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개요
대한민국의 시인. 본명은 고은태(高銀泰). '등대지기', '가을 편지', '세노야' 등 60~70년대 히트곡을 작사하기도 했다. 문학적 공로로 단국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와 은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2008년부터는 문예창작과 석좌교수로 재직했으나 2018년 미투 운동으로 인해 모든 분야에서 제명되었다.
2. 생애
1933년 전라북도 군산시 미룡동 용둔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제 말기에 창씨개명한 이름은 '타카바야시 토라스케(高林虎助)'였다. 훗날 고은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은 존경받아야겠어요. 우리가 아는 그 시절의 작가들이 대부분 조선 이름을 썼던 게 아닌가 하는데요?"라는 질문을 받자 최남선, 이광수의 예를 들며 반박하기도 했다.
군산중학교[6년제]에 재학 중이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다. 6.25때 고은의 일가친척들은 대부분 좌익 활동을 했으며 당숙은 인민위원장이었다. 고은 일가는 6.25 당시 용둔리 일대의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고, 이 때문에 마을 사람들과 원수 사이가 되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이 퇴각하자 고은은 군산에서 도피하여 선유도로 피신했다. 이후 중공군이 참전하여 1.4 후퇴로 국군과 UN군이 밀려나자 선유도에서 나와 군산으로 돌아왔다. 당시 무성 영화의 변사(당시의 성우 겸 나레이터)를 하려 했으나 처음 상영회에서 너무 떨어 잘린 적도 있다고 한다. 또 인맥을 통해 군산북중학교에서 잠깐 교사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군과 UN군이 다시 재반격을 시작하여 치고 올라가자 다시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6.25 도중에 '고은'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51년 봄에는 두 차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 귀에 청산가리를 부어 고막이 손상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6.25 전쟁 중이던 1951년에 군산 동국사에서 기승(奇僧) 혜초(慧超)를 은사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이후 10년간 승려 생활을 하면서 참선과 수양을 거듭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승려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폭음을 일삼았다고 거리낌없이 말하기도 했다. 1953년에는 혜초 스님에게 소개받아 경남 통영 미륵섬 미래사를 찾아가 당시 불교계에서 가장 명성 높은 고승 효봉의 제자가 되었는데, 고은의 삶에서 '효봉 스님의 제자'란 칭호는 두고 두고 이름값이 되었다.
고은이 승려 시절에 법명을 받은 과정이 불확실하다. 어디에서는 고은이 처음 은사로 모신 혜초로부터 중장(中藏)이란 법명을 받았는데, 나중에 효봉의 제자가 된 뒤 일초(一超)란 법명을 다시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디에서는 혜초가 처음부터 '일초'란 법명을 주었고, '중장'은 혜초의 법호였다고 한다.
1957년 효봉이 초대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추대되자 스승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1960년〈불교신문〉을 창간하고 법정(승려)과 함께 주필로 활동했다.
1958년 11월 〈현대시〉에 조지훈의 추천으로 〈폐결핵〉이, 서정주의 추천으로〈천은사운〉 〈봄밤의 말씀〉, 〈눈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60년 첫 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을 냈다.
1962년 종단의 징계를 받아 승복을 벗고 환속했다. 징계 사유는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훗날 고은은 4.19 혁명 정신에 자극을 받아 승단의 개혁을 주장했다가 종단의 정치보복성 징계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시 신문 기사에도 나와 있듯이 고은의 환속은 성추문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종단의 최고 어른이 자신의 스승 효봉이었기 때문에 고은이 정치적인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는 주장은 그리 설득력이 높지 않다.
환속 이후 1963년 봄 고은은 목포에서 제주도로 가는 배에서 그의 생애에서 세 번째로 자살 시도를 했으나 실패했다. 자신을 물속에 수장시킬 큰 돌과 로프를 가방 속에 숨기고 제주행 배를 탔다가 술을 마시고 잠든 후 깨어보니 제주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후 고은은 1963년부터 1968년까지 4년여 동안 제주도에 거처를 마련하고 은거 생활을 했다고 한다. 1968년 제주도에서 가짜 고은 사건이 터졌다. 고은을 사칭한 '가짜 고은'이 지역 유력자의 딸과 사기 결혼을 했다는 것.
1968년 수필집 〈인간은 슬프려고 태어났다〉를 냈는데, 수필집에서 자기 스스로를 '성(聖) 고은'이라고 신격화하여 사회적 이목을 끌었다. 1970년 짧은 시집 〈세노야〉를 펴낸 뒤, 한동안 작품을 내지 않고 번역가로 활동했다. 이무렵 고은은 북한산 계곡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 시도를 했다가 근처에서 훈련하던 예비군들이 그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겨져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등단 이후 1970년까지 발표된 그의 시들은 허무의 정서, 생에 대한 절망, 죽음에 대한 심미적인 탐닉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당시 그를 두고 흔히 허무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그 뒤 1974년부터 그의 시는 경향이 크게 달라지게 된다. 고은은 1974년 저항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을 발표한 이후 시대상황에 대한 비판과 현실에 대한 투쟁 의지를 적극적으로 담는 저항시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1970년대 중반부터 갑자기 성향이 완전히 바뀐 것에 대해 고은 본인은 "이쪽으로 흐르던 물이 다른 쪽으로 급격하게 돌아서 흐르기 시작한 것"에 비유했다. 이후 그는 1970년대 최고의 저항 시인으로 꼽히게 되면서 반독재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진보 문인 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창설하여 활동한것도 이때다. (아래 항목 참조)
1983년 중앙대학교 영어과 교수 이상화와 결혼한 뒤 그의 나이 50세에 딸 차령을 얻었다. 부인의 직장이 있는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에서 멀지 않은 안성 대림동산 전원주택 단지에 살았다.
2013년 수원시의 구애로 안성을 떠나 수원 광교산 자락으로 이주했다. 이에 광교산 일대 주민들이 특혜 및 혈세 낭비라는 이유로 시위를 하며 논란이 되었다. 아마 본인들 거주지 주변의 개발제한구역 해제를 위해 애먼 고은을 타겟으로 삼은 듯 한데 성격 상 수원을 떠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수원시 측에선 난감하게 여겼다. 그리고 실제로 떠나게 되면서 주민들은 욕을 엄청 먹었다. 상세한 내용은 아래 논란 문단을 참조. 참고로 저 구역은 장안구 상, 하 광교동으로 영통구에 속한 광교신도시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3. 정치적 행보
1958년 등단 이후 고은은 1970년대 초반까지 쭉 순수문학만을 지향해왔다. 그러다가 1974년을 기점으로 갑자기 저항시인으로 변모하여 반독재 투쟁에 앞장 서게 된다. 일부 문헌에는 1971년 3선 개헌 반대 때부터 고은이 반독재 운동에 앞장섰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에 대해 고은 본인은 훗날 3선 개헌 당시 자신은 '허무'에 빠져 '무각성적'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1974년 저항시인으로 변모한 이후 고은의 행적을 보면 반미, 친북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정작 업적으로 내세우는 민주화, 반독재 활동은 생각보다 비중이 크지 않다. 사실 고은의 반독재 민주화 활동을 보면 반미, 친북, 친미 성향 정부에 대한 반정부 활동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 운동권 반미주의 측면에서 고은은 독재자인 카다피, 김정일에게 찬사를 보낸 바 있기 때문에 반독재, 민주화 운동가라고 부르기에는 논란이 있다.
