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의 구성과 그 배치에 담긴 의미 -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한국불교건축의 구성 - 그 통불교적 교리 1. 서론 2. 한국 불교약사와 건축사 3. 조선 사찰의 건축적 조건들 4. 통불교 사찰의 殿閣構成 5. 건물 구성의 위계, 원리 6. 결론 - 동심원적 삼단형식의 의미 1. 서 론 사찰건축의 가람배치 형식은 주로 형태학적 차원에서 연구되어 왔다. 그러나 형태학적 접근은 결과적인 건축형상을 묘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의 발생과 변화에 대한 근본적 원인을 밝히지는 못한다. 또한 사찰건축이 가지는 근본적 기능, 즉 불교의 종교적 의례를 위한 건축이라는 본질적 내용에는 접근하지 못한다. 본 연구에서는 불교의 내재적인 관점에서 교리의 변화와 건축형식 사이의 관계를 추적하려 한다. 종교적 기능을 충족하기 위해 불교사원의 건축가들은 敎理의 표현과 수도 생활의 儀禮를 구성의 기본 원리로 삼았다. 그러나 교리와 의례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가변적인 것이어서, 사원 구성의 원리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조선조의 경우, 불교계가 처한 특수한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독특한 구성 형식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의 사찰들은 通佛敎 특유의 교리를 기본 원리로 삼고, 각 사찰이 처한 지형의 상황에 따라 변형을 구사했다. 본 논문은 조선조의 통불교 교리를 중심으로 이 시대 사찰건축의 구성 형식의 원리를 규명했다. 따라서 개개 사찰의 지형적 변형과 개별성은 이후의 연구로 미루고, 보편적인 원리만을 추론하려 한다. 2. 한국 불교약사와 건축사 2-1. 불교의 도입과 교학적 건축 (4-8세기) 세나라가 중국과 인도에서 수입한 불교는 고대국가의 통치 이념이 될 수 있는 교학 불교였으며, 특히 戒律學의 엄격한 교리 체계였다. 왕권을 상징하는 탑을 중심으로 1탑1금당 또는 1탑3금당 건축형식이 엄정한 기하학적 체계를 따라 배치되었다. 신라의 통일을 기점으로 교학불교는 계율학에서 점차 문화적 정치적 통합을 위한 華嚴學으로 중심이 이동되었다. 7세기 이후에는 탑 중심의 원칙이 허물어지고, 금당이 중심이된 쌍탑식 가람배치가 성행했다. 2-2. 禪佛敎의 도입과 다양한 건축적 실험들 (9세기) 중앙 집권 귀족들의 교학 불교에 대항해 지방 토호들과 민중계급은 禪佛敎를 옹호했다. 선불교는 중세국가인 고려의 개국에 사상적 군사적 도움을 주었고, 교선 양 파가 병존하는 고려시대 불교계의 구도를 정립했다. 사찰은 점차 승방부, 대민 활동부 들이 부가되어 하나의 건축적 複合體로 성장했고, 지방의 산지사찰이 발달함으로써 더욱 다양하고 자유로운 가람형식이 가능해졌다. 2-3. 宗派佛敎와 종파적 건축형식 (10-14세기)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한 불교 세력은 수많은 종파를 형성하며 분열의 양상을 띤다. 특히 강력했던 4대 종파는 교종의 華嚴宗과 諭伽宗, 선종의 天台宗과 曹溪宗이었다. 그들은 각각 華嚴 彌勒 阿彌陀 法華信仰의 체계를 발전시켰고, 각 종파와 신앙체계에 따라 고유한 가람구성 형식들이 분화 발달했다. 2-4. 通佛敎시대, 통불교 건축형식 (15-19세기) 본 논문이 주제로 삼는 시대다. 조선 왕조의 억불책으로 불교 세력은 급격히 축소되어 여러 종파들은 통합되거나 사라져 버렸고, 결국 無宗無派의 산중불교 시대가 도래했다. 여러 종파의 고유한 신앙은 서로 섞이고 변형되었다. 종파적 사원의 건축적 특질들 역시 약화되는 동시에 혼재되면서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나갔다. 2-5. 현대불교와 도시사찰형식 (20세기) 이 시대의 불교적 과제는 현대화, 도시화로 요약된다. 기독교의 급속한 전파와 산업사회의 전개로 전통적인 산중불교는 도시 포교의 요청에 직면한다. 