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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부르시는 주님(27-30)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류 역사를 바뀌어 놓은 사건입니다. 개인의 인생에서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후의 차이가 있듯이, 예수님 초림 사건은 새 시대를 열어준 사건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서도 예수님께서 초림하신 것은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먼저 죄인들을 찾아오섰습니다.
27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27-32)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치료하셨고, 다음에 중풍병자를 치유하시면서는 자신이 죄를 사하려 오신 인자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이제 본문은 그보다 한발 더 나가십니다. 죄만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과 거리감 없이 ‘식탁교제’를 하신 것으로 표현하십니다. ‘식탁교제’를 하신 것은 사회적은 교제의 차원을 넘어 구원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베푸는 구원의 잔치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세 가지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1) 죄인을 부르신 예수님(27-28)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찾아가셨습니다. 세관은 통행세를 받기 위한 장소입니다. 레위는 그 자리에서 통행세를 걷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제법 괜찮은 직업이었겠지만,
죄인이 주님을 찾기 전에 주님이 먼저 찾아가서 불러줍니다. 갈릴리 어부도 부르시지만, 돈 많은 세리도 부르십니다. 세리로서 레위에게는 두 가지 마음에 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로마 정부를 위하여 일하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유대 민족에 반하는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둘째는 당시 세리 직업은 세금을 과다하게 징수하여 남은 이익을 은익 하였습니다. 따라서 백성을 속이고 착취하는데 한몫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레위를 보시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도 레위의 반응도 간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나를 좇으라!’고 부르십니다(27). 이 명령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 사용하신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로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은 4복음서가 공동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리였던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앉아 있다가 일어서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세리의 직업을 그만둔다는 것은 엄청난 희생입니다. 그 동안 생명처럼 여겼던 부와 재산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게네사렛 호수에서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눅 5:1-11). 앞을 보지 못했던 맹인도 눈을 뜨자 예수님을 따랐습니다(요 9:1-7).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따른 것은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는 강한 결단을 나타냅니다. 부정하게 벌었던 재물뿐 아니라 민족을 배반하고 사람들을 속였던 자신의 탐욕도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를 때는 무한한 자유를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다른 것으로 채움을 얻기 위해서 있습니다. 복음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자유가 가득 채웁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레위가 보인 행위는 참 회개의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2절에서 레위를 부르신 사건을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으로 설명하십니다. 그러므로 레위에게 있어서 회개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명예와 소유를 버렸던 것입니다(27,32). 이것이 바로 삶의 방향을 예수님께로 재설정한 자의 태도입니다. 레위를 부르신 장면과 이어지는 논쟁은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신 사실에 초점을 맞춥니다. 누가는 유대교의 전통에서 레위가 얼마나 부정한 죄인이었고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신 사건이 얼마나 심각한 행위인지 강조합니다.
(2) 부르심에 합당한 반응(29-32)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은 레위는 무척 기뻤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집에서 친구 세리들과 많은 다른 사람들도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29). 예수님을 만난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를 말해 줍니다. 아마도 이 세리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큰 자유함을 누렸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중요한 특성 중 하나는 잔치와 비슷합니다.
현장에는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유대교의 규례를 준수하는지 조사하기 위해 와 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문제를 비난합니다(30).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비난을 받았다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예수님께서 비난을 받은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식사는 언약 식사이므로 거룩한 자들과 정결한 음식을 나눠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부정한 자들과 그들로 인해 부정하게 된 음식을 나눕니다. 바리새인들의 시각에서 세리들은 언약 공동체 밖의 사람들이고 제의적으로 부정한 자들이므로 이들과 식탁을 함께 나누는 것은 부정한 자들과 의인들의 경계를 허무는 행위다. 거룩한 식사 전통에 대한 도전은 유대교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환자와 의사의 비유를 들어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비판하십니다. 병자에게는 그 병을 고칠 의사가 필요하듯이 죄인에게는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사는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에게 필요합니다(31).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습니다(32).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판하는 근본 이유는 그가 죄인을 환대하는 데 있습니다(5:27-32; 7:28,30,34,36-50;15:1-2;19:7). 의인을 있겠습니까? 의인은 없고,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롬 3:23). 따라서 이곳에서 의인은 자신의 의를 주장하며 예수님께서 도무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부르심을 응답하면 죄를 해결하며 온전하게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회개할 기회를 잃고 완전하게 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 죄인들과의 접촉을 피하려 하였습니다. 죄인과 접촉하지 않으면 자신의 거룩이 유지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접촉하여 죄인과 접촉하여 그 죄를 거룩하게 만드셨습니다.
비유로 자신의 행위가 왜 정당한지 변증하시는데 본 단락에서도 의사가 환자에게 필요하다는 상식으로 세리들과 죄인들을 환대하는 근거를 제시하십니다. 15장의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 탕자를 용서하는 아버지의 비유, 18:9-14에 있는 바리새인의 기도, 19:1-10에 나오는 삭개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죄인들이야말로 복음이 필요한 가난한 자들에 해당하며(4:18-19) 회개로 치유 받아야 할 환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사를 찾아오지 못하는 환자를 찾아다니십니다. 단순히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입니다(15:7;19:10). 예수님께서는 한 병자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찾아오셨습니다. 사회적으로 용인하기 힘든 죄인이 회개하고 거룩한 공동체에 들어오는 일은 언제나 논쟁거리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사랑으로 알고 예수님의 사명을 긍휼의 사역으로 믿는 사람들도 심각한 죄인한 사람이 회개할 때 현실적으로 그런 사람을 수용하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교회는 죄인을 환대하고 치유하는 사명을 다른 어떤 사역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여겨야 합니다.