3.1. 명사(名士) 사냥꾼
힘이 없는 악은 의미가 없다. 악이 악다워지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권력이든 물리적 폭력이든 재력이든, 지식이나 기술 혹은 특수한 재능이든 상대를 강제하거나 마비시킬 수 있는 힘을 지녀야만 악은 악답게 자랄 수가 있다. 그의 악이 의지해 자란 힘은 말과 글을 다루는 재능이었다. 말의 재능은 그의 '명사(名士) 사냥' 시절에 이미 충분하게 발휘되었다 - 이문열의 소설 사로잡힌 악령 중에서
고은은 젊은 나이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당시 불교계 내외로 상당한 존경을 받고, 가장 유명한 고승이던 효봉의 상좌가 되었다.
상좌의 직함을 단 그는 이후 법조계, 문화계, 예술계 여러 사람들과 교우하였는데 그의 타고난 말재주와 언변으로 유명 명사들이 쉬이 그를 함부로 대접하지 못하게 했다, 나중에 명사들이 사망하자 낸 고은의 자서전에서는 자신과 명사들이 '피를 나눈 것처럼 절친한 사이', '둘도 없던 벗'이라고 포장했다.
예: 효봉의 상좌 → 문인들과 교류 → 문인들의 추천으로 등단 → 미당 서정주와 교류 → 서정주 사후 그의 문단 위치를 물려받음
위와 같이 이어지는 명사 사냥 테크트리로, 고은은 특별한 시재(詩材)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문단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추었다. 이후 자기 어필과 꾸준한 대내외 활동, 그리고 민주화 투쟁과 수감이라는 그의 이력이 삼박자로 맞았다.
고은의 명사 사냥은 이후 대통령에게까지 발을 넓혀 김대중과는 각별한 사이가 되었고, 그의 사후 묘비에까지 시를 써 주었다. 노무현과도 친분이 있었다. 막연한 민족주의 정서 때문에 고은은 북한을 일방향적으로 동경했고, 김정일을 지나치게 훌륭한 사람으로까지 평가하며 실제로 김정일을 만나기에 이르렀다. 그의 명사 사냥꾼의 자질은 한반도 내외에 걸쳐 끊임없이 발휘되었다.
3.2. 반미 운동
고은은 1974년 저항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을 발표한다. 이어 고은은 저항문학인들을 결집하여 1974년 11월 18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만들어 초대 대표에 취임했다. 이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현재까지 두 차례 이름을 바꾸면서 저항문학계열을 대표하는 단체 역할을 하고 있으며, 고은은 계속해서 그 중심에 있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민주화 열기가 한창이던 1987년 9월 17일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 재창단하였고, 다시 2007년 12월 8일 '한국작가회의'로 명칭을 바꾸고 도종환을 사무총장에 선출하면서 현재에 이른다. 고은이 중심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한국 문학의 대부 백낙청의 지원으로 인한 것이었고 백낙청의 묵인으로 인해 한국 문단이 문제점을 숨기고 문단 권력에 아부해야만 등단할 수 있는 기형적인 구조로 정착했기 때문이다. 이는 훗날 고은 본인이 성폭력 가해자로 몰락하면서 백낙청의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청렴한 문학가라는 겉으로 공고하던 위상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는 단초가 된다.
이문열 등은 1970년대 초중반 고은의 성추문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지탄을 받자 순수문학을 하던 그가 갑자기 저항시인으로 돌변했다고 말한다. 저항시인으로 변모한 후 고은은 당시 순수 문학계에 대해 현실 참여를 하지 않는 가짜 문인들이라고 비판했다. 참고로 1970년대 초 고은의 성폭력 문제를 거론한 시인들이 주로 순수문학계였다고 한다.
저항시인으로 변모한 고은은 김지하구출위원회 부위원장(1974년), 민주청년협의회 고문(1978년), 한국인권운동협의회 초대 부회장(1978년)으로 활동했다. 1979년 6월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방한 반대운동을 주도하다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으로 투옥되어 1979년 말 석방되었다. 그동안 6.25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우방인 미국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운동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훗날 고은은 1979년 카터 방한 반대운동이 국내 반미 운동의 효시가 된 사건이었다고 자평하면서 큰 의미를 부여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연루 혐의로 다시 투옥되어 복역했다. 그러던 중 평소 좋지 않았던 귀 건강이 악화되어 옥중에서 귀 수술을 받고 얼마 후인 1982년 8·15 특사로 풀려났다.
1987년 9월 17일, 이미 1974년 자신이 창설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확대 개편하여 '민족문학작가회의'로 재창단했다. 이후 고은은 이 단체에서 의장, 부회장 등을 지냈다. 같은 해에는 음악, 미술, 공연, 문학 등 진보적 문화예술계 전체를 아우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을 창설하여 초대 공동의장을 맡았다.
1989년 1월 한겨레신문에 '무아마르 카다피 대령에게'라는 칼럼을 썼는데 이 칼럼 내용이 논란이 되었다. 이 칼럼에서 고은은 악명 높은 독재자 카다피를 옹호하고, 미국을 맹비난했다. 고은은 칼럼에서 리비아가 테러를 저지르는 것은 미국 탓이라는 맹목적 반미주의 입장의 논지를 밝혔다. 미국에 대항하는 국가들은 모두 자유를 지향하는 혁명 국가들이며 미국이 '세계 경찰국가'의 못된 패권으로부터 그들 자신의 도덕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한미 연합 군사훈련인 팀스피리트 훈련이 동아시아 긴장 완화에 크게 해로운 것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외교관계를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볼 수 없지만 고은은 리비아가가 미국에 반항하기 때문에 정의로운 국가라는 단순한 이분법적인 반미주의를 근거로 두고 칼럼을 작성했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당시 반미가 기본이던 운동권에서도 리비아가 반미 국가라고 해서 무고한 민간 여객기를 폭파한 사건을 대놓고 옹호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다만 '진짜 리비아가 한게 맞느냐?' 같은 음모론을 거론하는 사람들이 간간히 있는 정도였다.
1989년 고은은 문익환의 방북과 동시에 진보계열 문학인들의 방북을 추진했다. 고은은 남북작가회담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3월 중순 북한의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와 교섭하여 3월 27일 남북 작가 회의 회담을 주최하기로 합의했다. 그리하여 27일 고은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 대표단 5명을 데리고 판문점으로 향했으나 경찰에 저지되고 말았다. 이에 고은, 신경림 등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 회원 26명이 서울마포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당시 뉴스 보도 화면. 당시 조사를 받은 26명 가운데 25명은 조사 후 풀려났으나 고은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4월 3일 구속 수감되었다.
3.3. 민주화 이후의 행보
1988년 12월 23일 진보 예술단체를 총망라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을 창설하여 공동 의장에 취임했다. 출범 이후 '민예총'은 명실상부한 대표적 진보적 문예운동 연합체로 자리잡게 되었다. 민예총은 창립 10년째인 1998년 회원이 만 명 수준이었으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급성장하여 2008년에는 회원이 10만 명에 달했다.
