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16편 3절-5절: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3절: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거룩한 성도를 즐거워하는 것은 주님의 마음이다. 신정통치를 하는 지도자의 마음도, 인도자의 마음도 그렇다. 거룩한 성도를 보고 마음이 기쁘고 즐거워하는 것은 신정통치를 하는 주님의 마음이요, 지도자의 마음이요, 인도자의 마음이요, 다윗이 이 시를 썼기 때문에 다윗의 마음이기도 하다. 자식이 훌륭하면 부모가 기뻐하는 이치와 같은 거다. 반면에 자식이 죄를 짓고 돌아다니면 부모의 마음은 안타깝다.
땅에 있는 성도가 왜 존귀하냐? 성도가 이 땅에서 잠깐 동안 나그네 생활을 하는 도중에 환난과 핍박과 박해 속에서 시련과 연단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의 사람으로 살려고 신앙정절을 지키면서 훈련을 잘 받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그런 성도를 얼마나 기뻐하시겠느냐? 만물들도 그런 성도를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거다.
그런데 성도가 죄를 지으면 만물이 통곡을 한다. 성도 때문에 만물이 심판을 받게 되니까. 마지막 날에 성도에게 심판이 있는 거지만 그러나 그 때가 되기 전까지는 부분적인 심판이 있으니, 성도가 죄를 지으면 성도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만물이 인간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거다.
예수님을 믿는 자기는 하나님의 사랑의 제 1 대상물이다. 그러니까 성도라고 하는 주님을 믿는 자기가 얼마나 존귀한 위치냐? 하나님 다음의 위치가 자기인데,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고 하면서도 만물 아래로 떨어진 상태로 소원이나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존귀한 자라면 존귀자로 살아야 한다. 존귀해지려면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야 한다. 신앙정절을 지켜야 한다.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즐거운 일을 그 성도로 통해 나타내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든지 미움을 받는다든지 하는 것은 자기 할 탓에 있다.
성경에 보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했는데 왜 그랬을까? 괜히 하나님이 그런 거냐? 하나님이 편견이 있는 분이냐?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니까 ‘내 마음이지’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을 수는 없는 거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을 품었기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을 하실까? 야곱이 어떤 마음을 품었기에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느냐? 이것을 기본구원에 붙이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마리아에게 찾아와서 ‘너에게 잉태된 자는 예수라’ 할 때 이 마리아가 요즘 아가씨들처럼 막 돌아다니고 하는데 하나님이 괜히 찾아와서 그러신 거냐? 그건 아니다. 왜 마태복음의 족보에 마리아가 쓰여져 있느냐 하면 마리아의 신앙사상이 조상으로 조상으로 신앙의 길을 타고 올라가고, 그 다음에 신앙적으로 아브라함의 신앙을 받아서 또 내려오고 내려오면서 마리아에게까지 그 신앙이 내려온다. 족보를 들여다보면 이게 들어있다. 이건 영의 눈이라야 보이는 거지 아무나에게 보이는 게 아니다. 하나의 종교인의 눈을 가지고 보이느냐? 그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을 가지고 이게 보이느냐? 그렇지도 않다. 하나님께서 왜 마리아에게 찾아왔을까?
모든 성경을 기본구원적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두들겨 패고 하는 걸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 이룰구원 성화구원 차원으로 성경을 볼 때 “그 성도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라고 말씀을 하실까?” 이게 있는 거다. 욥의 경우를 성경을 통해서 보니 하나님께서 욥을 올리기 위한 시험이었지만 욥의 입장에서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때리십니까?’ 할 때 ‘그거야 내 마음이지’ 이런 건 통하지 않는 거다.
4절: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예를 들면 추도식 같은 거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첫째로 우상을 섬기는 자에게는 고통이 온다. 왜 그럴까? 인간이 자기를 지으신 창조자를 모르면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 자는 사망권 안에서 사는 거다. 어두움에서 사는 것과 같다. 이는 자식이 부모를 떠난 것과 같아서 그 마음속으로 고통이 파고드는 거다.
