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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목요시낭송회 이기철 시 13편
풀잎
이기철(李起哲)
초록은 초록만으로 이 세상을 적시고 싶어 한다
작은 것들은 아름다워서
비어 있는 세상 한켠에 등불로 걸린다
아침보다 더 겸허해지려고 낯을 씻는 풀잎
순결에는 아직도 눈물의 체온이 배어 있다
배추 값이 폭등해도 풀들은 제 키를 줄이지 않는다
그것이 풀들의 희망이고 생애이다
들 가운데 사과가 익고 있을 때
내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만의 영혼을 이끌고
어느 불 켜진 집에 도착했을까
하늘에서 별똥별 떨어질 때
땅에서는 풀잎 하나와 초록 숨 쉬는
갓난아기 하나 태어난다
밤새 아픈 꿈 꾸고도 새가 되어 날아오르지 못하는
내 이웃들
그러나 누가 저 풀잎 앞에서 짐짓
슬픈 내일을 말할 수 있는가
사람들이 따뜻한 방을 그리워할 때
풀들은 따뜻한 흙을 그리워한다
인생사전
-누구나 가졌지만
시로 쓰면 진부한 것
그냥 첨벙 뛰어들었는데 인생이었다
언제나 눈앞에는 보이지 않고
뒤돌아보아야 보이는 그것
우편행랑으론 배달되지 않고
발끝에 머리 위에 모래처럼 쌓이는 그것
아무리 화사해도 빌려 입을 수 없는 그것
도서관에 가면 있지만 모두 남의 것인 그것
때론 놓친 기차 같이 아쉽고 못 잡은 무지개 같이 설레는 그것
왜 우는 지도 모르고 명사산 모래처럼 우는 그것
죄짓지 않고도 성서와 불경처럼 무릎 꿇게 하는 그것
먹는 일 입는 일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로 짠 피륙인 그것
사람들이 흔히 열 권 소설로도 모자란다고 하는 그것
때론 유행가처럼 절실한 그것
봉숭아씨처럼 뛰어나가지 못하고 살구씨처럼 문을 잠근 채 토라진 그것
불행보다는 달콤하고 행복보다는 쓰디쓴 것
아무에게도 배울 수 없고 누구도 가르치지 않는 것
빙벽등반처럼 아슬아슬 제 힘으로 올라야 하는 것
재봉틀로 수선할 수 없는 것
제 손으로 벼려야 하는 것
낮에는 죄를 짓고 밤에는 참회록을 읽게 하는 그것
벽돌 한 장만 잘못 뽑아도 집 전체가 무너지는 그것
위인전을 읽을 때마다 내가 모래가 되는 그것
그만 놓아버리고 싶은데 끝내 놓을 수 없는 그것
닦아도 씻어도 걸레처럼 얼룩이 남는 그것
눈앞에는 없고 등 뒤에만 쌓이는 그것
비범한 사람들이 걸어간 발자국을
부지런한 어느 펜이 평전에 담는 그것
소설로 쓰면 생생하고
시로 쓰면 진부한 그것
가을이라는 물질
가을은 서늘한 물질이라는 생각이 나를 끌고 나무나라로 들어간다
잎들에는 광물 냄새가 난다
나뭇잎은 나무의 영혼이 담긴 접시다
접시들이 깨지지 않고 반짝이는 것은
나무의 영혼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햇빛이 금속처럼 내 몸을 만질 때 가을은 물질이 된다
나는 이 물질을 찍어 편지 쓴다
촉촉이 편지 쓰는 물질의 승화는 손의 계보에 편입된다
내 기다림은 붉거나 푸르다
내 발등 위에 광물질의 나뭇잎이 내려왔다는 기억만으로도
나는 한 해를 견딜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오만한 기억은 내 발자국을 어지럽힌다
낙엽은 가을이라는 물질 위에 쓴
나무의 유서다
나는 내 가을 시 한 편을 낙엽의 무덤 위에 놓아두고
흙 종이에 발자국을 찍으며 돌아온다
보내주신 별을 잘 받았습니다
닷새째 추위 지나 오늘은 날이 따뜻합니다
하늘이 낯을 씻은 듯 파랗고
나뭇잎이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소풍 나오려 합니다
