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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명은 집중해야 합니다
성경본문 : 느헤미야 6: 1-19
이일기 목사
B. C 722년 경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그리고 남 유다는 B. C 586년 경 바벨론에게 각각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 때 수많은 지도자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는데 그들은 바벨론 제국이 무너지고 페르시아(바사) 제국이 건설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살고 있었습니다.
포로로 끌러간 사람 가운데는 그곳에서 관리로서 높은 벼슬까지 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다니엘과 스룹바벨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느헤미야 같은 사람입니다.
이후 70년 만에 포로에서 풀려나기는 했지만 나라가 자주(自主)를 되찾은 것이 아니라 단지 포로에서 귀환한 것 뿐입니다.
이들은 세 번에 걸쳐서 돌아왔는데 성경 에스라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돌아온 사람들의 일을 기록하고 있고 오늘 말씀의 느헤미야는 제 3차로 귀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타국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의 직책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는 다 훗날 이스라엘의 재건을 위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 제국의 관원장이라면 대단한 권한을 지닌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 느헤미야가 고국 이스라엘의 황폐의 소식을 동생 하나니로부터 듣고는 왕에게 윤허를 받아 총독의 직책을 받고 일시적으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귀환에서는 성전건축,
두 번째는 신앙부흥,
세 번째는 느헤미야를 필두로 하여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입니다만 느헤미야가 고국에 돌아 왔을 때 이스라엘의 모습은 가난과 황폐, 비참함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성벽 공사를 52일 만에 마쳤는데 그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하여 그 큰 공사를 마치게 되었는지를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느헤미야는 무너진 성벽 재건을 비전을 품고 추진하였습니다.
느 01:0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 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궁에 있더니 02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03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 지라.“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B. C 445) 기슬르월(11월 중순~12월 중순)에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은 소화(燒火)되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느헤미야는 이 기막힌 소식을 듣고는 수일동안 슬픔으로 하나님 앞에 금식기도를 하였습니다.
0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때 느헤미야는 가슴에 한 가지 소원을 품게 되었는데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고국으로 돌아가서 무너져 내린 성벽을 다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11절)
비전이란 하나님께서 보는 것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미리 볼 줄 아는 통찰력 아니겠습니까?
지금 사람들은 무너져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벽만 바라보고 있지만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신다면 단시간 내에 다시 아름답게 세워질 예루살렘 성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고국으로 돌아와 먼저 동족들에게 이제 우리도 조국을 건설하여 잘 살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비록 70년의 포로 생활이 고통스러운 세월이었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고 구원의 언약이 있음을 기억하고 믿음의 자리에 굳게 서라는 꿈입니다.
비전은, 꿈은, 건강한 생각은 우리를 적극적인 사람으로, 일하는 사람으로, 성공적인 자리로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 되는 줄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잠 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느헤미야는 현 시점에서 볼 때 근 150여년 가까이 무너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들에 직면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세우려 하자 당장 많은 반대 세력이 있었고, 또 내부적으로도 많은 문제들이 속속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성벽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설명하며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열정을 가지고 일을 추진하여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처음 성벽 쌓기를 시작했을 때는 모두가 신이 나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만 중간쯤 성벽을 쌓게 되자 아직도 남아 있는 흙무더기를 바라보면서 낙심에 빠지게 됩니다.
느 04:06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락되고 고가 절반에 미쳤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역사하였음이니라.”
10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담부하는 자의 힘이 쇠하였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성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현재 우리의 눈에 보이는 미약한 모습만 보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미래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이루어지게 될 놀라운 일들을 영적인 안목으로 보아야지 세상의 수준으로, 세상의 마음으로 보면 자칫 믿음이 시험 들기 쉬운 법입니다.
