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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32:1-5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이 시를 누가 썼든지 간에 그 선지자는 여기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성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자기의 집 또는 나라가 넘어지지 않고 보호하심과 지키심과 받도록 해 달라’ 고 간구합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 본문 1절은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근심한 것을 기억하소서” 입니다.
주석가들은 이 시의 저자가 누군지에 대해서 서로 의견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 아니면 솔로몬이 이 시의 저자라는 점에는 그다지 의심이 없습니다.
솔로몬은 엄숙한 성전 봉헌식에서 기도드릴 때, 성경 역사서에서 몇몇 구절을 인용한 것을 보면 우리는 이 시가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거나 솔로몬이 이미 자기가 완성해 놓은 시에 봉헌식에 맞는 구절을 삽입해 넣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봅니다.
다윗의 이름이 이같이 두드러지게 언급된 것은 왕국과 성전의 지속함에 대한 약속이 다윗에게 주어졌고, 또 다윗이 죽었다 해도 다윗의 죽음이 하나님 말씀의 신실함을 무효화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종 다윗에게 개인적으로 약속하신 게 아니라 모든 자기 백성에게 은혜로 약속해 주신 것을 여기 기록된 방법으로 기도하는 것이 매우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황주의자들이 이 구절을 근거로 우리가 죽은 자들의 중보를 통해 은혜를 입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생각 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치 성도들이 무덤으로부터 한 변호자를 불러내어 하나님께 그들의 일을 탄원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다윗과 했던 언약을 온전히 바라보았고, 비록 한 사람에게 주어졌지만 이 언약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전달되는 것을 잘 알았다는 사실이 문맥을 통해 충분히 증거 됩니다.
여기에 다윗의 “근심” 또는 ‘고통’을 말하는 이유가 들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온유’로 번역하는데 하등에 그럴 만한 이유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역대하 6장 42절에서 우리는 הסדים (하스딤), 즉 ‘온유함’ 이란 말이 수동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다윗에게 임한 “은총”들을 의미하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시편 132 편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이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불안하게 하는 동안 그가 당했던 괴로운 근심, 무수한 곤경과 씨름을 의미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봅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당했던 큰 근심과 막중했던 환난, 그리고 자기 일생 동안에는 성전을 짓는 일이 허락되지 않았음에도 이 일을 얼마나 빈번하고 간절하게 사모했는지를 기억하소서’ 입니다.
다윗이 당했던 위험과 수고와 환난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확신시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진실하다는 사실을 얼마나 분명하고 확실하게 확신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나타낼 수 있게 해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접속사를 삽입하여 ‘다윗과 환난을 기억하소서’ 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번역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את (에트) 는 성도들이 다윗에 대해 특별히 기억할 만했던 다윗의 환난들 입니다.
다윗은 환난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고 이 환난들 때문에 소망을 가졌습니다.
2. 본문 2-5절은 “(2) 저가 여호와께 맹세하며 야곱의 전능자에게 서원하기를
(3) 내가 실로 나의 거하는 장막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며
(4) 내 눈으로 잠들게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아니하기를
(5)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입니다
법궤의 위치 때문에 어찌할 바 몰라 했던 다윗의 한 가지 근심이 특별히 언급됐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자신을 예배하도록 선택해 주신 장소를 일러 주었습니다(신12:5).
다윗은 그 특별한 장소가 분명하게 밝혀질 충분한 때가 이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소간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법궤의 위치는 필연적으로 많은 근심을 낳게 했는데 특별히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고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더불어 고정된 자리를 정하시고 보호하시고 통치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했던 사람에게 그러했습니다.
다윗은 성전의 건물을 보기 위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다른 모든 생각을 뒤로 미루기로 맹세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는 잠자는 것과 음식을 먹는 것과 일상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금하기로 결심했다는 말씀은 너무 지나치고 억지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시기를 예언해 주신 것도 아니요, 또한 금식하는 날 수나 잠을 자지 않는 날 수를 견뎌낼 가능성도 없는데 이런 식으로 행동한 것은 분별없는 열심을 드러낸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때 이러한 맹세를 할 수 있겠습니까?
시편 132 편
우리는 어떤 히브리 학자들이 이때는 다윗이 천사 앞에서 엎드려 떨고 있을 때였다고 해석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번제를 드린 직후에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나 다윗이 그 시기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것은 지나친 추측으로 전혀 근거 없습니다.
시인이 이 구절에서 하는 말씀을 과장으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금할 것은 없습니다.
이 맹세는 글자 그대로의 맹세가 아니라, 곧 다윗은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집에 들어가거나 침상에 돌라가는 일이 결코 없었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성소의 건축이 나라의 상태와 직관되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성소의 위치에 대해 확실한 것을 알기 전에는 자기 왕위 자체도 불안정한 것으로 알았고 일상 생활에서도 만족을 누리지 못했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성경 말씀이 침묵한 곳에서는 아무것도 확실한 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깊이 다루지 않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은 매우 좋다고 봅니다.
