통해 하느님에 관해 알 수 있다. 말씀과 성사를 통해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 성경과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살 수 있다. 비록 하느님에 관한 확연한 앎이 부족하더라도, 비록 하느님 체험이 강렬하지 않더라도,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다 보면, 조금씩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고 하느님에 관해 조금씩 알게 되지 않을까?
성경과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온몸으로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살다 보면, 하느님을 마음으로 느끼게 되고 머리로 하느님을 알게 되지 않을까? 몸에서 마음을 거쳐 머리로 가는 순서가 아닐까? 삶에서 체험으로 그리고 앎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하느님을 잘 체험하지 못한다 해도, 그저 악착같이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하느님을 안다, 하느님을 느낀다,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산다. 분명 그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물론 그 셋은 서로 긴밀히 연결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사는 일이 아닐까?
신앙은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말로 설명될 수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 안에는 하느님을 아는 것과 느끼는 것과 사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잘 알지 못하고 잘 느끼지 못한다 해도, 그저 충실히 살다 보면 느끼게 되고 알게 될 것이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삶이 먼저다.
전례는 몸과 마음을 단련시켜 삶의 변화를 겨냥한다
몸과 마음이 머리보다 더 중요하다. 삶과 체험이 앎보다 더 중요하다. 신앙이 교리적 앎, 신학적 앎에 그쳐서는 안 된다. 진정한 앎은 삶과 체험에서 온다. 물론 관찰과 실험과 논리에 따른 순수한 앎도 있다. 하지만 신앙적 앎은 삶과 체험에서 온다. 신앙의 앎은 머리의 앎이라기보다 몸과 마음의 앎, 삶과 체험의 앎이다.
생각과 느낌도 몸을 통해 온다. 진정성을 강조하는 현대 문화는 생각과 의도를 중요시한다. 하지만 내면의 심리적 기제는 언제나 변덕스럽다. 오히려 상징적 행위의 반복을 통한 몸의 단련이 우리를 변화로 이끈다. 철학자 한병철이 “형식의 우위를 복원하는 리추얼적 전환”(「리추얼의 종말」)을 강조하는 이유다. “리추얼은 체화과정이며 몸-연출이다.”(「리추얼의 종말」) 가톨릭 신앙이 성사 전례를 강조하는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앎은 몸을 통해 내면화될(체화될) 때만 삶이 된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25) 한 해의 끝에서 – 신학적 단상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늙음과 소멸을 견디어내야 할까?
세밑 마음의 풍경
또 한 해가 간다. “세월 참 빠르다.” 요즘 옆 방 동기 신부와 내가 산책하면서 이 상투적 문장을 입버릇처럼 되뇐다. 나는 늙어감이 쓸쓸하고, 몹쓸 병과 오래 싸우고 있는 동기 신부는 기약 없이 견뎌야 하는 병고의 시간이 막막하다. 새해가 온다는 것이 우리 둘 모두에게 그리 반갑지 않다. 새로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의 시간이라기보다는 그저 견뎌내야 할 시간으로 다가온다. 이 마음의 감상(感傷)이 건강하지 않다는 사실도 안다. 신앙 안에서 다시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쓴다. 은총으로 허락된 생의 시간을 기쁘고 즐겁게 살아내자고 말이다.
코로나의 시절이 오래 지속되고 있다. 언젠가 곧 극복되리라 희망하며 견뎌온 시간이 벌써 두 해다. 아직 뚜렷한 전망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일상의 많은 것들이 제한되고 변했다. 물론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어떤 환경이든 그에 맞춰 살아낸다. 하지만 조금씩 보이지 않게 내상(內傷)이 쌓이고 있다. 이 무의식적 억압과 상처가 우리와 세상을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할지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전망이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시대를 산다.