갈 06:0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미리 바라볼 수 있는 비전을 가지십시오. 현재의 우리 교회의 모습만 보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헌신하게 됨으로 인해 우리 앞에 현실로 다가오게 될 축복들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일은 열정으로 하여야지 열정 없이 마지못해 하다보면 그만 낙심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에는 방해꾼들이 등장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모두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하여 전력 집중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옛말에 호사다마라 했던가요?
이스라엘 주변에는 강한 나라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그들이 성벽을 쌓는 일 즉 국가 재건을 위한 일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한 손에는 병기를 들고 적을 경계하면서 또 한 손에는 연장을 들고 열심히 공사 마무리를 향해 나갔습니다.
느 04:16 “그 때로부터 내 종자의 절반은 역사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17 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 하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18 건축하는 자는 각각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공히 따르는 어려움이지만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있어서 어둠의 방해는 서서히 가중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성벽을 쌓는 공사가 결국은 다 끝나고 이제 성문만 만들어 달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는 시점까지 왔습니다.
성문만 달면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안전장치가 마련되어지는 셈인데 이 막바지의 성문을 다는 마지막 순간이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항상 일이 실패하는 것을 원하며 특히 막바지에서 시험을 많이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고비를 믿음으로 잘 넘겨야 되겠지요. 같이 01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01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대적이 내가 성을 건축하여 그 퇴락한 곳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라.”
이방 족속의 지도자들 즉 일의 방해꾼들은 이렇게 빨리 공사가 진행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기에 당황해하면서 은근한 방법으로 걸림돌을 놓습니다.
음모와(01~04), 모함(05~09)과, 공갈 협박(10~14)의 걸림돌에도 느헤미야가 전혀 요동을 하지 앉자 마지막에는 암살까지 하려는 걸림돌을 동원합니다. 방해꾼의 이름을 봅시다.
산발랏.
애굽 남부 지역인 엘레판틴(Elephantine)에서 발굴 된 문서에 의하면 산발랏은 사마리아의 총독으로 언급되는 인물입니다.
그의 두 아들과 함께 언급되고 있는데 두 아들의 이름에 공통적으로 여호와를 뜻하는 어미(語尾)가 달려 있고, 그리고 유대의 대제사장 가문과 깊은 친교를 맺고 있었다는 점(13:28)에서 볼 때 나름대로 여호와를 섬겼던 자로 추측됩니다(Fensham).
그러나 이들의 종교는 지극히 혼합주의적이었기 때문에(스 04:01, 02) 순수한 여호와 신앙을 지녔던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서 용납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도비야.
02:10절에 의하면 산발랏의 종 되었던 암몬이라고 소개되는 것을 보아 사마리아의 총독 산발랏의 휘하에 있던 인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대제사장과 친밀하게 연락하는 사이였던 것으로 보아 자신을 여호와를 섬기는 자로 자처하고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13:04).
게셈.
아라비아 사람으로 소개되는데(02:19) 아라비아는 앗수르 시대부터 페르시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요단 동부 지역의 지배 계급이었습니다.
게셈이라는 이름은 애굽땅에서 발견된 B. C 5세기말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은그릇에 그 아들 카이누(Qaynu)와 함께 여신 한-일라트(Han-ilat)에게 헌신한 자로서 새겨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람어 비문에서는 게달의 왕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사실을 통해 볼 때 게셈은 요단 동쪽 및 남쪽 지역을 다스리던 자로 추정됩니다.
나머지 우리의 대적.
이들은 산발랏에 동조하여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방해하던 또 다른 자들인데 구체적으로는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04:07). 그러면 이들이 느헤미야에게 어떠한 방해를 하고 있습니까?
02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코자 함이라.”
01절에 의하면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라고 했는데 보통 문짝은 건축 공사에서 마지막 시점에서 달게 되는 일 아닙니까? 그렇다면 본 문구는 성벽 공사가 전반적으로 완료되기 직전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02절에 보면 산발랏과 게셈이(도비야는 지도자 아니라 제외) 오노 평지 한 촌에서 느헤미야를 만나자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오노는 예루살렘 북서쪽 약 32.4km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서 이곳은 그 당시로서는 사마리아와 아스돗 사이의 중립 지대로서(A. Alt) 완전한 이스라엘 영역이 아닙니다.
