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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오늘도 거룩한 주님의 날에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의 삶과 가정과 새 가운데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앞뒤 좌우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도 말고 전하지도 말라는 메시지를 전해 듣게 된 초대교회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 앞에 직면한 문제로 인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이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아니하고, 이들이 한마음으로 소리 높여서 하나님 우리가 맡겨진 사명 전하는 일에 담대함으로 전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는 것이죠. 전하지 말아라 가르치지 말아라라고 하는 그 명령에 반하여서 오히려 하나님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 주셔서 전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는 거예요. 결국 이들은 기도 가운데 성령 충만함을 받게 되었고 두려움 없이 담대함으로 세상 가운데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당시 초대교회 공동체가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였는가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시는 공동체가 이 초대교회와 같이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가기를 소망하면서 함께 말씀을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32절에 보시면 초대교회의 두 가지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32절을 한번 읽어보십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첫 번째는 초대교회 같은 경우 믿는 자들이 하나로 연합하는 연합 공동체였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표현되어져 있는 한마음 한 뜻이라는 이 표현은 완전한 일치라는 히브리적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당시에 완전한 일치를 말할 때에 한마음 한 뜻이라고 표현했다는 것이죠. 따라서 이들은 전 인격이 하나로 연합된 공동체였다.
사실 교회 공동체가 우리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 되시고 우리 각 지체가 하나가 되어서 건물처럼 세워지는 그 공동체를 소망하는데 바로 그들이 이렇게 한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이렇게 바라보실 때에 무엇을 하면 가장 기뻐하실까요? 다양하게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면 공동체가 주님을 온전히 예배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겠죠 그 공동체가 정말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리는구나 내 마음이 흡족하다 그러면서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한 영혼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기도해서 그 영혼이 주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 나라에서는 잔치를 벌일 만큼 기뻐하신다고 그렇게 말씀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가 영혼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가운데의 삶에 짙어 낙심하고 있는 자들을 돌보고 구제하는 일들을 감당한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죠.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서로 함께 살 수 있도록 그 원리를 만들어 주 기 때문에 공동체는 서로 돕고 특별히 섬기고 구제하는 일에 있으면 공동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공동체가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위해서 열심히 섬기고 봉사할 때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 가지고 나에게 맡겨주신 이 사명을 최선을 다해서 내 있는 자리에서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공동체가 믿음 안에서 한마음 한 뜻이 되어질 때에 함께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거예요. 공동체의 원리죠. 나 혼자서는 할 수 없지 그러나 공동체로서 그 일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7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또한 예수를 믿는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 핵심 내용이 하나님 아버지 믿는 모든 자들이 한마음 한 뜻이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듯 그들도 우리와 한마음 한 뜻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했다는 것이죠.
요한복음 17장 21절 22절인데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같이 읽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하나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했다는 것이죠.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 되었던 것처럼 믿음의 공동체가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안에서 성령 충만하여 하나 되기를 우리 주님은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또한 빌립보서를 접하는 독자들을 위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어라. 이것이 빌립보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선포한 말씀이에요.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의 메시지를 주시는데 에스겔서 11장 19절 20절인데 뭐라고 말씀을 주셨는가? 우리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내
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여러분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이 언약적 메시지에 있어서 가장 우선시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마음을 주신다는 그리고 그 한 마음 가운데 뭐를 성령을 부어주셔서 굳어져 있는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게 하시겠다.
이게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는 일의 시작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여러분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먼저는 한마음이 되어야 된다. 우리 공동체가 하나가 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져야 된다는 것이죠. 그때 비로소 성령의 역사가 부어질 때에 이 한마음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실상 초대교회는 이 예언의 말씀을 그대로 접목한 것이죠. 이들이 한마음 한 뜻이 되어서 연합되었고 그래서 성령 충만함을 받게 되었고 그들은 그 충만함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가 한마음 한 뜻이 될 때에 다툼과 분쟁은 일어날 수가 없죠.
왜냐하면 여러분 빛이 임하면 어둠이 물러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마음으로 한마음 한 뜻이 되면요. 하나님의 평화와 사랑이 충만해지기 때문에 우리 안의 갈등,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들은 떠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한마음 한 뜻이 될 때에 약하지만 굉장히 약해 보이지만 그 공동체가 강한 힘을 발휘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당시에 초대교회 공동체는 그렇게 막 힘이 있는 공동체가 아니었어요. 이제 신설된 공동체예요. 막 주변에서 유대교 사람들이 저 사람들 뭐야 하면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런 공동체로 시작했단 말이죠.