고은과 김대중의 관계는 상당히 각별했다. 1998년 2월 김대중의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되어 찬시를 헌정하기도 했다. 김대중 정권 취임식과 관련된 고은의 기사. 고은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적극 지지했으며, 1998년 7월에 통일문화연구소 방북조사단에 포함되어 북한을 방문했다. 이어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김대중과 함께 북한을 방문했다. 방북 당시 고은은 평양 목란관 만찬장에서 자신이 지은 즉흥시 '대동강 앞에서'를 낭독하고 김정일과 건배하며 김정일의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북한에서 돌아온 후 고은은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우리 현대사 중 가장 축복받은 역사의 절정이라고 평했다. 8,15 해방, 4.19 혁명, 광주항쟁, 6월항쟁을 종합한 감격이라고 표현했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인데, 김정일에 대해서는
우리는 분단현실에서 김 위원장을 비판하고 부정의 대상으로만 삼아 왔다. 그런데 내가 김 위원장을 직접 만나보니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고, 말을 잘하고, 속에 담아 두지 않고 즉각적으로 표현하는 솔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매우 예술적인 취향을 지녔다. 시를 좋아하고 특히 영화 예술에 전문가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정치인을 만났다는 느낌보다는 어떤 예술가를 만난 느낌을 받았다.
라고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또 같은 인터뷰에서 고은은 뜬금없이 북한의 문화재가 미군의 융단 폭격으로 남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훼손되었다와 함께 평양에 대해서는 "부다페스트를 본따 민족 형식을 가미한 서울보다 나은 도시"라고 평했다.
노무현 정권이 시작되고 나서도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이어갔다. 과거 고은은 당시 국회의원 노무현을 예찬하는 시를 쓴 적도 있다.
2003년 한 인터뷰에서 고은은 당시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갈등을 빚던 대북송금특검법를 거론하며, 대북송금을 옹호하고 특검법을 비판했다. 그는 대북송금 특검이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의미를 축소, 매장하고 오물을 퍼부으려는 행위라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또 고은은 북핵문제는 미국 탓이라고 주장하며 미국을 맹비난했다. 고은은 "미국은 원자로를 건설해 주기로 하고 지키지도 않았으며, 제네바 합의를 무효화시킨 미국은 기만적이다. 또 북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여 전쟁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데, 미제국주의는 전쟁을 시장화하고 있다. 신무기를 소비하여 경제를 활성화해야 하는 미국은 이라크 다음으로 북한을 공격하려 하고 있다. 지금은 평화적, 외교적으로 해결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갈지 모른다. 정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등, 미국을 제국주의라 부르며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2003년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와 '민예총'을 이끌며 이라크전 파병 반대 시위를 벌였다. 당시 고은은 "지금 지구는 오만한 침략전쟁으로 불모의 행성이 되고 있다."며 미국 정부를 강한 어조로 비난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고은의 반전 메시지가 적힌 엽서를 시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2005년 7월 20일에는 진보 문인 100여 명과 함께 평양을 방문했다.
2009년 8월 김대중이 사망하자, 추모시 <당신은 우리입니다>를 썼다. 이 시는 서울 국립현충원의 김대중 묘지 곁에 세워진 비석에도 새겨졌다.
2009년 9월 23일 노무현재단 출범 당시 재단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2010년 이후로는 정치적 행보를 자제하며 조용하게 지낸 편이었다. '민예총' 지역 행사, 모임, 강연 등에 꾸준히 참여하며 회원들의 의식을 고취하는 강연을 한다고 알려졌다. 또한 2011년 인터뷰에서 "자본주의의 타락으로 팍스아메리카나 체제가 마구 요동치고 있고 시장사회(자본주의)와 미국이 내리막 비탈길을 달리고 있다. 21세기 후반에는 중국 주도의 세계체제가 가동될 것이다."고 말하며 미국과 자본주의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을 다시 한번 드러냄과 동시에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 대한 기대감을 표출했다.
2000년대 초중반 당시 진보 진영을 떠나서 민족주의적인 의식, 북한에 유화적인 풍조가 절정에 달했고 반미 분위기가 꽤 높았기에 2010년대 이후처럼 크게 문제시되지는 않았다가 박왕자 피살 사건, 천안함, 연평도 포격으로 인해 반북 감정이 급상승하게 되면서 동시에 정권의 기조도 대북강경 노선으로 전환되었을 때에는 정파적 활동을 줄이다보니 대중들의 고은의 정치 성향 인식은 막연한 수준에 국한되었다. 한편으로는 보수 언론 및 정파에서 그다지 크게 문제시하지 않았던 점도 감안해야 하겠다.
4. 유명 문학가 폄하
고은은 자신보다 잘나고 유명하다고 생각되는 유명 문학인들을 납득할 만한 근거도 없이 악의적으로 비난하고 폄훼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상 평전, 한용운 평전, 미당 담론 등을 써서 별 근거도 없이 악의적인 중상을 가하며 이 시인들을 비판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애초에 문학적 가치가 전혀 없기 때문에 문학 전공 수업에서도 그냥 읽지 말고 무시하라고 한다.
애초에 정규적인 교육 과정을 밟아 문학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이, 시라면 모를까 비평을 쓰기는 능력 밖의 일임을 생각하면 당연한 이야기다. 문학작품의 창작과 평론은 일반적인 인식과 다르게 전혀 별개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굳이 평전을 쓰겠다고 나서서, 궤변으로 점철한 책을 출판까지 했음은, 남을 깎아내려 가면서까지 허명을 얻고 싶다는 고은의 일생을 관통하는 추한 욕망의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그가 쓴 글에서는 어떤 문학적 식견이나 통찰은 전혀 엿보이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색깔의 선명성을 밝히고자 하는 욕구만 잔뜩 드러난다. 그에게 이상이나 한용운은, 친일파와 퇴폐성을 죽도록 미워하는 고결한 자신이라는 허울을 꾸며 보여주기 위해 필요한 발판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말도 안 되는 중상을 동원해 그들을 색정광과 친일파로 만들고는 그들을 비판하는 자신을 한껏 추켜세운 것이다.
4.1. 이상 비난
고은은 저항시인으로 변신한 직후인 1974년 11월 '이상 평전'의 초판을 펴냈다. 이 평전은 문법에서 벗어난 난해한 문장으로 쓰여 있으며, 때때로 사전에도 없는 단어들이 튀어나오는데 27년 짧은 인생에 고은과는 비교도 안되는 자취를 남긴 천재를 온갖 억지 논리로 비난한다.
고은은 '이상 문학은 이 땅의 현대문학에 대한 음습한 주술'이라고 악평했다. 고은은 이상의 여성 편력을 집중적으로 부각하며 그의 시 대부분이 성적인 의미가 담겨진 섹스시라고 폄하했다. 또 고은은 이상이 모던 보이적 용어를 파렴치하게 취득하였으며, 국문학적 소양의 부족에서 오는 혼란과 전문 용어 남용에 의한 자기도취를 일삼았다고 비판한다.
이상 평전은 기초적인 사실관계나 지식조차 몰라서 써 놓은 헛소리나, 은근히 열등감을 내비치는 악의적인 문장들이 가득해서, 학부 수업 때는 그냥 읽지 말라는 소리를 듣는다. 막연하게 주워들은 고은의 명성에 기대감을 가지고 이상 평전을 집어든 사람은 세 페이지도 지나기 전에 짙은 실망감을 느낄 것이다. 하술된 괴작 '오늘 너는 대한민국이었다'와 더불어 전공자들 사이에서의 고은의 평가가 줄 잘타고 시인 흉내 잘 내서 학자연하는 늙은이 1 이상이 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주된 이유.