그러나 불교건축은 아직도 전근대적 건축형식을 벗어나지 못하여 발전된 현대건축의 성과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불교 고유의 사상과 기능을 담지 못하는 매우 절충적인 형식들만을 답습하고 있다. 3. 조선 사찰의 건축적 조건들 3-1. 입지의 제약과 중심의 통합 조선조 이전의 사원은 도시와 지방에 이원적으로 분포했다. 도시사찰은 예배소로서의 기능이 강했고, 교종의 영향 아래 놓였다. 평탄한 도시의 한 블록의 대지에 기하학적으로 구성되었다. 반면 지방 사찰들은 깊은 산 속 경사지에 위치하여 수도원으로서 역할했고, 참선과 집단적으로 수도하는 선종에 가까왔다. 유교왕조인 조선조에 들어서 도시의 평지사찰들은 모두 철거되었고, 깊은 산 중의 산지사찰들 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지방의 산지 사찰들은 수도원의 기능 외에도 일반 신도들을 위한 예배소의 기능을 확장해야만 했으나, 경사지와 산중 좁은 대지의 제약으로 인해 대지를 적절히 이용할 수 있는 새로운 구성 방법이 요구되었다. 즉 대지 효율을 높이기 위해 하나의 중심을 설정하여 배치의 체계를 갖추는 일이었고, 경사를 이용하여 각 건물들의 위계를 설정하는 일이었다. 3-2. 사원경제의 빈곤과 마스터플랜의 부재 지배층인 유교의 엘리트들은 불교를 이단으로 취급하였고 승려들을 노예층으로 격하시켰다. 주된 재정적 후원자였던 귀족층과 왕족들이 불교를 탄압하는 세력으로 둔갑함으로써 불교는 심각한 재정적 궁핍에 직면했다. 불교에 경제적으로 헌신하는 세력은 기껏해야 가난한 농민들과 아녀자들 밖에 없어서 승려들의 생계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대규모 사원의 건축공사는 불가능했고, 기존의 건물들도 황폐화됐다. 14세기에 2,800개소에 달하던 사찰은 16세기에 250개소로 축소될 지경이었다.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불교 사원은 90% 이상이 파괴됐다. 그러나 승군들이 자발적으로 빛나는 전공을 세움으로써, 전쟁이 끝난 후 정부는 정책을 변경하여 불교의 중흥을 묵인할 수 밖에 없었다. 수많은 사원들이 재창건되었고 대다수 건물들이 복원되었다. 이 대역사의 후원자들은 지역의 소지주들과 다수의 농민층이었다. 그들은 종교를 위해 일시에 거액의 재정을 동원할 수 없었고, 따라서 거의 모든 사찰은 일시에 지어질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사찰들이 짧게는 수십년, 길게는 200년에 걸쳐 조금씩 확장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한순간에 완성된 마스터플랜이란 무의미했고, 정해진 마스터플랜 없이 그때 그때 지형과 재정 여건에 따라 임의적인 배열을 해야했다. 조선조의 사찰배치가 기하학적 배치를 따르지 않고 일견 자유로운 배열을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3-3. 교리의 변화 제도적으로 종파 간의 구별이 없어짐으로써 교리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또한 신도 층이 민중화하고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낮아져, 난해한 기존의 교리체계는 더욱 쉽고 직접적인 내용으로 바뀔 것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추상적 우주론적으로 전개되었던 화엄경 중심의 기존 교리가 다시 석가모니 중심의 원초적 실제적 차원으로 회귀했다. 종파 간의 구별은 물론 禪敎 간의 구별도 없어지고 하나의 복합 교리로 통합되는 바, 이를 通佛敎라 부르고 그 중심이 되는 경전은 법화경이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종파적인 건축형식들은 축소 통합되어 또 다른 형식을 구성하기 시작한다. 4. 통불교 사찰의 殿閣構成 4-1. 殿閣들 불교사원은 승려들의 수도생활을 위한 수도원 부분과, 일반 신도 또는 승려들의 예불을 위한 에배용 전각들로 이루어진다. 여기서는 예배부분의 교리적 체계만을 다룬다. 한국 불교의 신앙대상은 불-보살-나한-신중들이었다. 그들은 十法界에서 인간 이상의 존재들이었다. 