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장흥신문 김선욱씨의 글입니다.
ㅡ국선님이 적절하게 강조하고있는 <공예태후 외가집안>에 대해 역시 지적하고 있습니다.
5남4녀 낳아 인종 총애 독차지 하다 (상)
고려사의 열전 인종 편을 보면, 인종이 공예태후를 왕비로 맞아들인 것은
그의 부친인 임원후가 전중 내급사(殿中內給事)로 있을 때인
인종 4년(1126년) 6월 을묘일로 기록되어 있다.
궁에 들어 온 이후 <공예태후 임씨>의 기록을 보면
△인종 5년(1127) 여름 4월 경오일에 장남 낳고
△인종 7년 2월 기사일에 왕비로 책봉되며
△인종 8년에는 2남 대녕후 경(大寧侯 暻)을 낳고
△인종 9년 10월 경진일에는 아들 호(晧)를 낳고
△인종 11년(1133)에는 장남 철(撤, 후에 현晛으로 개명)이 왕태자로 책봉되고
△인종 19년 정월에 왕태자 철이 관례를 치른다.
이어 △인종 21년(1143) 왕씨(王氏)가 태자비로 간택되고
△인종 21년 7월 경신일에 아들 탁(晫)을 낳았으며
△인종 24년(1146) 2월 갑자일에 인종이 별세하니, 향년 38세요, 재위 24년이었다.
△인종 24년 2월 갑자일에 인종은 임종 직전 왕위를 태자 현(晛)에 양위하니,
이가 곧 의종(毅宗)이다.
△의종 1년(1146년) 3월에 공예태후는 왕태후로 승격되며
△의종 2년(1148)에 왕자 경(暻)은 대녕후(大寧侯), 호(晧)는 익양후(翼陽侯)로 책봉되고 첫째공주는 승경궁주(承慶宮主)로 둘째공주는 덕녕궁주(德寧宮主)로 책봉되고
△의종 9년(1155) 9월 정미일에 임원후가 별세한다
△의종 5년 4월에 샛째누이는 창락궁주(昌樂宮主)로, 넷째누이는 영화궁주(永和宮主)로 책봉되며
△의종 8년(1154) 9월 기미일에 정안공 임원애가 별세한다.
△의종 24년(1170년) 9월에 의종은 정중부에 의해 퇴위당하고 익양공 호(晧)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명종이다.
의종은 명종 3년 10월에 이의민(李義旼)에 의해 사살당하니, 향년 47세요 재위 25년이었으며, 왕위를 내놓은 기간은 3년이었다.
고려사는 명종과 공예태후에 대해 "왕은 지난 시기에 의종이 불효하던 것을 징계로 삼았기 때문에 임금의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태후를 지성으로 섬기고 종실, 외척간에도 화목하게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종 13년(1183년) 11월 계미일에 공예태후가 별세하니, 향년 75세였다.
인종의 왕후가 되어 5남 4녀 9남매를 낳고, 남편과 자녀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던 임시였다.
명종의 모친 사랑 지극
고려사는 임종 당시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계미일에 왕태후 임씨가 죽었다. 태후가 병석에 누웠을 때에 왕(명종)이 친히 약을 달이고 여러 날 동안 옷을 벗지 않았으며 태후의 병이 위중하게 되자 왕이 너무 울어서 눈이 물었었다. 태후가 죽은 후에는, 왕은 의창궁(義昌宮) 곁 저택에 외빈을 하고 조석으로 가서 몹시 슬퍼했다.
이에 대하여 재상들이 애통한 마음을 억제하라고 청했으나 왕은 이를 듣지 않았다. …갑인일에 태후를 순릉에 장사하였다. 왕이 의창궁으로부터 도로로 미륵사에 이르러 상복을 벗고 제상궁(堤上宮)으로 옮겨앉았다. 무오일에 양부(兩府) 재추들이 대성돌에서 표문을 올려 일상 식사의 반찬을 종전과 같이 하자고 청했으나 듣지 아니하였다. …(이하 명종 14년) 정월 초하루 신묘일에 정조 축하의식을 정지하였다. …4월 임신일에 연등회를 열고 이튿날 대회에 풍류를 구경하였으나, 태후의 상사(喪事)와 관련하여 임시로 상원의 연등행사를 정지하시고 이날에 이르러 행사를 거행하였는데 꽃을 꽂는등 여러가지 놀음만은 금지하였다. 4월 병신일에 금나라의 조문사절이 왔다. …정사일에 왕이 대관전에서 금나라 사신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사신은 그 연회가 길례(吉禮)를 좇지 않았다 하여 노여워서 참가하지 않았다. …6월 무진일에 왕이 또 금나라 사신을 위하여 대관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마침내 채붕(綵棚,비단으로 만든 시렁)을 만들지 않고 꽃도 꽂지 않았으며, 주악도 하지 않았다. …11월 갑오일에 왕이 친히 왕태후의 우제(虞祭)를 거행하였다."