4.2. 한용운 비난
고은 씨가 '평전'이라는 이름 아래 만해의 불교 정신과 독립운동과 문학 세계를 사정없이 짓이기고 있음에 분노를 느껴야 했다. 고은 씨의 눈을 통해 비춰지는 만해는 시종일관 편협하고 이기주의적이며 최남선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영웅주의의 표본에 불과했다.
고은 씨는 먼저 만해의 독립 정신에 대해 비꼬기 시작한다. 국권을 상실하고 민중이 처참하게 죽어가던 시대에 분연히 일어선 만해의 뜻이 고은 씨 앞에서는 단지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었던 하나의 계기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중략) 고은 씨의 논리대로 하자면 만해 등 서명을 했던 인물들은 장래가 없는 사람이나 교단의 임무가 없던 사람들이다.
고은 씨는 만해에 대한 기존의 연구 결과를 완전히 무시하고 악의적으로 만해 스님을 왜곡하고 있다. 그럼 고은 씨는 왜 이렇게 평전이라는 이름 아래 만해를 철저히 짓밟고 있는 것일까? 아마 그것은 고은 씨의 만해에 대한 콤플렉스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단계까지 고은 씨의 행적은 만해와 닮아 있다. 출가했었다는 점도 그렇고, 문학을 했다는 점도 그렇고, 독립운동이나 민주화 운동에 주력했다는 것도 비슷하다. 결정적인 차이라면 한 사람은 한때의 고통이 문화 권력을 쥐는 계기가 되었지만, 한 사람은 일평생 고난의 세월을 걷다가 영양실조로 숨졌다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이번에 고은이 만해의 평전을 낸 것은 질투심의 발로다. 자신의 작품이 30~40대 만해가 썼던 작품에 못 미친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것에서 비롯된 것. 고은이 2001년 미당 서정주가 사망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미당의 친일 문제를 끄집어내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처럼 만해를 자신의 구미에 맞춰 난도질해 그의 사상과 문학 세계를 깎아내리고 자신을 높이는 의도로 해석된다.
- 법보신문 편집국 차장 이재형
고은은 <이상 평전>을 완성한 이듬해인 1975년 <한용운 평전>을 저술했다. 고은은 자신이 지은 한용운 평전에서 만해 한용운을 극렬히 비난했다. 책에서 고은은 만해 한용운이 "순수한 승려가 아니라 정치 선동가였다"고 말한다. 또 일제강점기 때 만해가 지조를 지킨 것에 대해서 "(만해는) 어떤 사람보다 지배 본능이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폄하했다.
고은은 평전에서 만해를 소영웅주의자로, 시종일관 편협하고 이기주의적이며 최남선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했다.
고은은 만해는 "이기적인 성정, 늘 원한이 살아 있는 감정적인 품성 때문에 사찰의 덕망의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하루도 견디어내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그는 사랑을 가진 일이 없고, 대중을 이용했으며, 대중을 극단적으로 모멸했다"고 주장했다.
“(만해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은 어떤 의미에서 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설명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설명문조차 모든 암시의 힘을 믿지 않는 사설체의 요설(饒舌)로 넘쳐 흐르고 있다.”
- 고은 저, 한용운 평전 (301페이지)
고은은 또 만해의 신체시 '심'에 대해서도 '비속한 해설'이나 '붓장난', '승려들이 걸핏하면 지껄이는 정도의 사어(死語)'라고 폄하했다.
만해의 대표작으로 수많은 학자들이 탁월한 저서로 평가하는 '조선불교유신론'에 대해서도 현실 인식이 부족한 치기어린 작품에 불과하다고 폄하했다.
만해가 불문(佛門)에 든 직후 시베리아와 만주를 주유한 것은 '허영'에 불과하며 폄하했다.
고은은 만해가 온 힘을 기울였던 잡지 <유심>에 대해서도 "공허한 배설물인 논설과 수필"이라며 최악의 평가를 내렸다.
독립선언서에 추가한 '공약삼장'은 최남선에 대한 시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은의 한용운 비판은 교수 시절에도 유명했다고 한다. 수업 시간 때마다 걸핏하면 열폭해서 한용운을 까댔다고 한다.
고은은 자신의 창씨개명 사실을 스스로 옹호하면서 한용운이 그의 딸 영숙을 창씨개명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면서 한용운을 까기도 했다. 당시 논란의 인터뷰가 페미니즘 열풍이 불기 이전인 2012년 2월 17일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한국 문단에서 이를 공론화하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했다. 공론화했더라면 2012년에 좀 더 일찍 조명될 수 있었던 것을 한국 문단에서 방관한 것이다.
고은의 한용운 평전은 불교계에 큰 논란을 일으켰다. 법보신문 편집국 차장 이재형은 "고은 씨는 만해를 정치적인 선동가로만 바라보고 있다.", "이 책은 만해의 본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은은 1988년 제1회 만해문학상을 받았고, 만해축전대회장, 만해마을 명예총재를 맡은 바 있다.
서울시는 만해 한용운을 비판하고 3·1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33인을 장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폄훼한 고은을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중 주요 사업으로 선정하여 2017년 11월 서울도서관(옛 서울시청사) 3층에 고은 기념관 '만인의 방'을 개관하고 그곳에 3·1운동 관련 유물을 전시했다. 그리고 2018년 초 성추문 사건이 터지자 2018년 3월 12일에 문을 닫았다. 결과적으로 시 예산을 자신의 명예욕만을 드높이기 위해 낭비한 것이라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곱게 넘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4.3. 서정주 비난
등단 초기인 1960년대에는 등단할 때 자신을 밀어 준 미당 서정주를 스승으로 모시고 육친 같은 정을 나누었다고 표현될 정도로 가까운 관계로 지냈다고 주장한다. 1960년대에 가까이에 살며 자주 서정주를 찾아갔다고 한다. 아마도 뻔질나게 미당의 집 문지방을 넘나들었던 것은, 그의 특기인 '명사 사냥'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되지, 그가 육친 같은 정을 나누었다고 언급하는 것은 이미 사로잡힌 악령에서 묘사된 바 몇 번 만나지도 않은 것이 사후에 육친의 정을 나눈 것 이상으로 포장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처럼 매우 진의가 불분명한 발언이다.
고은은 1970년대 저항시인으로 변모한 후 서정주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서정주가 전두환 정권을 찬양하자 완전히 연을 끊고 죽을 때까지 보지 않았다고 밝혔다.
