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수와 왕험성이 史記에 처음 등장한지 이천년이 넘었지만 그 곳이 어딘지는 여전히 논쟁중이다. BC 195년 燕나라 사람 위만이 패수(浿水)를 건너 조선으로 망명해서 조선의 왕이 되어 왕험성(王險城)에 도읍했다. BC 109년에는 漢나라 군대가 패수를 건너와 1년 동안 격전을 치른 끝에 왕험성을 점령하고 조선 땅에 4군을 설치했다. 왕험성(王險城)과 왕검성(王儉城)은 같은 곳으로 본다. 당시의 전쟁 상황은 사기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래는 사기 조선열전(史記 朝鮮列傳)이다.
조선왕(朝鮮王) 만(滿)은 옛 연(燕)나라 사람이다. 연나라 때 처음으로 진번(眞番)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키고는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다. 진(秦)이 연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했다. 한(漢)이 일어나고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매 요동의 옛 요새를 복구 수리해서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로 삼고 연(燕)에 속하게 했다. [사기 조선열전]
朝鮮王満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真番朝鮮 為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為其遠難守 複修遼東故塞至浿水 為界屬燕 [史記 朝鮮列傳]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반역하여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위만이 망명했다.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복장으로 동쪽으로 달아나 새(塞)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秦)의 옛 공지(空地) 상하장(上下鄣)에 머물렀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 및 옛 연(燕)나라와 제(齊)나라 망명자들을 복속시키고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했다.
燕王盧綰反, 入匈奴, 満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斉亡命者, 王之, 都王険
효혜제(재위 BC 195 ~ BC 188)와 고후(高后 : BC 180 死) 때를 맞아 천하가 비로소 안정되자 요동 태수는 위만과 약조하기를, 위만은 외신(外臣)이 되어 국경 밖의 만이를 보호하고 변경을 침범하지 않으며 만이의 여러 군장들이 천자를 뵈러 들어오고자 할 때 막지 않기로 했다. 이를 듣고 주상이 허락했다. 이로써 위만은 군대의 위세와 재물을 얻어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고 진번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니 그 땅이 사방 수천 리에 이르렀다.
會孝恵、高后時天下初定, 遼東太守即約満為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 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 以聞, 上許之, 以故満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 真番、臨屯皆來服屬, 方數千里
(위만이) 왕위를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 우거(右渠)에 이르렀다. 漢의 망명자를 유인하여 점점 많아졌고, 들어와 (천자를) 알현하지도 않았다. 진번의 이웃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를 뵈려 했으나 막아서 통하지 못했다. 원봉(元封) 2년(BC 109) 漢은 섭하(涉何)를 시켜 우거를 나무라고 깨우쳐주려 했으나 끝내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섭하가 돌아가다 패수에 임한 국경에 이르러 부하를 시켜 호송하던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이고 곧바로 패수를 건너 말을 달려 요새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천자에게 고했다. 주상은 꾸짖지 않고 잘했다며 섭하를 요동의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임명했다. 조선이 섭하를 원망해 군사를 일으켜 습격해서 섭하를 죽였다.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真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元封二年, 漢使渉何譙諭, 右渠終不肯奉詔. 何去至界上, 臨浿水, 使禦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 即渡, 馳入塞, 遂帰報天子曰殺朝鮮將 上為其名美, 即不詰, 拝何為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発兵襲攻殺何.
천자는 죄인을 모아 조선을 공격했다. 그 해(BC 109) 가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이 제(齊)에서 발해(渤海)로 뜨고,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우거(右渠)를 토벌하고자 병사 5만으로 요동을 나왔다. 우거는 군사를 일으켜 험한 곳을 막았다. 좌장군의 졸정(卒正) 다(多)는 요동군을 이끌고 선봉에 섰으나 패하여 흩어졌다. 다(多)는 달아나서 돌아왔으나 군법에 따라 목이 잘렸다. 누선장군은 齊의 군사 7천 명을 이끌고 먼저 왕험에 이르렀다.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다가 누선의 군사가 적음을 탐지하고 곧바로 성을 나와 누선을 공격하니 누선의 군사들은 패하여 분산도주했다. 장군 양복은 무리를 잃고 산속에 십여 일 숨어 있다가 흩어진 군사들을 점차 찾아 수습했다. 좌장군은 패수 서쪽의 조선군을 공격했으나 격파하고 전진할 수 없었다.
天子募罪人撃朝鮮. 其秋, 遣樓船將軍楊僕従斉浮渤海, 兵五萬人 左將軍荀彘出遼東 討右渠. 右渠発兵距険. 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縦, 敗散, 多還走, 坐法斬. 樓船將軍將斉兵七千人先至王険. 右渠城守, 窺知樓船軍少, 即出城撃樓船, 樓船軍敗散走. 將軍楊僕失其衆, 遁山中十餘日, 稍求収散卒, 複聚. 左將軍撃朝鮮浿水西軍, 未能破自前.
.... (중략) ....
좌장군은 패수에서 조선군을 격파하고 전진하여 왕험성에 이르러 서북쪽을 포위했다. 누선장군도 왕험성으로 와서 성의 남쪽에 주둔했다. 우거왕이 성을 견고하게 수비하여 여러 달 동안 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左將軍破浿水上軍, 乃前, 至城下, 囲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遂堅守城, 數月未能下.
.....(중략) ....
원봉 3년(BC 108)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四郡)을 두었다.
以故遂定朝鮮,為四郡。
....(중략) ....
좌장군은 불려 와서 공을 다투고 서로 질투하여 계책을 어긋나게 했다는 죄로 기시(棄市: 저자거리에서 목을 베는 형벌)에 처해졌다. 누선장군은 군대가 열구(洌口)에 이르렀을 때 좌장군을 기다려야 했으나 자기 멋대로 먼저 공격하다가 군사를 많이 잃은 죄로 사형이 당연했지만 돈으로 속죄하고 서인(庶人)이 되었다.... 후로 봉해진 장수가 아무도 없었다.
左將軍徵至,坐爭功相嫉,乖計,棄市。樓船將軍亦坐兵至洌口,當待左將軍,擅先縱,失亡多,當誅,贖為庶人。...將率莫侯矣
낙랑군 속현의 지명 - 주류설
漢軍의 작전계획 - 주류설
지금의 황해도 재령평야는 본래 바다였고 조선 중기부터 간척사업을 시작했다. 이 바다를 재령만이라고 부른다. 재령평야가 바다였다는 사실은 1530년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漢나라 육군과 수군은 열구에서 합류하여 왕험성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자면 좌장군이 이끄는 육군은 청천강을 돌파한 뒤 평양의 측면을 지나 남진해서 바다를 건너야 한다. 평양의 조선군은 한나라 육군의 길게 늘어진 보급로를 차단할 터이니 원정군은 굶주림을 피할 수 없다. 육군과 수군은 열구에서 합류하여 재령만을 우회한 뒤 북진해서 평양을 앞에 두고 또다시 대동강을 건너야 한다. 열구는 합류 지점으로 최악의 장소다. 육군과 수군이 합류하고자 했다면 합류 지점은 당연히 재령만 입구의 북안이라야 한다. 그런데 주류학계는 재령만 입구 북안을 점제현으로 확정했다. 1913년 9월 그 곳에서 점제현 신사비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비석은 후한 장제(章帝) 원화(元和) 2년(85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었고 대동강 일대가 낙랑군의 옛땅이라는 증거로 제시되었다. 이에 따라 주류학계는 비석이 발견된 지역을 낙랑군 점제현으로 확정하고 재령만 입구 남안을 열구현으로 결정했다.
평양이 공격 목표라면 열구현은 당연히 재령만 입구의 북안이어야 한다. 점제현 신사비는 본래 있던 곳에서 재령만 입구 북안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재령만 입구 북안이 열구현이라면 평양이 왕험성일까? 그렇지 않다. 평양이 공격 목표라면 육군과 수군이 구태여 재령만 입구 북안에서 미리 합류할 필요가 없다. 육군은 청천강을 건너 북쪽에서 평양으로 직행하고, 수군은 재령만과 대동강을 통해 평양으로 진격하는 것이 상책이다. 이 정도 작전계획은 기초 상식이다. 필자가 보기에 사기에 기록된 漢나라의 작전계획은 평양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평양은 왕험성이 아니다.
실전에서는 漢나라 육군이 패수 서쪽에서 초전에 참패하고 발이 묶였다. 육군이 약속된 기일까지 열구에 도착하지 않자 수군 단독으로 왕험성을 공격하다 패하여 분산도주했다. 누선장군을 비롯한 수천 명의 패잔병은 십여일동안 산속에 숨어있다 나와서 부대를 재편성했는데 평양 근처에는 수천 명이 십여일 동안 숨어있을만한 깊은 산이 없다. 이것으로 보아도 평양은 왕험성이 아니다.