바로 이 같은 점을 감안한다면 산발랏 일당이 느헤미야와의 면담 장소로 오노(계곡) 평지의 한 시골 마을로 택한 것은 느헤미야를 이스라엘 영토 밖으로 꾀어내어 살해하려는 음모에 따른 것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방해꾼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루살렘에 성문을 달지 못하도록 방해공작을 펼치고 암살의 음모를 꾸미면서도 겉으로는 평화회담을 하자는 겁니다.
평화회담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느헤미야여, 당신이 이겼소. 앞전까지 우리는 당신이 예루살렘 성벽 쌓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다 의견의 차이가 아니겠소?
그러나 이제는 과거는 잊어버리고 앞으로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친목을 도모하고 서로 협력할 것은 협력하면서 삽시다라는 회담입니다. 위장평화 회담인 것이지요.
느헤미야가 누구입니까?
영적인 분별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으로서 산발랏의 제안이 진정한 평화를 위한 초청이 아니라 자신을 살해하려는 음모인 것을 능히 간파할 줄 아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외딴 곳으로 자신을 나오라는 대적들의 제안에 어떤 흑막이 숨겨져 있었음을 즉각 눈치 채고는 실상은 나를 해코자 함이라고 규정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한 믿음과 한 소망을 가진 사람들과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신앙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과는 함께 주님의 일을 하기 힘듭니다. 사단은 광명의 천사로 우리 가운데 찾아와서 주님의 사역을 훼방하고 중단시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3. 방해꾼들은 집요한 걸림돌을 놓고 있습니다.
산발랏과 그의 동조자들은 일차로 음모를 꾸며놓고 느헤미야에게 네 번이나 오노 평야로 오라고 편지를 보내었으나 그때마다 거절을 당했습니다(04).
⑴그러자 그들은 이제 느헤미야에게 중상모략의 협박 편지를 보내는데 05~07절을 읽어 봅시다.
05 산발랏이 다섯 번째는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들려 내게 보내었는데 06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네가 유다 사람들로 더불어 모반하려 하여 성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하는 도다
07 또 네가 선지자를 세워 예루살렘에서 너를 들어 선전하기를 유다에 왕이 있다 하게 하였으니 이 말이 왕에게 들릴 지라 그런즉 너는 이제 오라 함께 의논하자 하였기로.“
산발랏 일당의 공갈협박 편지를 보십시오. 다섯 번째는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들려 느헤미야에게 보내었다고 했습니다(05절)
그 귀중한 편지를 이번에는 봉하지도 않고 전달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달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이 좀 읽어보고 그 입을 통해 소문이 퍼져 나가도록 교묘한 중상모략을, 유언비어(流言蜚語)를 날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①첫째, 너와 유대인들은 반란을 일으키려고 성벽을 재건한다는 소문이 이웃나라에 퍼져 있다.
②둘째, 너는 유대인의 왕이 되려고 성벽을 중수한다는 소문이 있으며 네가 너를 왕으로 선전할 선지자들을 임명하였다.
③셋째, 페르시아의 황제가 이 소문을 듣게 될 것이니 이제라도 우리가 조용히 만나서 이야기 하자는 것입니다.
편지를 본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①처음에는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는가?
②아니야 그럴지도 모른다.
③그럴 수도 있을 거야.
④그러다가 나중에는 다들 그렇게 말하던걸, 맞아 확실해 하는 과정으로 변하게 됩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여러분, 혹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소리를 듣거나 오해를 받았을 때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십시오. 예수님도 오해받고 죽지 않았습니까?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하죠. 만약 이러한 소식이 왕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진실유무를 떠나서 느헤미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페르시아 왕국으로 가야 합니다.