2000년 서정주가 사망하자 고은은 2001년 '미당 담론'을 발표하여 서정주를 비판했는데 제대로 된 학술담론이 아니라 철저한 감성팔이와 억지 논리의 산물이다. 여기서 고은은 '자화상', '귀촉도', '일본헌병 고 쌍놈의 새끼'같이 미당의 작품 중 친일과 상관없는 작품은 물론 친일 전력, 군사정권 협조, 개인 에피소드, 세계관, 철학 등 서정주의 모든 점을 트집 잡아 열심히 비난했다. 그 비판과 분석이라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들이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식인데, 예를 들어 친일과 상관없는 미당의 초기시 '자화상'의 첫 행 '애비는 종이었다'를 지적하며 서정주는 '노예 근성'에 쩔어있는 자라고 비난했고, 이어지는 구절 중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는 구절을 지적하며 "세상에 대한 수치가 결여된 체질"이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노예 근성과 수치심 결여 때문에 나중에 권력에 편에 서서 일신의 안전을 유지하는 삶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 고은이 한창 기세등등하던 시절이라 '용기 있는 행동'이란 호평이 많았지만, 그 당시에도 이미 미당 살아 생전에는 침묵하다 세상을 떠나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니 욕하고 나선다는 비판도 있었다. 고은의 주장대로 육친 수준으로 가까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60년대까지 도움을 여러 번 주었던 것은 분명한데 그런 서정주에게 제대로 된 비판이 아니라 일방적이고 감정적인 비난을 쏟아낸 것은 정상적인 인간의 처신이라 하기 힘들다.
서정주 사후 고은은 서정주의 이름이나 그의 호인 미당을 입에 올리는 법이 없었다. 대신 '그 고유명사'라고 불렀다. "내 입에서 그 고유명사(미당 서정주)는 다시는 안 나옵니다. 그게 내 교양이죠."라고 말했다.
언제나 권력을 가까이했던 서정주는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행위를 했고, 해방 후 1950년대에 자청해서 이승만 평전을 썼다. 고은은 서정주의 이런 성향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까지는 서정주를 스승으로 모시며 '시의 정부(政府)'라고 찬양하더니 1970년대 저항시인으로 돌아서 스스로 권력을 쥐게된 후 연을 끊었고, 서정주가 죽은 후 그를 부관참시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고은은 자신에게 필요할 때만 서정주를 찬양했고, 그가 죽고 더 이상 반박을 못하게 되자 바로 돌아서서 그를 까내리는 식으로 철저하게 이용한 셈이다. 물론 서정주가 친일파였고 독재정권을 찬양하는 등 문제있는 행적을 보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고은의 이런 배은망덕한 행위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고은 본인의 주장처럼 서정주 생전 육친의 정에 비할 법한 깊은 사제 관계를 맺은 게 사실이라면, 서정주의 문학적 재능은 하나도 안 받고 기회주의만 쏙 제대로 전수 받았다고 볼 만한 여지까지 있다. 고은이 서정주를 비판하며 쓴 문장, 예를 들어 수치심이 결여된 체질이라는 비판 등은 고은 본인에게 적용하여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4.4. 박경리 모욕
내가 감옥 독방에 갇혀 있었을 때 교도관을 통해 바깥과 연락했어요. 한번은 리영희·백낙청·고은이 함께하는 술자리에 교도관이 앉아 있었어요. 그 자리에서 고은이 '박경리에게 손자를 업고 시청 앞에서 김지하 석방 플래카드 들고 시위하라고 했더니 과부년 주제에 말을 안 들어. 하라고 하면 할 것이지'라고 떠벌리자, 리영희·백낙청이 낄낄 웃더라는 거야. 그 얘기를 교도관에게 전달받았소.
- 김지하 인터뷰
김지하 시인의 말에 따르면, 고은이 박경리 소설가에게 모욕적인 욕설을 했고 리영희·백낙청은 그걸 듣고 낄낄댔다고 한다. 당시가 1970년대 유신 시대인데, 저명한 소설가에게 거리낌없이 '과부년이 말을 안 듣는다'며 여성혐오적 언행을 해대던 저열한 수준들이 엿보인다. 게다가 박경리는 고은보다 7살 연상이고 문학적으로도 더 인정받은 작가이다.
4.5. 박목월 비난
이 시는 고은의 대표작 만인보에 <박목월>이란 제목으로 실린 작품이다.
청록파 3인이라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이라
타고난 서정파라
인생파라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일제시대는 형산강 기슭에서
금융조합 다니느라
긴 포플러길을
자전거 타고 다녔다
발은 유난히 크고 미욱했지만
손은 두꺼웠다
눈은 늘 서늘
시는 연필로 썼다
그러다가 대통령 부인에게
한동안 매주 한 번씩
시 이야기를 들려준 일로
시인들
시집 낼 돈 얻어
여러 시인들 시집 냈다
시집 뒤에는
어느 고마우신 분의 도움으로
이 시집을 냅니다라는
팻말이 박혀 있었다
그뒤 그녀 죽은 뒤
그 전기 써서
동작동 무덤에 봉정했다
딸 근혜와 함께
아마 그 전기 밑글은
싼 원고료 받고
박재삼이 썼다던가
미리 묻힐 데
부인과 함께 정한 뒤
먼저 묻혔다
묻혀
달에 구름 가는가 구름에 달 가는가
박목월의 대표작 나그네에서 구절을 따와 박정희 일가에 아부해서 시인 생활을 했다고 조롱했다. 그래도 서정주에 대한 비난과 마찬가지로 위에 서술된 다른 비난들보다는 객관적으로 타당성이 있는 편이다.
5. 노벨상 후보?
그는 언제나 노벨 문학상에 대한 회의가 올라오면 1순위로 꼽히는 거인이었다. 한국 여론 전체가 그를 언제나 노벨상 후보로 꼽았고, 기대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을 한국인이 누구이겠느냐' '노벨 문학상 심사가 열렸는데 한국인 중에서 누가 꼽히겠느냐' 하면 당연히 그를 떠올릴 정도였다. 하지만 마치 황우석처럼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20여 개국에 시가 번역되었고 오리엔탈리즘과 민주화 운동 경력같이 서양인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가 많아 노벨문학상 후보로 자주 거론되었는데, 매년 여러 나라에서 그를 초청을 하며, 2007년 영국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에 이명박, 가수 비와 더불어, 그리고 한국 문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름이 오른 것이 그러한 점을 보여준다.
다만 노벨상 후보는 수십 년 뒤에나 공개함이 원칙이기 때문에 실제 고은이 노벨상 후보에 올랐는지 여부는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다. 노벨상은 후보를 선정해서 투표하는 게 아니라 심사위원들이 올해는 누가 받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적어내는 방식이다. 일단 기존 수상자들이 '본인의 수상 분야'에 한해 특정 인물에 대한 추천서를 쓸 수는 있지만... 당연히 공식적인 노벨상 후보라는 건 없고, 보통 국내 언론에서 후보에 올랐다고 쓰는 것은 유럽권 언론에서 흘러나오는 예상 기사들을 받아서 쓰는 것이다.
'고은(및 한국 문학)이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번역이 맛깔을 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는 아주 훌륭한 변명이 있다. 실제로 번역에 따라 작품의 느낌이 달라지는 것은 사실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르지 않는가. 하지만 고은의 작품은 '번역의 수준을 논할 수준이 아닌' 것이었다. 만약 진달래꽃의 아름다움이 노벨상을 받을 수는 있어도, 고은 시인의 작품의 구절을 아는 사람은 그를 열심히 연구한 사람 밖에는 거의 없다. 이런 사람이 심지어 세계 규모로 보면 소수인 한국에서 노벨상을 받을 리가 없다.