고구려에서 대동강을 패수라고 부른 것이 혼란을 유발했다. 중국 북위(北魏 386~534) 시대에 력도원(酈道元 466~527)이라는 지리학자가 있었다. 그가 515년에 완성한 수경주(水經注)는 패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昔燕人衞滿 自浿水西 至朝鮮. 朝鮮故箕子國也. 箕子教民以義, 田織信厚, 約以八法, 而下知禁, 遂成禮俗. 戰國時, 滿乃王之, 都王險城, 地方數千里. 至其孫右渠, 漢武帝元封二年, 遣樓船將軍楊僕 左將軍荀彘 討右渠, 破渠于浿水, 遂滅之. 若浿水東流, 無渡浿之理. 其地今髙句麗之國治. 余訪蕃使, 言城在浿水之陽, 其水西流, 逕故樂浪朝鮮縣 即樂浪郡治, 漢武帝置, 而西北流. 故地理志曰浿水西至增地縣入海, 又漢興以朝鮮為逺, 循遼東故塞, 至浿水為界. [水經注]
옛날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패수 서쪽에서 조선에 이르렀다. 조선은 옛 기자(箕子)의 나라였다.... 전국 때 위만이 왕이 되어 왕험성에 도읍해서 땅이 사방 수천리였다. 손자 우거왕에 이르러 한무제가 원봉 2년(BC 109년)에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를 보내 우거를 토벌했다. 우거를 패수에서 격파하고 마침내 조선을 멸했다. 만약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면 패수를 건너지 않는 것이 이치이다. 그 땅은 지금 고구려의 도읍이다. 내가 고구려 사신을 방문했더니 (고구려 사신이) 말하기를, 성은 패수의 북쪽에 있고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군 조선현 즉 낙랑군의 치소를 지나서 서북으로 흐른다고 했다. 옛 지리지(한서지리지)에 이르기를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또 한(漢)나라가 일어서고 조선이 멀어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여 패수에 이르러 경계로 삼았다고 했다. [수경주]
※ 역도원은 왕험성이 지금 고구려의 도읍이라고 했는데 당시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이었다. 수경주(水經注)는 패수의 북쪽에 있는 성(城)의 이름을 명기하지 않았지만 앞뒤 맥락으로 보아 평양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사신이 말하기를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낙랑군 조선현 즉 낙랑군의 치소를 지나간다고 했다는데 이는 평양성을 지나간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역도원은 또 평양성을 지나가는 패수가 한나라와 조선의 경계인 패수라고 주장했다. 패수가 조선현을 지나서 서북으로 흐른다고 한 것은 서쪽을 잘못 기술한 것으로 생각된다. .
역도원은 고구려 사신의 입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말했는데 평양 일대가 낙랑군이라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라도 있지만 한(漢)나라와 조선의 경계인 패수가 왕험성을 지나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사기를 보면 왕험성은 패수에서 동쪽으로 한참 떨어져 있으니 패수가 지나가는 평양성은 왕험성이 될 수 없다. 대동강이 한나라와 조선의 경계인 패수라면 왕험성은 임진강이나 한강을 끼고 있어야 하고 평양이 왕험성이라면 패수는 압록강이라야 한다. 역도원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고구려에서 대동강을 패수라 부르니까 대동강을 한나라와 조선의 국경인 패수로 만들려고 억지를 부린 것이다.
그런데 漢代에 상흠(桑欽)이 저술한 지리서 수경(水經)은 패수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浿水出樂浪鏤方縣東南過臨浿縣東入于海.
력도원은 이 문장을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로 읽었다. 이는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력도원은 수경주(水經注)를 저술하면서 고구려 사신의 말을 인용하여 사기에 등장하는 패수는 평양을 지나며 수경의 기록과 달리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기술했다. 고구려에서 대동강을 패수라 부르는 내력을 알아보지도 않고 대동강을 사기에 등장하는 패수로 단정한 것이다. 중대한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후세의 중국인들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당(唐 618~907) 왕조에서 636년에 편찬한 주서(周書) 이역열전(異域列傳)과 636년에 편찬한 수서(隋書) 동이열전(東夷列傳)은 "고구려의 국도(國都)는 평양성으로 동서 6리(里)이며 남으로 패수(浿水)에 닿아 있다."고 했다. 삼백년 후 오대(五代) 시대 후진(後晉 936~946) 왕조에서 945년에 편찬한 구당서(舊唐書)에 "고구려는 평양성에 도읍했는데 한대(漢代) 낙랑군의 옛 땅이다. 평양성은 남쪽으로 패수에 닿아 있다."라고 했다. 중국 정사(正史)에 평양을 낙랑군이라고 한 것은 이것이 시작이다.
삼국사기 제37권 고구려지리지에는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평양성은 한대(漢代)의 낙랑군으로 남쪽이 패수에 닿아 있다 했고, 또 수양제의 동방정벌조서에 거함(巨艦)들이 구름같이 날아 패강(浿江)을 가로질러 평양에 이르렀다고 했으니 패수는 대동강이고 평양성은 고려의 서경(西京)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평양을 낙랑군의 옛 땅이라고 한 것은 평양을 왕험성으로 본 것이다. 한(漢)과 조선의 경계는 패수인데 평양은 대동강의 북쪽 기슭에 있으니 대동강이 패수이면 왕험성은 한(漢)나라에 속하게 된다. 이게 말이 되는가? 사기(史記)를 보면 왕험성은 패수(浿水)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이에 조선왕조에서는 사기에 등장하는 패수를 압록강으로 보고 대동강은 또 다른 패수로 보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51권 평양부(平壤府) 조에 평양은 왕험성으로 단군(檀君)조선, 기자(箕子)조선, 위만(衛滿)조선의 도읍이고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낙랑군이라 했다. 대동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대동강은 일명 패강(浿江) 또는 왕성강(王城江)이다. 패수(浿水)는 셋인데 사마천의 사기(史記) 조선열전에 한(漢)과 조선의 경계라고 한 패수는 압록강이고,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평양성은 낙랑군이고 남쪽이 패수에 연해 있다고 했는데 이는 대동강이다. 또 고려사(高麗史)에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북쪽으로 패하(浿河)를 경계로 삼았다고 했다. 세 곳 패수 중에 누구나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대동강뿐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비류와 온조가 무리를 이끌고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서 浿水와 帶水를 건너 미추홀에 자리잡고 백제를 세웠다. 비류는 미추홀에 자리잡고 온조는 위례성에 자리잡았다는 설도 있다. 훗날 고구려와 백제는 평양으로부터 한성에 이르는 지역에서 27년간 치열하게 싸웠는데 전쟁의 무대에 패하, 패수, 한수, 아리수가 등장한다.
패수가 대동강이면 패하는 어디란 말인가?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사에 거듭해서 등장하는 패수는 평양성 남안을 흐르는 대동강 본류가 결코 아니다. 필자는 다른 논고에서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대의 하천 명칭을 아래와 같이 제시한 바 있다. 다만 대수가 어디인지는 알지 못한다.
삼국사기의 하천 명칭 - 이광헌 설
현재의 하천 명칭
단재 신채호는 패수로 태자하를, 왕험성으로 해성(海城)을 지목했고, 비교적 근자에 이덕일이 란하와 창려현을 지목하여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다. 필자는 세 가지 학설 모두가 틀렸음을 입증하고 육고하(六股河)와 북진(北鎭)을 새롭게 제시하고자 한다.
패수와 왕검성의 위치 비정
이마니시 류(今西龍) : 청천강, 평양
신채호 : 태자하, 해성
이덕일 : 란하, 창려
이광헌 : 육고하, 북진
사기보다 이백년 뒤에 반고(班固)가 편찬한 한서지리지에 여러 사람이 주석을 달았는데 낙랑군의 하천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浿水縣 : 浿水西至增地入海,
含資縣 : 帶水西至帶方入海,
呑列縣 : 分黎山列水所出, 西至黏蟬入海, 行八百二十里, 列亦作冽
패수는 서쪽으로 증지(增地)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고, 대수는 서쪽으로 대방(帶方)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열수는 분려산(分黎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점제(黏蟬)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며 길이가 820리다. 列은 冽로도 쓴다.
한서지리지의 주석으로는 浿水, 帶水, 列水가 어느 강을 지칭하는지 알 수 없다. 대동강 북안에 위치한 평양을 왕험성으로 정하고 보니 대동강은 패수가 될 수 없었다. 사기에 浿水가 漢 나라와 조선의 경계라 했으니 패수는 사마천 생시의 요동과 왕험성 사이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요동과 평양 사이에는 압록강과 청천강있고 사학계도 압록강설과 청천강설로 갈라졌다. 양쪽 다 고대의 요동과 현재의 요동을 같은 지역으로 본 것이다.
사기에 조선을 침공한 漢나라 水軍의 상륙지를 열구(洌口)라 했는데 열구는 열수(洌水)의 河口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동강을 열수(列水)로 간주하고 열구(列口)를 대동강 하구에 설정했다. 남은 帶水가 문제였다. 대수는 대방에서 서해로 들어간다 했고 다른 문헌에 대방은 낙랑군의 남쪽이라 했기에 마땅한 강을 지목할 수 없었다. 결국 대수를 정하는 일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차라리 압록강을 패수, 청천강을 대수, 대동강을 열수로 정하는 편이 그럴듯했을 것이다.
청천강이 과연 사기에 기록된 패수일까? 사기에 의하면 漢무제가 조선을 침공할 때 요동에서 출발한 한나라 육군은 동쪽으로 진격하여 열구에서 수군과 합류한 뒤 왕험성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초전에 패수 서쪽에서 조선군에게 참패하고 수 개월 동안 진격이 저지되었다. 패수 서쪽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은 패수가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는 것을 말해 주는데 한서지리지는 낙랑군의 패수가 서쪽으로 흐른다고 했다. 남쪽으로 흐르는 패수와 서쪽으로 흐르는 패수가 동일한 강일 수는 없다. 따라서 서쪽으로 흐르는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은 사기에 등장하는 패수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류학계는 청천강이 패수라는 허구에 기반하여 천년의 역사를 날조했다. 이제 진실을 찾아가는 역사탐험을 시작하자.