즉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법궤의 정확한 위치를 깨닫게 될 때까지 다윗은 집에 있을 때든지 잘 때든지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맹세 그 자체에 대해서 볼 때, 교황주의자들이 자기 자신의 본성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들이 말한 맹세들은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신다고 하는 말은 이 구절이나 다른 구절을 볼 때 그 근거가 없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이 받으실만하게 드리겠다고 하나님께 한 맹세는 칭찬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맹세가 우리 육체의 경향에 적절하다는 말은 지나친 추측입니다.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만 갖고 계시는 권리를 빼앗아 버리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기” 때문입니다(삼상15:22).
시편 132 편
시132:6-9 우리가 그것이
다윗의 소원은 후에 착착 이루어져서 법궤도 발견되었고, 성전도 건축되었습니다(6-9) 성전 건축은 실상 그의 별세 후에 그 아들 솔로몬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습니다.
이렇게 성도의 참된 기원은 그 성도의 죽은 후에도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1. 본문 6절은 “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입니다.
이 구절은 그 의미가 애매하기에 주석가들이 그 의미를 밝혀내기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첫째로 관계 대명사는 여성인데다 선행사가 없기에 우리는 복수이기는 하지만 앞 절에 나오는 “성막” 이란 단어가 그 선행사라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려움은 주로 “에브라다” 라는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언약궤는 그곳에 있은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단어를 과거로 돌린다면 이곳은 실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언약궤의 새로운 거처에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므로 왜 시온을 말하지 않고 특별히 에브라다 라고 하는지의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리석은 생각을 해 내고 있습니다.
즉 다윗에게 보여주신 터는 두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땅이 비옥했기에 에브라다 라고 불려졌다는 것입니다(삼하24:18, 대상21:18).
이러한 생각으로 제롬은 이 이름을 καρποϕοριαν(카르포포리안)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롬의 이런 생각에는 스스로 모순을 범하고 있습니다.
제롬으로서는 다른 곳에서 비유적인 해석을 내리기를 이 말은 ‘분노’를 의미한다고 가장 터무니없는 해석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이 ‘열매 맺다’ 는 뜻을 가진 פרה (파라)에서 왔다고 확신합니다.
이것은 같은 지역의 베들레헴이 그 비옥함 때문에 ‘떡집’으로 불린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은 단순히 지명으로만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보다 더 타당성 있는 해석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말이 강조형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언약궤가 다윗의 고향인 에브라다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시편 132 편
그러므로 우리는 최소한 다윗의 고향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언약궤와 성도를 위한 가장 적합한 장소로 여겨졌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이 어떻게 널리 퍼졌는지를 쉽게 가려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시인의 말을 들은 자들이 그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옮겼음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을 이러한 의미로 본다면, 동사의 시제는 과거 완료가 되어 ‘우리는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었다고 들었다’ 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에브라다가 수풀 속, 곧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것이나 훌륭하게 개발될 소지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수풀이라고 일컬어진 이유는 많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어느 한 곳도 비옥한 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당시에 시온에서보다 에브라다에서 더 큰 일을 말씀하셨기에 성도들이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라고 말한 것으로 생각해 봅시다.
명백한 예언(미5:2)이 아직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베들레헴에 관한 매우 막중하고 의미 깊은 예언을 주셨을 것이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우리는 옛날 성도들이 베들레헴에 대해서 말했던 것처럼 그 장소에 대해 아직 희미한 기대밖에 가지고 있지 못했으나 한편으로는 에브라다에 관한 약속이 성취될 것을 내다보고 수풀 속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사실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나 다른 사람들에게 올바른 해석으로 인정하도록 추천하기에 너무나도 빈약합니다.
보다 단순한 의미로 해석하는 방법은 “에브라다”란 말은 다윗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요 지명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시인이 말씀하는 의미는 ‘이제 하나님께서 에브라다에서 왕을 택하셨으므로 이와 동시에 그 장소도 필히 언약궤를 위한 곳이 될 것이니이다’ 와 같을 것입니다.
“들었더니” 란 성소의 위치를 결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달렸기에 하나님의 뜻이 알려지기 전에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대로 그 장소를 결정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성전의 영원한 건축에 관한 현저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 다윗이 왕위에 오름으로 그 효력을 나타내게 되었다는 사실은 감사를 드리기에 매우 좋은 근거를 마련해 줍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약궤를 함부로 아무 곳에나 두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지시해 주심에 따라 하나님이 경배 받으실 곳에 두었다는 증거를 봅니다.
모든 정당한 예배는 믿음에서 나오고 그 믿음은 들음에서 나옵니다(롬10:17).
시온산은 이 장소로 뽑힐 만큼 다른 곳들보다 특별한 장점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곳을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사실을 들은 이상 이것을 문제 삼는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을 보여 주었습니다.
시편 132 편
2. 본문 7절은 “우리가 그의 성막에 들어가서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하리로다” 입니다
시인은 여기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상호 권면하는 일반적인 표현방식을 사용하여 천사가 지적해 준 장소로 올라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분명하게 밝히시면 밝힐수록 우리는 더욱 민첩하게 그 뜻에 순종함을 보여야 합니다.