부모를 떠난 자는, 이를 테면 집에서 내쫓기면 무서움 고통 괴로움이 몰려오고, 부모로부터 오는 모든 사랑과 물질공급과 보호가 다 끊어진다. 거지가 돼버린다. 그런 것처럼 인간이 창조자를 모르면 어두움에 사는 것과 같다. 죄 가운데 사는 거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필연적으로 죄의 고통과 세상성적인 성질이 자기 마음을 파고들게 되어있다. ‘아니다’가 아니라 마음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돼 있기 게 때문에 늘 그 고통이 떠나지 않게 되는 거다. 그 고통에서 살게 된다.
바로 믿는 사람은 그 고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늘은 오늘로서 해가 다 가는 거고, 내일 또 눈을 뜨게 해주시면 내일 또 부딪히는 일을 해 나가는 거다. 사실 우리 인간들이 ‘아, 어제 잘 잤다’ 하겠지만 우리가 신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어제는 완전히 영원으로 흘러가 버린 거고, 아침에 눈을 뜰 때는 다시 사는 것과 같은 거다. 지난 것은 다 죽었다. 그 다음에 다시 눈을 뜰 때는 다시 사는 거다.
또 두 번째는 하나님을 떠난 자는 사단 마귀 귀신과 악령들이 달라붙어서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더럽게 만들게 되어있다. 빛이 없는 어두운 곳에는 여러 가지 잡 벌레들이 다 들어온다. 들어오게 돼 있는 거다. 우리가 그 이치를 알아야 한다. 그냥 인간의 감정이나 제 생각을 하면 안 된다. 하나님을 떠난 자는 모든 악령들의 역사에 완전히 노출이 돼 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을 떠난 자는 세상을 세상만큼 모르니 만물과 사건과 환경과 존재와 대립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게 또 고통스러운 거다. 모르니까 소란이 일어나고, 모르니까 대립을 하게 된다. 자기의 지식이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절대 정확한 것을 가졌다면 자기에게 닥치는 사건 환경을 분별할 수 있어서 그것과 대립이 안 되지만 저질적인 타락적인 자기 주관적인 지식으로 마음이 그렇게 돼 있고 정신이 그렇게 돼 있으면 자기에게 닥치는 사건 환경과 대립이 되니 고통이 일어나게 되어있다.
그래서 우리가 안 믿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저 놈이 자꾸 내 신경을 건드리고 내 속을 팍팍 쑤셔서 내가 고통을 당한다’ 라고 하면서 그 상대를 나쁜 놈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상대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상대가 자기에게 고통을 주기 이전에 자신 속에 사건 환경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이미 자기 속에 들어있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을 깨닫고 보는 것과, 안 믿는 사람이 그냥 자기 주관적인 눈으로 보는 것과는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거다.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그러니 남을 보고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은 참 어리석다. 일반적으로 보면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을 향해서 ‘저 놈이 나쁜 놈이다’ 이렇게 하지만 우리가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네가 너를 모르는구나. 손가락질을 하는 네가 깨달아야 된다’ 이렇게 들어가는 거다.
교인들의 세계를 보면 염소나 이리 같은 사람이 한 두 명이 있는데 진리로 구별을 하면서 자기를 잘 다듬어 나간다면 이 사람은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이 온다고 해도 그 사람을 진리 쪽으로 자꾸 밀착을 시키려고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누가 어떤 말을 하거나 옮기게 되면 그 말을 듣는 자기도 슬며시 그 사람과 하나가 돼버린다. 이래가지고 당이 된다. 이런 사람은 어떤 말을 하건 상대를 슬슬 끌어당겨서 자기편으로 만들어서 이용을 한다. 이런 상태를 잘 알아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속는다.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일반적인 차원으로 사람을 보면 자기는 가난한데도 일은 안 하고 잘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고, 또 늘 가난하다고 하면서도 집안에는 최고급품만을 사놓는 사람도 있다. 이건 아주 위험하다. 그러면서 또 남의 말을 잘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다. 이거는 내보내야 한다. 또 자기가 세상을 잘 모르고 살다보니 이래 속고 저래 속고, 늘 남에게 속으며 살면서도 속에는 욕심이 가득 찬 사람도 있다.