소진(蘇秦)이 연(燕)나라로 가서 떠돌다 1년여 후에 연 문후(文侯)를 만나 이렇게 유세했다. 연나라는 동쪽에 조선(朝鮮)과 요동(遼東)이 있고, 북쪽에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이 있고, 서쪽에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이 있고, 남쪽에 호타하(嘑沱河)와 역수(易水)가 있습니다. 땅은 사방 2천여 리에 갑옷을 두른 병사가 수십 만, 전차가 600승, 전투마가 6,000필이고 비축된 식량은 몇 년을 먹을 수 있습니다. 남으로 갈석(碣石)과 안문(雁門)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으로는 대추와 밤이 풍족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하늘이 내려준 창고라는 것입니다. [사기 소진열전]
去遊燕 歳餘而後得見 説燕文侯曰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九原 南有嘑沱易水 地方二千餘里 帯甲數十萬 車六百乗 騎六千匹 粟支數年 南有碣石鴈門之饒 北有棗栗之利 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 此所謂天府者也 [史記 蘇秦列傳]
이때가 燕 文公(재위 BC 361 ~ BC 333) 28년이니 BC 334년이다. 사기의 기록으로는 연나라의 강역을 종잡을 수 없어서 온갖 설이 분분하다. 역사학계는 동쪽에 조선과 요동이 있다는 말에 근거하여 연의 영토를 아래와 같이 유추하는데 발해 연안을 따라 요하까지 뻗어나간 형상이 몹시 기이하다. 고대의 요동과 현대의 요동이 동일한 지역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BC 334 중국의 형세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은 호복(胡服)을 입도록 풍속을 바꾸고 기사(騎射)를 익히게 해서 북쪽의 임호와 누번을 무찌르고 대(代)에서부터 음산(陰山)산맥을 따라 고궐(高闕)에 이르기까지 장성을 쌓아 요새로 삼고 그 땅에 운중군(雲中郡), 안문군(雁門郡), 대군(代郡)을 설치했다. [사기 흉노열전]
趙武霊王亦変俗胡服 習騎射 北破林胡樓煩 築長城 自代竝陰山下至高闕 為塞而置雲中鴈門代郡
무령왕(BC 326 ~ BC 295)이 유목민족의 복장인 바지와 기사(騎射) 즉 말 위에서 활쏘기를 도입한 시기는 BC 307년이다. BC 300년에 胡族의 나라 中山國을 멸하고 이어서 북방의 유목민족을 몰아내고 그 땅에 삼군을 설치했다. 무령왕은 BC 299년 次子 夏에게 양위했는데 295년에 반란을 일으킨 長子를 비호하다 궁에 유폐되어 굶주려 죽었다.
BC 300 중국의 형세
그 후 燕나라의 현명한 장수 진개(秦開)가 胡에 인질로 있었는데 胡가 그를 매우 신임했다. 진개가 연나라로 돌아온 후 군대를 이끌고 동호를 습격해 쳐부수니 동호는 1천여 리를 물러갔다. 형가(荊軻)와 함께 진시왕을 암살하려던 진무양(秦舞陽)은 진개의 손자다. 연나라 역시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 장성을 쌓고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여 胡를 막았다. [사기 흉노열전]
其後燕有賢將秦開, 為質於胡, 胡甚信之. 帰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 開之孫也. 燕亦築長城, 自造陽至襄平. 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주류학계는 여기에 등장하는 조양을 지금의 장가구(張家口)로, 양평을 지금의 요양(遼陽)으로 본다. 진시황이 秦, 趙, 燕의 장성을 토대로 임조(臨洮)에서 요동까지 만리장성을 건설했다는 사기의 기록을 원용한 것이다. 청천강을 패수로 정할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고대와 현재의 요동을 동일한 지역으로 간주하고 있다. 진개가 동호를 습격한 시기는 확실치 않은데 趙나라 무령왕이 삼군을 설치한 후라 하니 BC 295년경일 것이다. 연나라의 전성기인 소왕(昭王 BC 312 ~ BC 279) 때의 일이다. 동호를 천리 밖으로 내쫓은 뒤 진개는 동쪽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燕나라는 전성기 때부터 일찌기 진번(眞番)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키고는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다.
自始全燕時 嘗略屬真番朝鮮 為置吏 築鄣塞 [史記 朝鮮列傳]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위략(魏略)에 이르기를, 옛날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약해지고 연이 스스로를 높여 왕이 되어 동쪽으로 침략하려 하자 조선후 역시 왕을 자칭하고 병사를 일으켜 연을 공격함으로써 주 왕실을 받들고자 했으나 그 대부 예가 간언하므로 그만두었다. 예를 서쪽으로 보내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도 그만두고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자손들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해지자 연나라가 장수 진개를 보내 그 땅의 서방을 공격하여 이천여 리를 빼앗고 만번한에 이르러 경계를 삼으니 마침내 조선이 약해졌다. [삼국지위지동이전]
魏略 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不攻, 後子孫稍驕虐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三國志魏志東夷傳]
연나라 군주가 왕을 칭하기 시작한 때는 문공을 계승한 역왕(易王 BC 333 ~ BC 321) 10년(BC 323년)이다. 연나라가 조선을 침공한 시기가 확실하지 않은데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소왕(昭王)이 즉위했다.(BC 312년) 소왕(昭王) 28년(BC 284년) 악의(樂毅)를 상장군으로 삼아 秦、楚、三晉과 함께 齊나라 정벌을 모의했다. 齊나라 군사는 패하고 제 민왕은 도성 밖으로 도망쳤다. 연나라 군사가 단독으로 추격하여 임치에 진입하여 제나라의 보물을 빼앗고 궁실과 종묘를 불태웠다. 함락되지 않은 제나라의 성은 요(聊), 거(莒), 즉묵(卽墨)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연나라가 6년 동안 차지하였다. [史記 燕昭公世家]
燕昭王 二十八年,燕國殷富,士卒樂軼輕戰,於是遂以樂毅爲上將軍,與秦、楚、三晉合謀以伐齊。齊兵敗,湣王出亡於外。燕兵獨追北,入至臨淄,盡取齊寶,燒其宮室宗廟。齊城之不下者,獨唯聊、莒、卽墨,其餘皆屬燕,六歳。
연나라 소왕은 재위 33년(BC 279년)에 죽고 아들 혜왕(惠王)이 즉위했다. 악의는 조나라로 망명하였고 BC 278년 연나라는 제나라에게 대패하고 철수했다. 연나라 진개가 조선을 침공한 시기는 동호 정벌 후 제나라 정벌 전으로 보아야 하니 BC 290년경으로 추정된다. 주류학계는 진개가 수행한 두 차례의 전쟁으로 연의 영토가 아래와 같이 확장되었다고 주장한다. 연나라와 조선의 국경인 만번한은 지금의 청천강이며 연나라가 장가구에서 청천강까지 장성을 쌓았고 훗날 진시황이 건설한 만리장성의 동쪽 구간은 연장성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BC 109년에 한무제가 조선을 침공할 때까지 이 국경이 변함 없이 유지되었다고 주장한다.
연장성과 연5군 - 주류설
BC 280 중국의 형세 - 주류설
BC 246 진시황 즉위초 형세 - 주류설
주류학계의 주장에 따르면 연(燕)나라는 진개를 시켜 아래 그림의 녹색지대에서 동호를 몰아냈고, 연나라가 조선을 침공하기 전 조선의 영토는 아래의 그림과 같다고 주장한다. 진번은 조선의 남쪽이라고 주장한다.
BC 290 연과 조선의 형세 - 주류설
燕의 영토확장
연두색 지대 - 東胡에게서 빼앗은 영토
주황색 지대 - 조선에게서 빼앗은 영토
주류학계가 설정한 연장성에서 남쪽인 조선과의 국경선은 그 거리가 매우 짧고 동쪽 국경선은 대단히 길어서 남쪽 국경선의 열 배나 된다. 국경선이 길 수록 교류나 충돌이 빈번하기 마련인데 중국의 문헌에는 남쪽 조선과의 관계만 기록되어 있고 동쪽 국경에서는 누구와도 접촉한 기록이 없다. 아무런 접촉이 없었다는 것은 국경선이 날조되었다는 반증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진번을 조선의 남쪽에 설정한 것도 분명한 조작이다. 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燕나라는 전성기 때부터 일찌기 진번(眞番)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키고는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다.
自始全燕時 嘗略屬真番朝鮮 為置吏 築鄣塞 [史記 朝鮮列傳]
연(燕)나라가 조선의 서쪽 땅을 빼앗을 때 진번을 정복했다는 것이니 진번의 위치는 연경의 동쪽이고 왕험성의 서쪽이다.
사기 화식열전(貨殖列傳)은 연((燕)나라의 동쪽에 진번이 있다고 했다.
北鄰烏桓夫餘 東綰穢貉朝鮮眞番之利
북쪽으로 오환, 부여와 이웃하고 동쪽으로 예맥, 조선, 진번과의 교역에서 이득을 얻는다.
연나라 장수 진개가 진번을 정복하고 조선의 서쪽 땅을 빼앗아 만번한을 국경으로 삼은 것은 BC 290년경이다. 이때 왕험성은 만번한 바깥에 있으므로 진번은 연나라와 왕험성의 사이에 있다. 연(燕)나라는 진시황의 침공으로 BC 222년에 멸망했다. 진시황은 연이 정복한 지역을 요동외요(遼東外徼)라고 이름지었다. 요동외요는 요동 바깥의 변경(邊境)지대이므로 양평에서 만번한에 이르는 땅이다.
진(秦)이 연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했다.
秦滅燕 屬遼東外徼 [史記 朝鮮列傳]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죽은 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기원전 206년에 진나라가 멸망하고 항우의 초나라와 유방의 한나라가 4년간 싸웠다. 이 혼란기에 주변의 여러 민족이 중국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했는데 조선도 옛날에 연나라에게 빼앗겼던 땅을 회복했다. BC 81년에 한(漢)나라에서 기록한 염철론(鹽鐵論)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대부가 말하기를 옛적에 사이(四夷)가 모두 강하여 함께 쳐들어와 노략질하였는데 조선은 요(徼)를 넘어 연의 동쪽 땅을 빼앗았다.
大夫曰 往者四夷具强 竝爲寇虐 朝鮮踰徼 劫燕之東地 [염철론(鹽鐵論) 권 38 비호편(備胡篇)]
요(徼)는 요동외요(遼東外徼)를 가리킨다. 사기와 삼국지는 이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한(漢)이 일어나고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매 요동의 옛 요새를 복구 수리해서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로 삼고 燕에 속하게 했다.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為其遠難守 複修遼東故塞至浿水 為界屬燕 [史記 朝鮮列傳]
漢나라가 노관을 燕王에 봉했고 조선과 연이 패수를 경계로 삼았다.