따라서 시인은 이제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장소에 대해 전혀 의심할 수 없는 확증을 가지게 된 이상, 이 사실을 주저함없이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가까이 부르시면 부를수록 더 신속하게 그리고 더 특별한 유대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다른 여러 곳들 중에 한 곳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나타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계시의 정도와 비례해서 더욱 강한 열심을 나타내지 못하는 자들의 뜨뜻미지근함을 신랄하게 정죄합니다.
“성막” 은 복수로 사용되었는데 그 이유는(우리는 시인이 그러한 모습을 자기 눈으로 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것이 성전 내부의 가운데 부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할 중요한 점은 시인이 다음에서 언약궤를 가리켜 ‘하나님의 발등상’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하여 흔히 사람들이 어리석게 생각하듯 하나님의 무한하신 존재가 성소 안에 갇힐 수 없음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표면적인 성전만으로는 그 모든 위엄을 다 합쳐도 하나님의 발등상에도 미치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늘을 쳐다보고 하나님 자신에게 적절한 경배를 드릴 수 있는 생각을 가지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천하게 또는 육체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소가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앞에 있는 하나님의 상징을 바라보게 하여 그들의 믿음을 확고하게 해주는 ‘하나님의 얼굴’(시28:8 여호와)로 불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두 사상이 매우 명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이 성전 안에 국한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미신에 불과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서 외면적인 상징물들이 사용됨이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믿음을 증진시켜 주는데 도움을 주고 있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이것들로 만족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거하시고 계시며 또한 온 하늘을 초월해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깨달아 알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임재의 상징물들을 우리들을 위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발을 땅에 디디고 계시사 우리가 만져볼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우리들을 위해 자신을 낮추어 우리들의 연약함과 같이 되시어 이러한 세상적인 것들을 통해 하늘나라의 거룩한 것들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하십니다.
시편 132 편
우리는 이 구절의 말씀을 들어 우리의 교부들 중에 연약한 자들에게 이러한 가치 밖에 가지고 있지 않는 것들을 우상숭배의 증거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던 제2차 니케아 회의의 무식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다윗과 솔로몬이 마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상(像)을 세우고 그것들에게 예배하라고 명하기나 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모세의 의식들은 폐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의문(儀文)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참 신령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의 발등상에서 예배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직접, 그 절대 성품을 가지신 채 내려오신 게 아니라 발은 감추시고 발등상만 나타내셨다고 하나님을 중간 상태로 이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발이 머물러 있는 분이실 뿐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의 모든 충만한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찾아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도께서 내려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을 향해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본문 8절은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입니다.
하늘과 땅에 충만하여 계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이 새로운 거처에 들어오시도록 초대하는 것과 같은 표현은 어색하고 지나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외면적인 종교의 상징물들은 이와 같이 고상한 용어들로 표현되어 그것들에 영광을 부여해 줌으로서 그것들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연관되어 있음을 더욱 분명하게 해줍니다.
하나님이 중간 매개체를 설정치 않고 우리를 불러 직접 하늘과 교통하게 해주신다면 우리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간격 때문에 당황해 떨 것이요, 기도는 중단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것으로 자신의 위치를 바꾸신 것은 아니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감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 가운데 계시사 자신의 능력과 은혜의 가견적(可見的)인 상징이 있게 하기 위해서 언약궤로 옛 백성들 중에 내려오셨습니다.
따라서 하반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능을 언약궤와 관련해서 현저하게 나타내셨다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을 교회에 가르쳐 주고 있는 해석적 특징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언약궤는 “주의 권능의 궤”라고 불려져 단순히 죽어 움직이지 않는 표상에 불과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와 가까이 계심을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평안한 곳”을 우리는 시온산으로 봅니다.
하나님께서 나중에 오직 이곳에서만 경배를 받으셨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132 편
4. 본문 9절은 “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입고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 입니다
시인은 이제 앞 절과 밀접히 연결된 교회의 형통에 대한 일반적인 기도를 드림으로서 우리의 최대 관심사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 되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하나님께 향한 예배가 순결을 유지하게 되기를 바라는 기대를 말한다고 해석하고, 생각하기를 시인이 이 구절에서 제사장들이 자기들의 구별된 의복으로 비유된 거룩함으로 옷 입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과 문맥에 좀 더 유의해 볼 때 우리는 의견을 달리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의 기도로 여기는데, 곧 하나님의 의가 제사상들의 장식이 되어 모든 백성들에게 즐거움을 전달함으로서 그 백성 중에 나타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라는 말을 의의 열매 또는 결과들이라는 의미로 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요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들”이 먼저인 것은 정해진 교회의 질서로 볼 때 높은 지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는 제사장들이 자기들에게 위임된 마땅한 지유를 지키는 한편, 제사장들에게 나타난 이 의의 영광이 백성들에게도 임하기를 바라는 교회 전체에 해당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주와 도움으로 나타나셔서 자신의 능력으로 우리를 도우시며 보호하사 우리가 자기의 통치 아래서 보살핌의 대상임을 보여주실 때, 자신의 의로 우리를 옷 입히신다고 표현됩니다.