오히려 고은은 번역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다른 비유럽어권 문인들의 후광에 엄청난 수혜를 받은 케이스에 속한다. 만인보를 비롯한 고은의 작품들은 문학적 아름다움은 매우 저열한 수준이었으나 그 엄청난 양으로 인해 유명해졌다. 이런 작품들이 번역되어봤자 그 아름다움이 죽기는커녕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원본의 작품성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또 래드브록스 같은 영국의 도박 사이트들은 매년 노벨상 수상자 선정을 두고 베팅을 하는데 여기에서 순위권에 자주 오르기는 했다. 일단 래드브록스 자체는 2006년 터키 소설가 오르한 파묵의 수상을 맞힌 이력이 있긴 하지만, 사실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들의 저명성 등을 생각하면 애초에 아예 한 번도 못 맞히는 게 더 어려웠긴 하다. 즉, 후보 운운하는 것부터가 어떻게 보면 김칫국.
그가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부터인데, 마침 2000년 김대중의 노벨 평화상 수상 이후 또다른 한국의 노벨상 수상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이때 인터넷의 전국적인 보급 시기와 맞물려 오프라인에서 가장 많이 오르내리던 이름이 고은이었다. 이때부터 교과서나 모의고사에 출제되는 빈도가 늘었으며, 본인의 저서가 노벨문학상을 주관하는 북유럽 쪽으로 번역되었다. 또한 2000년 말 미당 서정주의 죽음과 맞물려 그 자리를 대신하는 수준의 인지도가 생겼다.
구체적으로는 2002년 외신에서 고은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했으나 그때는 별다른 반향이 없었다. 국내 언론은 '고은도 노벨문학상 물망에 올랐다.'면서도 그 해는 여성 작가의 차례가 올 것이라고 짧게 전달했을 뿐이었다.
2005년부터 고은의 노벨상 후보 이야기가 국내 언론의 큰 관심을 끌었다. 로이터 통신이 한국의 고은을 두 번째로 유력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꼽았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발표가 당초 예상된 10월 6일보다 한 주 늦어진 13일로 바뀌면서 기대가 커진 것도 한몫했다.
이렇게 후보로 거론되는 까닭은 고은이 1990년대 이후 1년의 반을 국외에서 보낼 정도로 세계 각지의 문학회를 돌아다니면서 우리 문학 알리기, 시 낭송, 초빙 교수 등 활발한 국외 활동을 하여 국제적인 인지도를 높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때 스스로를 노벨 문학상 후보라고 소개하며 셀프 홍보를 하고 다녔다. 고은의 노벨상 셀프 홍보를 한겨레신문 등이 긍정적으로 보도하면서 그의 노벨상 후보설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반복되다 보니 마치 신빙성 있는 사실인 양 확대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어찌되었건, 고은의 노벨상 후보 밀어주기는 문학적 성취보다는 꾸준한 홍보와 한국 문단을 대표한다는 아이덴티티를 적극 어필하여 외신에 알리는 행위가 더 영향이 컸다. 그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거나 한국 문단에서 크게 인정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가 해외에서 받았다는 상들도 과장된 부분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북유럽에서 받았다는 상들이다.
일단 노벨상을 주는 북유럽에서는 여러 상을 수상한 바가 있다. 노르웨이에서는 자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비에른스티에르네 비에른손(Bjørnstjerne Bjørnson)을 기린 비에른손 훈장(2005년)을 수여했고, 스웨덴에서도 자국 노벨문학상 수상자 하뤼 마르틴손(Harry Martinson)을 기리는 상인 동시에 동아시아권 문학에 주는 상인 시카다(Cikada)상(2006년)을 수여했다.
우선 비에른손 상(Bjørnsonprisen)은 비에른손 아카데미에서 매년 수여하는 상이기는 하나, 노르웨이 왕실 및 정부에서 공인하는 훈장은 절대 아니다. 역사도 짧아 2003년에 만들어졌으며, 2017년 이전까지는 해외 문학가들에게도 시상했으나 그 후로는 노르웨이 문학가들에게만 시상한다. 무엇보다 비에른손 아카데미 홈페이지의 수상자 명단을 봐도 고은의 이름이 없다. 2005년에는 마케도니아의 Esma Redzepova가 수상했다고 나온다. 시카다 상(Cikada-priset)의 경우 2006년에 수상한 것은 맞으나, 이 상은 하뤼 마르틴손이 생전에 동아시아(특히 일본)에 관심이 많았다는 이유로 동아시아(한국, 중국, 일본, 대만, 베트남, 홍콩 국적자들이 수상한 바 있다.) 시인에게만 수상하는 대상이 매우 제한된 상이다. 한국인으로는 고은 외에 신경림(2007년), 문정희(2010년)가 받았다. 이 상도 역사가 굉장히 짧아 2004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한국 문단은 고은을 전반적으로 박하게 평하며 어디까지나 원로라서 대접을 한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문학적 담론이나 평론의 대상으로 활발하게 논의되지도 않을 뿐더러 일반 대중에게도 대표작으로 기억될 만한 작품도 없다. 예를 들어 다른 문학자의 유명한 대표작으로는 윤동주의 서시,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이육사의 광야, 김소월의 진달래꽃,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등이 있다. 그나마 대중에도 좀 알려진 게 있다면 김연아 헌상시 '오늘 너는 대한민국이었다.' 정도. 하지만 이것도 인터넷 커뮤니티들 반응을 보면 대부분 오글거리고 유치하다며 까는 게 대부분이다. 즉, 애송되는 시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학교 교과서나 참고서에는 간간히 나오는 작품이고 이에 따라 수업시간에 다루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노벨 문학상 수상 무렵에 나오는 뉴스 기사 이외에 순수 문학 작품으로 고은을 접한 사람은 적은 편이다. 미당 서정주와 그 제자들이 주류인 한국 문학계에서 비 주류로 밀려있다가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될 무렵부터 문단계의 원로로 자리매김했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이는 고은이 말년에야 미당과 멀어졌고 그 이전에는 미당과 친밀했으며 미당의 제자라는 말까지 불렸던 인물 중 한 명이라는 점을 간과한 억지 주장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고은이 미당과 대등하거나 뒤를 이을 정도라고 하기도 힘들다. 위에 설명한 것처럼 어디까지나 고은은 명사 사냥꾼에 가까웠지 문학적 성취가 대단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당 사후에는 고은은 미당을 혹평했다. 살아 생전에는 전혀 하지 않았던 일.