결국은 이러한 루머에 의해 느헤미야가 자리를 비우게 되면 중단된 성벽 역사와 더불어 기회만 엿보던 산발랏과 도비야는 감언이설을 통해 이스라엘을 자기들의 휘하에 넣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간교한 방법이 아닐 수 없고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마귀의 전략이 성공하는 것과 같은 순간입니다. 사실 중상모략과 비방을 받으면 너무나 억울해서 사람들을 만나 직접 해명하고 싶은 게 사람입니다만 그러나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 않아요.
중상모략은 본래는 약간 삐딱하게 이야기를 흘리기 때문에 사람들 입을 통해 이야기가 전해질수록 눈 덩이처럼 불어나 나중에는 기정사실화처럼 되어버립니다.
소문의 근원을 추적해 들어가다 처음에 얘기를 시작했던 사람을 붙들고 물어보면 그런 이야기한 적 없다고 발뺌하는 것 잘 알지요.
이러한 작전에 말려들 필요가 없습니다. 이럴 때 영적인 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느헤미야는 산발랏과 도비야의 물음에 당신들이 지어낸 것이지 내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분명하게 대답한 후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문제를 풀어나갑니다.
08 “내가 보내어 저에게 이르기를 너의 말한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 하였나니.”
사람의 문제는 사람이 풀 수 없고, 특히 중상모략 하는 사람은 더욱 감당할 수 없고, 머리 좋은 사람들이 이 전략을 쓰면 정말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해결해 주셔야만 합니다. 신앙인들은 이런 일을 당할 때에 더 이상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시간 끌기보다는 아닌 것은 아니라고 밝히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해결책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중상모략에 대비하여 세워놓은 원칙이 있다고 합니다.
①첫째 원칙은 이것이 사실인가?
②둘째 원칙은 본인에게 확인했는가?
③셋째 원칙은 만약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 이야기가 퍼졌을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내 형제에게도 유익한가 하는 것입니다.
엡 0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 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⑵산발랏과 도비야는 종교적인 문제로 회유와 협박을 하고 있습니다(10~14).
종교적인 방법으로 다른 사람을 통하여 은근한 미혹과 협박을 하고 있는데(10~14절) 거짓 선지자 스마야를 통하여 하는 말을 들어 볼까요?
10 “이 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하기로 내가 그 집에 가니 저가 이르기를 저희가 너를 죽이러 올 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있고 그 문을 닫자 저희가 필연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하기로.”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해석을 하겠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산발랏에 동조하는 상류층의 사람들이 더러 있었는데 그 중에 스마야라고 하는 제사장 겸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는 산발랏의 사주를 받고는 자기 집에 은거하면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는 것처럼 위장을 하고 있을 때 느헤미야가 제사장에게 무슨 변고가 있는가보다 하고 그의 집을 방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스마야가 예언하기를 느헤미야여, 당신이 오늘 밤 산발랏이 보낸 자객에 의하여 공격을 당할 것 같습니다. 성전으로 피하십시오. 내가 친히 동행할 터이니 염려 말고 성전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나와 함께 기도합시다 라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러자 느헤미야가 대답합니다.
11 “내가 이르기를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고.”
하나님의 성전 안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제사장들만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지성소는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번씩 들어갈 수가 있도록 되어 있고요. 그런데 이 법칙을 어기고 유다 왕국의 웃시야 왕이 함부로 성소에 들어갔다가 문둥병에 걸리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유다의 총독으로 백성을 보호할 책임이 있는데 어찌 그 책임을 완수치 못하고 자기 신변안전을 위해 도망갈 수가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합니다.
또한 나는 정치 지도자이지 제사장이 아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면서 성소에 들어가 숨겠느냐 라고 스마야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가 주신 말씀에 어긋나는 모순 된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스마야가 받았다는 계시도 율법에 어긋남으로 거짓된 예언을 한다는 것을 이내 간파했던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자기의 일을 반드시 이루게 하십니다.