“즐거이” 라는 말은 복된 생활을 가리킴에 틀림없습니다.
이 두 말이 서로 연결된 점으로 보아 “의”라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통치하심을 의미함을 확신케 합니다.
이와 일치하는 사상을 “주의 제사장으로 구원을 입게 하시고” 에서 봅니다(대하6:41).
이 솔로몬의 엄숙한 기도에서 그는 의를 말하지 않고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왜 חסידים (하시딤 ; 긍휼한 자들)이라고 불리고 있는지 그 이유를 되풀이하여 말해 왔습니다.
이는 긍휼 또는 복이 우리를 가장 하나님을 닮아 가도록 만드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32 편
시132:10-12 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
본문은 다윗의 후계자를 축복해 주시기를 소원하는 부분입니다.
1. 본문 10절은 “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 주의 기름 받은 자의 얼굴을 물리치지 마옵소서”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의 상반절을 9절과 연결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하나로 되어 있음을 신자들은 첫눈에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시인이 말하려는 것을 해석하기 전에 만일 우리가 “주의 기름받은 자의 얼굴을 물리치지 마옵소서”라는 구절을 구속주에 대한 생각을 우리에게서 빼앗지 마소서라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억지 의미가 된다고 말하고자 하는데 이것은 타당합니다.
우리는 솔로몬의 기도에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왕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구하였음을 분명하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표현은 밧세바가 자기 아들 솔로몬을 위해 드렸던 기도에도 사용되었습니다.
“내 얼굴을 괄시하지 마소서”(왕상2:20). 이 말씀은 왕에게 자기를 왕 앞에서 내쫓지 말아 달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불쾌함을 드러내 보이는 것’ 과 같은 표현입니다.
우리는 이 사상을 한두 마디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구속주에 대한 말들을 달리 생각하는 것은 그럴듯하게 들려서 분별력이 적은 자들을 잘못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다윗이 온 백성들의 이름으로 드린 기도를 멸시하여 배척하지 말아 주실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다윗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구한 것은 다만 하나님께서 그와 더불어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특권이 있었기에 다윗은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똑같은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요컨대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사 다윗의 후손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라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모든 왕들이 교회를 위해 드려야 할 기도로 다윗이 그 기초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비유를 통해서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가 모든 백성들을 위해 중재하여 주실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시지도 않았고 자신을 희생하여 모든 사람들을 거룩함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시지도 않았기에 그 당시 백성들에게는 그들 생각 속에 이것들을 생각할 수 있기 위해 비유적인 중보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시편 132 편
2. 본문 11절은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치 아니하실지라 이르시기를 네 몸의 소생을 네 위에 둘지라” 입니다.
시인은 여기서 자기가 다윗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맺어주신 값없는 언약뿐이었음을 더욱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믿음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맹세로서 그 언약을 비준하셨다는 사실에 유의합니다.
시인은 독특한 단어들로 하나님께서 진실로 맹세하였다고 말함으로서, 거짓이 없이 선한 믿음 안에서 말씀하셨다고 함으로서 하나님은 약속을 어기실 수 없다고 합니다.
언약된 사실은 다윗으로부터 그 후손에게로 계승되었습니다.
그는 자녀들을 원치 않았으나 이미 그의 집안에는 숙명적 혼란이 파고들어 정상적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고, 자녀들은 서로 불화해 그 왕위를 파멸시킬 것이 분명했습니다.
솔로몬이 나타나기는 했으나, 이 언약은 계속 그의 혈통에 이어져 내려갔습니다.
이러한 계승은 온 교회의 복을 위한 것이지 다윗 한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사실을 확신함으로서 자기들 가운데 세워진 나라는 성별되었고 견고하게 유지될 것이라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왕과 백성들 모두 언약이 이 신적 기초 위에 서 있음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말로는 자기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통치한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교만으로 가득 차서 그 통치권이 자기들에게 속해 있는 것으로 여기며 얼마나 교만하게 행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또 그들은 얼마나 난폭하게 왕위를 빼앗으며 정상적으로 왕위를 계승한 것이 과연 몇 번이나 되는가?
그러므로 이 세상의 나라들과 다윗이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말씀을 받아 성별되어진 나라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3. 본문 12절은 “네 자손이 내 언약과 저희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저희 후손도 영원히 네 위에 앉으리라 하셨도다” 입니다.
보다 더 뚜렷한 증거가 후손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으로 왕위가 대대로 이어질 것이 지적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임금의 아들은 보통 세습적으로 왕위를 계승합니다.
그렇지만 다윗 왕국의 경우에는 확고부동하고 독특한 특권이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으로부터 단지 한 세대만이 아니라 영원히 그 왕위에 오르는 후손들에게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편 132 편
비록 그 나라가 얼마동안 멸망당해 있었으나 다시 회복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성취를 보았습니다. 여기서 문제점이 생깁니다.