늙음과 소멸을 견디는 방식 – 세속의 지혜
괜한 청승을 떨며 살고 싶지 않다. 유난하고 호들갑스럽게 응대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의연하게 생의 시간을 살아내자고 자주 다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틈이 보이면, 늙음과 소멸의 화두는 나를 사로잡는다. 노년과 죽음에 관한 좋은 책들이 나오면 자꾸만 눈길이 간다. 다른 사람들은, 세상의 현자들과 학자들은 어떻게 그것을 견디고 성찰하는지 늘 궁금하다.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를 읽었다. 소설가이자 철학자답게 저자는 노년의 생에 대한 통찰과 지혜를 아름답고 설득력 있게 들려준다. “과학 기술이 늘려준 것은 수명이 아니라 노년이다.” “삶의 변화를 꿈꾸기보다는 이미 있는 좋은 것들과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다.” “나이가 들어도 탐구와 관찰의 정신을 유지함으로써 의식을 풍요롭게 채울 수는 있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찰나의 영원뿐이다. 사랑하는 동안, 창조하는 동안 우리는 불멸이다.” 이 몇 문장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저자의 생각과 사유에 공감하고 동의하는 것과 실제 내 생활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과 마음 사이에는 여전히 간극이 있다. 공감과 동의는 위로와 힘이 되지만 실제 내 삶의 현실에서 그렇게 살아내는 일은 전적으로 내 몫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의 늙음과 소멸을 견딘다. 어느 서정 시인은 시적 탐구 속에서 자기 생의 여정을 건너가고 있다.
이기철 시인의 시집 「영원 아래서 잠시」를 읽었다. 노 시인의 정서적 회고와 담백한 성찰을 담은 시들과 당대의 탁월한 평론가 김우창의 긴 해설문이 인상적이었다. “수많은 책과 금언들을 지나왔지만/ 아무도 아름답게 세상 건너는 걸음걸이를/ 가르쳐 준 사람이 없다”(「이슬로 손을 씻는 저녁에」)고 탄식하는 시인은 자연을 ‘친구’와 ‘연인’으로 여기며, 자연의 ‘노복’이자 ‘도반’으로 살았다고 고백한다.(「생활에 드리는 목례」) “시는 현실의 한순간을 포착하고, 그 포착을 통하여 그 순간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시간, 더 나아가 영원한 것으로 변성 승화(昇華)하는 시간의 길 찾기”(김우창)라면, 이기철 시인은 자연과의 교감과 일상의 순간에 관한 시적 탐구를 통해 잠시의 생을 견디며 영원으로 건너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시인은 소박하고 담담하게 진술한다. “나와 이 소목상(小木床)의 가족사는 오래되었다/ 나는 사람과 세계를 사랑하는 법을 이 평면의 지형학에서 배웠다”고(「책상의 가족사」), “파꽃을 보면 피는 일이 아픔이라는 걸 안다”고(「백서(帛書) - 시에게」), 자신의 “하루는 언제나 저녁이 오는 방향으로” 걷는 일이지만 “어김없이 오는 가을의 규칙을 생각”한다고 말이다.(「가을의 규칙」) 시인은 “컬러판 인생을 꿈꾸지 않았다/ 강물 휘는 어느 곳에서는/ 들깻잎같이 푸른 삶도 있으리라 믿었다”며(「살아오면서 나는 아무것도 미워하지 않았다」), “시 한 줄로 세상을 요약해 보이고 싶지만/ 세상은 일만 페이지의 행에도 저 자신을 담지 않”는다고 탄식한다.(「노령에 눕다 – 장수에서」) 시인이 보여주는, 삶을 향한 시적 탐구의 순정함과 정결함에 ‘경애의 마음’이 든다.