긴 소매 아우터를 빨아놓고 흰 티를 갈아입어 봅니다
거울을 닦아야 지은 죄가 잘 보일까요
새 노래를 공으로 듣는 것도 죄라면 죄겠지요
외롭다고 더러 백지에 써보았던 시간들이 쌓여
돌무더기 위에 새똥이 마르고 있네요
저리 깨끗한 새똥이라면 봉지에 싸 당신께 보내고 싶은 마음 굴뚝입니다
적막을 끓여 솥밥을 지으면 숟가락에 봄 향내가 묻겠습니다
조혼의 나무들이 아이들을 거느리고 소풍 나오는 발자국소리가 들립니다
오늘은 씀바귀나물의 식구가 늘어났네요
내 아무리 몸을 씻고 손을 닦아도 나무의 식사에는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밤이 되니 쌀알을 뿌린 듯 하늘이 희게 빛납니다
아마도 당신이 보내주신 것이겠지요
잘 닦아 때 묻지 않게 간직하겠습니다
보내주신 별을 잘 받았습니다
작은 이름 하나라도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라도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된다
아플 만큼 아파 본 사람만이
망각과 폐허도 가꿀 줄 안다
내 한 때 너무 멀어서 못 만난 허무
너무 낯설어 가까이 못 간 이념도
이제는 푸성귀 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불빛에 씻어 손바닥 위에 얹는다
세상은 적이 아니라고
고통도 쓰다듬으면 보석이 된다고
나는 얼마나 오래 악보 없는 노래로 불러왔던가
이 세상 가장 여린 것, 가장 작은 것
이름만 불러도 눈물겨운 것
그들이 내 친구라고
나는 얼마나 오래 여린 말로 노래했던가
내 걸어갈 동안은 세상은 나의 벗
내 수첩에 기록되어 있는 모음이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들
그들 위해 나는 오늘도 한 술 밥, 한 쌍 수저
식탁 위에 올린다
잊혀지면 안식이 되고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되는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를 위해
내 쌀 씻어 놀 같은 저녁밥 지으며
이향(離鄕)
제대를 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나는 개나리꽃이 한 닷새 마을의 봄을 앞당기는 조그만 시골에서
시나 쓰는 가난한 서생이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고급장교가 되어 있는 국민학교 동창과
개인회사 중역이 되어있는 어릴 적 친구들이 모두 마을을 떠날 때
나는 다시 이 마을로 돌아와 탱자나무 울타리를 손질하는
초부(樵夫)가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눈 속에서 지난 해 지워진 쓴냉이 잎새가 새로 돋고
물레방앗간 뒷켠에 비비새가 와서 울면
간호원을 하러 독일로 떠난 여자 친구의 항공엽서나 기다리며
잠처럼 조용한 풍금소리를 듣는 2급정교사가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시간을 물처럼 흘러갔고
놀 속에 묻히는 봄보리들의 침묵이 무섭게 나를 위협했을 때
나는 눈에 익은 돌멩이들의 정분을 거역하기 시작했다
염소들 불러 모으는 비음의 말들과
부피가 작은 국정교과서를 거역했다
뒷산에 누운 할아버지의 산소를 한 번 만 바라보았고
그리고는 뛰는 버스에 올라 도시 속의 먼지가 되었다.
봄이 오면 지금도 그 골의 물소리와
아이들의 자치기 소리가
도시의 옆구리에 잠든 나의 꿈속에 배달되지 않는 엽신으로 녹아
문지방을 울리며 흐르고 있다.