즉 그 나라가 유지되는 것은 선한 행위나 인간의 공로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러한 말은 사람들이 신실하게 행하여 약속된 은혜를 순종함으로 누리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언약은 아무 필요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언약이 구주와 구속주를 보내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연관되는 한 완전히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언약 자체가 은혜로 약속을 받은 자들의 최초 선택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의 배반과 반역도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 주시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인생들의 선행(善行) 여하에 따라 행동에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는 공적 증거이었습니다.
바울은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3:3-4)라고 말함으로서 하나님은 자신이 값없이 은혜로 택하신 유대인들에게서 은혜를 거두어 가시지 않을 것을 암시했습니다.
우리도 역시, 백성들이 언약을 파하려고 의도적으로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의에 찬 대적을 자신의 놀라우신 사랑으로 대하사 자신의 진실하심과 신실하심을 가장 성공적인 방법으로 나타내신 것과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의 어떠한 공로와도 무관하게 확고부동함을 나타내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입장에서도 언약은 조건적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언약에는 부과된 하나의 조건이 덧붙여져 있었습니다.
즉 백성들이 계명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순종을 하지 않았기에 포로로 붙잡혀 갔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우리가 다른 곳에서 살펴보았던 것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을 취소하시고 파하신 것’ 처럼 보였습니다.
유대인들의 흩어짐은 일종의 언약의 파기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분에 국한된 것이요, 겉으로 보기에 그렇게 보일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다윗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일어났던 성경의 역사에 나타난 말씀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열지파의 변절로 국가는 큰 타격을 입었고 불과 소수만 남아있었습니다.
육체적인 곤경에 시달리던 국가는 마침내 뿌리째 뽑혀 나가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후 다윗의 왕위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이란 이름을 가진 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시편 132 편
스룹바벨이 받은 존경은 매우 불투명했고, 가짜 왕들이 일어났으나 모두 정통한 혈통에서 나온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이 폐기되었다고 말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로 그 근원에서 나오실 것으로 예언된 구속주가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위에 확고하고 안전하게 서 있다는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이런 의미로 에스겔 선지자는 면류관에 대해 “관을 제하며 면류관을 벗길지라 그대로 두지 못하리니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것이니라”(겔21:26) 고 말했습니다.
선지자는 이 구절에서 마치 하나님이 직접 그의 손으로 기록하신 것을 취소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의 언약을 파기하신 것처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레미야 애가를 보면(4:20) 백성들의 안전이 왕위와 직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가 저희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는 선지자가 면류관이 벗어졌다고 말했을 때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언약과 정면으로 맞서 말하는 것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곧 하반절에서 이어 ‘그 언약이 은혜로 주어진 것인 이상 영원한 것이요, 파기할 수 없는 것이라’ 고 말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은총에서 일시적으로 제외되었던 유대인들의 처사에도 불구하고 구속주의 약속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한편으로는 백성들에게 그들의 배은망덕함을 인하여 보응하심으로서 언약하여 주신 말씀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사람들의 조건에 따라 달려가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께 임하셨을 때 자기가 값없이 맺어 주신 약속을 은혜로서 성취하게 하시어서 그리스도의 머리에 면류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이 특별히 이 언약에 대한 순종이라고 언급된 것은 우리들이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것 속에서 하나님을 섬겨야만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132 편
시132:13-16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시온”은 선민국(選民國)을 말함인데, 그 선택된 백성이 받은 복은 선택(13절), 물질적 복(15절), 영적 복입니다(16절).
1. 본문 13절은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입니다.
시인은 제사장 직분과 성소의 예배를 왕국과 연결시킴으로서 그 나라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님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연결은 다른 이유를 들어 간과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나라의 진정한 힘과 안정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의 제사장 직분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왜 시온을 택했다고 말씀했는지 그 이유가 설명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으나 성도와 분명한 연결을 갖도록 하신 것은 장차 오실 중보자이시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제사장과 왕이 되시는 중보자를 더욱 자세하게 미리 예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국과 거룩한 언약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시68:16), 시온산을 택하신 것은 거기에 어떤 뛰어난 것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라는 이 선택의 이유를 유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시온산 그 자체의 어떤 장점과 대조되어 설명되었습니다.
또 다른 한 증거는 우리가 이미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기의 인자하심으로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셨다는 점입니다.
2. 본문 14절은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입니다.
이제 동일한 진리가 무게를 더하기 위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성전이 세워진 것은 헛된 일이 아니었다고 선포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처소에서 경배 받으시기를 즐겨하심을 효과적이고도 실제적인 증거로 보여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다 하나님에게서 쉬십시다.