때때로 무신론자들이 보여주는, 삶의 의미에 대한 정직한 절망과 냉정한 현실 인식이 더 서늘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존 그레이의 「고양이 철학」을 다시 읽었다. 그의 중요 저작인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의 문제의식을 고양이에 빗대어 대중적으로 풀어낸 책이다. 의식의 비극적 속성과 인간 정신의 나약함과 무기력함을 그는 여전히 말한다. 의미와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 의식의 본능이 외려 인간을 불안과 절망으로 이끌게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좋은 삶이란 비극적인 우연성을 헤쳐나가는 데 있으며, 영적인 삶은 의미를 찾아 헤매는 삶이 아니라 의미에서 놓여나는 삶”(「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이라는 그의 핵심 주장이 거듭 반복되고 있다. “삶의 의미는 우연히 찾아와서 그게 무엇인지 당신이 알기 전에 사라져버리는 촉감과 향기”(「고양이 철학」)일 뿐이다. 행복과 의미를 추구하지 말고 그저 사심 없는 이기주의자로 살아가라고 말한다. “고양이는 오직 자기 자신과 자기가 사랑하는 다른 것들에만 관심을 가진다는 점에서 이기주의자다. 고양이는 보존하고 확대하려고 애쓰는 자아상이 없다는 점에서 사심이 없다. 고양이는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심 없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간다.”(「고양이 철학」) 욕심 없이, 사심 없이 그저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의 아름다움을 존 그레이는 나직이 설파한다.
지혜의 탐구 – 신앙의 지혜
세속의 현자들은 삶의 지혜에 기대어 소멸의 운명을 견디고 있다. 지혜는 탐구와 배움에서 온다. 세속의 지혜와 신앙의 지혜는 서로 다른 것인가? “지혜는 다정한 영”(지혜 1,6)이며,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온다”(집회 1,1)는데, 시간 속에서 늙음과 소멸의 운명을 견디며 영원으로 건너가려는 신앙인에게 지혜의 탐구는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모든 것이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코헬 1,14)인 세상에서, 하느님께 의탁하고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며 성령의 인도에 따른다는 것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지혜는 자기에게 맞갖은 이들을 스스로 찾아 돌아다니고/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상냥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의 모든 생각 속에서 그들을 만나 준다”(지혜 6,16).
지혜는 생의 모든 길목에서 우리와 함께한다. 그런데 과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성경과 교회의 전통과 이 시대의 삶 안에서 어떻게 참 지혜를 찾고 발견하고 있는가? 신앙 공부와 세상 공부에 대한 마음을 다시 가다듬는다. 어쩌면 탐구와 공부가 늙음과 소멸을 견디며 영원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의 하나가 아닐까?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26) 공부하는 신앙
신앙 공부, 모든 일에서 하느님 뜻 찾고 예수님 방식 실천하는 일
공부의 즐거움
한 해를 마감하고 또 한 해를 시작한다. 새로운 무언가를 꿈꾸기보다는 그저 신앙 안에서 잘 살아내야겠다고 다짐한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조금 즐겁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탄식과 회한이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즐거움이 가득하기를 비는 마음이다. 삶은 주어지는 것과 만들어가는 것의 이중주다. 운명으로 주어지는 것들은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저 다가오는 것들에 대해서 신앙의 방식으로 응대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자고 마음을 다잡는다.우리 생의 즐거움들은 주로 감각과 관련이 있다. 보는 눈이 즐겁고, 듣는 귀가 즐겁고, 먹는 입이 즐겁고, 만져지는 느낌이 즐겁고, 좋은 내음이 우리를 평안하게 한다. 오늘날 여행과 식도락에 대한 프로그램이 발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비정한 자본주의 시대에 감각과 욕망의 즐거움들은 돈과 시간을 요청한다. 돈이 없는 사람, 시간의 여유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은 잘 즐기지도 못한다. 하지만 진정한 즐거움은 감각과 욕망을 충족시키는 물질적 소비에서 발생하는 즐거움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를 누릴 줄 아는 향유의 즐거움이다. 비용도 들지 않고 또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향유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은 공부와 산책이다. 그저 배우려는 태도와 마음의 여유만 있으면 된다.
