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
설교자가 설교 도중에 히브리어와 헬라어,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을 나는 좋게 여기지 않습니다. 강단에서는 누구에게나 친숙한 쉬운 모국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궁정과 법정 같은 곳에서는 외국어나 어려운 전문 용어를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슈타우피츠 박사(Dr. Staupitz)는 학식이 깊은 사람이었지만, 그의 설교는 매우 장황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설교보다 차라리 평수사의 알아듣기 쉬운 설교를 더 좋아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칭찬과 호평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데모스테네스와 키케로가 사용한 고상하고 품위 있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쉽고 적당한 단어들을 사용하여 숭고한 내용을 전했는데, 그것이 훌륭한 태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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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은 교회를 해치는 큰 독입니다. 설교자들에게는 더욱 해로운 독입니다. 그것은 다 태워버리는 불입니다. 성경은 육체의 정욕을 멸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이용하여 세속적 명예를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사람들이 별것 아닌 것 가지고 자랑하고 교만한 것이 몹시 놀랍습니다. 인생은 죄 가운데 태어나 매순간 죽음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것이 상처의 딱지와 흉터가 아닙니까?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부정한 존재입니다.
루터, 『루터의 탁상담화』, p.155, 157.
첫댓글 현대 한국교회가 지금 들어도 좋을 분별이 있는 탁월한 글입니다.
공감해요. 명불허전입니다.
아래 말씀이 떠오르는군요.
"고전1:26-31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아멘!
아멘22
오늘날 교황주의자들 중에 거지나 다름없던 자들이 마치 복음을 위하여 많은 것을 희생한 듯이 자랑하고 으스대며 다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 조금만 헌신해도 그들 자신의 헌신을 터무니없이 부풀려서 자랑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경험상으로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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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9: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베드로는 은연중에 자기 자신을 비롯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세상을 좋아하여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간 "부자 청년"과 비교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모시고서 장래에 더 잘 된다는 보장도 없이 모욕과 괴로움들을 참으며 이리저리 떠도는 가난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베드로가 여기에서 그들이 이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께 헌신한 것이 아무 소용도 없는 헛일인 것이냐고 물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그들이 장차 더 좋은 것으로 보상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렸다고 했는데, 거기에서 “모든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는가?
왜냐하면, 그들은 아주 가난하고 미천하게 살아가던 자들이었던 까닭에, 그들에게는 "버릴" 집조차도 없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그들의 이러한 자부심과 자랑은 어이없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황주의자들 중에 거지나 다름없던 자들이 마치 복음을 위하여 많은 것을 희생한 듯이 자랑하고 으스대며 다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 조금만 헌신해도 그들 자신의 헌신을 터무니없이 부풀려서 자랑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경험상으로 잘 알고 있다.
← 존 칼빈, 『칼빈주석: 공관복음』
@장코뱅 칼빈의 위 설명은 언제 보아도 날카롭고 지혜롭습니다.^^
<호크마 주석>, 고전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 바울은 앞에서 논술한 내용을 바탕으로 고린도교회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려 한다. '부르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레신'(* )은 하나님의 주체적이고 동적인 모습이 강조된 말로서 (롬 11:29;엡 1:18) 고린도 교회의 부르심이 하나님으로 부터 왔음을 시사한다. 한편 '보라'의 헬라어 '블레페테'(* )는 문법상 직설법으로 볼 수도 있지만 본절에서는 명령형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Morris, Alford, Meyer).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능한 자가... 문벌 좋은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 '육체를 따라'의 헬라어 '카타 사르카'(* )는 '육체를 표준으로 삼아'라고 해석되는데, 대개 '육체'는 인성(人性)을 뜻하므로, 세속적인 관점으로 분별한다는의미가 된다. 이 문구는 '지혜있는 자', '능한 자', '문벌 좋은 자'에 모두 적용된다.'지혜 있는 자'(* ,소포이)는 헬라의 철학자들처럼 높은 교육을 받은 지적인사람들을 가리키고 '능한 자'(* , 뒤나토이)는 정치적인 권력을 가진 자를 의미하며, '문벌 좋은자'(* , 유게네이스)는 사회적으로 상류 계급에 속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바울은 이 세 용어를 사용해서 지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유력한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 대부분이 상류 계급에 속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이러한 외적인 조건에 근거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장코뱅 설명이 풍부합니다. 첨부 감사합니다.
루터의 글은 언제나 믿고 읽을 만합니다.
바울이 쉽고 적당한 단어들을 사용하여 숭고한 내용을 전했다는 설명이 마음에 쏙 와닿습니다. 설교자들이 헬라어, 히브리어를 사용하여 현학적인척 하는 설교가 자기 자랑과 허세라는 걸 루터도 간파한 걸 보니 루터가 요즘 사람 같이 느껴지고 역시나 하게 되네요!
설교자들의 야심, 성경을 이용하여 세속적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 교회를 해치는 독이 된다는 것이 특히 요즘 한국의 목회자들에게 양약이 되는 좋은 말씀이네요.
네, 매우 공감합니다ㅠㅠ
위에서 좋은 댓글을 써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