이상은 명종이 왕태후를 여읜 후 보여준 그의 효행의 모습들이다. 왕태후가 별세한 지 5개월여 만에 금나라 사신들이 조의사로 파견돼 왔는데, 그들은 왕의 모후에 대한 조문행위가 지나치다고 여겨 왕의 이같은 처신을 나무라는 조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도 왕의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조문의식을 중지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이었다.
"군자가 남의 집상(執喪)하는 뜻을 빼앗지 않는 것은 대개 교화를 바르게 하려 함이요…얼마 전에 보내온 글월에서 모친의 상사를 당하였다 하니 나도 듣기에 서러운데 왕은 이 슬픔을 어찌 견디겠소? 그러나 한 나라의 중책을 생각할 때 어찌 사소한 예절에 구애받겠는가. 이에 우리는 이미 해당 관리에게 지시하여 왕이 평사시와 같이 정사에 임하도록 하였소. 상복을 입고 적을 격파한 옛 명장도 있었거니와 부모를 추모하는 효성은 마음 속에 있다 할 것이니 어찌 상복의 겉치레만 치중하리오…조상이 물려준 위업을 소중히 여겨 군민(軍民)에 대한 도리와 본분을 지켜야 할 것이니 왕은 속히 나라의 평안부터 보존하길 바라는 바이오.
ㅡ태후의 외가는
고려 유수의 문벌인 수주이씨
공예태후는 장흥임씨 일문을 고려의 명문 벌족(閥族)으로 찬란하게 꽃피어낸 문하시랑 평장사 출신의 임원후(任元厚)의 딸이다. 임원후는 부인을 3번 맞았는데,
초취는 여진족 정벌과 동북 9성으로 유명한 문하시중 펴평 윤관(坡平 尹瓘/?∼1111)의 딸이였으며,
재취 역시 문하시중 수주 이위(樹州李瑋 1049∼1133)의 딸이요,
삼취는 참지정사 경원 이식(慶源李軾)의 딸이였다.
공예태후는 임원후의 세 부인 중 이위의 딸이었다.
이위의 부친은 시중 이정공(李靖恭/?∼1099)으로, 시호가 문충(文忠)이었다.
이정공은 수주(樹州) 이씨로 개국공신 희목(希穆)의 후손이었는데, 문종(文宗) 조에 문과에 급제한 뒤 1059년(문종 13) 시예부외랑(試禮部外郞)으로 지남원부사(知南原府事)를 지낼 때 〈삼례도(三禮圖)〉54판, 〈손경자서(孫卿子書)〉92판을 신조(新彫)하여 문종으로부터 상을 받았고, 82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국사를 편찬하였던 고려조 문신이었다(86년 문하시중·상서이부판사로 치사하였다).
이정공의 이들이었던 이위 역시 고려시대의 문신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이 되었을 때 선종이 각읍 수령들의 비위를 조사하기 위하여 윤관(尹瓘)·최사열(崔思悅)과 함께 각 도에 파견하고 겸하여 백성들을 위로하게 하였는데, 이때 왕의 뜻에 거슬려 파직되었다가 예종 때 복관, 형부상서(刑部尙書)를 거쳐, 1110년(예종 5) 문하시랑평장사가 되고 좌리(佐理)공신에 책록되었던 명신이었다.
예종 16년 수태보(守太保) 문하시중을 거쳐 태부(太傅)가 되어 계양백(桂陽伯)의 작호(爵號)를 받고 치사(致仕)했으며, 22년(인종 즉위) 계양공에 봉해졌던 인물이었다
-후에 외손녀인 공예태후가 인종의 비(妃)가 되자 중서령을 더하고 또 진정(鎭定)공신의 호를 받기도 했다.
ㅡ이처럼 공예태후의 외가가 되는 수주이씨 역시 고려 유수의 문벌이었다.
따라서 공예태후가 왕비로 책봉될 무렵(당시 임원후는 조정 안에서 부동의 기반을 구축하기 전으로 그의 관직 또한 전중내급사 종6품직이었다)에는 <이정공-이위로 이어지는 수주이씨>쪽이 <임의-임원후으로 이어지는 장흥임씨>보다 문벌의 명성으로나 권위 면에서 월등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아니면 공예태후가 외가에서 태어나서였는지,
태후에 관한 태몽조차 친가인 임원후 쪽이 아닌 <외조부의 꿈 이야기>로 소개되고 있다.
굳이 장흥임씨와 수주이씨의 우열을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태후의 외가 역시 장흥임씨 못지 않는 문벌이었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태어난 태후였기에 훗날 왕비로 책봉되는 영예를 입게 될 수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