월동엽서
순이, 손을 몇 번 불어서 그 겨울은 지나갔나
미나리 잎새 얼어서 얼음 밑에 묻혀 있던 그 겨울
장작개비 책보에 얹고 가던 등굣길
소백산맥 끝 웅크린 골짜기
너는 전근 가는 아버질 따라 진주ㄴ가 사천인가로
닳은 고무신을 끄을며 떠났지만
얼음이 얼다 녹던 축축한 묏부리에 앉아
마른 잔디만 집어 뜯던 나는 지금
허언을 괴로워하는 삐걱이는 강의실 계단을 오르내린다
스물이 지나 서른이 되어서 너의 그 검정치마도
세상 따라 모양이 달라졌겠지만
진주ㄴ가 사천인가의 언덕 아래 조그만 마을에서
너는 이제 두 번째 아이를 낳고
들길에 나가 너의 아이들에게
새로 핀 꽃 이름을 가르치고 있는가
이 겨울에 난로 꺼지면 나는 양말을 갈아 신고
저 죽은 풀빛의 들판이나 밟으면서
겨울의 가장 따뜻한 곳으로 걸어가야겠다
눈이 내리면 다시 시린 손을 불며
생의 노래
움 돋는 나무들은 나를 황홀하게 한다
흙 속에서 초록이 돋아나는 걸 보면 경건해진다
삭은 처마 아래 내일 시집갈 처녀가 신부의 꿈을 꾸고
녹슨 대문 안에 햇빛처럼 밝은 아이가
잠에서 깨어난다
사람의 이름과 함께 생애를 살고
풀잎의 이름으로 시를 쓴다
세상의 것 다 녹슬었다고 핍박하는 것
아직 이르다
어느 산기슭에 샘물이 솟고
들판 가운데 풀꽃이 씨를 익힌다
절망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지레 절망을 노래하지만
누구나 마음속에 꽃잎 하나씩은 지니고 산다
근심이 비단이 되는 하루
상처가 보석이 되는 한 해를 노래할 수 있다면
햇살의 은실 풀어 내 아는 사람에게
금박 입혀 보내고 싶다
내 열 줄 시가 아니면 무슨 말로
손수건만한 생애가 소중함을 노래하리
초록에서 숨 쉬고 순금의 햇빛에서 일하는
생의 향기를 흰 종이 위에 조심히 쓰며
하얀 병원
나는 소년시절부터
아무도 앓아보지 않은 병 하날 앓아보고 싶었다
포르말린 냄새나는 작은 병실에서 오후의 햇살에 눈부셔하며
혼자 나부끼는 깃발 같은 외로움에
손수건 같은 마음 꺼내 말려보고 싶었다
하얀 벽돌집 창가에 앉아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고
구름이 짓다만 집을 내가 대신 지어보고 싶었다
에테르 냄새 나는 병이 조용히 내 어깨를 두드리면
나는 벤자민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벤치에 나가 앉아
아직 한 번도 이름 불리지 않은 풀밭의 풀들에 처음으로 이름을 붙여주고
식물도감에도 없는 가락지꽃 댕기꽃의 이름을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불러보고 싶었다
어쩌다 눈 맑은 소녀가 표지가 예쁜 시집을 들고 오면
그 시집 가운데 가장 슬픈 시를 골라
소녀와 함께 소리 내어 읽고 싶었다
귀 속에 푸른 강을 파고 흘러가는 강물 소릴 듣다보면
때로 앓는 것만이 인생의 진실한 모습임을 깨닫게 되거나
죽음이 삶의 가장 깨끗한 모습이라고 믿게 되리라 생각했다
꽃의 눈물을 손으로 받아 함께 나누어 마시던 소녀가 떠나면
이름 모를 아픔들이 다시 장미처럼 어깨 위로 피어나겠지만
그런 것쯤, 슬픈 영화의 주인공처럼 양복 주머니에 편지인 듯
접어 넣어 두리라 생각했다
몸이 가지 않은 길을 마음을 세수시켜 푸른 들길 나서면
어느덧 내 옷은 이슬에 젖어있고
옷깃의 어디엔가 들새울음이 높은음자리표로 묻어있으리라 생각했다
가장 여린 꿈이 가장 더디게 익는다는 말을 믿으며
내 몸 맡겨 마음대로 병과 친해 보는 일
내 마음 맡겨 몸만큼 아픔을 사랑해 보는 일
그런 꿈도 꿈이라면 때로는 아름다운 것이 되지나 않을는지