공부는 나이 들어도 할 수 있다. 젊은 날의 공부는 성취와 인정과 권력을 향하기 쉽다. 오히려 늙은 날의 공부가 배움 그 자체가 주는 즐거움을 더 겨냥할 수 있다. 늙어갈수록 더 공부해야 한다. 잘 늙어가기 위해서, 순수한 앎의 즐거움을 위해서, 겸손하고 온화한 노년을 위해서 공부가 더 절실히 요청된다. 학문으로서의 공부든 삶을 향한 인생 공부든 말이다. 노년의 공부가 좋은 이유는 참 많다. 사실, 지식과 권력의 역학 속에서 학문으로서의 공부는 변질되고 퇴화될 위험이 늘 있다. 권력을 향한 지식인들의 변절과 흑화를 우리는 정치의 장에서 쉽게 목격하지 않는가. 노년의 학문 공부는 학문 그 자체의 목적에 집중하게 할 수 있다. 순수한 앎과 지식의 즐거움을 향유하기가 더 쉽다는 뜻이다. 더욱이 탐구와 호기심으로서의 공부는 우리를 언제나 젊게 하지 않는가. 또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이상 삶을 향한 인생 공부는 죽는 그 순간까지 해야 한다. 청년과 중년의 인생 공부 역시 사람을 성숙하게 하지만, 노년의 인생 공부는 우리를 원숙함과 지혜로 나아가게 한다. 노년의 공부는 지식 탐구보다 지혜 연마에 무게 중심이 있다.
공부의 방식
모든 공부는 바르게 알기 위해, 깊이 이해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판단하고 비판하고 지적질하기 위해, 즉 권력으로 사용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말을 위한 문법 공부조차도 원래의 목적은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다. 작고한 평론가 황현산 선생도 트위터에서 위트있게 말을 날렸다. “잘못된 말을 지적하여 바로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법 공부는 꼰대질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 말이나 남의 말이나 말을 깊이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공부하는 행위는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이다. 다양한 책을 읽고, 읽은 것을 매개로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보고, 자신의 생각과 말을 글로 옮겨보는 일이다. 공부의 행위 안에는 타인의 다양한 생각을 읽는 즐거움, 자신의 생각을 벼려가는 즐거움, 자기의 말과 글을 사용하는 작가가 되는 즐거움이 들어 있다. 물론 생각하기와 글쓰기는 자주 고통스러운 노역(勞役)이 되기도 한다. 공부의 행위는 듣고 이야기 나누는 일이기도 하다. 공부는 배우고 경청하는 일이다. 공부는 일방적인 강의를 듣는 일이 아니다. 공부는 책과의 대화를 통해, 타자와 진솔한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공부는 서로의 생각을 말하고 듣고 대화하는 일이다.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다. 어떻게 공부하는가의 문제만큼 누구와 함께 공부하는가가 중요한 문제다. “공부란 곧 동학들 사이의 대화적 긴장과 그 상호모방의 호혜성에 빚지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김영민)
공부의 기쁨과 즐거움은 성취의 결과물에서 오는 것이라기보다 공부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다. 공부하는 과정 그 자체가 기쁨과 즐거움이다. 참다운 공부란 머리와 마음과 몸을 관통하는 공부다. 참 공부는 언제나 삶을 겨냥한다. 물론 순수한 앎의 공부도 있다. 앎 그 자체의 즐거움도 크다. 하지만 진정한 공부는 몸으로 하는 것이다. 몸을 움직여서 하는 공부가 마음을 건드리고 삶을 변화시킨다. 공부의 여정은 머리로 알고 마음으로 깨닫고 몸으로 실현하는 과정이다. 머리와 마음과 몸으로 하는 공부, 삶으로 하는 공부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성숙하게 하며 겸손하게 만든다. 공부하면 할수록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황현산)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신앙 공부
신앙도 공부가 필요하다. 신학은 신앙에 관한 학문적 공부다. 신학 행위는 신앙을 탐구하고, 교회를 성찰하며, 시대의 징표를 읽는 일이다. 신학은 ‘지혜’이며, ‘합리적 지식’이며,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실천에 관한 비판적 성찰’이다. 신학 공부가 소수의 전문가에게만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신학 공부는 신앙인 모두가 할 수 있는 공부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위가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이미 신학을 표현하고 있다.”(필립 클레이튼) 신앙인은 누구나 ‘신학적 에로스’를 갖고 있다. “즉, 인간 실존과 세계의 운명에 관한 궁극적인 질문들과 씨름하도록 하느님께 부름받았다.”(미로슬라브 볼프)
신앙 공부는 성경과 교리에 관한 공부이기도 하다. 오늘의 성경 공부는 성경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공부하는 역사비평적 접근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 저자만큼 성경 독자의 문맥을 중요시한다. 일종의 수용비평적 성경 공부다. 두 이야기(성경 이야기와 오늘의 우리 이야기)가 만나고 합류하는 지점을 공부한다. 성경이 오늘의 우리에게 살아있는 말씀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삶을 공부해야 한다. 넓은 의미의 인문 성경 공부다. 신앙의 빛으로, 성경에 비추어 세상을 읽는 일 역시 신앙 공부의 한 요소다.