느헤미야는 순수한 동기와 조금도 요동하지 않는 열정을 가지고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려 했을 때 백성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아십니까?
02:18 “또 저희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고하였더니 저희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그 동안 허물어진 예루살렘 성벽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던 백성들이 모두 다 헌신하면서 함께 희생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저들의 생애에 영원히 남을 가치 있는 일을 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할렐루야.
모두가 신이 나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만 중간쯤 가서는 여러 가지 악 조건들이 따르자 중단하자고 하는 소리와 함께 포기자하는 소리까지도 나왔습니다(04:10).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 귀한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갈 때 하나님께서 친히 도와주셨습니다.
16 “우리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하였으니 이는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주위의 끊임없는 음모와 중상모략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격려하며 성벽을 쌓기 시작한지 아주 짧은 기간 52일 만에 모든 공사를 다 이루었습니다.
그리고는 느헤미야는 내가 이 일을 이루었다고 하지 않고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어떻게 이러한 놀라운 일을 행할 수가 있었습니까? 무엇보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 안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음을 우리 자신이 먼저 압니다. 느헤미야서를 읽으면 그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그 분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 능력으로 일을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슥 04:0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지금 느헤미야는 이 역사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간섭으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어떤 큰일을 이루게 되면 내가 했다라고 자기가 행한 일을 자랑하면서 교만해지기 쉽지요. 하나님은 자신이 행한 일에 들러리로 세우면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느헤미야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자랑하였고 그 분께만 모든 영광을 돌렸습니다.
참으로 멋있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곳에 신앙의 초점을 맞추면서 살았던 겸손한 사람입니다.
눅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성벽 공사가 마침내 52일 만에 완성되었습니다만 그렇다고 원수들의 공격이 다 멈춰진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17~19절에서 보게 됩니다.
도비야는 느헤미야를 끝까지 괴롭혔던 사람으로서(04:03) 계속해서 느헤미야를 공격하는데 이번에는 유대의 지도층 인사들과 사돈 관계를 맺고 그 영향력으로 느헤미야를 공격합니다.
19 “저희들이 도비야의 선행을 내 앞에 말하고 또 나의 말도 저에게 전하매 도비야가 항상 내게 편지하여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하였느니라.”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에게도 어려운 일은 늘 붙어 다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적 긴장을 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도 알렉산더 같은 사람에게 얼마나 큰 고난과 고통을 당하였습니까?
딤후 04:14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도비야의 권모술수로 인하여 느헤미야는 더욱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게 되었고 영적 긴장을 풀지 않음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영적 부흥의 기초를 놓는 일을 잘 행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때로는 우리의 삶에 원치 않는 고통의 현장이 있지만 하나님의 프로그램에서 보면 다 유익하게 하는 일이라고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는 그 분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일 축복 된 일을 우리를 통하여서 능히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09 “이는 저희가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저희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정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
그는 헛소문에 연연하며 시달리는 대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런 경우를 당하고 있다면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가 십자가에 죽는 순간, 악이 선을 이기는 듯 했고 거짓이 진실을 덮는 듯 했으나 그러나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느헤미야는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나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내 손을 힘있게 하셔서 사명을 이룰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신앙과 인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체면이나 명성에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항상 자기가 관심이 하나님이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사명의 길을 가는데 가장 큰 방해 세력은 나 자신입니다. 내 자존심 내 고집 내 체면 내 이익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방해를 받습니다.
거짓 소문에 연연하는 것은 내가 중요하기 때문이요 사람들이 주는 평판과 칭찬이 하나님의 평가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명 자의 길을 가려면 나를 극복해야 하고 나에게서 벗어나야 합니다.
요일 04:0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불가능해 보이던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52일 만에 끝났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완성하는데 긴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천하의 과학자들과 의사들이 다 달라붙어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하나님이 한 번만 나를 어루만져 주시면, 도와주시면, 놀라운 은혜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