또한 종교 지도자들이 사도들에게 했던 것처럼 협박의 말을 하면서 너희들 그거 하지 말아라고 막 제재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이 하나 되지 못했다면 어떻게 부응할 수 있었겠어요? 얼마 되지 않아 그 공동체는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에 유도 종교 지도자들이 그렇게 협박하며 대적자 가운데 있고 또한 로마라는 강력한 나라가 지배하는 그러한 가운데에 살면서도 초대교회가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이 교회가 오히려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초대교회 성도들이 한마음 한 뜻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최근에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 교회가 팬데믹이라는 큰 위기를 경험하게 되었죠. 이 위기로 인해서 실상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공동체도 있고요. 그래도 잘 버텼다 수고했다. 스스로 위로하는 공동체도 있고요. 반면 위기 가운데 부흥하는 공동체가 있더라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신은 공동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우리 같이 공동체인데 좀 그거 원해야 되지 않겠어요 우리 공동체가 별 볼 일 없는 공동체보다는 이왕이면 아름답고 하나님 보시기에 잘했다. 칭찬받는 공동체가 돼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소망한다면 여러분 우리에게 허락하신 믿음 안에서 한마음 한 뜻이 되어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양보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돼요. 그렇죠 내 주장만 자꾸 펼치면 그게 참 어렵다라는 것을 우리는 대화 속에서 늘 경험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그게 잘 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기도가 필요한 것 같아요. 하나님 이러한 마음을 우리에게 주셔서 한마음한 뜻이 되어서 주님의 마음으로 하나 되게 해 주십시오. 연약하잖아요. 그죠 우리가 다 연약하니까 그것 좀 도와달라고 그래서 우리 공동체가 초대교회처럼 한마음 한 뜻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로 세워지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
두 번째 초대교회는요. 단 한 사람도 자기 재산을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봅시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으로 자신의 물건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한다는 것은 쉬운가요? 어려운가요? 쉽지 않아요. 우리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요. 나 중심의 삶을 살기 때문에 내 것을 누구와 공유한다는 게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철저한 교통하심이 있지 않고서는 모든 물건을 통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서로 통용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 충만한 이들에게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고백이었냐면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만물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소유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즉 이 소유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그 고백에서 시작되었다는 거예요. 즉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이라는 고백. 이 고백을 하는 사람은요.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여러분 부유하고 평화로웠던 욥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때 했던 그의 고백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니 주신 분도 여호와이시오. 가져가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여러분 이 고백이 쉬울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물질의 은혜를 주시고 건강의 은혜를 주셨어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주셨어요.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건강 빼앗아가 물질 빼앗아가 살 용기 잃어버려. 그러면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 내가 태어날 때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빈손으로 가는 게 맞죠?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할 수 있어요. 쉽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가 할 수 있는 것이 그냥 우리가 그냥 말로만 이렇게 하는 거 말고요. 진짜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고 그러면 또 나에게 채워주실 것을 믿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 고백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여러분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변한다 할지라도 변하지 않는 분명한 사실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다. 이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이 누구시라는 거예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거 창세기 1장을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드셔서 사람에게 뭐라고 했어요?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해라. 그다음에 다스리라.
다스리라는 것은 뭐예요? 내 건데 너에게 위임할 테니 이걸 다스려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야 다스리는 거 그만하고 나한테 줘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줘야 되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 원리 가운데 우리에게 청지기적 사명을 주신 거죠.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 땅을 살아가면서 물질 주고 건강 주고 생명 주는 것은 이 땅을 다스리라는 청지기적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역을 감당하다가 주님이 때가 차는 시간 야 이제 그만해도 되겠다 하면 놓고 가는 거예요.
여러분 만약 청지기가 주인의 것을 자신의 것인 양 생생내면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옳은 모습일까요?