그의 시 세계는 이상처럼 독특하고 기념비적인 것도 아니고, 이육사처럼 강렬하고 지조 있는 세계를 구현하지도 않았다. 윤동주처럼 널리 애송되고 사랑받는 아름다운 시를 작시하지도 못하였으며, "한국어의 화신"으로까지 평가되는 미당 서정주의 시 세계에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다만 그는 허무주의와 탐미주의의 탈을 쓴 채로 의미 없는 텍스트를 생산하여 시집이랍시고 출판했으며, 불교 시절 때 배운 선문답을 교묘히 이용하여 해석하기 아리송한, 막상 해석할 내용도 없는 공허한 의미 없는 시 세계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이에 대해 한국 최고의 문학 평론가 김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의식이 없는 의식, 자작농의 밋밋한 삶은 고양된 혹은 충전된 삶에 대한 감각이 마모되어 있어, 비장이나 장엄에 이르지 못하고 있으며, 그렇다고 사실의 정확한 전달이라는 묘사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도 못하다. 그것은 고은이라는 떠돌이의 의식이 자작농에 기탁한 가면 때문이다. 무의식적인 오문들, 달관의 제스처 섞인 선적 언어의 비-선적 남용, 지켜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 잘 알 수 없는 민족 정서들에 대한 집착 등, 비진정성이 진정성의 탈을 쓰고 있다.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 31쪽)
이는 그의 실체를 명확하게 꿰뚫어 본 것인데, 일방적인 북한에 대한 옹호, 동경, 궤를 같이하여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증오성 발언은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 잘 알 수 없는 민족 정서들에 대한 집착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그의 노벨상 후보 거론도, 후술할 성폭력 파문 이전에 이미 점점 사그라드는 추세였다. 2005년 무렵부터 활발하게 언급되던 노벨상 수상 기대가 몇 년이 지나도록 계속 빗나갔기 때문이다. 거기다 그러는 동안 뭔가 문학적 성취를 이룬 것도 아니고 말이다. 참고로 2011년 당시에는 수상자가 스웨덴의 시인이었고, 근 몇 년 간 시인이 나오지 않았었기 때문에 가까운 해 안에는 시인이 수상할 가능성이 급격히 줄었다는 예상도 나왔다. 2012년에도 또 후보에 올랐다고 했지만 앞서 설명한 것처럼 애초에 후보에 진짜로 올랐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이 그냥 예상이었을 뿐이고, 중국의 모옌(莫言)이 수상했다.
2013년 수상을 앞두고 본인은 "노벨상에 대한 내 소감은 12년도 넘게 한번도 없다."란 인터뷰를 남겼다. 다만 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말만 저렇지 매우 집착한다고 한다.
2016년 10월 노벨문학상 수상 시즌이 돌아왔고, 래드브록스 등 베팅 사이트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상이 유력하다고 일컬어지는 와중에 일각에서는 고은 또한 유력한 후보라고 발표해 또 다시 주목받았지만, 2016년에는 미국의 포크 가수 밥 딜런이 선정되었다. 사실 하루키가 1위로 예측되던 레드브록스 사이트에서도 고은은 11위였기에 가망이 없어 보였다. 노벨상 후보로서 언론에 지속적인 관심을 받는다는 점에선 무라카미 하루키도 비슷하지만, 적어도 하루키는 세계적인 관심을 받는 데다 문학적 성취도 고은에 비하면 훨씬 뚜렷하다. 물론 평가야 주관적이긴 하지만 대체로는.
2017년 또한 노벨상 수상 시즌이 되면서 다시 언론을 통해 고은의 수상 가능성을 예측하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다만 사실 이쯤되면 그냥 진짜 가능성이 있는지 이전에 연례행사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2017년 래드브록스 사이트에서 고은은 예측 순위가 4위로 올라갔지만 2017년에는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받았다.
2018년에는 전세계적으로 미투 운동이 폭발하는 와중에 노벨문학상을 결정하는 스웨덴한림원에서도 성추문 스캔들이 터지면서, 시상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
그 뒤 성추문 사건으로 인해서 이제는 언급 자체도 되지 않고 있으며, 이후에는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이 노벨문학상 거론 대상이 되고 있지만, 인터내셔널 부문의 특성상 한강의 가능성은 현재 시점에선 없는 게 현실이다.
6. 폭음
술을 굉장히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승려 시절부터 폭음을 즐겼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술버릇이 매우 더러웠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 '술집'이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 술을 좋아하는 것은 집안 내력이라고 하며, 고은의 할아버지는 고향 일대에서 소문난 술꾼으로 매일 술을 마셔야 얼굴이 펴졌다고 한다.
술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일화가 있다. 신년 목표를 하루에 소주 100잔 마시기로 잡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빨리 성공해서 하루에 200잔을 목표로 잡았다는 일화도 있다. 예전에 한 대학에서 강의하던 고은이 강의 시간에 10분 지각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이유를 밝히길 "술 한잔 하다가 늦었다"고 당당하게 둘러댔다고 한다. 한 기자가 고은이 술 약속이 있다고 해서 점심 때 인터뷰를 잡았는데, 이미 반주를 하고 있길래 "나중에 술 드신다면서..."라고 하자 "다음날 깼을 때 누구와, 언제까지, 얼만큼 마셨는지 기억나지 않아야 술을 마신 거다. 이건 그냥 곡차다."라고 선언했다고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술버릇은 그의 악명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높다. 알코올 중독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다 그 위험성을 감안하면 그나마 남아 있던 판단력을 갉아먹는 행위였을 것이다.
7. 기타
6.25 전쟁 당시 친인척들의 좌익 활동과 양민학살 사건으로 인해서 수십 년간 고향을 방문하지 못하다, 1991년 어머니 팔순 잔치 때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고향 군산을 방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학살의 피해를 입은 지역 주민들의 반대 여론 때문에 군산에 있는 고은 생가는 복원되지 않고 방치된 상태라고 한다. 고은 생가는 2006년까지만 해도 남아 있었으나, 이후에도 끝내 복원되지 못하고 완전 철거되어 현재 그의 생가 터에는 방문객들을 위해 시 한 편과 문패만 걸려 있다.
비공식적으로는 몇번 고향을 방문했던거 같긴 하다. 하지만 고향에서 간첩으로 몰려 신고를 당하는 등 여러 수모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
20대에 고향을 등진 이후 문인으로 성공한 후에도 고향에 남아 어렵게 살아가던 부모를 오랫동안 외면하고 찾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고향 군산에서는 그의 좌익 활동과 더불어 불효자 이미지까지 겹쳐 인식이 매우 좋지 않다고 한다. 미투 운동으로 고은의 성범죄 논란이 생기자 군산 사회가 큰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고은은 "탈고향 이후 나의 삶에서 아버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또 아버지 사후 고향에서 홀로 지내는 어머니에 대해서, 어머니가 아들인 자신과 함께 살기를 원하지 않고 혼자서 살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2010년 김연아에게 헌정하는 시 '오늘 너는 대한민국이었다'를 썼다. 그런데 이 시에 대한 대중들의 평가가 좋지 않아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17년 9월에는 수원 연고 야구단 kt wiz 헌정시를 썼다.
허공이 소리친다, 온몸으로 가자
제목이 아니라 이게 kt wiz 헌정시 전문이며 반응은 별로 좋지 않다. 물론 나쁘지 않다거나 좋다는 평가도 있는데, 비꼬는 건지 슬로건인 줄 안 건지... 사실 이 헌정시라는 것도 새로 쓴 것이 아니라, 기존에 썼던 "화살"의 한 구절을 재활용한 것이다.
kt wiz 야구단은 이 헌정시를 2018년 kt의 캐치프레이즈로 확정했다고 발표했다. kt wiz는 "지상의 허공은 무언가 받아들이는 수동체다. 허공이 소리쳐 공을 부르고, 공은 날아갈 때 에너지를 남기지 않고 간다. 온 힘을 다해서 그렇게 우리도 온몸으로 가자"고 시의 의미를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해석했다. 꿈보다 해몽인 셈. 하나 이후 고은이 성추문에 휘말리면서 이 캐치프레이즈는 폐기되었다. 차라리 야구에 대한 시 한 문장이라면 '공이 소리친다. 날아가자.' 식으로 썼으면 나았을 것이다.
