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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에게 닥친 고난들
욥기 1장 13-22절
우리는 고난을 생각하면 고난의 원인을 먼저 생각합니다. 인과응보라는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욥기를 통해서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은 고난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새롭게 경험하게 됩니다. 욥기에는 난해한 내용이 적지 않게 나오지만, 고난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을 새롭게 하는 즐거움을 주시기도 합니다.
하늘에서 결정된 대로 욥에게 고난이 닥칩니다. 외국인들의 폭력과 하늘에서 내리는 불과 바람으로 인해 욥의 종들과 가축, 그리고 심지어 자녀들까지 모두 잃게 됩니다. 숨 쉴 틈 없이 연속적으로 불어 박치는 ‘까닭 없는 고난’ 앞에서 욥은 인과응보의 원리를 초월한 신앙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욥의 신앙고백은 규범적 지혜를 뛰어넘는 반성적 지혜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입니다.
욥에게 닥친 첫 번째 재앙(13-19)
사람들은 비극적인 일을 겪으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더구나 비극이 닥친 이유를 알지 못할 때, 그 원망의 정도는 더 심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이라도 갑자기 재난을 맞을 수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굴하지 말고 믿음으로 끝까지 견뎌 내야 합니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냅니다. 천상회의에서 사탄이 제기한 질문, 곧 이유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분명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주장이 틀렸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증명했습니다.
13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14사환이 욥에게 와서 아뢰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15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6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7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갈대아 사람이 세 무리를 지어 갑자기 낙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8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들의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19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한지라(13-19)
욥에게 닥친 첫 번째 재앙은 욥의 생명 외에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참혹한 재난이었습니다. 그의 모든 소유물, 즉 가축과 종들 그리고 심지어 10명의 자녀들까지 한 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고통의 상황 속에서도 예배자의 모습으로 반응합니다.
(1) 맏아들의 생일 모임(13)
욥의 고통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날들 중 한 날 시작됩니다. 이날도 여느 때처럼 욥의 자녀들은 첫째 아들의 생일을 맞아 그의 집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2) 소와 나귀와 종들 재앙(14-15)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14) 일상의 삶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욥의 일상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렀습니다(15). 소와 나귀들을 약탈하고 종들을 죽입니다.
(3) 양과 종들의 재앙(16)
두 번째 비보가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양과 종들이 희생됩니다. 연이어 갈대아인들의 기습적 공격으로 낙타를 빼앗기고 종들이 살해됩니다. 결정적으로 욥의 10자녀가 몰살됩니다. 장자의 생일날이 열 자녀의 애도일이 되었습니다. 평범한 일상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져 버렸습니다. 최선의 삶을 살던 욥은 최악의 고통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첫 번째 재난 보도는 서론 2-3절에서 언급된 욥의 소유물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아들 일곱과 딸 셋, 양과 낙타, 소와 암나귀 그리고 많은 종들. 첫 번째 재난을 통해 이제 욥에게 남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한 욥의 건강한 몸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욥의 잃어버린 가축의 리스트는 이미 구약성경 다른 곳에서 그대로 나옵니다. 바로 신명기에서 모세가 언급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불순종했을 때 받는 저주 가운데 낙타를 제외한 모든 항목이 적시되어 있습니다(신 28:31-32a`
아이러니한 사실은 어떻게 율법에 충실하고 온전하였던 욥이 오히려 율법에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선포된 저주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이다. 욥기를 접하는 독자들에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여기에 있다. 악인에게 일어났어야 할 저주가 의인 욥에게 일어났다는 현실이다. 더군다나 보다 독자들이 더 잘 알고 있는 정보에 의하면 그 재난 자체가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있었던 욥의 의로움에 대한 토론으로부터 발생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토론의 결과가 가져다준 재난은 욥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막대한 것인데 그 원인을 아는 독자들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일로 밖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무참한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도에 우리의 관심은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욥기 이야기를 전해주는 거가는 사실상, 이러한 드라마틱한 환경을 서론에서부터 의도적으로 조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존의 율법 순종 여부에 따른 축복과 저주의 교훈을 넘어서고 있으며 인간의 기대와 상상을 초월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의 첫 번째 순종적 반응(20-21)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 가장 빛나는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우리는 가진 것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좋은 상황 때문에 아니라 좋으신 하나님 때문에 찬양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이 있으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완전한 뜻에 따라 만물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20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21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20-21)
로버트 알터(Robert Altern)가 발견한 히브리 문학 산문체의 수사학적 비평 방법에서 자주 쓰이는 방법 중 하나는 ‘침묵의 기술’(art of reticence)이라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들은 아브라함, 형들에게 배신당하여 애굽으로 끌려가는 요셉, 우리는 그들로부터 아무런 목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저 사건의 전개에 의지할 뿐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의 입은 열리고 그들의 말을 통해 성경본문에서 정작 전하고자 하는 핵심적 메시지를 얻게 됩니다. 따라서 본문의 이야기 가운데 침묵이 진행될 때 긴장은 고조될 수밖에 없습니다.