그렇지 않죠 어쩌면 자기 분수를 모르고 사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청직이라는 고백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셨구나라는 이 고백이 있을 때 비로소 욥의 고백처럼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어떤 상황 속에도 찬송할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생계를 위해서 필요한 만큼 재물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종의 신분일지라도 그 일꾼의 삭을 받는 것은 마땅한 것이잖아요. 그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이 삶 속에서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것을 일부 내 삶을 위해서 살 수가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 외에 넘치도록 부어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너 혼자 먹고 잘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서로 돕고 세우라고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신명기 24장에 보시면 내가 내 포도원에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떼지 말아라.
그렇게 말씀하셔 왜요? 개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서 남겨두어야 된다. 하나님의 원리가 거기에 있습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하면서 두 가지를 이야기해요. 하나님이 보실 때의 경건한 모습 두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첫 번째가 곧 고아와 과부를 환란 중에 돌보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드 그니까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두 번째 하나님과의 관계인데 그 관계도 중요하고 내 주변에 갯과 고아와 가구를 돌보는 이웃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죠.
신명기 14장 29절에 보면 이런 자가 복받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신명기 14장 29절 시작
너희 중에 분기이나 기업이 없는 내위인과 내 성 중에 교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손으로 하는 범사에 내게 복을 주시리라.
누가 복 받는다고요? 레위인과 성중에 거류하고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들이 배불리 먹게 하는 그 사람, 그 사람에게 손으로 하는 수고에 따라서 풍성함으로 채워주시겠다. 그렇게 약속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을 만물의 주인이라고 인정하고 자신이 천직이라는 사실을 믿으면서 청지기적 사명을 사는 사람이 하나님이 맡겨주신 이 풍성함으로 나만을 위해서 살아간다. 그리고 다른 성도는 핍절한 가운데 있는데 돌아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소유를 맡겨주신 그 천지적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참 주인으로 고백하고 이 신앙의 고백을 기초하여서 풍성하게 맡겨주신 것을 함께 나누며 세워가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 번째는 초대교회는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는 공동체였다라는 거 증언하는 공동체 33절에 보시면 초대교회는 사도들이 어떤 사역을 했는지를 기록해 주고 있는데 우리 33절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우리가 큰 은혜를 받아 큰 권능으로 증언한 것이 무엇이에요?
예수님의 부활, 부활, 이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증언하다는 이 헬라어는 증거를 되돌려갔다.
금요일날 오신 분들은 들으셨겠지만 복수하다는 개념 복수할 만큼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갚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증언하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들이 왜 복수의 심정을 가지고 그렇게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을까요? 복음에 빚진 자였기 때문에 그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이죠.
사도들뿐만 아니라 바울도 그러한 심정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로마서 1장 14절 15절에 보면 나는 그리스 사람들이나 미개한 사람들에게나 지혜가 있는 자에게나 어리석은 자에게나 다 빚진 자다 그렇게 말하면서 내 간절한 소망이 있는데 내가 속히 로마에 가서 여러분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록했다는 것이죠. 이처럼 사도들뿐 아니라 바울도 예수를 통해 받은 은혜의 빚을 갚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아니했다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그 현장을 본 사람들이고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또한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하셨다라는 이 놀라운 사실을 경험한 사람.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예수와 죽음과 부활, 이것으로 인해서 그 은혜의 빛을 갚기 위해서 복음의 사명을 감당한 것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사도와 바울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국한된 것입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우리도 오늘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이 자리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주님께로부터 갚기 어려운 큰 은혜를 이미 빚진 자로 살아가는 것이지 그렇잖아요.
우리 원래 영원한 형벌 지옥에 가야 될 존재 왜요?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 내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됐다.
얼마나 감사해요? 감사하십니까? 감사하십니까? 내 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는 거예요. 감사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요. 50%밖에 안 되는 거예요. 여기에다가 그것이 끝이 아니라 플러스 이제 영원한 생명이라는 놀라운 축복까지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100을 가진 게 아니라 200을 가진 거예요. 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더하여서 구원의 은총, 영원한 생명의 자리까지 우리를 인도하여 주셨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우리는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은혜를 생각하면 사실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갚을 길이 없는 큰 은혜라는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는 이 복음에 빚진 자라는 사실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우리가 살다 보면 사실 복음에 빚진 자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잖아요. 그러면 안 되고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그래 내가 복음에 빚진 자지 그래서 삶의 영역에서 열심히 일하는데 그 자리가 어떤 자리가 돼야 돼요?