나뭇잎이 힘껏 껴안았던 햇빛 쪽에서 제 먼저 붉어질 때
나는 이제야 에테르냄새 나는 병의 방문을 받고
벤자민 나무그늘의 벤치에 앉아
추억처럼, 노래처럼 어릴 적 꿈을 다시 꾸나니
그것은 아직도 내 삶이 걸어가 닿을 길이
더 남아 있다는 것이겠지
그러면 내 꿈이 다시
말매미 높이 우는 푸른 숲으로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이겠지
여자를 위하여
너를 이 세상의 것이게 한 사람이 여자다
너의 손가락이 다섯 개임을 처음으로 가르친 사람
너에게 숟가락질과 신발 신는 법을 가르친 사람이 여자다
생애 동안 일만 번은 흰 종이 위에 써야 할
이 세상 오직 하나 뿐인 네 이름을 모음으로 가르친 사람
태어나 최초의 언어로, 어머니, 라고 네 불렀던 사람이 여자다
네 청년이 되어 처음으로 세상에 패배한 뒤
술 취해 쓰러지며 그의 이름 부르거나
기차를 타고 밤 속을 달리며 전화를 걸 사람도 여자다
그를 만나 비로소 너의 육체가 완성에 도달할 사람
그래서 종교와 윤리가
열 번 가르치고 열 번 반성케 한
성욕과 쾌락을 선물로 준 사람도 여자다
그러나 어느 인생에도 황혼은 있어
네 걸어온 발자국 세며 신발에 묻은 진흙을 털 때
이미 윤기 잃은 네 가슴에 더운 손 얹어 줄 사람도 여자다
너의 마지막 숨소리를 듣고
깨끗한 베옷을 마련할 사람
그 겸허하고 숭고한 이름인
여자
어떤 이름
어떤 이름을 부르면
마음속에 등불 켜진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나지막하고 따뜻해서
그만 거기 주저앉고 싶어진다
애린이란 그런 것이다
어떤 이름을 부르면
가슴이 저며온다
흰 종이 위에 노랑나비를 앉히고
맨발로 그를 찾아간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는 없다
연모란 그런 것이다
풀이라 부르면 풀물이, 불이라 부르면 불꽃이
물이라 부르면 물결이 이는 이름이 있다
부르면 옷소매가 젖는 이름이 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어떤 이름을 부르면 별이 뜨고
어떤 이름을 부르면 풀밭 위를 바람이 지나고
은장도 같은 초저녁별이 뜬다
그리움이란 그런 것이다
부를 이름 있어
가슴으로만 부를 이름 있어
우리의 하루는 풀잎처럼 살아있다
빨간 자전거를 타고 산모롱이를 돌아가고 싶다
산들이 양떼처럼 엎드린 골을 지나
빨간 자전거를 타고 산모롱이를 돌아가고 싶다
귀속에 해바라기를 피워놓고 기다리는
박꽃 같은 사람들을 찾아
이 세상 가장 순하고 여린 마음을 지닌 우체부가 되어
산모롱이를 돌아가는 페달을 밟고 싶다
새록새록 숨 쉬는 싸리나무의 숨소리를 듣고
둔덕에 피어오른 자운영 꽃망울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싸락눈같이 흰 꽃들과도 눈 맞추는
우편배달부가 되어 살고 싶다
살구꽃이 치약처럼 피어나고
햇볕이 타월처럼 빨랫줄에 걸리면 더욱 좋으리라
두 달 치 월급을 받지 않아도
마음 그리 야위지 않고
가다가 돌멩이에 눌린 풀잎 하나도 일으켜놓고 가는 사람
도랑물을 건널 때 피라미들이 발목을 간질이면
마음은 더욱 즐거우리라
엉겅퀴 새 잎 돋는 산굽이를 돌면
거기 채송화에 물 주던 손을 놓고
빨간 자전거를 바라보는 새댁도 있으리라
사립문에 기대서서 내가 전해주는 하얀 봉투를 받아드는
새댁의 얼굴에는 아직 홍조가 남아 있으리라
편지를 받아드는 새댁의 손이 무처럼 희리라
말하지는 않지만 나는 그녀의 눈썹 사이에 번지는
근심까지도 읽을 수 있으리라