세상에는 별별 사람이 다 있는데 어찌되었건 옳은 진리의 사람으로 맞춰 가자.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그런 것은 다 벗어버리고 새로 거듭난 사람이 되자. 이렇게 되면 사람이 정립이 딱 되고, 정립이 되면 그 다음에 생활면에 안정이 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절제를 하게 되고, 가정살림도 모이게 되는 거다. 사람이 이렇게 되어 들어가면 희망이 보이는 거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오기 시작하는 거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어떤 교인을 만나더라도, 어떤 이웃을 만나더라도 그 면으로 나가야 한다.
목사님들도 보면 자기 생활을 위한 목회를 하는 분도 있고, 또 말로 해서 사람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여서 자기 사람을 만드는 일도 있다. 교인들 중에도 사기성적인 말로 편당을 만들어서 예수 잘 믿는 사람을 깎아내리고, 상대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일도 있다. 이거는 안 된다. 이건 사단 마귀의 짓이다. 이런 사람을 사귀면 안 된다.
우리 속에도 이런 요소가 들어있지만 그러나 주님처럼 닮고자 하는 마음이 자기를 다스리고 잘 다듬어져야 한다. 안 그러면 사건에서 시험 타고, 인간끼리 시험 타고, 서로 싸우고 보기 싫어서 교회에 안 나오고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기 마음대로 안 되니 ‘이놈의 교회는 사랑이 없다’ 하는 말이 나오게 되는 거다.
우리는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아, 이 사람은 그 나름대로 잘못이 있지만 고치려고 하는구나’ 하는 게 있을 수 있고, ‘이 사람은 사기성까지 있어서 교회에 시험이 들게 하는 요인이 되겠구나’ 하는 게 있을 수 있다. 어쨌든 우리의 과거는 좋은 게 없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진리말씀을 붙잡고 잘 다듬어져 나가면 된다. 바로 믿으려고 애를 쓰고 자기를 다스리면서 자꾸 절제해 나가면 된다.
그리고 네 번째는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에 탐심을 가지는 자는 마귀의 졸병이다. 세상탐심은 우상을 섬기는 것이니 이것은 자동적으로 마귀의 졸병노릇이 돼버린다. 이러면 악령이 들려서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되니 이게 얼마나 고통일까? 우리가 사람인지라 세상을 살면서 걱정 근심이 있겠지만 그러나 아무리 못 살아도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살고자 노력을 하면 그 마음속에서는 기쁨이 샘솟는다.
자기의 현실을 붙잡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아버지, 나를 통해서 당신이 영광을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가난한 나에게 물질축복을 많이 주셔서 부자로 만들어 주시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나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려면 나를 부자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라고 한다면 이런 기도는 일리가 있지 않으냐?
아니면 ‘내가 어리석음으로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가난 속에서 나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이 가난이 언제까지 연속이 될 런지 모르겠지만 이 가난 때문에 신앙 믿음을 팔아먹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한다면 하나님께서 ‘에이, 고약한 기도구나’ 하시겠느냐?
‘하나님께서 부요한 환경을 주시더라도 그 부요 속에 쏙 빠져서 하나님을 집어 내던지는 일이 없도록 해주시고, 혹 가난을 주시더라도 이 가난 속에서 철두철미하게 깨닫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붙잡아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한다면 이 기도는 부자 되게 해 달리는 기도는 아니다. 이런 기도를 하는 사람은 가난이던 부요든 상관이 없다. 부자도 초월이 되는 거고, 가난도 초월이 되는 거다. 그 다음 것은 하나님께 맡겨버리는 거다.
그러면 성도가 부자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안 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가난하게 두시는 거냐? 가난이 오던 부요가 오던 그건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는 거고, 하루 하루 나에게 맡겨진 일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도록 최대로 해나가면 되는 거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깨닫게 해줌과 동시에 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지 모르는 거다. 부자가 되던 가난하게 되던 그건 자기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는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적인 것에 목적을 두고 살면 우상을 섬기는 사람과 같으니 자동적으로 고통이 찾아오게 된다. 물질적인 생활 쪽에 마음이 빼앗겨서 ‘이 가난을 어떻게 해결을 할까?’ 하며 물질 부요성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면 우상을 섬기는 사람과 같다. 세상만사는 자기 마음대로 되라는 법은 없다. ‘돈 돈’ 하기 전에 먼저 네가 손발을 빨리 움직여라. 손발은 안 움직이면서 ‘돈 돈’ 하면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냐?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고통이 온다. 고통이 온다는 속에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사람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시대를 통해서 별스런 일을 다 만들어 준다는 게 들어있다. 이러면 자동적으로 고통으로 들어가는 거다. 자식 면으로 올 수도 있고, 생각지도 않은 일이 터질 수도 있고, 아무도 모르는 거다.