한국의 종교건축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한 건물이 한 방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각 신앙 대상은 자신의 건물을 가지게 되고, 다시 신앙의 위계에 따라 건물 질의 위계와 배치의 위상이 결정된다. 물론 교리체계의 혼란과 지형적 제약 등으로 그들 간의 구별이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크게 3개의 그룹, 上壇 中壇 下壇으로 나누어진다. 上壇의 건물은 여러 부처들의 예배소이며, 사찰 구성 중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中壇의 건물은 보살들과 나한들을 예배하며, 상단 건물의 옆이나 뒤에 놓이게 된다. 下壇의 건물은 불교 혹은 토착종교의 여러 잡신들을 예배하는 곳으로 민중 신앙과 관계가 깊다. 하단의 건물들은 규모가 작고 질도 떨어지며 사찰의 가장 구석지에 위치하지만, 풍수의 체계에서는 중요한 지형적 위치에 설치하고 일반 신도들의 인기도 아주 높았다. 일반적인 예배소들은 4-2,3,4항과 같지만, 가장 보편적인 것들은 상단의 대웅전, 중단의 영산전, 하단의 산신각들이다. 다시 말하면 多佛信仰에서부터 석가모니 신앙으로 회귀한 점과 한국 고유의 산신신앙이 결부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불교 신도의 주류가 민중계층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4-2. 上壇의 건물들 (佛壇) 1) 大雄殿 주불전 가운데 조선시대에 가장 유행한 건물이다. 석가모니는 위대한 인물(大雄)이기 때문에 대웅전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 석가모니 단독불상을 안치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좌우에 협시불이나 협시보살과 함께 삼존불로 신앙된다. 규모는 3×3칸이 일반적이고 5×4칸의 대규모 건물도 있다. <法華經>에 근거를 둔다. 2) 大寂光殿 또는 毘盧殿 <華嚴經>에 근거를 둔 화엄계 사찰의 주불전이다. 비로자나불은 모든 부처의 근본이고 으뜸이며 많은 협시불을 동반한다. 따라서 5×4칸의 대규모 건물이 많으며, 사찰의 주불전이 될 때는 대적광전, 부불전이 될 대는 비로전 혹은 화엄전으로 불리운다. 3) 藥師殿 약사여래는 병을 치료해 주고 고통을 덜어주는 현실적 필요의 부처다. 약사의 세계는 동쪽 정유리정토이며, 일광 월광보살은 좌우에 동반한다. 조선조에는 대웅전의 부불전으로 많이 신앙되었다. <藥師如來本願經>에 근거를 둔다. 4) 極樂殿 또는 無量壽殿, 彌陀殿 대웅전과 함께 조선조 2대불전을 이룬다. 아미타불은 서쪽 극락정토를 주관하는 내세의 부처이다. 좌우 협시보살로 대세지, 관음보살을 동반한다. <淨土三部經>에 근거를 둔다. 5) 龍華殿 또는 彌勒殿 미륵은 미래에 재림할 메시아이다. 따라서 현실 개혁을 희구했던 민중들이 인기리에 신앙했던 대상이다. <彌勒三部經>에 근거를 두며, 미륵불상은 흔히 서서 설법을 하는 형상을 취하므로 높은 내부공간이 필요해서 2-3층의 외관을 이룬다. 4-3. 中壇의 건물들 (菩薩壇) 1) 羅漢殿, 應眞殿 석가의 16제자를 예배하는 건물이다. 석가가 중앙에 위치하고 양 편에 8구씩의 나한상이 놓여진다. 석가모니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영취산에서 설법 하는 광경을 재현하고 있다. 2) 捌相殿, 八相殿 석가의 생애 가운데 대표적인 8장면을 그려 예배하는 건물이다. 제단 중앙에 석가 단독불을 안치하고 양 옆에 4폭씩 그림을 건다. 대웅전과 함께 중요한 법화신앙의 건물이다. 3) 冥府殿 죽은 후의 지옥세계에 가는 영혼들을 구제하기 위한 예배소이다. 명부의 신앙은 원래 인도의 地神신앙에서 유래하였지만, 조선 민중들의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제단 중앙에 지장보살이, 양 옆으로 5구 씩의 명부 10대왕상이 앉아 있다. 4) 圓通殿 또는 觀音殿 중생의 고통과 원망의 소리를 들어준다는 관세음보살을 예배하는 건물이다. 중단에 속하는 건물이기는 하지만 소수의 사찰에서는 주불전이 되어 상단의 위계를 갖기도 한다. 5) 기타 菩薩殿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예배하는 文殊殿, 普賢殿 등이 있으나, 조선조에는 그다지 흔치않다. 4-4. 