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三國志魏志東夷傳]
노관은 BC 202년 8월 연왕에 책봉되었다. BC 202년 12월 항우가 해하에서 패하여 자결하고 유방의 한나라가 승리했다. 노관은 패수를 조선과의 경계로 정했다. 위의 기록들은 진시황 사후의 혼란기에 조선이 과거 연나라에게 빼앗겼던 땅을 모두 수복하고 연나라 본토의 동부 지역까지 점령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패수는 장성에서 동쪽으로 그다지 멀지 않고 만번반은 패수에서 동쪽으로 멸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류학계는 패수와 만번한 공히 청천강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주류학계는 진개가 조선을 침공하기 전 연나라와 조선의 국경이 태자하이고 침공 후의 국경은 청천강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패수는 태자하를 넘어야 하니 적어도 요하라야 하고 아마도 요하를 넘어 대릉하일 수도 있다.
노관은 BC 195년에 흉노제국으로 망명했다. 아래는 사기 조선열전이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반역하여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위만이 망명했다.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복장으로 동쪽으로 달아나 새(塞)를 나와 패수를 건너 秦의 옛 空地 상하장(上下鄣)에 머물렀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 및 옛 연(燕)나라와 제(齊)나라 망명자들을 복속시키고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했다. [사기 조선열전]
朝鮮王満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真番朝鮮, 為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為其遠難守, 複修遼東故塞, 至浿水為界 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満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斉亡命者王之, 都王険
효혜제(재위 BC 195 ~ BC 188)와 고후(高后 : BC 180 死) 때를 맞아 천하가 비로소 안정되자 요동 태수는 위만과 약조하기를, 위만은 외신(外臣)이 되어 국경 밖의 만이를 보호하고 변경을 침범하지 않으며 만이의 여러 군장들이 천자를 뵈러 들어오고자 할 때 막지 않기로 했다. 이를 듣고 주상이 허락했다. 이로써 위만은 군대의 위세와 재물을 얻어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고 진번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니 그 땅이 사방 수천 리에 이르렀다. [사기 조선열전]
會孝恵、高后時天下初定, 遼東太守即約満為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 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 以聞, 上許之, 以故満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 真番、臨屯皆來服屬, 方數千里 [史記 朝鮮列傳]
연나라가 진번을 정복하고 조선의 서쪽 땅을 빼앗은 때로부터 백년 후 위만이 진번을 정복했다. 이것은 위만이 망명하기 전에 이미 진번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했다는 뜻이다. 그 시기는 秦시황이 사망한 BC 210년에서 항우가 자결한 BC 202년 1월 사이일 것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 BC 403~BC 221)에 진(秦), 조(趙), 연(燕)은 북방 유목민족을 막기 위해 장성을 건설했다. 이를 진장성(秦長城), 조장성(趙長城), 연장성(燕長城)이라 한다. 진시황은 천하통일 후 장군 몽염을 시켜 수십개의 성곽과 요새를 신축하고 기존의 삼국 장성을 수선하여 연결하니 그 길이가 만여리에 달하여 후세에 이를 만리장성이라 불렀다. 사기는 이렇게 기록했다.
땅은 동으로 바다와 조선에 이르고, 서로 임조와 강중에 이르고, 남으로 북향호에 이르고, 북으로 황하에 의거해서 요새로 삼고 음산(陰山)산맥과 나란히 요동(遼東)에 이르렀다. [사기 진시황본기]
地東至海曁朝鮮 西至臨洮羌中 南至北嚮戶 北據河爲塞 竝陰山至遼東
진(秦)이 천하를 병합하고 몽염을 시켜 30만 무리를 이끌고 융적(戎狄)을 북으로 내쫓고 하남(河南)을 거두었다. 지형을 따라 험준한 곳을 이용해 요새를 만들고 장성을 쌓아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요동(遼東)에 이르렀고 길이가 만여리에 달했다. [사기 몽염열전]
秦已竝天下 乃使蒙恬將三十萬衆 北逐戎狄 収河南 築長城 因地形 用制険塞 起臨洮至遼東 延袤萬餘里
진(秦)나라가 六國을 멸하고 시황제(始皇帝)는 몽염(蒙恬)을 시켜 1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으로 胡를 공격해서 하남 땅을 빼앗고 황하를 요새로 삼고 44현의 성을 쌓았다. ... 험한 산과 계곡을 참호로 삼고 미비한 곳을 수선해 임조(臨洮)에서 요동까지 만여리였다. [사기 흉노열전]
後秦滅六國 而始皇帝使蒙恬將十萬之衆北撃胡 収河南地 因河為塞 築四十四縣城 ... 因邊山険塹谿谷可繕者治之 起臨洮至遼東萬餘里
두 개의 만리장성
위의 지도에서 청색은 현존하는 만리장성이고 붉은색은 고대의 장성이다. 장가구에서 적봉(赤峰)을 지나 요동으로 이어지는 구간이 주류학계가 주장하는 燕장성이다. 燕장성의 동쪽 끝을 청천강이라고도 하고 압록강이라고도 한다.
두 개의 연장성(燕長城)
위의 지형도에서 연장성 A는 현존하는 장성이고 연장성 B는 지도 위의 그림일 뿐 실체가 없다. 사기는 만리장성이 음산산맥(陰山山脈)의 험준한 산과 골짜기를 따라 요동까지 이어졌다고 기록했다. 문맥상 요동에서도 장성이 산악지대에 건설되었다는 뜻이다. 西에서 東으로 달리는 음산산맥은 장가구를 거쳐서 북경 북쪽을 지나 발해 연안 산해관까지 이어진다. 현대의 지리학에서는 조백하(潮白河)의 발원지를 경계로 서쪽을 음산산맥, 동쪽을 연산산맥(燕山山脈)으로 구분하지만 고대에는 전체를 하나의 산줄기로 보고 음산이라 칭했다.
연장성 A의 지형
古北口의 만리장성
연장성 A가 자리하고 있는 연산산맥은 대부분 해발고도 1,500 m를 넘고 흥륭현(興隆縣) 북쪽에 있는 주봉 무령산(霧靈山)의 해발고도는 2,116 m이다. 아래의 위성사진에서 짙은 녹색은 수목이 울창한 산악지대이다. 음산산맥에 녹색이 없는 이유는 수목이 자라지 않는 건조지대이기 때문이다.
구글 위성사진
燕장성 B는 대부분 광활한 평야지대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지금의 요동은 일망무제(一望無際)의 대평원이다. 사기에 기록된 만리장성의 지형과 판이하다.
구요동과 신요동 - 이광헌 설
A : BC 108년 이전의 요동
B : BC 108년 이후의 요동
위의 지도에서 A가 고조선 시대의 요동이고 B가 고조선 멸망 후의 요동이다. 오늘날 요하의 동쪽 지역을 요동, 요하의 서쪽 지역을 요서라고 부르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천하의 중심지인 낙양(洛陽)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지역 즉 Far East를 요동이라 칭했다. 요동(遼東)은 원동(遠東)과 같은 뜻이다. 중국에서 원래 A를 요동이라 부르다가 중국의 영토가 요하유역으로 확장되면서 B를 요동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 그 때가 언제인가? 전국시대에 연나라가 동호를 몰아내고 B까지 영토를 확장했다는 주류학계의 주장이 허구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밝혀졌다. 따라서 연나라가 설치한 요동군과 장성의 위치는 요동 A이고 만리장성의 종착지도 요동 A이다. 중국이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을 정복한 후 요하 동쪽을 요동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진시황 사후 반란군 진승의 부하였던 한광(韓廣)이 BC 209년에 스스로 연왕에 올랐고 여전히 왕위를 지키고 있었다. BC 207년 12월에 진(秦)나라를 멸한 항우는 다음해 2월 18개 제후국을 분봉하면서 연(燕)을 분할하여 요동국을 신설하고 무종(无終)을 도읍으로 정했다. 연의 도읍 계(薊)를 통상 연경이라 불렀는데 지금의 북경이다. 연경과 무종(无終) 사이를 흐르는 조백하(潮白河)가 연과 요동국의 경계임은 누구나 알 수 있다.
항우는 자신을 수행하여 관중까지 종군했던 장도(臧荼)를 연왕으로 봉하고서 한광을 요동왕에 봉하고 무종으로 옮기라고 명했다. 한광은 이에 불복하고 요동으로 옮겨가기를 거부하다가 장도의 공격에 패하여 살해되었고 연과 요동 양쪽 땅은 모두 장도가 차지했다. [사기 항우본기]
燕將臧荼被封為燕王,而韓廣則被徙封為遼東王,以无終為都。韓廣對此不服,不肯遷往遼東,同年被臧荼擊敗及殺害,燕及遼東兩地皆為臧荼所有。
항우가 분봉한 요동국 - 이광헌 설
BC 206 항우가 분봉한 18제후국
만리장성의 조백하 동쪽 구간은 요동국 북쪽을 가로지르는 연산산맥에 건설되어 사기에 묘사된 지형과 일치한다. 여기가 만리장성의 종착지라고 사기에 기록된 요동이다. 만리장성은 秦, 趙, 燕 삼국의 장성을 기반으로 해서 건설되었으므로 燕長城은 장가구에서 진황도까지 현존하는 만리장성과 동일한 경로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연장성(燕長城)의 종착지 양평은 지금의 진황도이다.
주류학계는 현재 장가구와 진황도 사이에 존재하는 장성을 明代(1368~1644)에 신축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明代에 신축한 장성은 감숙성 구간이고 나머지 구간에서는 기존의 장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증축했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문헌으로도 확인된다. 907년에 주전충(朱全忠)이 당(唐) 왕조를 멸하고 후량(後梁)을 세우면서 五代十國의 전란이 시작되었다. 바로 그 해에 오늘날의 요서지역에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거란족을 통일하고 칸에 즉위했는데 현존하는 만리장성이 중국과 거란국의 국경이었다.