우리가 하루 하루 사는 것이 주님 앞에서 자타의 이룰구원에 정신을 쏟아야지 잘 먹고 잘 사는 면에 목적을 두고 산다고 해서 제 마음대로 되는 거냐? 하루 하루 사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최대한으로 자타의 구원을 위해 살면 되는 거다.
사시사철을 누가 만들었느냐? 하나님이 만들었다. 그러니까 자기가 사시사철에 잘 순응하고 활용하면 먹고 마시는 것은 얼마든지 혜택을 입게 돼 있다. 사시사철을 네가 만드는 게 아니다. 밤과 낮을 네가 만드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연법칙을 만들어서 돌리는 것은 믿는 자기가 만들어지라고 돌리는 거다. 그러니 잘 순응하면서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면 먹고 마시는 것은 일반인들처럼 염려 걱정을 안 해도 된다. 세상은 나도 가고 너도 가고, 다 지나가는 거다. 어쨌든 하나님 앞에 바로 살고, 바로 만들어지고, 바른 정신을 가지고 신앙의 정로를 바로 가면 된다.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피의 전제는 물 붓듯이 부어 드리는 것인데, 우상에게 산 자식을 잡아서 바치고, 돼지를 잡아서 바친다. 왜 이렇게 드리느냐? 자기의 바라는 세상일이 잘 되라고 바치는 거다.
산 자식을 우상 앞에 바치는 것을 신앙 사상적으로 보면 진리 팔아먹고 세상기준에 맞춰서 사는 걸 말한다. 세상을 탐하여 자기의 일생을 전폭적으로 세상에게 투자하며 산다면 이것은 자기의 일생 전체를, 자기의 목숨 전체를 우상에게 부어 드리는 것과 같다. 이게 전제다.
기독교인들이 종교적인 세상을 만들고자 그 일에 충성봉사를 하며 몸을 바친 것도 종교적인 우상에게 드려진 피의 전제다. 자기의 일생을 몽땅 그렇게 드리는 것이 피의 전제다. 전제는 물을 붓듯이 전부를 바치는 거다. 자기의 삶의 목적이 진리의 깨달음에,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업적을 남기고자 하는 것은 종교적인 우상이다.
우리가 알지 못해서 저주의 삶을 살았던 그 때를 생각하며 치를 떨고 그 이름도 부르지 말아야 한다. 그런 사고방식으로 살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면 심청전을 들어보면 부모공경에 대한 걸 많이 느끼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영의 눈으로 보면 이 심청이 얘기 속에 함정이 있다. 무슨 말인가 하니 부모공경에 대한 강조를 하기 위해서 우상을 섬기는 것이 들어있는데 이 면은 감춰져 있어서 사람들이 잘 모른다. 참 묘한 거다.
그래서 사람들이 부모공경에 신경을 쓰느라고 어디에 정신을 쓰느냐? 우상을 섬기는 데 정신을 쓴다. 제사나 추도식이 그런 거다. 누구를 섬긴다고 이걸 하는 거냐? 부모를 섬긴다고 하는 거다. 그러면 그 부모가 살아 있느냐? 죽었다. 그러니 우상이다. 그러니 얼마나 웃기는 일이냐? 허망한 일이다. 이치에 맞지도 않는 일이다. 믿는 우리는 죽은 부모에게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리지 말고 살아계신 부모님을 제대로 섬겨라. 이게 말하자면 산 제사다.
이방 신을 섬기는 사람과 세상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물론이고 예수를 믿는 교인이 자기를 위해서 살면 이는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은 거다. 그런데 교인들이 이걸 못 깨닫는다.
5절: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이방 세상 사람들은 농업, 목축업, 공업, 광업, 임업, 수산업 등 생산을 할 수 있는 산업이 많다. 이 산업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남는 이익을 크게 보고자 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장사를 하면 이문을 남겨야 한다. 본전을 까먹어가면서 퍼주면 안 되는 거다.