공부하는 신앙, 살아있는 신앙, 삶을 흔들고 변화시키는 신앙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명확하게 설명한다. “우리를 성장하게 해주지 않는 신앙은 그 자체로 성장해야 할 신앙이다. 질문하지 않는 신앙은 질문을 받아야 할 신앙이다. 잠든 우리를 깨우지 않는 신앙은 깨어나야 할 신앙이다. 우리를 뒤흔들지 않는 신앙은 뒤흔들려야 할 신앙이다. 머릿속에만 머물며 미온적인 신앙은 ‘신앙’이라는 개념일 뿐이다.”(2017년 12월 21일 연설)
성모님은 신앙 공부의 모범을 보여준다. 신앙 공부란 질문을 던지고 곰곰이 생각할 줄 아는 태도로(루카 1,29.34),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섬세한 시선으로(루카 2,19.51), 예수님의 방식을 배우고 실천하는 일이다.(요한 2,5 참조)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27) 본당 공동체에 관한 신학적 단상
본당 쇄신, 구성원 마음 모아 하느님 뜻 살아내는 것이 최선
본당 경험과 사목의 문제
본당 사제로 8년을 살았다. 짧은(?) 본당 경험이었지만, 신학교 선생 시절 동료 교수 신부들 가운데 그래도 가장 긴 본당 사목 경험을 가진 신부였다. 신학교는 신학과 영성과 인성을 종합적으로 교육하는 공간이다. 단순히 현장 사목을 위한 실습 장소가 아니다. 하지만 신학교 양성 과정 안에, 사제 삶의 중심을 차지하는 본당 사목에 대한 정밀한 이해와 교육이 조금 부족하다는 인상이다.
경험은 체화(體化)를 통해서 산 경험이 된다. 경험은 사유와 성찰과 공부를 통해서 구체화 되고 교훈이 된다. 경험은 머리와 마음과 몸을 통하지 않으면 죽은 경험이 된다. 경험이 많다고 해서 자동으로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다. 성찰되지 않은 경험은 오히려 우리를 고집스럽게 할 위험이 있다. 경험이 많은 사람이 자기 경험의 울타리에 빠져 다른 것을 잘 수용하지 못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자주 목격한다. 성찰과 공부 없이 그저 반복되는 경험은 습관화, 관습화의 폐해만 낳을 뿐이다. 오랜 본당 사목 경험이 역설적으로 사목적 매너리즘에 빠지게 하는 위험으로 작동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코로나 시대의 본당
신앙생활의 대부분은 본당에서 이루어진다. 가정교회도 있지만, 우리가 가시적으로 경험하는 교회는 본당이다. 본당은 가톨릭 신앙의 중심이다. 그런데 그 본당 공동체가 위기를 겪고 있다. 오늘날 겪고 있는 본당의 위기가 코로나 사태 때문만은 아니다. 오래 누적되어왔던 본당 공동체의 위기가 코로나 사태로 분명하게 드러났을 뿐이다. 사실, 오래전부터 본당은 조금씩 활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코로나 사태로 전례와 성사 생활이 가장 먼저 타격을 받았다. 미사 참례자 숫자가 줄었다. 코로나 사태가 종식되어 일상이 정상화 된다고 해도, 코로나 시절의 신앙생활에 익숙해진 신자들이 예전의 신앙생활로 모두 복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통계와 여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본당 생활에 조금 미지근했던 신자들은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본당 생활에서 이탈할 위험이 많다는 전망이다.