복음의 자리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바울이 고백했던 그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사도행전 20장 24절 말씀을 큰 소리로 고백하도록 합시다. 시작.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증언하는 일이야말로 주님께 빚진 빚진 것을 갚는 데 최선의 방법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고 저와 여러분들이 이 사실을 동의하신다면 우리 신은 공동체가 이 복음의 빚진 공동체로서 복음의 사역을 위해서 함께 힘쓰고 노력하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도들이 이렇게 증언을 하니까 또한 사도들만 증언한 것이 아니죠. 그때 기도했던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담대하게 전하게 해달라고 했으니까 흩어져서 전했을 거 아니에요 전하게 되자 33절 뒷부분에 보니까 그 증언을 들은 무리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고 이야기해 큰 은혜를 그러니까 사도들과 제자들뿐만 아니라 기도했던 사람들만 은혜받은 게 아니라 이들이 전하니 전함을 받은 이들 또한 은혜를 입었다.
그래서 은혜받은 자의 삶이 초대교회의 네 번째 아름다움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그 네 번째 아름다움은 그들 가운데 궁핍한 자가 없었다는 거예요. 34절 앞부분을 보시면 그중에 가난한 삶이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가?
34절 35절을 보면 그 이유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4절 35절 같이 읽어봅니다.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급한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 발 앞에 두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먼저는요. 밭과 집이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어떻게 했다는 거예요? 사도들 발 앞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것을 가져다가 각 사람의 필요, 가난한 사람들을 쭉 살펴보고 그 필요에 따라서 잘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초대교회 공동체는 그냥 말뿐인 공동체가 아니라 자신들에게 맡겨주셨던 소유를 팔아서 실제 구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공동체였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마도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에 대해서 분명히 알았을 거예요. 그렇지 않고서는 할 수 없거든요. 이 땅의 가치도 중요하지만 이 땅의 가치보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을 거예요. 아마 사도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들었던 말씀들이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3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시작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소유를 팔아서 구제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낡아지지 않는 배낭이 있으면 어떤 배낭이 있다는 거예요? 낡아지는 배낭이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너희 낡아지는 배낭 말고 낡아지지 않는 배낭을 만들어라.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이 낡아지지 않는 배낭을 만드는 것이 뭐라는 거예요? 하늘의 보물을 쌓는 것이다. 이 땅에 보물을 쌓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보물을 쌓는 것이 배낭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맑아지지 않습니까? 왜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면 없어지지가 않습니까? 거기에는 뭐가 없다고요? 도둑과 좀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반대로 정리하면 재물을 도둑과 조 피해가 없게 하늘을 쌓아둘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자기 소유를 받아서 구제하는 것이다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땅의 보물을 아무리 많이 쌓아놓아 봤자 죽으면 단 하나도 가져갈 수가 없다는 것이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한 부자 이야기를 비유로 들었던 것입니다. 어느 부자가 농사를 지었는데 대풍년이 된 거예요. 막 이게 걷어도 걷어도 끝이 없는 농사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여러분 조금만 풍년돼도 기분이 억수로 좋잖아요.
근데 막 엄청난 풍년이 이 생각합니다. 이거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래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작은 곳간을 헐어서 큰 곳간을 짓자. 그리고 거기에다 차곡차곡 쌓아놓자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부자는 자신을 향해서 말합니다. 내 영혼아 내가 쓸 것 물건들 이제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그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내 영혼을 도로 찾으면 그러면 내 준비한 것이 무엇이 되고 여러분 아무리 잘 쌓아놔도요.
그것 내가 죽고 나면 하나도 가져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차려진 밥상이라 할지라도 생명이 없으면 먹을 수가 없는 거예요.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어도 죽음 앞에서 그 누구도요. 손에 움켜쥐고 갈 수도 없고 주머니에 담을 수도 없는 것이 재물이라는 거예요. 이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유한한 이 땅 가운데 보물을 쌓기보다 유한한 하나님 나라의 보물을 쌓는 참 지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 그런데 여러분 앞서서도 보았지만 하늘의 보물을 쌓으면 이 땅에 하나님께서 복 주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하늘의 보물을 쌓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지금 어디에다 보물을 쌓고 있는가 결국에는 아무 보장도 받을 수 없는 이 땅의 보물을 쌓고 있습니까? 아니면 영원히 보장해 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하나님 나라의 보물을 쌓고 있습니까?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우리 신흥 공동체가 이 땅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보물을 쌓는 그래서 구제하는 일에 앞장서는 믿음의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여러분 이 아름다운 공동체의 핵심은요. 주제의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시면 36절에 저자들과는 교회 공동체를 이야기하다가 한 사람에게 집중을 해요. 그 한 사람을 소개해 주는데 36절 누구를 소개하는가 우리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36절입니다.