사람이 자기의 산업이 있으면 활기가 돋고 살맛이 난다. 사람이 일을 하게 되면, 일할 곳이 있으면 활기가 있다. 몸은 성한데 일을 안 하고 놈팽이로 있으면 정말 그 집은 죽을 지경이다. 일할 곳이 있는 것은 참 좋은 것이다. 일거리가 없으면 사는 재미도 없는 거다. 놀고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사람이 놀면 심심해서 못 견딘다. 얼마나 심심하면 외국에까지 가서 자기 재산을 유흥비로 다 날려버리고 감옥까지 가겠는가? 우리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산업을 하는 존재다.
인간이 예수를 믿는 것이 우리의 본업이요, 생활의 수단은 우리의 부업이다. 부업은 본업을 하기 위한 수단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본업과 부업의 자리가 바꿔지면 이방인처럼 돼버린다. 안 믿는 사람은 예수 믿는 것은 없는 거고 잘 먹고 잘 살 목적으로 피가 터지도록, 몸에 병이 들도록 일을 하는 거다.
짐승은 먹기 위해서 살고, 이방인들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먹고,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입기 위해서 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게 바꿔지면 안 된다. 사는 목적이 바꿔지면 이방인처럼, 짐승처럼 돼버린다.
그러면 이 세 종류의 사람이 사는 목적이 똑같으냐, 완전히 다르냐? 완전히 다르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은 몇 번째에 속하는 사람이냐? 첫 번째일까, 두 번째일까? 세 번째는 확실히 아닌데, 몇 번째에 속할까?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잘 먹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이것은 부자가 되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과 비슷한 건데, 몇 번째에 속하는 거냐? 잘 먹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과, 부자가 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통하는 건데, 분명한 것은 세 번째에 속하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면 첫 번째에 속하는 건지, 두 번째에 속하는 건지?
두 번째에 속한다고 보는 것은 틀린 거다. 첫 번째 속한다고 하는 것은 맞기는 맞는데 사실은 첫 번째에 속하는 것보다 더 적이 되는 거다. 더 저질이다. 왜 그러냐 하면 이거는 짐승보다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짐승은 자기 힘으로 먹을 것을 찾아서 먹는다. 그런데 잘 먹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는 노력도 안 하고 예수님의 힘을 빌려서 부자가 되어서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도둑의 심보다. 그러니 이건 짐승보다 못하다. 짐승은 도둑의 심보는 없는데 이거는 남의 힘을 빌려서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면으로 들어가 있으니 도둑의 심보요, 짐승보다 못한 거다.
진리성도 다윗은 무슨 소득을 올리려고 ‘여호와는 나의 산업’이라고 하느냐? 1.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믿고 무슨 사업을 해도 하는 것마다 다 잘 되기 때문에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산업이다’ 라고 한 거다? 2. 예수 믿고서 도둑질을 해도 그 도둑질을 하는 산업이 잘 돼서 ‘여호와는 나의 산업이다’ 라고 한 거다? 3.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처럼 사람이 성장이 잘 되어 나가니까 ‘여호와는 나의 산업’이라고 한 거다? 어느 거냐?
예수 믿는 것이 자기 육신이 먹고 마시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 믿는 것이 목적이 돼야지 생활의 수단으로 예수를 믿는 것은 안 된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내가 살아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으로 인해서 내가 산다는 것이 뭐냐? 예수 덕으로 밥 먹고 사는 거냐? 하나님의 온전으로 이뤄지는 것으로써 내가 사는 거다. 이것이 다윗의 사는 길이다. 다윗은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사는 거다.
우리의 산업도 다윗처럼 돼야 한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이니.’ 내가 사는 것이, 인간들이 사는 것이 여호와께서 자기의 산업이 돼야 한다. 하나의 예를 든다면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공부하는 게 자기의 할 일이다. 공부를 하는 자식에게 먹고 마시고 입히는 것은 부모가 할 일이다. 그런데 학생이 학교에 가서는 맨 쓸데없는 곳에 가서 놀고 공부를 안 한다면 부모가 그 자식을 위해서 뭘 해주고 싶겠느냐?
우리는 자타의 속에서 하나님의 일이 잘 되도록 살아야 한다. 사는 방편을 통해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런 정신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이 잘 되도록 하려니 많이 깨달아야 하고 많이 알아야 한다.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입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