실제 본당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것들은, 미사, 다양한 신심 활동과 봉사 활동, 친교와 친목 모임, 구역과 반 모임, 성경 공부, 예비신자 교육 등이다. 오늘날 본당의 위기란, 결국 본당 중심의 전례와 모임과 행사에 참여자가 줄어든다는 것이며, 본당 안에 활기와 역동성이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여자의 감소와 활기와 역동성의 축소는 긴밀한 관계를 갖지만,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참여자가 증가한다고 해서 활기와 역동성이 늘어난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숫자의 증가에 따른 활기와 역동성은 물질주의적 자본주의 성장 논리에 불과할 수 있다. 어쩌면 오늘날 본당의 위기는 본당에서 수행되는 모든 것들이 그 진정한 목적과 지향을 놓치고 있는 데서 오는지도 모른다.
본당의 본질과 목적과 지향
코로나 사태는 다시 한번 본당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본당의 목적과 지향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본당은 그 지역에서 사는 교회의 현존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인 생활이 성장하는 장소이며, 대화와 선포, 아낌없는 사랑 실천, 그리고 예배와 기념이 이루어지는 장소다.”(「복음의 기쁨」 28항) 본당은 친교와 참여의 장소이며 복음화(선교)를 지향해야 한다.(「복음의 기쁨」 28항) 즉, 본당은 시노달리타스의 핵심 주제인 친교, 참여, 사명이 이루어져야 하는 곳이다.제도는 언제나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본당은 친교와 참여와 복음화 사명을 위해 존재한다. 본당의 유지와 관리와 운영은 부차적 문제다. 제도의 본질은 그 제도가 지향하는 목적과 사명 수행에 달려있다. 교회 공동체가 본당이라는 제도를 통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를 놓쳐버리고, 그 외형적 유지만을 집착할 때 위기가 온다. 본당의 본질과 사명을 수행하려는 목적은 사라지고 본당의 전통적 형식만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일 때, 본당의 활기와 역동성은 축소된다. 본당이라는 시스템의 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본당이 갖는 원래의 목적과 지향을 다시 상기하면서 그 목적과 지향에 맞는 새로운 스타일을 찾아내자는 뜻이다. 본당이 ‘자기 보존’에 매몰되지 말고 ‘복음화의 역동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의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것을 ‘본당 공동체의 사목적 회심’이라 부른다.
본당 공동체의 회심
교황청 성직자성 훈령인 「교회의 복음화 사명에 봉사하는 본당 공동체의 사목적 회심」은 오늘날 본당이 처해 있는 현실을 진단하고 다양한 제안을 하고 있다. “본당 사목구는 지난날과 같이 모임과 사교의 으뜸가는 곳이 아니기에 동행과 친교의 새로운 형태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14항) “본당 사목구가 복음화의 영적 역동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자기중심적이고 화석화될 위험에 놓이게 된다.”(17항) 본당 구조가 행사중심으로 함몰되는 것을 피해야 하고(34항), 관료적이고 위압적인 방식을 버려야 하고, 사목 활동이 성직자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극복해야 한다.(37-38항)
본당 구조의 쇄신과 더불어 구성원들의 회심이 요청된다. 무엇보다 성직자의 사목적 회심이 가장 필요하다. 오늘날 본당 신부들은 미사, 신자 관리와 재정 문제, 본당 행사에 매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지친다. 속된 표현을 사용하면, 미사 드리는 기계와 인사와 재정 관리자로서 살아간다. 복음화, 신앙 교육, 참된 친교와 봉사라는 목적과 지향을 자주 놓치고 산다. 본당의 현실은 사제들을 복음 선포자로 살게 하기보다 관리자와 운영자의 모습으로 살게 한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제도와 구조의 문제일까? 아니면 지속적 양성의 부재와 공부와 성찰의 부재에서 발생하는 성직자들의 신원 의식의 약화에서 빚어지는 것일까? 관리자가 아니라 현장 사목자로 살아가기 위한 발상의 전환은 어떻게 가능할까?