시편 132 편
또 거처를 삼으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임재가 사람들에게는 능력으로 나타남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시온에 거하신다’ 는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율법의 명령대로 하나님을 섬김으로서 그 예배에 대한 복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자기들이 구했던 것에 대한 은혜로운 응답을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이 조금도 어긋남이 없다는 사실은 성전이 무너지고 제단이 넘어지며 모든 합법적인 예배가 끊어진 이후에 여호와의 영광이 다시 한번 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임재 하시자 매우 놀라운 방법으로 생생하게 나타났습니다.
유대인들이 악하고 수치스런 방법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은혜를 베푸시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마음이 교만해져 선지자들을 멸시하고 심지어는 잔인하게 핍박까지 했던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루터는 이 언약을 ‘피묻은 약속’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죄악으로 덮어 씌우고 있는 모든 위선자들처럼 악한 죄악의 충동을 받으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선지자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베풀어주신 특권을 빼앗아 갈 수 없다고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위선자들과 더불어 성전에서 그 영광을 빼앗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어리석다고 비난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헛된 생각에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은 무죄한 피를 흘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마귀가 거짓으로 찬란히 꾸민 것보다 더 뻔뻔스러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격렬하게 그리고 뻔뻔스러운 교만을 가지고 교회의 이름을 사칭하여 모든 종교를 난도질해 놓고 드러나게 하나님을 경멸하며 사람들을 극악무도하게 괴롭히고 있는지를 보고 있습니다. 그 결과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배우자인 교회를 버리시지 않는다면 성직자들이 어찌 다른 방법으로 넘어질 수 있단 말인가! 라고 그들은 변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명에 대한 논박은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교회는 한 장소에 제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제 여호와의 영광은 온 땅에 비춰졌습니다.
또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들이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선지자가 성전의 영원한 계속성에 대해 말씀한 것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강림은 ‘개혁의 세대’였고 구약의 비유들은 헛되이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보충되고 성취되었습니다.
아직도 여기서 시온산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거처라고 말씀된 사실을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온 세상이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시온산이 되었다고 대답해도 좋을 것입니다.
시편 132 편
3. 본문 15-16절은 “(15) 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양식으로 그 빈민을 만족케 하리로다 (16) 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으로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움 으로 외치리로다” 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 가운데 계신다는 것은 백성들의 복의 큰 원천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버지같이 나타내 주시는 관심의 증거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준비해 먹여주고 궁핍한 것을 해결해 주며, 제사장들에게는 구원으로 옷을 입혀 주고 모든 백성들에게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케 해 주시는 것 등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말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눈으로 보지 못하면 그 복을 깨닫기 위해 영적인 느낌을 일으키는데 부족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에서 하나님의 은총의 두 가지 점을 볼 수 있습니다.
땅이 비옥한 것은 우리에게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점과 땅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 생활을 윤택케 위해서 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양식을 공급해 주시기 위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실 것이라는 약속과 하나님의 백성들은 큰 부귀를 누리지 못한다 해도 가난으로도 만족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교황주의자들이 어리석게도 이 구절을 오해하여 이 세상에 아무 것도 먹지 못할 것은 없다는 터무니없는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들은 uictus 란 단어의 두 문자를 uidus 라고 한 문자로 복합시킨 다음 이 단어는 uiduas 가 와전된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추측합니다.
‘네가 네 과부들에게 복을 주리라!’ 그들은 “식료품” 대신 ‘과부들’을 사용합니다.
그들이 오늘날까지도 성전에서 이 말을 부르짖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것은 우리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중대한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백성들에게 양식의 복을 주시는 하나님은 백성들이 자기 마음에 도취되어 매사를 어리석은 환상과 농담으로 뒤섞어 버리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영감을 받은 저자는 계속해서 자기가 이미 말했던 여러 가지 복들을 ‘의’라는 말 대신 “구원”이라는 말만을 사용해서 되풀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 말한 대로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이 교리의 순결성과 생활의 거룩함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고 있으나 이 해석은 지나친 해석으로 여겨집니다.
시인은 단순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서 평안함과 복을 누리게 될 것을 의미하고 있을 뿐입니다.
시편 132 편
시132:17-18 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본문 말씀에서는 시온을 향한 하나님의 복, 곧 하나님의 총체적인 복이 선언됩니다.
1. 본문 17절은 “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내가 내 기름 부은 자를 위하여 등을 예비하였도다” 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나라의 상태로 되돌아 갑니다.
우리는 이 용어들이 특별한 강조형으로 되었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합니다.
“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에서 “뿔” 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세력’ 또는 ‘능력’을 의미하는 말로 매우 흔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뿔이 나는 것’은 그 나라의 보잘것 없었던 본래의 상태와 그 나라가 겪었던 거룩한 회복을 비유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하찮은 목동의 고된 생활과 평범한 목동에 불과했던 아버지의 막내 아들로 살던 보잘것없는 시골집에서 택함 받아 보좌에 올랐고 예기치 않게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여로보암 시대에 나라는 또다시 심각하게 잘려 나갈 조짐이 보였기에 나라가 적절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대대로 계속해서 뿔이 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새 뿔이 나지 않았다면 망할 수밖에 없는 여러 일들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러지고 구부러진 다윗의 뿔이 새롭게 돋아나도록 하시지 않았더라면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됐을 때에 그들에게 임한 결과는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이사야 선지자가 그리스도를 다 자란 나무에서 나온 막대기가 아니라 그루터기에서 나온 나무로 비유한 것은 이런 사상을 안중에 둔 것이 사실입니다(사11:1)
스가랴 선지자가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6:12)라고 한 예언은 오직 이 방법을 통해서만이 잘리고 황폐된 국가의 권위와 세력이 회복될 수 있었음을 가리킵니다.