그러면 내 그녀 대신 그녀의 근심 몇 자 적어
아직도 우엉 밭에 물주고 있을 친정어머니께 전하리라
그때의 자전거 바퀴자국은 소낙비가 올 때까지는
지워지지 않으리라
산그늘이 길을 덮을 때까지는
새댁의 눈에 빨간 자전거가 지워지지 않고 있으리라
낡은 가방에 든 편지들은
저마다 닿고 싶은 대문이 있으리라
대문에 편지가 꽂힐 때마다
집들은 하얗게 웃고
처마들은 더욱 나즉해지리라
그때마다 보자기만한 뜰에는
아기 입술 같은 채송화가 피리라
들꽃처럼 따뜻하고 햇빛처럼 환하게 사는 길이
거기 있음을
빨간 자전거를 타고 모롱이를 돌아보면 알리라
갈 때 무거웠던 편지가방 돌아올 땐 기쁨으로 가벼워지리라
어깨에 내리는 저녁햇살이 산새처럼 정겨운,
노래하지 않아도 온몸이 노래로 적셔지는,
빨간 자전거를 타고 산모롱이를 돌아가는
우체부가 되어 살고 싶다
눈 오는 밤에는 연필로 시를 쓴다
눈 오는 밤에는
이 세상 가장 슬픈 시를 읽고 싶다
슬픔이 아름다워 차마 페이지를
넘길 수 없는 시집을
헌책방에 가서 오백 원 주고
사 온 옛날 시집을 다시 꺼내 읽고 싶다
종이 썩는 냄새가
조금은 코에 거슬리지만
그것이 추억의 냄새라 생각하면 오히려 즐겁고
떨어져나간 책 귀퉁이의 구절이
새록새록 상상의 움을 내미는
책상을 정리하다 나온
흑백사진 같은 시집을
눈 오는 밤에는 내가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이 되어 읽고 싶다
전화도 티브이도 없는 곳이면 더 좋겠다
캄캄함이 하얗게 빛나는 외진 곳으로
먼 나라 사람 지바고처럼 털모자를 눌러 쓰고
걸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펑펑 눈 오는 밤에는
잊혔던 호롱불 심지를 올리고
불빛이 흐려 글자가 잘 안 보이는 작은 방에서
지금은 죽은 작가가 쓴
이별이 아름다운 소설을 읽고 싶다
실패가 아름다운 연애
슬퍼서 아름다운 소설을
한기가 찾아들면
면내복을 꺼내 입고 외투를 껴입고
누군가가 창을 두드려도
못 들은 척 책읽기에만 몰두하고 싶다
눈 오는 밤은 시골 교회 뒷담
기다리다 기다리다 그만 돌아설까 망설이다
작은 그림자로 나타나던
처음 닿던 입술이 인둣불이던
소녀를 만나고 싶다
슬프지 않은 추억은 추억이 아니다
그때의 가슴이 손수건처럼 펄럭였다고 쓴다 한들
풋순 같은 그 가슴을 누가 탓하랴
눈의 살은 희고 눈의 빛은 부드럽다
눈 오는 밤에는 옛날의 책들
조르즈 상드니 버지니어 울프
샤롯 브론테니 알프렛 테니슨,
읽으면 금방 한숨이고 눈물인
김소월이니 백석이니
그런 이름을 A4용지 다섯 장에
덧없이 끄적거리고 싶다
펑펑 문풍지에까지 눈이 차오르면
갈 곳도 없이 자꾸 목이 긴 양말만 갈아 신어보고
혼자서 뒤척거리며
쓸쓸함을 생밤처럼 깨물기도 하고
그리하여 마침내 눈 오는 밤은
티브이도 안 켜고 전화도 안 받고
그것이 꼭 태고의 말일 수밖에 없는 시를
새로 깎은 4B연필로 쓰고 싶다
눈을 목화송이에 비유한 최초의 사람의
눈보다 더 희고 깨끗한 사람의 마음을
하이얀 종이에 눈의 물을 찍어 쓰고 싶다
일생 시를 써도 눈 오는 밤 아니면 쓸 수 없는 시를
마음이 부르는 대로 받아쓰고 싶다
첫댓글 수고 많으십니다
작은 이름 하나라도 신청합니다
감사합니다 명희선생님..
다른 분들 언능 신청 기다립니다
풀잎 할게요
정지홍선생님-구름에 대한 명상
정영옥 선생님 -산사수수화화초초
신청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정옥 어떤이름 신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