본당의 구체적 현실에 대한 정직한 질문과 성찰이 필요하다. “우리 본당은 진정한 친교와 참여와 복음화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지?” 그저 정직하게 질문하고 답을 찾으려 노력하기만 해도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또한, 본당 공동체 안의 수도자와 신자들의 역할과 태도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가 요청된다. 문제 해결과 대안 제시는 어느 특정인의 몫이 아니다. 주교, 사제, 신학자, 수도자, 평신도가 모여서 함께 공부하고 대화하는 수밖에 없다. 시노달리타스의 실현이 해결책이다. 모든 것을 한 번에 해결하는 만능 프로그램은 없다. 법과 제도의 변화는 언제나 나중이다. 공부와 성찰과 교육을 통한 회심과, 본당의 삶을 살아내는 방식과 스타일의 변화가 먼저다. 회심과 스타일의 변화는 언젠가 법과 제도의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다. 예수님 역시 새로운 제도와 프로그램의 창시자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살아내는 방식의 혁명적 변주자였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28) 가톨릭 지성과 세상 읽기
오늘날 교회, 경청과 식별 위한 신앙적 지성 절실히 요청
경청, 읽기, 식별
오늘날 ‘경청하는 교회’라는 말이 자주 사용된다. 주장하고 가르치려는 경향이 강한 세상에서 경청하고 배우는 행위는 중요한 미덕이다. 하지만 경청의 행위는 많은 수고와 노력을 요청한다. 경청한다는 것은 단순히 타인의 말을 듣는다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경청의 행위 안에는 말하지 않는 것, 발화되지 못한 말도 들을 수 있는 태도와 능력이 포함된다. 경청은 타자의 말과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진정한 의미와 의도를 정확히 읽어낼 수 있어야 하고, 타자가 말하지 않거나 말하지 못한 것들마저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경청은 대상을 향한 정밀한 읽기 행위다.
교회의 문맥에 있어서 경청의 대상은 사람들의 생각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경청의 대상은 무엇보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이다. 경청은 성경을 읽고, 역사와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읽는 것이다. 성경과 교회의 역사적 전통과 오늘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읽어내는 일은 해석과 식별의 과정을 내포한다. 성경을 해석하는 일, 교회 전통을 이해하는 일, 오늘의 세상을 식별하는 일은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경청은 읽기와 식별의 행위를 포함하는 고도의 작업이다.
정확히 읽는 일, 섬세하게 식별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식별은 판단과 비판이라기보다 섬세하고 정확하게 읽는 일이다. 식별은 하느님의 뜻을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다. 세상을 읽는 일, 시대의 징표를 읽는 일은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서 더욱 어려운 일이 되었다. 복잡한 사회와 복합적인 사람들을 읽고 식별하기 위해서는 인문사회적이며 자연과학적 역량과 지성이 필요하다. 전통적인 철학과 신학의 시선으로 읽어내기에는 현대 사회와 문화는 너무 복잡하다. 변해가는 세상을 읽어낼 수 있는 지성적 역량의 부재를 교회 안에서 자주 실감한다.
교회 안의 신앙적 지성 부재 현상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 급속한 변화를 따라가면서 시대를 읽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과학기술과 미디어 문화의 발전을 통해 매우 복잡해진 인간 삶의 현상들은 교회의 역량만으로 분석하고 읽어내기 어렵다. 현대 교회 역사가 마시모 파지올리는 한 칼럼에서 오늘의 교회에서 자주 발견하는 지성의 부재와 문해력(literacy) 부족을 뼈아프게 지적한다. 세상을 정확히 읽고 복음의 진리와 가치를 설득력 있게 선포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더 세상과 대화하고 세상의 현자들에게서도 배울 수 있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하지만 오늘의 교회는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파지올리는 진단하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레트로토피아」에서 서술했듯이, 복잡하고 변덕스런 현재와 불확실하고 불안한 미래에 대한 전망은 과거로 도피하려는 경향을 낳는다. 오늘의 교회 역시 시대와 문화의 도전에 맞서 싸우지 못하고 과거로 회피하려는 태도를 은연중에 취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파지올리는 교회가 “거대한 문화적 도전 앞에서 지적 무장해제”를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교회 안에 지성적 열정은 사라지고 부정적 뉘앙스의 경건주의만 강화되고 있다고 경고한다. 물론 경건주의 자체는 종교에서 소중한 흐름이다. 하지만 때때로 경건주의는 형식주의와 엄숙주의 형태로 작동된다. 종교적 감정만을 강조하는 왜곡된 경건주의는 혐오와 배제를 기반으로 하는 이념화된 종교의 모습으로 전락할 위험이 많다.