사무엘하23장 5절에서 다윗은 이 시편의 본문에 나오는 말씀들을 사용했으나 그 의미를 약간 달리하여 나라가 계속해서 더 나은 수준으로 번영해 갈 사실을 의미했습니다.
여기서 성경 말씀의 저자는 단순히 하나님이 지난날에 다윗의 후손들을 꺾으시고 시들게 하셨던 바로 그때 다윗의 뿔이 다시 소생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말할 따름입니다.
본문 17절 끝에 “등” 이라는 말도 같은 내용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등”은 백성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했던 비유로 성경 여러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나라가 때대로 암흑가운데 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등불은 항상 타오르고 있어서 여호와의 백성들에게 안전함을 가까이서 비춰주기에 넘어뜨리려는 환난에서도 나라가 결코 완전히 패망 당하지는 않는다는 하나님의 확고하신 “뜻” 입니다
시편 132 편
당시에 빛을 비추어 준 것은 예루살렘에서 가물거리며 타오른 등불 뿐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의의 태양이 되시는 그리스도는 온 세상에 충만하게 비추고 계십니다.
2. 본문 18절은 “내가 저의 원수에게는 수치를 입히고 저에게는 면류관이 빛나게 하리라 하셨도다” 입니다.
제사장들은 앞에서 ‘의와 구원으로 옷 입고 있다’ 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다윗의 원수들이 ‘수치를 입었다’ 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내적으로 잘 조화를 이루기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밖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많은 위험과 죄악에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우리는 하반절에 나오는 약속하나만으로도 우리가 형통할 때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복들보다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종종 깨닫고 있습니다.
원수들에게 공격을 당할까봐 두려움에 사로 잡힐수록 우리는 더 민감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붙들게 됩니다.
이 구절은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단이 신자들을 멸망시키고자 하여 일으키는 다양한 원수들의 공격을 완전하게 피할 수 있는 정도의 평안은 이 땅에서는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권세로 말미암아 그 원수들의 모든 계획들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며 마침내는 무지와 수치로 물러가고 말게 된다는 말씀은 실로 지당하신 표현입니다.
하반절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는데 “빛나게” 로 번역한 동사는 히필(Hiphil) 동사형으로 때때로 ‘보다’ 는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뿔이 돋아나게 될 때 그곳에서 다윗의 면류관이 나타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단어가 ציץ (치츠 ; 금그릇)에서 나왔다고 보고, 시인은 왕의 면류관이 금붙이로 다시 찬란하게 될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여기서 면류관이 ‘빛난다’는 말씀은 마치 앞에서 뿔이 돋아나는 것으로 비유한 것과 똑같다고 여겨집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에브라임의 술에 빠진 면류관을 가리켜 화관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다윗의 면류관이 그의 후손들에게서 아무리 연약한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할지라도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생기를 얻어 영원히 빛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시133:1-3 형제가 연합하여
“형제” 라는 말이 같은 조상에게서 나온 후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형제”라는 말은 같은 공동체에 속한 자, 같은 거룩한 종교를 고백한 자, 같은 조직 안에서 한 왕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언급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본 시편은 온 나라가 거룩하게 하나가 된 것을 기뻐하며 찬송합니다.
주의 백성들이 계속 그러한 일치를 지속할 것이 열렬히 권면되는 감사 찬송입니다.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 본문 1절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입니다.
1) 우리는 다윗이 이 시에서 나라가 오랫동안 침울했던 혼란과 분열의 상태에서 벗어나 평화롭고 화목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여 찬송을 드리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또 우리는 아울러 모든 사람들에게 화평을 지키도록 힘쓰라고 권면한다고 확신합니다.
이 문제는 시가 짧다고 해서 사소하게 생각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최상의 용어들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송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심히 비통하게 나뉘어졌던 백성들이 하나로 연합된 사실에 있었습니다.
다윗이 처음에 왕위에 올랐을 때는 태반이 넘는 백성들이 그를 공공의 유익에 대한 원수로 여기고 그를 가까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실로 불화가 존재한 것은 너무도 치명적이어서 반대파를 파멸시키지 않고서는 평화의 전망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기게 했습니다.
백성들이 충심에서부터 화합하기를 가장 격렬하게 거절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손이 기이하고 전혀 예기치 못했던 방법으로 나타나서 백성들을 서로 화합하도록 하셨습니다. 주석가들은 불행하게도 이 시가 말하고 있는 이 특수한 상황을 간과해 버립니다.