936년 석경당(石敬瑭)이 거란국의 지원을 받아 후당(後唐)을 멸하고 후진(後晉)을 창업한 후 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연운(燕雲) 16주를 거란국에 바쳤다. 연운16주의 북쪽 경계는 현재의 만리장성과 일치한다. 장가구에서 산해관까지 현존하는 장성이 당시에도 존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구간의 장성을 唐代(618~907)에 건설했을까? 전혀 아니다. 혹자는 北齊(550~577) 시대에 건설했다고 하는데 이 또한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다. 진시황이 사망한 BC210년 이후 역대 어느 왕조에서도 장가구에서 산해관까지 장성을 신축한 일이 없다.
위략에 이르기를, 옛날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약해지고 연이 스스로를 높여 왕이 되어 동쪽으로 침략하려 하자 조선후 역시 왕을 자칭하고 병사를 일으켜 연을 공격함으로써 주 왕실을 받들고자 했으나 그 대부 예가 간언하므로 그만두었다. 예를 서쪽으로 보내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도 그만두고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자손들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해지자 연나라가 장수 진개를 보내 그 땅의 서방을 공격하여 이천여 리를 빼앗고 만번한에 이르러 경계를 삼으니 마침내 조선이 약해졌다. [삼국지위지동이전]
魏略 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不攻, 後子孫稍驕虐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三國志魏志東夷傳]
앞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진개가 조선을 침공할 당시 연나라와 조선의 국경선은 현존하는 만리장성의 동쪽 구간이었다. 연나라는 진번을 정복하고 조선의 서쪽 땅 이천리를 빼앗아 만번한을 경계로 삼았다. 만번한은 어디인가? 삼국지 왜인전을 보면 천 리는 대략 80 km에 해당한다. 연나라의 동쪽 관문은 진황도(秦皇島) 앞에 있는 산해관이다. 산해관에서 동쪽으로 160 km 전진하면 대릉하(大凌河) 못미친 곳에 소릉하(小凌河)가 동남쪽으로 흘러 금주시(錦州市)를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필자는 이곳을 만번한으로 본다.
BC 290 燕의 조선침공 직전 형세 - 이광헌 설
조선왕(朝鮮王) 만(滿)은 옛 연(燕)나라 사람이다. 연은 전성기 때부터 일찌기 진번(眞番)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키고는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다. 진(秦)이 연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했다. [사기 조선열전]
朝鮮王満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真番朝鮮 為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史記 朝鮮列傳]
요동외요(遼東外徼) : 요(徼)는 순찰한다, 돌아다니며 살핀다는 뜻으로 요동외요는 <요동 바깥의 순찰지역>이다. 과거에 연이 정복한 진번 및 연이 조선에게서 빼앗은 땅으로 장성에서 만번한에 이른다.
진(秦)의 요동외요(遼東外徼) - 이광헌 설
한(漢)이 일어나고 그곳(요동외요)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우매 요동의 옛 요새를 복구 수리해서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로 삼고 燕에 속하게 했다. [사기 조선열전]
漢興為其遠難守 複修遼東故塞至浿水 為界屬燕 [史記 朝鮮列傳]
漢이 노관을 燕王으로 삼았고 조선과 연이 패수를 경계로 했다. 관이 모반하여 흉노로 들어가고,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했다. 오랑캐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투항했다. 준에게 서쪽 경계에 살기를 구하고 중국 망명인으로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겠다고 했다. 준이 믿고 은혜를 베풀어 박사 벼슬을 주고 규를 하사하고 백리의 땅을 봉하여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삼국지위지동이전]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及綰反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中國亡命爲朝鮮藩屛準信寵之 拜爲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黨 衆稍多 乃詐遣人告準言 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三國志魏志東夷傳]
노관은 BC 202년 8월 연왕에 책봉되었고 BC 195년 흉노제국으로 망명했다. 위의 기록은 시황제 사후의 혼란기에 요동외요를 지키지 못하고 만번한에서 물러났으며 漢初에 연왕 노관이 조선과 협정을 맺고 패수(浿水)를 경계로 정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패수는 요동외요에 있으며 만리장성의 동쪽 관문 임유관(산해관)과 소릉하 사이에서 발해로 들어간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반역하여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위만이 망명했다.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복장으로 동쪽으로 달아나 새(塞)를 나와 패수를 건너 秦의 옛 空地 상하장(上下鄣)에 머물렀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 및 옛 연(燕)나라와 제(齊)나라 망명자들을 복속시키고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했다. [사기 조선열전]
燕王盧綰反入匈奴 満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真番朝鮮蠻夷 及故燕斉亡命者 王之都王険
패수는 산해관과 만번한 사이에 있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소릉하의 하류가 만번한이다. 산해관과 소릉하 사이에는 북에서 남으로 또는 서에서 동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가는 강이 10개도 넘는다. 산해관에서 멀어지는 순서로 나열하면 Jiujiang, Shihe(石河), Qiangliuhe, Gouhe, Maoyanhe, Changtan, Dongsha, Xingcheng, 육고하(六股河), Yantal, Lian 등 11개 다음에 소릉하(小凌河)가 있다.
그 중에 백랑산(白狼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육고하(六股河)가 가장 커서 漢과 조선이 국경으로 삼을만 하다. 위만 일행이 토벌군에게 붙잡히지 않고 국경인 패수를 건너간 것으로 보아 패수는 산해관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가 육고하(六股河)를 패수로 보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점이다.
BC 195 위만 망명시 형세 - 이광헌 설
요동외요는 요동 바깥의 순찰지역이다. 요새와 초소를 설치했다..
진시황 시대 중국의 판도 - 비주류설
(진시황의 천하통일) 당시는 東胡의 세력이 강하고 월지(月氏)도 번성했다. 그 때에 흉노의 선우(單于)는 두만(頭曼)이었다. 두만은 秦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여 북쪽으로 옮겨 살았다. 그로부터 10여년 뒤에 몽염이 죽고 과거 六國의 귀족들이 진나라에 반기를 들자 중국은 온통 혼란 상태가 되고 진나라가 변경을 지키기 위해 보냈던 수비병들은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흉노는 마음 놓고 다시 점차 황하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 옛날의 요새를 경계로 삼아 중국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묵돌이 선우가 되었을 때(BC 209) 東胡의 세력이 강성했다. 묵돌이 군사를 이끌고 습격해 순식간에 동호의 군사를 격파하고 그 왕을 잡아 죽였으며 백성들과 가축을 빼앗았다. 그리고 본국으로 개선한 묵돌은 이번에는 서쪽의 월지국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남쪽으로 누번왕, 백양하남왕(白羊河南王) 등의 영토를 병탄했다. 燕과 代를 공격해 일찌기 진나라의 몽염에게 빼앗겼던 흉노 땅을 모조리 되찾았다. 본래 흉노는 하남의 요새를 기점으로 한나라와 경계를 삼았는데, 그곳에 관문을 설치해서 조나(朝那), 부시(膚施)에까지 이르렀고, 더 나아가서는 燕과 代에까지 침범하게 되었다. 당시 漢나라 군대는 항우(項羽)와 서로 대치하느라 중원 천하는 전쟁으로 피폐해 있었다. 이 때문에 묵돌은 손쉽게 흉노의 세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사기 흉노열전]
진시황 사후 혼란기에 조선 역시 과거 연나라에게 빼앗겼던 땅을 수복했다. BC 81년에 기록한 염철론(鹽鐵論)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대부가 말하기를 옛적에 사이가 모두 강하여 쳐들어와 도둑질하였는데 조선은 요(徼)를 넘어 연의 동쪽 땅을 빼앗았다.
大夫曰 往者四夷具强 竝爲寇虐 朝鮮踰徼 劫燕之東地 [염철론(鹽鐵論) 권 38 비호편(備胡篇)]
요(徼)는 요동외요를 가리킨다.
묵돌代(BC 209~BC 174)에 흉노가 가장 강대해져서 북방 오랑캐들을 모두 복종시키고 남쪽으로는 중국과 대적하기에 이르렀다. 左方의 여러 왕들과 장수들은 동방에 거주하는데 상곡군(上谷郡)을 마주보고 동쪽은 예맥(濊貊) 및 조선과 국경을 접했다. 右方의 왕들과 장수들은 서방에 거주하는데 상군(上郡)을 마주보고 서쪽으로 월지, 저(氐), 강(羌)과 국경을 접했다. 선우의 궁정은 대군과 운중군을 마주 보는 곳이었다. [사기 흉노열전]
묵돌시대의 대륙형세 - 이광헌 설
사기 흉노열전에 의하면 흉노는 남쪽으로 상곡군(장가구 일대)에서 중국과 접경하고 동쪽에서는 조선 및 예맥과 접했다. 서쪽으로는 만리장성을 따라 상군(上郡)을 거쳐 농서(隴西)에 이르렀다. 중국은 상곡군에서 만리장성을 경계로 흉노와 접하고 동쪽으로 패수에서 조선과 접경했다. 필자는 육고하(六股河)를 패수로 본다. 조선은 서쪽으로 육고하에서 중국과 접하고 로합하에서 흉노와 접했다. 한편 사기 조선열전에 의하면 조선과 중국 사이에 진번이 있었다. 당시의 형세는 아래와 같다.
묵돌시대 흉노의 동부국경 - 이광헌 설
아래 지도는 이병도의 학설인데 흉노와 漢의 국경이 요하에 이르고 조선과 흉노는 국경을 접하지 않았다. 이는 사기의 기록에 어긋난다. 만리장성과 조선 및 진번의 위치도 사기의 기록과 딴판이다. 역사를 날조한 것이다.
