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빈 최씨는 원래 숙종의 왕비였던 인현왕후를 모시던 무수리였다. 1689년 인현왕후가 폐비되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희빈 장씨가 왕비가 되자 인현왕후를 모시던 그녀는 모진 구박을 받았다. 날마다 인현왕후의 복위를 기도했는데, 어느 날 숙종의 승은을 입은 후 숙원을 거쳐 내명부 정1품인 빈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녀의 아들인 영조가 훗날 숙종과 경종에 이어 조선 21대 왕이 되었지만, 그녀는 왕비의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다. 희빈 장씨의 비극적인 일이 되풀이될 것을 두려워한 숙종이 궁녀에서 왕비로 오르는 것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영조는 오랜 재위 기간 동안 어머니 숙빈 최씨를 왕비로 추승하려고 노력했으며, 숙빈의 묘호를 육상궁, 숙빈묘를 소령원으로 격상시켰다. 보광사가 왕실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영조는 보광사를 소령원의 원찰로 삼고 대웅보전과 만세루 등을 중수했다. 그리고 매월 초 됫박고개를 넘어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 이 고개가 모자를 갈라놓는 것 같아 영조가 고개를 더 낮춰 파라고 하여 '더파기고개'라 불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