그리고 다윗은 어떤 특별한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단지 형제간의 연합만을 일반적으로 말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시편 133 편
한글 성경말씀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시편의 처음 부분에 있는 ‘보라!’ 라는 말씀은 특별한 표현으로 우리 눈앞에 사물의 상태를 생생하게 보여줄 뿐 아니라 평화의 기쁨과 나라가 거의 두 쪽으로 갈라졌을 때의 사회적 상황과를 암암리에 대조시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고상한 말로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이를테면 유대인들은 백성들을 파멸로 빠져들게 만드는 내부의 불화를 오랫동안 체험함으로서 연합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배웠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 끝에 나오는 נם(감)이란 말은 이 사실을 한층 더 분명하게 나타내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오해하고 이 말씀은 단순한 접속사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문맥을 강조하기 위해서 덧붙여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시인이 말하려는 의미는 곧 “나면서부터 형제인 우리가 서로 나뉘었던 것이 피차에 외적(外敵)에게 당하는 아픔보다 더 쓰라린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형제간에 마음이 일치하게 되었으므로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입니다.
2) 동시에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 구절에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 있어야 할 상호간의 화목을 유지토록 하여 우리에게 이 화목을 지키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라고 권면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증오심이 우리사이를 갈라놓고 질투심이 우리 속에 침투해 들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일반적 관계에서 형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어그러지고 제외된 사람이 남아 있는 한 하나가 되었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성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차간의 화목과 우애하는 사랑으로 그 연합을 입증해야 합니다.
교황주의자들이 전에 자기들이 배신하고 돌아섰던 거룩한 연합으로 되돌아오는 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되어진다면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도록 부르심을 받음과 아울러 기쁨으로 자신을 여호와께 굴복시키듯 모든 자들을 형제같이 포용케 된다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마귀들이 쉬지 않고 교회 안에서 일으키려고 하는 요란한 영들과 대립하는 한편 가르침과 인도하심을 받아들이는 성품을 부지런히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의로 죄를 범하는 자들과는 이런 교제를 유지해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들을 형제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만유의 아버지이시요 모든 영적 관계를 생성케 하시는 성부와의 관계를 두절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말하고 있는 화평은 참된 머리에서부터 시작한 것으로 우리를 대적하여 교황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근거 없는 구분과 분파를 논박하기에 매우 충분합니다.
시편 133 편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교황주의자들이 어떻게 하든지 거룩한 연합을 묶어 주는 유일한 끈인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우리와 더불어 융화되기를 바란다는 기대를 가짐에 있어서 이에 대한 우리의 열정을 충분히 보여 주었습니다.
2. 본문 2-3절은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형제들간의 진정한 연합이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말하고 있으며 이것은 모든 사람들로 하나님을 순전하게 예배하며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분명한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종교가 항상 무엇보다도 가장 우선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해 온 것이 아니었다면 이 비유는 거룩한 기름 부음에서 빌어 왔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속에 있는 연합이 하나님을 기쁨으로 예배하는 끈으로 묶여 있지 않다면 아무런 의의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이 상호간의 사랑으로 연합할 때에는 피차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 머물기 위한 것으로 최대 목표를 삼아야 한다고 봅니다.
만일 이 점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비싼 댓가를 지불하고 평화를 사는 것보다는 그들과 강력하게 대치하는 쪽이 더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제사장에 관한 말씀 속에 사람들이 서로 일치하는 것은 순수하고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에서부터 일어난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또 “수염” 과 “옷깃”이라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평화가 모든 교회 구석구석까지 퍼져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고 해석하게 합니다.
시온과 헐몬산의 “이슬”이라는 비유는 거룩한 연합이 하나님 앞에서 열납될 수 있는 것일 뿐 아니라 이슬이 땅을 적시어 수분과 생기를 공급하듯이 선한 열매를 맺게 해주는 것인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모세가 유대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유대 땅은 애굽처럼 강이 범람함으로 말미암는 비옥한 땅을 이루지 못하고 매일 하늘에서 내리는 물만을 마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신11:11).
다윗은 형제간에 화목이 없으면 인생살이가 메마르고 무익하며 처참하게 될 것을 암시합니다.
시편 133 편
헐몬산은 목축하기 이름난 산들 중에 가장 부요하고 풍성한 산입니다.
산들은 본래 그 비옥함을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에 의존합니다.
시온산의 경우에서도 이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끝으로 하나님께서는 평화가 깃드는 곳에 복을 명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사 서로 화목케 하시는 방법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기쁨을 누리고 계신지를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께서도 같은 내용을 다른 말로 “마음을 같이하여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후13:11, 빌4:9)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형제간의 화목을 유지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도록 하십시다. 심지어는 우리와 의견을 달리하는 자들에게까지도 손을 뻗쳐서 그들이 믿음으로 돌아와 연합할 수만 있다면 그들과도 화목하도록 하십시다.
그들이 이것을 거절하는가? 그렇다면 내버려 두십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 아래 거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면 형제 우애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