BC 200년의 형세 - 이병도 설
BC 202년 1월, 해하 전투에서 항우가 패하고 자결함에 유방이 천하를 제패했다. BC 201년 가을 흉노가 침입하여 마읍과 태원을 점령하자 유방이 직접 출정했다. 유방은 묵특의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흉노를 추격하다가 평성(지금 대동) 근처 백등산에서 포위당했다. BC 200년 정월의 강추위 속에 꼼짝없이 죽게 되었는데 묵돌이 포위망 한쪽을 풀어준 덕분에 7일만에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 후 漢은 흉노의 속국이 되어 해마다 막대한 조공을 바쳤다. 이런 상황은 武帝가 흉노를 상대로 전쟁을 개시한 BC 133년까지 지속되었다.
흉노에게 항복한 뒤 유방은 공신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표적이 된 진희가 BC 197년 8월에 趙와 代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유방이 직접 출정하여 평정했다. 이어서 楚王 한신과 梁王 팽월을 장안으로 불러 주살하고 삼족을 멸했다. 위협을 느낀 회남왕 경포가 BC 196년 7월에 봉기하자 유방이 출정하여 10월에 반군을 격멸했고 경포는 도주하다 살해되었다. 유방은 이때 화살에 맞아 병석에 누웠는데 얼마 후 연왕 노관이 모반을 꾸미고 있다는 고변이 들어왔다.
(BC 195년 2월) 유방은 燕王 노관을 장안으로 불렀다. 노관이 두려워 병을 핑계로 가지 않자 유방이 노하여 번쾌에게 燕을 치라 하였다. 연왕 노관은 자신의 궁인, 가속과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長城 아래에 머물며 상황을 살폈다. 다행히 유방의 병이 나으면 스스로 들어가 사죄하려고 했다. 그런데 4월에 유방이 죽자 노관은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흉노국으로 도망갔다. 흉노가 그를 동호(東胡)의 노왕(盧王)으로 삼았다. 그렇게 한 해 남짓 지내다 오랑캐 땅에서 죽었다. [사기 노관열전]
高祖使使召盧綰 綰愈恐 迺遂稱病不行 上益怒 使樊噲擊燕 燕王綰悉將其宮人家屬騎數千居長城下 侯伺 幸上病愈 自入謝 四月高祖崩 盧綰遂將其衆亡入匈奴 匈奴以為東胡盧王 居歲餘 死胡中
노관열전에는 노관이 싸워보지도 않고 흉노국으로 도망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노관의 군대와 토벌군 사이에 수개월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처음 토벌군 사령관에 임명된 번쾌가 출정하기도 전에 참소를 당해 주발(周勃)로 교체되고 번쾌는 장안으로 압송되었는데 도착했을 때 유방은 이미 죽은 뒤였다. 그리하여 주발(周勃)이 토벌전을 수행했다.
연왕 노관이 모반하자 주발(周勃)은 상국(相國)으로서 번쾌를 대신하여 군을 이끌고 계현(연경)을 함락시켜 노관의 대장 지(扺), 승상 언(偃), 태수 경(陘), 태위 약(弱), 어사대부 시(施)를 사로잡고 혼도(渾都)를 도륙했다. 노관의 군대를 상란에서 격파하고 저양에서 노관의 군대를 다시 격파하고는 장성까지 추격했다. 상곡군 12개 현, 우북평군 16개 현, 요서군과 요동군 29개 현, 어양군 22개 현을 평정했다. [사기 강후주발세가]
燕王盧綰反 勃以相国代樊噲将 撃下薊 得綰大将抵 丞相偃 守陘 太尉弱 御史大夫施 屠渾都.破綰軍上蘭 复撃破綰軍沮陽 追至長城 定上谷十二縣 右北平十六縣 遼西遼東二十九縣 漁陽二十二縣 [史記 絳侯周勃世家]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반역하여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위만이 망명했다.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복장으로 동쪽으로 달아나 새(塞)를 나와 패수를 건너 秦의 옛 空地 상하장(上下鄣)에 머물렀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 및 옛 연(燕)나라와 제(齊)나라 망명자들을 복속시키고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했다. [사기 조선열전]
燕王盧綰反入匈奴 満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真番朝鮮蠻夷 及故燕斉亡命者 王之都王険
漢이 노관을 燕王으로 삼았고 조선과 연이 패수를 경계로 했다. 관이 모반하여 흉노로 들어가고,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했다. 오랑캐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투항했다. 준에게 서쪽 경계에 살기를 구하고 중국 망명인으로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겠다고 했다. 준이 믿고 은혜를 베풀어 박사 벼슬을 주고 규를 하사하고 백리의 땅을 봉하여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이 망명한 무리들을 꾀어 무리가 점점 많아졌다, 이에 준에게 사람을 보내 漢兵이 열 갈래로 쳐들어오니 들어가서 지키게 해달라고 거짓으로 고하고는 돌아와서 준을 공격하였다. 준이 위만과 싸웠으나 대적하지 못하였다. 그의 좌우궁인들을 이끌고 바다로 달아나 韓의 땅에 자리하고 스스로 韓王이라 하였다. [삼국지위지동이전]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及綰反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中國亡命爲朝鮮藩屛準信寵之 拜爲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黨 衆稍多 乃詐遣人告準言 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三國志魏志東夷傳]
위만이 나왔다는 새(塞)는 국경을 의미하며 현재의 만리장성이 당시의 국경이었다. 주발의 군대에게 연경이 함락될 때 위만은 연경에서 동쪽으로 달아나 산해관을 통해 만리장성을 나온 뒤 패수를 건너 조선으로 망명했다. 주류학설은 청천강이 패수이고 만리장성이 청천강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연경에서 청천강까지는 직선 거리가 약 1,200 km로 삼천리에 달한다. 위만의 무리는 군대가 아니라 군인과 관리, 하인들, 여자와 아이들이 뒤섞인 피난민이었다. 식량과 가재도구를 실은 짐수레가 행열을 이루고 대다수는 걸어갔을 것이다.
위만이 연경을 출발한 때가 몇 월인지 알 수 없다. 유방이 음력 4월에 죽었고 토벌군에게 연경이 함락된 것은 몇 달 후일 터이니 아마도 여름이 끝나갈 무렵일 것이다. 목적지인 청천강까지 몇 달이나 걸렸을까? 적어도 6개월은 걸리지 않았을까? 피난길에 한겨울을 맞이했을 터인데 추위와 질병과 굶주림에 시달리며 1,200km나 도망갔다는 말인가? 주발이 평정한 요서군과 요동군이 요하 유역이라면 위만 일행은 추격군보다 빠른 속도로 도망쳤다는 말인가?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국경인 청천강에 도착했을 때 만리장성의 수비군이 순순히 통과를 허락했겠는가?
주류학계는 산해관에서 청천강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아무도 살지 않는 빈땅으로 취급하고 있다. 주류학계의 주장에 따르면 산해관에서 지금의 요양까지는 東胡의 영토였고 요양에서 청천강까지는 조선의 영토였다. 위만이 망명하기 90 여년 전에 연나라가 정복했다고 한다. 유목생활하는 동호족은 모두 떠나고 그 땅에는 연나라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을 터인데 위만은 동족들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얻지 못하고 조선으로 가야만 했다는 말인가?
요양을 지나서 청천강까지는 정착생활하는 조선족이 그대로 머물러 살았을 터인데 그 지역의 조선족은 秦의 공격으로 燕이 멸망할 때, 그리고 시황제 사후 전국적인 반란으로 秦이 멸망하고 이어서 항우와 유방이 싸우는 혼란 속에서도 漢族의 지배에 순종하며 숨죽이고 지냈다는 말인가? 북방의 흉노족은 중원의 혼란을 틈 타 잃었던 영토를 모조리 수복했는데 청천강 남쪽의 조선은 아무 생각 없이 먼 산 바라보고 있었다는 말인가?
위만은 연나라 사람들의 동쪽 끝 정착지인 요양에서 왜 동쪽인 압록강 방면으로 가지 않고 하필이면 남쪽 조선으로 갔을까? 조선은 오래 전부터 燕나라의 적국이 아니었던가? 청천강 패수설을 주장하는 주류학계는 이런 여러 의문에 대하여 아무런 답변도 못한다. 청천강 패수설은 날조되었기 때문이다.
흉노제국의 동쪽 지역은 광활한 평원지대라 국경선이 애매하다. 필자는 년간 강수량 380 mm 선을 흉노제국의 국경으로 본다. 유목지대와 경작지대의 분계선이며 만리장성의 경로와 거의 일치한다.
경작지대와 유목지대
단재 신채호 선생은 海城을 왕검성으로 보았다. 단재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왕검성의 위치를 해성으로 명시했으나 패수와 만번한은 요동 일대라고만 했다. 고조선의 경계를 북으로 개원(開原), 동으로 흥경(興京), 남으로 압록강이라 하고 서쪽 경계는 명시하지 않았으나 고조선의 위치를 요동이라 한 것으로 보아 요하를 서쪽 경계로 본 것이 분명하다.
단재 신채호 설
漢나라와 조선의 국경이 패수였으니 요하가 패수이고 만번한은 요하와 해성 사이에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만번한은 혼하 또는 태자하인데 두 곳 모두 요하에서 너무 가깝다. 사기에 이르기를 만번한이 너무 멀어 지키지 못하고 물러났다가 漢初에 패수를 조선과의 국경으로 정했다고 했으니 패수는 만번한과 근접한 곳이 아니다. 태자하를 만번한으로 본다면 패수는 대릉하 또는 그 서쪽이라야 한다. 또한 단재설에서는 진번이 누락되어 있는데 그 위치를 설정하기가 몹시 애매하다.
흉노제국의 영토는 유목지대에 국한되었다. 위의 그림에서 녹색선이 유목지대와 경작지대의 분계선이다. 그렇다면 < ? > 지역은 누구의 영토라는 것인가? 사기에는 흉노와 중국이 상곡군에서 만리장성으로 국경을 접했다고 했다. 만약 < ? > 지역이 흉노의 영토라면 흉노와 중국의 국경은 요하까지 연장되므로 사기의 기록과 어긋나게 된다. 단재설에서는 흉노가 상곡군 동쪽에서도 漢나라와 접하고 있어서 흉노가 동쪽에서 조선과 접경했다는 사기의 기록에 어긋난다. 따라서 단재설은 성립할 수 없다.
