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기원
인간은 어려운 환경에 놓일수록 무엇인가를 믿고 의지하며 견뎌내는 힘을 얻는다. 그것이 종교적인 신앙이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든 크게 다르지 않다.
삶이 절망의 벼랑 끝에 다다랐을 때, 인간은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찾아 두 손을 모은다. 어쩌면 믿음은 인간이 고통 속에서 발견한 가장 오래되고 간절한 희망인지도 모른다. 특히, 자식의 아픔과 고통을 지켜보는 부모들이 느끼는 믿음의 강도는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방금 미국 버팔로에 사는 남동생의 소식을 들었다. 태어날 때부터 심각한 뇌질환을 앓아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말조차 하지 못하는 딸아이를 데리고 무려 사흘 동안 운전하여 휴스턴에 도착했다고 한다. 텍사스 아동병원에서 6주 동안 진행되는 FOXG1(여우증후군) 치료제 임상시험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 부모가 감내했을 고통과 희생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작은 변화에도 가슴을 졸이고, 희미한 가능성에도 마음을 걸며, 밤낮없이 딸아이의 앞날을 걱정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그동안 버팔로 대학에 연구소를 세우고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치료제가 까다로운 절차와 과정을 거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제 막 가느다란 치료의 가능성을 열어주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그 시발점에 선 것이다.
더욱 가슴 뭉클했던 것은 이제 열네 살인 남동생이 누나의 임상시험이 잘되기를 빌며 빅터 E.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인용했다는 사실이다. 다음은 떠나는 아빠에게 쓴 편지로 어린 소년의 깊고 따뜻한 사유의 심성이 잘 드러나 있어 울컥하였다.
Viktor E. Frankl was an influential phycologist who survived the Holocaust. In his memoir “Man’s search for meaning”, Victor argues that the reason he and the people who endured the holocaust survived was because of HOPE, and that humans can survive any amount of suffering if they have a clear sense of purpose.
(빅터 E. 프랭클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영향력 있는 심리학자이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인 『죽음의 수용소』에서 자신과 다른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희망”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프랭클은 인간이 삶의 분명한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아무리 극심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이를 견뎌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인간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때 어떤 어려움과 고통도 견뎌낼 수 있다는 어린 소년의 깨달음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누나의 아픔을 자신의 일처럼 받아들이고, 책 속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그 순수한 마음이 참으로 대견하고 애틋하였다.
그동안 안타깝게 바라만 보던 누이와 몇 마디라도 이야길 나누고, 둘이서 손을 마주 잡고 한국에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본다.
돌이켜보면 믿음은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만은 아니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내일을 기다리는 마음이다. 고통을 없애주지는 못하더라도 고통에 무너지지 않게 하고, 결과를 보장하지는 못하더라도 다시 한 걸음 내딛게 하는 힘이다. 그러기에 믿음의 뿌리는 어쩌면 인간을 향한 사랑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번 임상시험이 성공하여 희귀질환으로 고통받는 아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열리기를 바란다. 오랜 시간 연구에 헌신해 온 의료진과 연구자들에게도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아울러 희귀질환을 앓는 소수의 환자에게까지 치료의 가능성을 열어주기 위해 엄청난 비용과 시간을 투자하는 미국 사회의 관심과 포용에도 뜨거운 감동의 박수를 보낸다.
오늘도 나는 마음을 모아 기도한다. 사랑하는 조카에게 작은 기적이 찾아오기를, 그 기적이 수많은 환자와 가족에게 희망의 문을 열어주기를. 그리고 세상의 모든 고통받는 이들이 끝내 희망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믿음은 기적이 일어났을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기적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도 희망을 놓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2026.10.11.작성/10.14.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