구부르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이 사람은 레위 족속이다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죠. 그런데 구브로에서 태어났어요. 여러분 레위인이 구브로에서 태어나면 안 되거든요. 여인들은 흩어져서 그 성 중에 하나님께서 48성에 이렇게 배치를 시켜줬잖아요.
근데 구브로로 간 거죠. 초대교회 당시 또 그전부터 계속 전쟁에 의해서 외세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하다 보니 초대교회 당시에 많은 내위들이 흩어지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그러다 보니까 이 가정은 구글로로 간 거죠.
그래서 여러분 나중에 보시겠지만 전도 여행 1차 전도여행의 첫 번째 간 데가 어디예요? 구글로 바로 이 레위 사람이 살았던 그 자리로 가게 된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보니까 이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이름은 요셉인데 사도들은 뭐라고 부른다고요? 바나바라 그래서 우리는 요셉이라는 이름보다 바나바라는 이름이 조금 더 친숙한 그런 것이죠. 바나바는 헬라식 이름으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 뭐라고요? 위로의 아들이라 이로 볼 때 이 바나바라는 이 사람은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을 위해서 정말 잘 섬기고 위로해 주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굳이 이 시간에 왜 이 사람을 소개해 주었을까요? 37절 말씀을 한번 보실까요?
37절 그가 밭에 있음에 밭에 있음에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 밥 앞에 두느라
초대교회 공동체가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수 있었던 다섯 번째 일입니다. 바로 초대교회는 바나바와 같이 자신의 것을 헌신하는 데 앞장서는 사람이 있었다. 실제 구브로섬은 구리광산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큰 부자들이 많이 살았던 것이죠. 아마 바나마 가문도 그곳에 정착하면서 큰 부자가 되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본국인 예루살렘에 집과 밭을 사게 된 것이죠.
왜 샀을까요? 우리가 때가 되면 특히 우리 동국으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참 신앙인으로 명문 가문을 이루자 그런 마음으로 사겠죠. 예루살렘의 집과 밭을 소유하게 된 것은 그들의 미래를 위해서 아마도 준비했던 것일 것인데 그런데 바나바는요. 그중에 자기의 소유가 된 것들을 팔아서 하나님께 봉헌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할 수 있었던가 바나바는 이 세상보다 하나님 나라를 더 사모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죠. 여러분 예수님께 찾아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했던 부자 관원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이 사람이 자신 있게 했던 이야기가 있어요. 내가 어려서부터 계명 열심히 잘 지켰습니다.
진짜 저는 계명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지켰습니다. 자신했던 사람이죠. 예수님께서 그를 향해서 내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니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그다음에 덧붙인 이야기가 뭐냐 하면 그리하면 하늘에 보아가 있을 것이다. 하늘에 보아가 있을 것이니 니가 가진 것 나눠줘라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즉 소유를 팔아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는 것이죠. 그러면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죠. 이 구제를 통해서 하늘의 부활을 쌓는 지혜를 가르쳐주는 이고요. 더불어서 영생에 대한 질문을 했으니 그렇게 해서 나를 따르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라는 것을 가르쳐준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그 사람은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으로 인해서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면서 예수 따르는 걸 포기해버린 것입니다. 영생이신 예수님 대신 무엇을 선택한 거예요? 이 땅에 있는 재물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재물이 있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하시면서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신 거예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 끼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 어렵다 쉽대요. 낙타가 바늘귀에 어떻게 들어갑니까? 근데 그게 더 쉽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제 재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지 않아요 내가 어디에다가 지금 투자하고 있는지 보세요. 거기에 내 마음이 다 쏠려 있어요. 자녀를 양육할 때는 자녀에게 막 쏟아붓잖아요. 왜 거기에 내 마음 그렇게 볼 때 여러분 이 바나바는 초대교회 공동체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굉장히 컸다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죠.