한무제의 조선 침공도 - 이광헌 설
BC 195년에 위만 일행이 임유관(산해관)을 나와 건너갔던 浿水가 여전히 두 나라의 국경이었다. 좌장군은 요동의 임유관을 나와 패수로 향했다. 한나라 육군 선봉부대가 패수 서쪽에서 조선군에게 패하고, 주력군이 패수에서 저지당했다. 패수 서쪽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은 패수가 남쪽으로 흐른다는 것을 말해준다. 패수는 어디인가? 육고하를 패수로 보아야 사기의 전쟁 기록에 부합한다.
좌장군이 이끄는 육군은 패수를 지나 열구에서 누선장군이 이끄는 수군과 합류하여 왕험성을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누선장군이 이끄는 수군은 산동성 봉래에서 배를 타고 발해로 나갔다. 발해의 명칭은 고금이 동일하다. 지도를 보면 수군이 상륙한 열구(洌口)가 지금의 요서 지방 해변이란 것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열구(洌口)는 열수(洌水)의 입구인데 필자는 열수를 지금의 소릉하로 본다.
전쟁터 상황도
실전에서 누선장군의 수군이 열구에 상륙하여 단독으로 왕험성을 공격한 것은 왕험성이 상륙지점에서 멀지 않음을 말해 준다. 위의 지도에서 C는 대릉하, 요하, 혼하, 태자하의 강줄기가 모여들어 거대한 삼각주를 형성한 곳이다. 해변은 물론 내륙 깊숙히 수십 km에 걸쳐 소택지와 진펄 지대가 전개되어 육상 통행과 군사작전이 불가능하다. 만약 해성이 왕험성이라면 한나라 수군 7천 명은 B에 상륙하게 된다. 그렇다면 임유관(산해관)을 출발한 한나라 육군 5만 명은 B에서 수군과 합류하기 위해 동쪽으로 장거리를 전진해야 하는데 갈수록 보급선이 늘어져 식량수송이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대릉하를 건너면 광대한 소택지 C를 우회해야 하고 이어서 요하, 혼하, 태자하를 연속으로 건너야 한다. 태자하를 건너면 조선군의 본거지 해성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어 수군과 합류하기 전에 결전을 벌여야 한다. B는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육군과 수군의 합류가 애시당초 불가능한 곳이다.
그러므로 육군과 수군이 합류해서 왕검성을 공격한다는 한나라의 계획 자체가 합류 예정지는 B가 아니라 A임을 말해 준다. A는 임유관에서 그다지 멀지 않아서 수군이 발해를 건너올 동안 육군이 도달하기에 충분한 곳이다. 비록 실전에서 육군이 초전에 참패하는 바람에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지만 이는 조선군이 예상 밖으로 강했기 때문이지 무리한 계획 탓은 아니다. 또한 육군과 수군의 합류예정지가 A라는 것은 왕험성이 A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나라의 작전계획에 비추어 보아도 왕험성의 위치는 요동이 아니라 요서임이 분명하다. 흉노와 조선이 국경을 접했다는 사기의 기록도 이와 같은 추론을 뒷받침한다.
한서지리지에 기록된 요동군의 속현으로 험독현이 있다. 1,800년전 후한(25~220)말에 응소(應劭)가 한서지리지에 주석을 달면서 위만의 도읍은 험독(險瀆)이라 했다. 사기에 위만의 도읍이라 기록된 왕험(王險)이 험독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唐나라 때 편찬 된 사기 주석서 사기색은에 인용되어 전해온다.
應劭曰 險瀆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史記索隱]
응소가 험독은 조선왕 위만의 도읍이라고 했다.
그 뒤에 宋나라 때 편찬된 사기 주석서 사기집해에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전해온다.
應劭注 漢書地理志 遼東險瀆 朝鮮王舊都 [史記集解]
응소의 주석에 한서지리지의 요동 험독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라고 했다.
험독의 위치가 미상이지만 요하 서쪽으로 간주되고 있다. 필자는 요서지역 의무려산 인근에 위치한 북진시(北鎭市)를 왕험성으로 본다. 의무려산의 주봉인 망해봉(望海峰)은 광활한 평원지대에 우뚝 솟아있어 고대로부터 聖山으로 모셔져왔기에 조선의 도읍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의무려산은 하나의 산이 아니라 많은 봉우리가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산맥이다. 漢나라 수군이 단독으로 왕험성을 공격하다가 패하여 분산도주했고 누선장군 양복은 십여일을 산속에 숨어있다 나와서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했다. 수군 병력이 원래 7천 명이었으니 도주하여 산속에 숨어있던 패잔병이 수천 명이었을 것이다. 요동과 요서 일대에 그럴만한 산은 의무려산뿐이다.
이덕일은 란하가 패수이고 고조선과 낙랑군의 도읍인 왕검성의 위치는 갈석산 부근 창려현이라고 주장하여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다. 그가 란하를 지목한 근거는 水經에 기록된 아래의 한 구절이다.
浿水出樂浪鏤方縣東南過臨浿縣東入于海
서두에서 말했듯이 북위(北魏 386~534) 시대에 력도원(酈道元 466~527)은 水經注에서 이 문장을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즉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로 해석했다. 이덕일은 이 문장에서 "패수는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東入于海)"라는 뒷 부분은 무시하고, "패수는 동남쪽으로 흐른다"라는 앞 부분을 근거 삼아 동남쪽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가는 란하를 패수로 지목했다.
이덕일 설
필자는 東入于海 즉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라는 해석은 틀렸다고 본다. 수경의 원문은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東, 入于海> 즉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을 나와 동남으로 흘러서 임패현의 동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로 해석해야 한다.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란하를 패수로 지목하려면 먼저 필자의 방식으로 해석해야 논리적으로 하자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란하는 패수가 아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기에 의하면 위만은 천여 명의 피난민 무리를 이끌고 연경에서 동쪽으로 달아나 만리장성을 나갔다. 위만이 인솔한 무리가 성벽을 넘을 수는 없고 관문을 통과했을 터인데 동쪽으로 나가는 관문은 산해관이다. 당시에는 임유관(臨楡關)이라고 했다. 현재의 만리장성이 당시에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은 이덕일도 인정한다. 위의 지도를 보면 연경에서 산해관으로 가는 도중에 란하를 건너야 하는데 위만은 산해관을 나온 뒤에 패수를 건넜으니 란하는 패수가 아닌 것이다.
이덕일은 또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 기록된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라는 문장을 근거로 란하 하류에 있는 창려현(昌黎縣)을 낙랑군의 치소이자 고조선의 도읍인 왕험성이라고 주장한다. 지금의 갈석산 인근에 있는 창려현이 고대의 낙랑군 수성현이라는 것이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수성현이 왕험성이라는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 아닌가? 이 문제를 둘러싸고 문헌고증학적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나 필자가 보기에는 무의미한 논쟁이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기에 의하면 패수와 왕험성은 만리장성 바깥에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이덕일의 주장은 논쟁할 가치도 없다. 이덕일은 역사의 진행과정을 살피지 않고 옛 문헌의 단편적인 문장에 매달린 결과 이런 오류를 범한 것이다.
여기까지 다각도로 살펴본 바와 같이 고조선의 위치는 요서 지역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주류학계는 평양이 왕검성이고 청천강이 패수라는 허구에 기반하여 한국 고대사 전부를 날조했다. BC108년에 한무제가 위씨조선을 정복하고 그 땅에 4군을 설치했다고 한 史記의 기록에 근거하여 한사군의 영역을 설정하면서 주류학계는 또 다시 역사를 위조했다.
漢四郡 - 주류설
위의 그림에서 낙랑군이 조선의 본토라는 것인데 앞에서 밝혔듯이 진번은 조선의 남쪽이 아니라 중국과 조선 사이에 있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위의 그림은 성립할 수 없다.
진번군보다 더 황당한 것이 현도군(玄菟郡)이다. 현도군이 설정된 지역은 고구려 땅인데 한사군을 설치할 때 고구려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사기에는 조선 땅에 4군을 설치했다고 하는데 아무 관계도 없는 고구려에 현도군을 설정한 것은 대체 무슨 망발인가? 고구려가 건국되기도 전에 현도군 관내에 고구려현을 설치한 것이 참으로 가관이다. 소설 쓰듯이 역사를 창작해도 되는 것인가? 현도군은 BC 75년에 요동으로 철수했다고 하니까 4군이 설치된지 불과 30여년만에 낙랑군만 남게 되었다. 당시의 형세는 아래 지도와 같다.
BC 1세기의 형세 - 주류설
현도군이 물러간 자리에서 BC 37년에 고구려가 일어나 졸본성(卒本城)에 도읍했다. BC 18년에는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졸본(卒本)에서 무리를 이끌고 浿水와 帶水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서 백제를 세웠다. 도읍은 위례성과 미추홀 두 가지 설이 전해온다. 그 곳이 어디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삼국사기에 대동강을 패하 또는 패수라 했으므로 대동강 남쪽인 것은 확실하다.
後漢(25~220)시대의 형세 - 주류설
그런데 온조왕(BC 18~AD 27)이 첫번째 도읍인 위례성에 정착한 뒤로 백제는 낙랑의 위협에 시달렸다. 결국 온조왕은 건국 10년인 BC 8년에 漢水 남쪽으로 천도를 결심하고 3년간의 공사 후 BC 5년에 한성으로 천도했다. 첫번째 도읍지인 위례성은 낙랑과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BC 2년에 낙랑이 쳐들어와 위례성을 불사르자 다음해에 온조왕이 낙랑을 치러 출정했다가 큰 눈을 만나 회군하였다. 이것을 끝으로 낙랑은 백제의 역사에서 사라졌다.