교회 안의 신앙적 지성의 부재는 다양한 원인에서 비롯된다. 정직하게 말하면, 신앙의 전통을 정확하게 읽고 해석하면서 동시에 세상을 읽고 식별하기란 어렵다. 교회의 역량만으로는 세속의 급격한 변화를 따라잡지도 못한다. 변화의 흐름 속에서 자칫 자신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도 있다. 그래서 교회는 자신의 본업에 집중하려는 전략적 태도를 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앙적 전통에만 집중하고 세상의 문화를 단순히 세속주의로 치부하고 배격하는 것은 오만한 무지다. 교회는 신앙적 전통과 세상의 문화를 언제나 함께 안고 가야 한다.
교회 안의 신앙적 지성의 부재는 성직주의와 관련이 있다고 파지올리는 주장한다. 그는 신학교 교육의 문제점을 말한다. 오늘의 신학교 교육이, 성직자의 성적 스캔들에 대한 예방적 방법으로서, 강화된 인성 교육과 심리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경향은 어쩔 수 없이 신학적이고 인문사회적인 지성 교육의 소홀로 이어질 수 있다. 성직자들의 지속적 양성 교육의 부재, 고위 성직자들의 고령화 현상은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신앙의 시선으로 식별할 수 있는 교회의 능력을 위축하게 하고 있다고 파지올리는 진단한다.
가톨릭 지성의 부활을 위하여
역사를 돌아보면, 시대 안에서 지성이 언제나 바른 역할을 수행한 것은 아니다. 지성과 지식이 삶과 연결되지 않아 공허한 앎으로 전락한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지성과 지식이 권력과 자본과 결탁해서 올바른 사회적 힘으로 작동되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더욱이 오늘의 시대는 이성보다 감정과 욕망이 더 중요한 시대다. 그래서 더 역설적으로 이성이 요청되는 시대다. 감정과 욕망에 충실한 현대인들이 빚어내는 현상들을 우리는 쉽게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의 모든 자리에서 이성은 사라지고 감정과 욕망만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다고 스티븐 핑커(「지금 다시 계몽」)와 조지프 히스(「계몽주의2.0」)처럼, 계몽주의적 이상을 다시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지성(이성)의 역할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가톨릭의 빛나는 전통은 언제나 신앙과 지성(이성)을 두 축으로 움직여 오지 않았던가.
지성의 부활이 지성주의(intellectualism)의 귀환을 뜻하지는 않는다. 지성과 지식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지성주의는 지식인들의 한 시절의 오만일 뿐이다. 지적 우월주의가 아니라 신앙적 지성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다. 신앙은 이성을 포함하지만, 지성은 언제나 이차적이다. 신앙도 삶이 먼저다. 앎은 삶에서 나온다. 지성적 행위로서 신학은 이차적 작업이다. 신학이 신앙보다 앞설 수는 없지만, 올바른 신앙을 위해 신학은 필수적이다. 시대의 징표를 읽어내고 식별할 수 있는 신학의 부재가 교회 안의 신앙적 지성의 부재를 알리는 증거다. 사실, 가톨릭 신학은 그 본성상 전통과 시대를 동시에 읽으려는 노력의 산물이 아니던가?
공부하는 지성이 절실히 요청된다. 지식이 단순히 정보의 취득으로 전락하고, 공부가 욕망 실현의 수단으로 전락한 시대이기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지성과 신앙의 일치와 균형을 강조하는 가톨릭 신앙의 이상(理想)이 더 매혹적이지 않을까? “리터러시가 공동체적으로 갖춰지면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된다.”(조병영) 교회의 지성, 교회의 문해력이 성장하기를 희망한다. 경청과 읽기와 식별을 위해 신앙적 지성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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