下壇의 건물들 (神衆壇) 1) 神衆門들 - 天王門, 金剛門, 仁王門 사찰의 출입구 역할을 하는 동시에 신중들에 대한 예배소의 기능을 겸한다. 이전 시대에는 독립된 예배용 건물이었으나, 축소기의 조선조에는 문과 예배소가 합쳐졌다. 일반적으로 천왕문이 설치된 곳부터 사찰의 신앙적 영역으로 인식한다. 2) 七星閣 칠성신은 중국 道敎에서 연원된 신들이지만 불교화되어 신앙된다. 제단에는 彫像이 있는 것이 아니라, 7명의 칠성신과 주존인 북극성신의 그림이 걸려있다. 3) 獨聖閣 獨聖이란 불교 전래 이전에 태어나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성자이다. 1×1칸의 작은 규모의 건물에 노인 형상의 그림을 그려 예배한다. 4) 山神閣 山神은 韓國 고유의 地神이다. 불교가 민중화 되면서 산신각이 중요한 예배소로 설치되었다. 규모는 가장 작은 건물이지만, 예배의 빈도가 아주 높고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놓여진다. 5) 三聖閣 칠성-독성-산신의 세 전각을 하나의 건물로 모아 놓았다. 이 3신은 모두 민중적 기반을 가져 서로 잘 구별되지 않는 대상들이기 때문에 작은 사찰에서는 하나의 건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5. 건물 구성의 위계, 원리 경남 고성군의 玉泉寺의 예로서 조선시대 통불교 사찰건축의 전형을 보여준다. 5-1. 중심 佛壇의 구성 舍利신앙이 쇠퇴하여 탑의 중심적 의미가 약화되고, 사원 경제의 침체로 말미암아 여러 예배 영역들이 축소 단일화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 또한 법화신앙으로의 회귀는 사바세계와 정토가 분리됐다는 이원론적 세계관으로 부터 '沙婆卽淨土'의 一元論으로 바뀌어, 대웅전을 중심으로 단일영역을 구성하는 것이 일반화됐다. 중심역은 북쪽에 大雄殿, 동쪽에 僧房, 서쪽에 講堂, 그리고 남쪽엔 樓閣을 세움으로써 위요된 영역을 이룬다. 상징적으로는 대웅전이 중심이 되지만, 실제적으로는 4건물로 둘러싸인 빈 마당이 중심이 된다. 중심역의 僧房은 중요 승려들의 거처일 뿐 더러 일반 신도들을 접객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講堂은 승려사회 내부의 설법과 강론을 위한 곳이다. 강당과 승방은 동-서향이기 때문에 중심 마당을 형성하기에는 유리하지만, 주거로서의 일조는 불리하다. 따라서 남향의 날개채를 달아 두 건물 모두 ㄷ자 혹은 口자형으로 구성된다. 두 건물은 각각 내부의 중정을 가지며, 중심 마당 쪽에는 공동실을 두어, 의례적인 기능을 수행하며, 내부 마당에 면해서는 개실을 두어 승려들의 거처와 수도공간으로 이용한다. 佛殿-僧房-講堂의 건물 구성은 佛-法-僧의 三寶가 하나로 귀일하는 신앙의 상징이기도 했다. 三寶歸一은 법화신앙의 핵심이며, 이를 건축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동시에 경제적 기능적 요구를 수용한 복합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중심역 남쪽에 놓이는 樓閣은 2층으로 구성되며, 아래로는 출입구의 기능을 위로는 일반 신도들의 집회소인 복합건물이다. 조선조 사찰 대부분이 경사지에 위치하기 때문에, 경사를 흡수할 수 있는 유리한 건물의 유형이기도 하다. 조선조에 특히 루각 건설이 유행했는 바, 이는 경전 상에 "불국토는 많은 루각들로 이루어졌다"는 설을 수용한 결과이고, 또한 유교 엘리트들이 말을 탄채 중심영역 안으로 침범하는 불손을 막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다. 5-2. 菩薩壇과 神衆壇의 구성 조선조 사찰에서 이 4건물로 이루어지는 중심 마당은 최소한의 구성 요건이었다. 빈곤한 경제력 때문에 사찰의 모든 건물이 동시에 지어지지 못한 당시의 현실적 제약은, 일차적으로 중심불단을 구성하고, 형편에 따라 오랜 기간에 걸쳐 여타의 다른 예배소들을 건설해 나갔다. 그러나 추후에 건설되는 예배소들은 중심 불단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었고, 일정한 위계적 원리에 따라 지어질 장소가 정해졌다. 