세리는 로마 정권에 앞잡이로서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둔 사람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자기의 이익을 얻기 위해 자기 동족 유대인들에게 로마에서 요구하는 이상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그 중에 일부를 자신들이 착복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리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예수님을 위해 자기 집에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금식과 혼인잔치 비유(33-35)
익숙한 옛 것에 취해 예수님과 함께 찾아온 은혜와 사죄의 시대를 외면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새로운 감동으로 우리를 만나 교제하기 원하시는데, 우리는 자신에게 익숙한 신념이나 교리나 전통에 매여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져온 것은 소수를 위한 특권적인 혜택이 아니라, 신분과 계급, 성과 나이, 민족과 나라를 뛰어넘어 모두에게 구언을 주는 새로운 시대입니다.
33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33-35)
제자들에게 질문했던 바리새인들은 이제 두 번째 이의를 제기합니다. 첫 번째는 죄인과 교제하는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이의 제기는 금식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경건한 제자라면 금식하고 기도하는데 중심해야지, 왜 그렇게 잔치를 좋아하고 먹고 마시냐고 따집니다.
바리새인들은 정기적으로 금식과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세례 요한도 자신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제자들과는 다르게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는 것을 지적합니다(33).
예수님께서는 결혼 잔치의 예로 설명하십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십니다(34). 혼인집 손님들은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하지 않습니다. 당시 결혼 축하는 일주일 동안 펼쳐졌고 친구들과 손님들은 결혼 잔치를 즐겼습니다. 구약에서 혼인 잔치의 신랑은 하나님이지 메시아가 아니지만(사 5:1; 54:5-6; 62:4-5; 겔 16:6-8; 호 2:19),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의 혼인 잔치임을 암시하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자들은 결혼식 잔치에 초대받은 친구들이나 손님들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자들은 금식하기보다 축하하고 즐겨야 합니다. 예수의 구원 사역은 지금 잔치로 펼쳐지고 있으며, 하나님 아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지금 마련하시는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늘나라가 지금 임했기에, 이 나라를 준비하기 위해 수행했던 금식을 지금은 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은 메시아의 잔치를 맛보는 시기입니다. 그런데도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 즉 민족의 해방을 위해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고대한 메시아의 잔치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요한의 제자들 역시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메시아의 오심으로 펼쳐지고 있음을 알지 못해 계속 금식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는 자들은 먹고 마시는 반면,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계속 금식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도 신랑을 빼앗기는 날에는 금식할 것입니다(35). ‘신랑을 빼앗긴다’는 표현은 이사야 53:8을 떠올립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에 할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온 이후로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금식하는 일은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사역으로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마지막 날에 참여할 메시아 잔치를 즐겨야 할 때입니다. 즉, 구원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은혜를 기뻐해야 합니다.
새 것과 옛 것의 비유(36-39)
오늘날 젊은이들이 기독교에 대해 너무 고리타분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들을 향한 전도방법이 준비되지 못한 탓입니다. 시대는 급변하는데, 교회는 과거의 방법에 집착합니다. 분명한 것은 복음은 절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달하는 방법은 시대에 걸맞게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다시 수많은 젊은이들이 기독교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36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8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36-39)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환대한 것(27-32)과 금식 대신 구원의 잔치를 즐기는 생활(33-35)을 비판한 바리새인들을 향해 두 개의 비유로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새 질서를 수용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새 옷과 헌 옷은 공존할 수 없고(36)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도 공존할 수 없습니다(37-38). 새 옷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면 새 옷을 버리게 되고, 새 옷감은 낡은 옷에 어울리지 않습니다(36).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새 포도주의 발효로 낡은 부대가터지고 맙니다(37). 그렇게 되면 부대도 못쓰고 포도주도 쏟아지고 만다. 따라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38). 죄인을 제자로 부르고 죄인들을 환대하는 것은 새것에 해당합니다. 나사렛 회당에서 선언하신 희년의 복음(4:18-19)이 바로 새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과 마음을 오해한 유대교의 규례들은 복음과 공존할 수 없는 옛것입니다. 옛것으로는 죄인들을 긍휼로 영접하지 못하고 정죄하며 경계만 높게 설정할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구약을 오해한 것일 뿐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복음을 예고했고 복음의 정신과 일치합니다. 이런 점에서 묵은 것은 원래 좋은 것입니다(39). 오래된 포도주 맛을 본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듯이 구약의 오랜 목적은 참으로 은혜로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잃은 자들을 찾아 구원하시는 행위(19:10)는 하나님의 오랜 목적을 성취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16:19-31)에서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모세와 선지자들, 즉 구약에 가난한 자들을 환대하는 것과 그렇게 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보상이 중요한 가치로 기록된 점을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의 형제들이 구약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예수님의 경고와 약속을 받아들일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16:24-29). 죄인들을 환대하고 그들을 긍휼로 대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새 나라의 속성일 뿐 아니라 오래전에 구약에 기록된 가치입니다. 환대하는 긍휼이 새것이고 경계를 나누는 태도가 옛것입니다. 긍휼과 자비 없는 종교적 의식과 규례는 결코 새 시대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레위와 같이 공동체에 해를 끼친 자를 환영하고 수용하는 일은 오랜 가르침이고 좋은 것입니다. 가장 급진적이고 어려운 신앙은 죄인을 환대하는 것입니다.
메시아 예수님께서 오심을 기뻐하는 것이 참된 의요 경건입니다. 형식으로 의를 세우고 경건을 드러내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되 능력은 상실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약한 자를 돌아보고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참 경건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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