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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묵상:
엘리야는 갈멜산의 영적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 결과,
거기에 모여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참된 신으로 인정하게 되었고,
엘리야의 명령에 따라 바알의 선지자 450명을 모두 심판하게 되었다.
도망가던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죽였으니,
당시 그곳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이스라엘 백성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고,
그들이 엘리야의 명령에 따라 바알의 선지자들을 심판했으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잠시나마 회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영적 전투를 허락했던 아합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 하나의 질문을 더 해 보자.
아합은 갈멜산의 현장에 있었을까?
모든 정황을 종합해서 볼 때,
아합도 그 기적의 현장에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1) 바알의 선지자들을 죽인 후, 엘리야가 아합에게 비 소식을 알렸던 것,
2) 큰 비가 내리자, 아합이 마차를 타고 떠났을 때, 엘리야가 아합을 앞서 간 것,
3) 그리고, 오늘 본문 1절에 나오는대로 아합이 엘리야의 행한 일을 자세히 알고 있었던 것.
그렇다면,
아합은 갈멜산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기적을 직접 체험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왔을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알 수 없다.
그 대신, 중요한 내용이 오늘 본문에 나온다.
아합 자신이 몸소 보고 겪은 모든 일들을 그의 아내 이세벨에게 알렸다는 것이다.
1절,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왜 아합은 이세벨에게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바알의 선자자들을 칼로 죽인 것을 말했을까?
이세벨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을까?
그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아합이 이세벨에게 말했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엘리야였기 때문이다.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엘리야)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그러니까,
아합이 말한 초점은 하나님이 아니었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합은 왜 이세벨에게 갈멜산의 이야기를 말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당시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사람은 아합이 아니라 이세벨이었다는 것이다.
2절을 읽어 보자.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이세벨이 북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엘리야를 죽여달라고 부탁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직접 사신을 보내었고,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세벨에 대해서 들어본 사람은 이 부분에서 많이 놀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세벨은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악녀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엘리야다.
오늘 본문 19장 전체도 엘리야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엘리야가 이세벨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은 후,
엘리야가 도망간 이야기가 3절부터 끝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도망의 끝에서
엘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두 번이나 반복해서 들었던 말이다.
9절,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3절,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똑같은 질문을 두 번 반복해서 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간략하게 엘리야의 도피 여정을 정리해 보자.
1) 엘리야는 이세벨의 협박을 받은 후, 유다의 브엘세바로 도망을 갔다. (3절)
브엘세바는 어떤 곳인가?
브엘세바는 전이스라엘 영토 최남단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이스라엘 땅 전체를 말하는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관용어를 들어봤을 것이다.
그러니까
엘리야는 이세벨의 협박이 무서워 유다 땅으로 도망을 갔는데,
그것도 유다 최남단까지 도망을 갔던 것이었다.
이것으로도 마음에 안심이 되지 않았을까?
2) 엘리야는 브엘세바에 사환을 남겨두고, 홀로 광야로 들어가서 하룻길을 더 걸었다. (4절)
왜 하룻길을 더 걸었을까?
그 이유는 이세벨이 내일 이맘때에 반드시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협박했기 때문일 것이다. (2절)
갈멜산에서 브엘세바까지가 약 125마일(200km) 정도된다.
그 먼 거리를 도망온 다음에, 다시 광야에 들어가서 홀로 하룻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엘리야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도 다 떨어져서 없게 되었던 것 같다.
두려운 마음,
기력이 다한 육체,
뜨거운 광야의 태양,
음식도 물도 없는 상황.
당시 엘리야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로뎀 나무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잠을 청하는 것 뿐이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셨다.
그리고 똑같은 일을 두 번 반복하도록 하셨다.
5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7절,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엘리야를 돌보아 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말이 나온다.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아마도 엘리야는 광야에 들어가면서 어디까지 갈 지 목표를 세웠던 것 같다.
그래서 천사가 그의 마음을 읽고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결국,
엘리야는 천사가 준 떡과 물을 먹고 마신 후,
40주 40야를 더 걸어가서 자신이 목표로 정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되었다. (8절)
왜 호렙산이 엘리야의 최종 목적이였을까?
호렙은 하나님의 산이므로,
이세벨이 그곳까지 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당시 고대 사람들이 흔히 생각했던 영역을 지배하는 신의 개념으로 호렙산을 생각했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호렙 산의 굴에 들어가서 머물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똑같은 말씀을 두 번 반복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렇다면,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엘리야가 여기 있으면 안 된다는 말씀이었을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여기 호렙산이 아닌, 사마리아에서 이세벨과 맞서 싸우기를 원하셨던 것일까?
우리는 그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기적의 사건들을 종합해 볼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더 큰 믿음을 기대하셨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몇 가지만 생각해 보자.
1) 먼저, 오늘 본문 19장에서는 엘리야가 자의로 도망했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본문 17장에서 엘리야가 아합에게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고 말씀하셨다.