그는 자신의 것을 팔아 나눔으로 나눔의 삶의 본이 되었던 사람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는 바나바와 같이 섬기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잘 좀 들어보십시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확신 있게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도 힘 받도록 복음을 전했어요. 왜 그것이 사명인 줄 알아 기도했고 성령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복음을 접한 사람들이 어떻게 됩니까? 모두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어요. 초대교회는 협박과 핍박 가운데서도 하루가 다르게 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장하게 된 것이죠. 그렇게 부응할 수 있었던 초대교회 공동체의 특별함이 무엇입니까?
신자들 가운데 생활이 쪼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한번. 그럼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그 지역에 가난한 사람이 많았을까요? 적었을까요? 많았겠죠. 그러면 지금 이 상황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가난한 사람이 이 공동체에 들어오면 사는 데 지장은 없구나.
먹고 사는 데 그것이 그들의 주변에 소문이 나겠습니까? 안 나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는 복음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거기에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도 있지만 나도 거기 가서 가난 좀 해결하자 해서 들어가서 거기에서 그 가난을 해결하면서 복음을 듣고 이것이 복음 공동체지 이제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 그렇게 살아서 나도 이제 그 공동체와 함께 나누며 살아야겠다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겠죠. 그래서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어 여러분 오늘 본문 가운데 두 번 반복된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사도들 발 앞에 두었다는 여러분 구제라는 것은요. 세상 사람 많이 했죠. 우리만 하는 게 아니라 세상에 개인적으로 구제하는 사람들 많아요. 그래서 연말이 되면 불류유독기 성공도 하고요. 구세군에 있는 자석 연기에 돈을 넣기도 하죠. 다양한 루트를 통해서 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지나가다가 구걸하는 걸음이 있으면 도와주기도 하죠. 엔데믹이 되자 이곳저곳에서 무료 급식을 하면서 또 이렇게 돕는 그런 모습들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초대교회 공동체는 어떻게 했습니까? 개인적으로 하지 않은 거예요. 공동체를 위해서 사도들을 바로 앞에 두고 사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이것을 각각 나누어서 필요한 사람들을 채워서 공동체가 살 수 있도록 돕는 거죠.
그렇죠 그러니까 그 공동체가 힘이 있고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도 있었고 성령의 역사하심도 있었지만 이들이 같이 분배하고 나눔을 통해서 사랑으로 세워가는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있어서 칭찬받는 공동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이죠.
여러분 개인적으로 다양한 유튜브를 할 수도 있지만 교회 공동체가 부응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드려진 것을 통해서 세상 가운데로 흘러갈 수 있게 하는 그것이 교회 공동체를 살리는 지혜라는 것을 우리가 여기 본문을 통해서 볼 수가 있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 말씀을 통해서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는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알아야 돼요. 그걸 알아야 할 수 있는 것이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여러분 이 땅에 머물면서 이 땅에 있는 것을 너무 겁내지 마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아서 하늘의 부활을 쌓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의 부활을 쌓으면 우리가 구제할 수 있을 만큼의 은혜를 부어주시는 거예요. 그러할 때 그것을 나눌 때 또 풍성함이 세상 가운데로 흘러가서 교회 공동체가 아름답게 성장하고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맨날 해도 없고 부족하고 연약하고 이렇게 되는 그러니까 성장하기가 어려운 겁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공동체 의식 우리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래서 한마음 한 뜻으로 그 일들을 같이 기억하고 기도하면서 세상 가운데로 흘려줄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된다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초대교회와 같은 이러한 아름다운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마음과 힘을 모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가끔은 제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사실 여러 사역위원회가 있는데 구제 사역위원회가 없어요. 구제사역위원회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 그걸 중심으로 과거에 했던 우리 무료 급식들이 좀 다시 한 번 되어지게 우리가 다 하지 못해도 자원자들을 받아서라도 또한 주변에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모아서라도 그렇게 해서 교회가 다시금 소재하는 일을 해야 되지 않을까라는 기도의 마음을 주실 때가 참 많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래 우리 공동체가 어떻게 이 나라에 영혼들을 위해서 또한 교회 공동체의 규제를 위해서 애쓰고 노려야 할 것인가 기도해 보시고 깨가 찬 시각 같은 마음 같은 뜻을 주실 때 그 일에 힘을 다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