온조왕 代에 등장하는 낙랑은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이 아니라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최씨낙랑국이다. 최씨낙랑국은 32년에 고구려에 항복했고 37년에 완전히 멸망했다. 낙랑군이 백제사에 처음 등장한 때는 246년이다. 백제가 BC 18년부터 246년까지 무려 264년 동안 낙랑군과 아무런 접촉이 없었다는 것은 낙랑군이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고구려는 건국 후 246년까지 283년 동안 서쪽에서 중국의 요동군과 현도군을 상대로 쉴새 없이 싸웠다. 그러나 남쪽에서는 37년에 최씨낙랑국을 멸하고 56년에 옥저를 정복한 후 190년 동안 전쟁이 없었다. 낙랑군이 한반도 서북부에 존재했다면 37년에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게 된다. 그런데 그 후 246년까지 209년 동안 고구려는 남쪽에서 낙랑군과 싸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는 대동강 유역에 낙랑군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고구려는 건국 후 283년 동안 낙랑군과 부딪친 일이 오직 한 차례뿐인데 싸움터는 남쪽이 아니라 서쪽이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태조왕 시절인 146년 8월에 漢의 요동군 서안평을 쳐서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아 왔다. 서안평의 위치가 요하 하구이니 이 사건은 대방현과 낙랑군의 위치가 고구려의 서쪽이라고 말해준다.
고구려와 낙랑군의 충돌이 1회에 그친 이유는 낙랑군의 위치가 요동군과 현도군의 후방이어서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구려와 중국 사이의 모든 전쟁이 요동 방면에서 벌어진 것은 대동강 유역에 낙랑군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혹자는 최씨낙랑국과 낙랑군을 동일체로 보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146년의 전쟁에서 보듯이 낙랑군은 고구려의 서쪽에 있었고 최씨낙랑국은 고구려의 남쪽에 있었다. 낙랑군과 최씨낙랑국은 완전 별개인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동시에 낙랑군과 충돌한 246년에 대체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지 살펴보자.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이 설치된지 삼백년 후에 대방군이 등장했다. 군웅이 할거하던 後漢末, 요동에서 반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한 공손씨는 204년에 낙랑군을 분할하여 대방군을 신설했다. 주류학계가 주장하는 공손씨의 세력권은 아래 그림과 같다. 고구려는 내륙에 갇혀있고 중국은 위, 촉, 오 삼국이 대립하고 있었다.
공손씨 세력권 - 주류설
삼국 형세 (220~263) - 주류설
공손연이 위나라에 입조하기를 거부하자 237년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토벌군을 이끌고 출정했으나 큰비가 내려 회군했다. 공손연은 스스로 燕王을 칭하고 百官을 임명했다. 위나라와 고구려는 공손연을 정벌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제갈공명과 싸웠던 사마의가 238년 봄에 4만의 군사를 이끌고 요동으로 출정하고 동천왕은 수천 군사를 보내 협공했다. 그 해 8월 사마의는 공손연의 도성인 양평(지금의 요양)을 점령하고 도주한 공손연을 붙잡아 참수했다. 이어서 공손연 휘하의 관리들을 포함해서 수천 명을 학살하고 공손연이 다스리던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 대방군을 평정했다. 이같은 사실은 삼국지위지공손연전에 기록되어 있다.
한국사의 통설은 이 시기의 대동강 일대에 낙랑군을, 황해도 일대에 대방군을 설정하고 있다. 이때 이미 고구려가 압록강 하구를 차지하고 있었음이 삼국지 손권전과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확인된다. 그렇다면 사마의의 군대가 고구려 영토를 통과해서 낙랑군과 대방군을 평정했다는 말인가? 그런 일은 없었다. 동시대에 진수(陳壽 233~297)가 저술한 삼국지에 의하면 주류학계가 주장하는 공손씨의 세력권은 날조된 것이 드러난다. 필자가 이미 밝혔듯이 공손씨가 지배한 낙랑군과 대방군은 요하 서쪽에 있었다. 따라서 동천왕(227~248) 시대의 형세는 아래와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
230년대의 해상 교류 - 이광헌 설
삼국지위서동이전의 마한전에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있다.
景初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 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 其次與邑長. 其俗好衣幘, 下戶詣郡朝謁, 皆假衣幘, 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
景初(247~249) 중에 明帝가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비밀리에 바다 건너로 보내 두 군을 평정했다. 韓國의 여러 신지들에게 고을 군주의 인수를 하사하고 그 다음 서열에게는 읍장의 인수를 주었다. 그들 풍속에 옷과 모자를 좋아하여 하호들이 郡에 와서 조알할 때에 모두 옷과 모자를 한다. 이제 인수와 옷과 모자를 착용한 자가 천여명이다. 부종사 오림이 낙랑으로써 한국을 다스리고자 진한의 8개 국을 분할하여 낙랑에게 주려고 했다. 통역이 다르게 전달해서 신지가 격분하여 韓이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함께 병사를 일으켜 정벌하다 궁준이 전사했다. 두 군은 마침내 韓을 멸했다. [삼국지위지동이전한전]
正始六年, 樂浪太守劉茂帶方太守弓遵 以領東濊屬句麗, 興師伐之, 不耐侯等擧邑降.
정시 육년(245년)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은 영동의 예가 구려에 복속하자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니 불내후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삼국지위지동이전예전]
景初는 曹魏의 2대 황제 明帝(재위 226~239)가 237년부터 239년까지 사용한 연호이다. 237년에 위나라의 관구검이 공손연을 토벌하기 위해 요동으로 출정했다가 악천후로 회군했다. 238년에 사마의가 출정하여 6월에 요수에 도착하고 8월에 공손연을 주살하고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 대방군을 모두 평정했다. 사마의는 9천 명 이상을 학살했다.
이 당시 낙랑태수와 대방태수는 공손연의 수하인데 위나라 명제가 새로운 낙랑태수와 대방태수를 임명했고 이들이 비밀리에 바다를 건너 낙랑군과 대방군에 상륙해서 공손연의 군대를 평정했다는 이야기로 해석된다. 그런데 후속되는 내용은 마한에 관한 것이다. 유흔과 선우사가 수행한 일은 마한의 韓人들을 회유하고 포섭하는 작업이었다.
경초(景初) 2년 (238년) 6월 왜 여왕이 대부 난승미 등을 보내 (대방)군에 이르러 천자에게 조헌할 것을 청하니 태수 유하가 관리와 장수를 보내 왜의 사신을 京都(주; 낙양)까지 호송하게 했다. [삼국지위지왜인전]
景初二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 求詣天子朝獻, 太守劉夏遣吏將送詣京都
238년 12월 위나라는 왜 여왕 히미꼬(卑彌呼)를 친위왜왕(親魏倭王)에 봉하고 사신이 왕래하며 친선을 유지했다. 히미꼬는 야마대국(耶馬臺國)의 통치자였다. 238년 6월에 낙랑태수는 유하였으니 유흔이 낙랑태수로 임명되어 바다 건너로 파견된 때는 237년일 것이다. 사마의가 요수에 도착한 238년 6월에 이미 위나라의 다른 군대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평정한 상태였다. 그런데 왜 삼국지 공손연전에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사마의가 평정했다고 했을까?
魏나라가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마한과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다. 대방태수 궁준이 마한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시기가 기록에 없으나 위서동이전왜인전에 정시 8년(247년) 신임 대방태수 왕기가 부임했다고 했으니 247년에 궁준이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 낙랑군과 대방군은 마한과 동예를 정복했다고 한다.
삼국지 동이전의 마한전 기록이 사실이라면 마한 땅에서 일어선 백제는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고구려가 247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한 삼국사기는 어떻게 되는가?
魏나라가 마한에서 정복활동을 수행하고 있던 242년에 동천왕은 요동에서 위나라의 요충지 서안평을 습격하여 점령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위나라는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고구려를 침공했다.
동천왕 20년(246년) 8월에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군사 1만을 이끌고 현도를 나와 침입했다. 왕은 군사 2만을 거느리고 비류수에서 이를 격파하여 3천 명을 참살하고 양맥곡에서 또다시 3천여 명을 참획하였다. 왕이 추격했으나 관구검이 결사항전하여 아군은 크게 패하고 1만 8천여명이 전사했다. 왕은 1천여기를 이끌고 압록원으로 달아났다. 10월에 관구검은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도륙했다. 왕은 남옥저로 도망했다가 반격하여 위군을 격파하니 관구검은 퇴각하였다.
二十年, 秋八月, 魏遣幽州刺史毋丘儉, 將萬人, 出玄菟來侵. 王將步騎二萬人, 逆戰於沸流水上, 敗之, 斬首三千餘級. 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王謂諸將曰: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毋丘儉者魏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乃領鐵騎五千, 進而擊之. 儉爲方陣, 決死而戰, 我軍大潰, 死者一萬八千餘人. 王以一千餘騎, 奔鴨淥原. 冬十月, 儉攻陷丸都城, 屠之... (中略)....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전란으로 환도성에 다시 도읍할 수 없게 되어 동천왕 21년(247년) 2월에 평양성을 쌓고 백성들과 종묘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仙人 王儉이 살던 곳이다. 혹자는 왕이 왕검에 도읍했다고도 한다.
백제 고이왕(古尒王) 13년(246년) 8월 위(魏)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삭방태수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왕이 그 틈을 타고 좌장군 진충을 보내 낙랑의 변경을 습격해서 백성들을 붙잡아 왔다. 유무가 소식을 듣고 노하자 고이왕은 침공 당할까 두려워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古尒王 十三年 秋八月 魏幽州刺史毌丘儉與樂浪太守劉茂·朔方太守王遵 伐高句麗 王乘虛遣左將眞忠 襲取樂浪邊民 茂聞之怒 王恐見侵討 還其民口 [三國史記 百濟本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