자녀로는 외동딸 고차령이 있으며, 어린 시절부터 영국 런던에 유학을 보내 그곳에서 대학까지 마쳤다. 현재 미술가로 활동한다고 한다.
고차령의 작품이 2012년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아트광주12'에 전시되어 화제가 되었다. 고은이 직접 아트페어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트광주12'는 출품작들의 수준이 너무 낮다는 비판에 휩싸였다. 향후 출품작의 수준을 반드시 심사해야 하고 저명한 미술가들의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되었다. 이후 고은의 성폭력 논란이 일어나면서 친부의 후광이 아닌 스스로의 실력으로 예술성을 증명해야만 오명에서 벗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2012년 당시 대선에 출마한 문재인을 '숫처녀'에 비유하여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2018년 미투 운동 이후 윤단우가 다시 한번 이를 거론하며 재발굴되었다. 윤단우는 "숫처녀를 칭찬으로 입에 올리는 인간이나 그걸 칭찬이라고 낼름 옮기는 인간(안도현)이나"라고 비판했다.
마광수에게 호된 비판을 들은 일이 있다.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어서 문단정치, 문단권력이 나온다. 후배들이야 출세하려면 이들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며, 고은은 사실상 시인이 아니라 시인 흉내내는 정치꾼이라는 내용이다. 당시에는 워낙 독설을 입에 달고 살던 마광수라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고은의 엽기적 엽색 행각이 수면 위에 드러나며 재조명을 받았다.
3.1 운동을 심각하게 폄훼하였다. 고은은 만해 한용운이 개인적인 컴플렉스에서 3.1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모독했고, 당시 민족대표 33인을 장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폄하한 바 있다. 서울시가 3.1 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중 주요 사업의 하나로 만인의 방에 3.1 운동 유물을 전시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적반하장이나 다름없는 행위다.
신라 말기의 지식인 최치원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처음에 글을 배울 때 읽은 것이 바로 최치원의 전기였다고 한다. 그런데 고은은 최치원이 경주시 출신이 아니라 군산시 출신이라고 억지 주장했다. 한 야사에 그렇게 적혀 있다고 하는데 그 야사의 출처에 대해서는 대답을 회피했다.
동료 시인 구자운의 부인과의 추문이 있다. 막장 드라마 같은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드라마티카 백과사전과는 사이가 매우 좋지 않다, 카더라.
교과서에 실린 애창곡 〈등대지기〉의 작사가로 알려졌다. 이 노래는 1970년대 양희은, 은희 등이 건전가요로 부르면서 유명해졌다. 당시에는 원곡이 영국(또는 아일랜드) 민요이고, 고은이 여기에 아름다운 노랫말을 붙였다는 식으로 알려졌다. 사실 이 곡은 일본 소학교(초등학교)에서 사용하는 『학교창가집』에 1947년부터 실린 〈灯台守〉이며, 가사 또한 일본 시인 가츠 요시오(勝承夫)가 붙인 것이다. 1970년대 등대지기 수록 음반들을 보면 한국어 가사가 조금씩 다른데, 이것은 일본어 가사를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게 옮겼기 때문이다. 고은도 그런 번역자 중의 한 명일 뿐이다.
세월호 참사의 추모시를 쓴 적 있다. 참사 100일(2014년 7월 25일)을 기해 나온 추모 시집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에 실렸으니 사고 직후에 쓰인 것.
<이름 짓지 못한 시>
8. 수상
1974년 - 한국문학작가상
1988년 - 만해문학상 (시집 만인보)
1991년 - 중앙문화대상
2002년 - 은관문화훈장
2005년 - 노르웨이 국제문학제 비에른손 훈장
2006년 - 스웨덴 동아시아 문학상 시카다상
다만 일련의 사건으로 이들 중 상당수는 박탈될 것으로 보인다.
9. 작품
9.1. 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 (1960)
<해변의 운문집> (1964)
<신 언어의 마을> (1967)
<세노야> (1970)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 (1974)
<부활> (1975)
<제주도> (1976)
<입산> (1977)
<새벽 길> (1978)
<고은 시선집> (1983)
<조국의 별> (1984)
<지상의 너와 나> (1985)
<시여 날아가라> (1987)
<가야 할 사람> (1987)
<전원시편> (1987)
<너와 나의 황토> (1987)
<백두산> (1987)
<네 눈동자> (1988)
<대륙> (1988)
<잎은 피어 청산이 되네> (1988)
<그 날의 대행진> (1988)
<만인보(萬人譜)> (연작: 1986~2010): 1986년부터 2010년까지 집필된 30권 4001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연작시로, 고은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만인보'는 만인의 삶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으로 고은은 "반만년의 한국사에 명멸한 인간 군상의 부침과 영욕을 담아냈다."고 말했다.
<독도> (1995)
<남과 북> (2000)
<허공> (2008)
<상화 시편> (2011)
<내 변방은 어디 갔나> (2011)
<무제 시편> (2013)
<초혼> (2016)
<어느 날> (2017)
<무의 노래> (2022)
9.2. 소설집
<피안앵(彼岸櫻)> (1962)
<어린 나그네> (1974)
<일식(日食)> (1974)
<밤 주막> (1977)
<산산히 부서진 이름> (1977)
<떠도는 사람> (1978)
<산 넘어 산 넘어 벅찬 아픔이거라> (1980)
<어떤 소년> (1984)
<갠지스 강의 저녁노을> (1986)
<화엄경> (1991)
10. 사건 사고
10.1.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일전에 고은 선생님, 문재인 후보하고 소주 한잔 얼큰하게 하시더니 일갈. “보통 정치하는 사람들 똥갈보 같은데 이 사람은 숫처녀 그대로란 말이야!”
- 안도현, 2012년 10월 초 자신의 트위터에서 고은이 문재인을 숫처녀라 칭찬했다고 주장하며
2016년 최순실 게이트로 정국이 혼란한 가운데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고은의 이름이 올라왔다는 보도가 터졌다. SBS뉴스 보도자료 문재인을 지지했다는 명목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안도현이 2012년에 주장한 것과 달리, 본인은 문재인을 포함해서 정치인은 누구든지 지지한 적이 없다고 인터뷰에서 주장했다.SBS뉴스 보도자료
10.2. 성폭력 파문
2018년 미투 운동 때 최영미가 고은의 과거 상습적 성추행 행각을 폭로하여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다. 거기에 그가 과거 등단 직후인 60~70년대부터 해당 폭로보다 심각한 행각을 벌여 왔으며 이에 대한 폭로가 번번이 묻혀왔다는 것까지 알려졌다. 서울시는 2월 28일 고은을 기리기 위해 3억 원을 들여 서울시청사에 조성한 만인의 방을 즉시 철거하였고 기타 다른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단체들도 기념사업을 모두 취소했다. 국내 대표 문인단체인 한국작가회의의 상임고문직에서도 사퇴하고 탈퇴했다. 다만 이미 수여된 은관 문화훈장 및 한신대학교의 문학 명예박사 학위 등은 박탈되지 않았다.
고은은 성추행 의혹을 부인하며 2018년 7월 25일에 최영미를 상대로 10억 7000만 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1심 및 2심 소송에서 모두 패소하였다. 2019년 11월 8일에 내려진 2심 판결 이후 대법원 상고를 포기하고 은거하며 간간히 글을 발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