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마애불 통신 17(8월 30일, 금)|마애불 통신 (텐트 서신)
文慧 | http://cafe.daum.net/bodydhamma/MjWx/70
문혜선우님
한국 선종의 발생지에 머물며, 아침 여명에 들어오는 지리산을 관상하는 맛에, 아직도 희망과 절망의 땅 지리산에 있습니다.
지리산은 꿈꾸는 자의 땅입니다.
이상세계를 꿈꾸는 자와 혁명을 꿈꾸던 자가, 골짜기와 산언저리에서 절망과 좌절을 곱씹으며,
시간의 수레바퀴에 짓눌려 저 멀리 사라져간 현장입니다.
생명의 세계는 학습되는 세계입니다. 행복도 학습되고 인간관계도 학습되는 세계입니다.
학습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서툴고 설어서 잘하지 못합니다.
꿈꿀 수는 있지만, 꿈밖의 세계는 학습을 통해 살아가는 현실의 세계입니다.
이상을 꿈꾸든 혁명을 꿈꾸든, 꿈을 깨지 못하면 꿈속의 일일 뿐입니다.
원묘요세는 보조지눌과 정혜결사를 함께한 동지였지만 상무주암에서 보조와 결별하고 다른 길을 갑니다. 원묘요세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꿈속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세계임을 깊이 자각하지요.
현실세계는 근오근수勤梧勤修*하고 학이지지學而知之**하는 학습의 세계입니다.
학습되지 않으면 손이 설어 제대로 일할 수 없습니다.
타인과의 관계가 삐꺼덕거리는 것도 학습의 부족에서 오는 부적응입니다.
학습은 경험과 동의어입니다.
한국 선종의 발생지에서 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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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慧 - *근오근수勤梧勤修
붓다는 배움, 익힘, 숙달의 삼 단계의 근오근수(勤悟勤修)를 제시하였다.
**학이지지學而知之
삼지(三知)의 하나. 배워서 앎.
삼지(三知)는 태어나면서 앎에 이르는 생이지지(生而知之)
배워서 아는 것을 학이지지(學而知之),
많은 고생을 하고 난 다음에 알게 되는 곤이지지(困而知之)
┗ 蓮庵(반달곰) - 문혜님 스님께 질문 부탁 드려 주세요.
근오근수(勤梧勤修)와 점오점수(漸悟漸修)는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하나요?
근오근수(勤梧勤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는 어떻게 다른 가요?
┗ 文慧 - 혜천스님: 붓다께서는 깨달음은 점차적으로 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순간에 오는 것도 아니다 했지요.
돈오돈수는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배고프다고 한 그릇의 밥을 한 숟갈에 밀어 넣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밀어 넣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기도가 막혀 죽겠지요.
돈오돈수는 과학으로 말하면 가설입니다.
점오점수 또한 이론은 그럴 듯하지만 현실 수행의 체험의 점수점오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너무 수행을 기계적으로 보고 있지요.
이 땅에서 수행은 내 능력에 맞게 근수하고 근오하는 게 현실의 경험세계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배우고 익히고 숙달시킴이 가르침은 근오근수라는 의미입니다.
그 동안 불교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에 치우쳐 현실의 삶을 도외시하고 관념의 세계에 도피해 버렸지요. 돈오돈수는 비겁한 현실도피입니다.
생이지지한 인간이 있을 수 없듯 돈오돈수한 인간 또한 생명세계에는 없었지요.
붓다께서는 칠년의 시간이 필요했잖아요.
생명의 세계는 근오근수하고 학이지지한 세계입니다.
내가 논하는 것은 생명세계에 한정해서입니다.
지구 밖 생명체는 돈오돈수할지는 잘 모르겠네요.
남의 세계를 논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입니다.
독에 물을 채우려면 바닥부터 차올라 옵니다.
빨리 차오르게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바닥부터 차오르는 현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항아리 바닥부터 전까지 동시에 채우는 것은 인간세계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돈오돈수는 허구의 가설입니다.
文慧 - 학습을 풀어쓰면 배우고 익힌다는 것인데
익힌다에 방점을 두는 이들은 적어도 10년의 시간은 들여야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배우는 자의 몫이고,
가르치는 자는 가르침에 의문을 품게 하는 것이 최고의 가르침이라는 주장도 있던데요.
새 학기를 맞아 새겨 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매번 새학기 네요.
┗ 文慧 - 혜천스님: 붓다께서는 학습을 삼단계로 말씀합니다.
배움 익힘 숙달. 난 반드시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학습은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풍요로운 행복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그 분야에 일가를 이루는 일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무언가가 되기 위해 하는 것은 테크닉이지 학습은 아닙니다.
또 가르치는 자가 의문을 품게 해야 훌륭한 스승이라고 말합니다.
스승이 의문을 품게 해서 의문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본디 의문은 그 사람의 의식세계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동산 양개(洞山良价)선사가 소년 시절 반야심경을 배울 때,
당시 스승이던 스님이 강학을 하니 묻기를,
저는 이렇게 눈도 코도 귀도 있는데 왜 경에서는 없다고 합니까? 질문을 하니
스승이 너는 내가 가르칠 수 없다고 고명한 선사께 보내지요.
동산에게 스승이 의심을 불러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그 후에도 동산은 의문을 품고 질문하고 답을 구하기 위해 선지식을 참례합니다.
가르치기가 의문을 일으킨다는 것은 자신이 제자 몫까지 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짓입니다.
석두 - "타인과의 관계가 삐꺼덕거리는 것도 학습의 부족에서 오는 부적응입니다." 마음에 새깁니다.
서쪽밭을 일구다 - 경험에서 배우고 깨치는 이는 준비된 사람. 경험에서 아무런 깨침이 없는 이는?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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