(1) 땅에 엎드려 예배함(20)
휘몰아치듯 네 차례의 연이은 비보가 욥의 귀청을 따라고 온 존재를 흔들어놓았습니다. 그의 세계는 이제 인간이 느릴 수 있는 최고점의 삶에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참혹함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네 차례에 걸친 끔찍한 소식들 가운데 욥은 줄곧 침묵하고 있다. 아니, 본문의 저자는 일부러 욥의 반응을 먼저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20절에 이르러 욥의 반응을 그가 취한 행동을 통해 알려줍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입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욥의 침묵은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욥이 보인 반응 역시 확실치 않습니다. 욥은 일단 “일어나”라고 보도되어 있습니다. 이제까지 그는 족장시대 가부장의 권위로 앉아서 비통한 소식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가 앉아 있던 자리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은 그의 겉으로 보이는 자세의 변화뿐만 아니라 현실세계와 관계된 방식의 변화 또한 동반합니다. 구체적으로 세 가지 행위가 진행되는데 처음 두 번의 행위는 애도의 의식을 보여줍니다: “겉옷을 찢고” 그리고 “머리털을 민다” 고대근동의 전형적인 조문자의 애도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행위는 예상을 깨고 있습니다.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욥이 갑작스레 망자가 되어버린 10자녀를 향해 애절한 탄식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했던 독자들에게 이러한 예배의 행위는 당황스럽습니다. 따라서 20절까지 오면 욥의 반응에 대한 침묵의 기술은 효과적인 차원에서 그 절정을 맞습니다. 도대체 지금 욥의 심리상태는 어떤 것입니까?
(2) 주권자 여호와를 찬송함(21)
21절에서 급기야 욥이 입을 뗍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 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도대체 믿기지 않는 고백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욥이 당한 재앙의 경중과 상관없는, 말 그대로 정통적인 신앙 고백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욥의 이러한 고백에 대한 주석가들의 해석은 다양합니다. 물론, 가장 일반적인 견해는 “인내하는 욥”의 경건한 반응입니다. 현실에서 어떠한 고통을 당하더라도 의로운 욥의 하나님께 향한 신앙은 항상 신실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토론은 욥의 신실성을 기대한 하나님 편으로 승부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고통의 현실 앞에서 현재 욥은 진정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기보다는 어찌할 바 모르는 상황 속에서 기존의 관습에 따른 예배행위의 태도를 취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론 부분인 1-2장에서 욥기의 드라마가 바로 42장 결론 부분으로 이어진다면 일반적인 전자의 해석 즉 경건한 욥의 반응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내 3장에서 보이는 욥의 생일저주를 비롯해 이후 세 친구와의 대화에서 나타나는 욥의 항변을 보면 오히려 뉴썸의 해석이 더욱 타당한 것으로 다가옵니다. 아직 욥기 이야기의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지 않은 상황에서 어떠한 입장이 욥기 본연의 메시지와 더 가까운지 결정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욥의 예배자적 반응은 서론 1-5절에서 보여준 욥의 모습과 일치된다는 사실입니다. 온전하여 악으로부터 떠나 있는 의인 욥으로서의 당연한 반응이 보도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의 첫 번째 반응에 대한 주석가들의 해석이 어떠하든지 간에 현재로서 분명한 것은 욥기의 이야기는 일관성 있게 펼쳐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욥 이야기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 우리는 이야기의 전개를 하나하나 그대로 따라가 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해석자의 기존 관념이나 선입관이 아니라 본문 자체의 세밀한 관찰과 분석이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본문과의 만남을 허락할 것입니다.
욥의 반응에 대한 평가(22)
우리가 인생에서 재난을 만나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살아 계시며 우리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실 분입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하고 그 주권에 순종하여 살아갈 때, 우리도 욥같이 모든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을 향한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22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22)
첫 번째 재앙 보도는 내레이터의 요약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두 가지 요점입니다. 욥이 이 모든 일에 범죄치 않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범죄하지(과녁에서 벗어나다) 않았다는 것은 본래의 정통적 신앙 노선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원망하지(불미스러움) 행치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결론에 따르면 현재 욥은 정통적 신앙의 노선을 견지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욥의 현실 상황에서 일어난 일은 정통적 신앙의 인과응보적 교리에 어긋났습니다. 내레이터의 사건 보도는 비정통적 현실을 그립니다. 반면에 내레이터의 사건 요약은 정통적 신앙을 그립니다. 양자 사이의 충돌은 다분히 의도적이요 이 충돌의 해결이 욥기의 중심 과제입니다.
고난이 찾아올 때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고 마음은 연약해지기 쉽습니다. 고난의 시기를 굳건한 믿음으로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단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통해 연약해진 우리를 새롭게 하셔서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게 하실 것입니다. 또 고난의 시기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넉넉히 견디고 극복할 수 있도록 능력을 베푸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