보살단과 신중단의 건물들은 불단의 건물군보다 중심에서 더 먼 거리에 위치한다. 이 거리는 절대적 거리가 아니라 시각적이며 감각적인 거리이다. 단일 영역으로 전체 사찰이 구성되기 때문에 불단과 보살단과의 거리가 멀어질 경우, 각 예배소 간의 연결이 어려워진다. 따라서 실제 그들 간의 거리는 시각적 인식이 가능한 한계 내에서 설정된다. 그러나 앞의 중심 불전과 뒤의 여타 예배소들이 겹쳐짐으로써, '중첩 효과'에 의해 상대적인 거리감을 유도한다. 중심 영역의 4건물 사이의 틈새로 부불전들을 면하게 함으로써 마당의 중심에서 볼 때 주불전은 정면으로 면하게 되지만, 여타 예배소들은 빗면으로 면하게된다. 중심축선 상에 주불전을 배치하여 정면성을 강화하며, 주불전 뒤 축선상에는 극히 중요한 건물이 아니면 배열하지 않는 원칙을 지킨다. 조선 사찰들은 깊은 산 속 경사지에 입지함으로써, 수직 레벨 계획이 극히 중요한 부분이다. 계획의 첫단계는 경사지를 몇단의 평지로 조성하는 것이다. 중간의 가장 넓은 단에 중심 불단을 위치시키며, 그 윗단에 보살단을, 가장 높은 단에 신중단의 건물들을 위치시킨다. 윗단으로 갈수록 건물의 규모는 작아져서 주불전의 위세를 방해하지 않는다. 5-3. 同心圓的 三壇形式 중심 불단의 앞 부분은 예배건물을 배열하지 않고, 진입공간으로 설정된다. 진입부에는 몇개의 문들이 배열되는 바, 가장 바깥에서 부터 아래와 같이 배열된다. 1) 사찰의 경계를 나타내는 一柱門 2) 사찰 수호신을 봉안한 天王門 3) 승려들의 깨달음을 유도하는 不二門 一柱門은 속계와 성계의 경계에 위치한 문으로 특별한 신앙적 위계를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天王門은 신중단의 건물이고, 不二門은 보살단의 건물이어서 그 위치와 신앙적 상징에 따라 위계화된다. 여러 문들을 다른 불전들의 신앙적 위계와 연결해 본다면, 상단-중단-하단의 세개의 개념적 동심원을 이룸을 알 수 있다. 중심불단을 하나의 원으로 치환한다면, 보살단에 속하는 예배소들은 그 바깥 원주 상에 위치하게 되며, 신중단의 건물들은 더욱 바깥 원에 위치한다. 이같은 세겹의 동심원의 구조는 다분히 개념적이었다. 구체적인 건물군의 배열은 마당 중심에서의 상대적 거리, 정면성과 피면성, 그리고 수직 레벨의 차이에 의해 실현된다. 6. 결론-동심원적 삼단형식의 의미 조선사찰의 배치구조는 불교가 처한 정치 사회 경제적 제약과 이에 따른 변화된 신앙체계를 함축하고 있다. 원초적 신앙으로의 회귀현상은 건축적 구성인 동심원적 삼단형식이 불교 고유의 우주적 모델과 일치하는 결과를 낳았다. 具舍論의 須彌山 세계의 모델, 十法界의 모델은 모두 중첩된 원통들의 피리밋적 구성을 보여준다. 이를 평면적으로 전개한다면 중첩된 동심원의 구조를 이루며, 조선사찰의 배치구조와 일치한다. 이는 또한 만다라 도형의 중심성, 중첩성, 방사성의 성질과도 유사하다. 14세기까지 복잡하게 전개되었던 배치형식은 이제 하나의 유형, 하나의 단순한 구조로 축소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불교회화의 구도 변화와도 맥을 같이한다. 14세기 이전까지의 불화는 수직3분적인 구도를 보이지만, 15세기 이후의 구도는 부처를 중심으로 보살들과 신중들이 겹겹이 에워싸는 동심원적 구도로 전환된다. 사찰 구조의 틀과 동일하게 회화 구도가 변화되었다는 것은, 변화된 조선 불교의 세계관이 건축 뿐 아니라 다른 조형예술에도 일반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조선 사찰은 외래 종교건축으로서의 이국성을 탈피하여, 한국 고유의 성격을 획득한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 시기의 한국 건축계는 외국과의 교류가 거의 단절되어 가장 폐쇄적인 시기였다. 그러한 폐쇄성은 역설적으로 한국적 고유성을 형성하게 된 동인이 되었다. 그 폐쇄된 세계 안에서 한국 불교의 신앙과 건축은 자생적인 변화를 겪어 하나의 유형을 완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 유형의 건축적 완성도와 보편적 가치는 별개의 차원에서 평가해야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