17:2,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17:3,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17:4,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하지만
오늘 본문 19장에서는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지 않았다.
19: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가": 엘리야가,
"자기의 생명을 위해": 엘리야 자신의 생명을 위해,
그러니까,
엘리야는 이세벨로부터 살해 협박을 듣고,
자기의 생명을 위해 스스로 일어나 도망을 갔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같은 엘리야의 도망이지만,
17장 2절과 19장 3절이 전혀 다른 성격을 띈 것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17:2과 19:3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 둘째, 모든 기적은 궁극적으로 엘리야의 믿음의 성장을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로 숨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이후,
계속 점층적으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기적들을 체험하게 되었다.
먼저, 까마귀들이 엘리야를 위해 아침과 저녁에 떡과 고기를 가져다 주었다. (개인의 양식)
그리고, 시돈의 사르밧 과부에게 갔을 때에는 비가 다시 오기까지 가루와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 (가정의 양식)
그 다음,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하나님께 기도하여 다시 살림으로 한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행했다. (한 사람 생명)
그런 다음,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대결하여 거기 모인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었다. (한 무리의 영적 생명)
마지막으로, 3년만에 하늘에서 비가 내려 온 나라 백성을 구원한 것까지.
엘리야는 이런 기적들을 계속해서 체험하면서 그의 믿음이 계속해서 자라갔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엘리야에게서 더 성장한 믿음을 기대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는 이세벨의 죽이겠다는 협박의 말을 듣고서,
자신의 생명을 위해 유다의 브엘세바까지, 하룻길 더 되는 광야까지, 그리고 하나님의 산 호렙까지 도망을 갔던 것이다.
신약에 이와 유사한 사건이 생각나지 않는가?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고자 했을 때, 큰 광풍이 일어났다.
배는 흔들려 깨질 것 같았고,
물결이 배에 들어와 배가 거의 잠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소리쳤던 것이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막 4:4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무슨 말씀인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무서워함을,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신 것이었다.
그러면, 그 당시 제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했어야 했나?
예수님처럼 호수에 부는 큰 광풍을 향하여 잠잠하라고 명령했어야 했나?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기대하셨던 것 같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나님께서도 엘리야에게 같은 것을 기대하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네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말하시면서 말이다.
만약 우리가 엘리야였다면,
본문에 나오는 기적들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는가?
한 번 질문에 답해 보자.
까마귀를 통하여 양식을 공급해 주셨던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이세벨의 손에서 구원하지 못하셨을까?
사르밧 과부의 가루와 기름 통에서 양식이 떨어지지 않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이세벨의 손에서 구원하지 못하셨을까?
이미 죽은 과부의 아들의 영혼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이세벨의 손에서 구원하지 못하셨을까?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제단의 모든 것을 태우고 온 우주의 유일한 통치자이심을 나타내신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이세벨의 손에게 구원하지 못하셨을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러실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그렇다면, 엘리야의 신앙은 우리의 신앙보다 더 못한 것인가?
당신은 정령 그렇게 생각하는가?
엘리야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만약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영적 전투를 벌일 때,
만에 하나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주시지 않았다면, 엘리야는 어떻게 되었을까?
엘리야가 그 결과를 모르고,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싸웠을까?
그들은 응답이 없자,
자신들의 몸을 칼과 창으로 상하게 했던 난폭한 사람들이었다.
엘리야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었다.
오직 하나 하나님을 믿고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본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엘리야가 갑자기 딴 사람이 된 것인가?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그런 엘리야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마치 무서워하고 믿음이 없던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끝까지 버리지 않으셨던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믿음의 방황을 한다.
중요한 것은 엘리야의 하나님이 지금 우리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치고 방황할 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셔서 우리를 어루만지며 우리에게 떡과 물을 제공해 주실 것이다.
우리가 나 혼자라고 느낄 때,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을 남겨두신 것처럼, 우리도 혼자가 아니라고 말씀해 주실 것이다.
우리가 이제 끝이라고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3가지 사명을 주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셔서 우리를 통하여 계속 역사해 주실 것이다.
이 믿음을 가지고 오늘 하루를 살아가자.
주님,
무서워하는 제자들을 버리지 않으셨던 주님,
무서워서 도망갔던 엘리야와 끝까지 함께 하셨던 주님,
오늘 말씀으로 새로운 위로와 용기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 엘리야의 하나님,
지치고 방황할 때, 천사를 보내어 주옵소서.
혼자라고 느낄 때, 혼자가 아님을 알려 주옵소서.
이제 끝이라는 생각이 들 때, 새로운 사명으로 불러 주옵소서.
무엇보다, 믿음에 믿음을 더하셔서,
주님께서 기대하시는 믿음의 분량만큼 성장하여 주님께 영광 돌리는 저희 모두가 다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