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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
논어의 제목에 관하여
1. 토론과 대화를 뜻하는‘논’이다. 그러니까 공자가 일차적으로는 그의 제자들과 이차적으로는 당시의 정치 지도자 등과, 마지막으로는 공자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이들과의 대화와 대결의 궤적이다.
2. 이것은 공자에 대한 저자 거리의 이해를 갖고 있던 내게 그야말로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기는 묵직한 나무 몽둥이에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공자는 열린 사람이었구나. 과정의 사람이었구나. 시쳇말로 공자님 말씀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며, 내리꽂는 위계와 명령의 사람이 아니었던 게다. 꼰대가 아니었다는 말씀이다.
논어의 편집에 관하여
1. 신정근의 주장 : 논어가 어렵고, 읽기 어려운 까닭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 때문. 그러나 논어는 내용의 통일성과 논리성을 갖춘 책이 아니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수 없다(「유쾌한 공자씨」, ??쪽).
2. 이한우의 생각 : 편집자의 의도가 있고, 그에 따라 배열했고, 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을 수 있다(10쪽).
3. 나는 이한우의 생각이 옳다고 본다. 신약성서에서 복음서나 바울서신에서도 이와 비슷한 토론/논쟁이 있는데, 나는 편집자가 마구잡이로 목차를 정하고, 내용을 배열했다고 보지 않는다. 그 나름대로 의도에 따라 배치했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내재적 읽기 혹은 내재적 접근을 취해야 마땅하다. 특별히 경전임에랴.
주석에 관하여
1. 주희의 「논어집주」와 다산의 「논어고금주」를 중심으로 배병삼과 이한우를 자주 그리고 많이 활용할 것이고, 그리고 신정근의 책을 종종 사용할 것이다.
2. 신학자요 목회자인 나로서는 논어를 기독교의 경전과 대결하고 대화를 시도해 볼 참이다. 그저 단상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學而第一>
각 장의 제목에 관해 :
1장
子曰,“學而時習之,不亦說乎?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1. 첫 글자, 학(學)에 관해
편집자요 제자의 눈에 보기에 공자의 전체 사상을 일별할 수 있는 한 단어를 고르라면, 아니, 그 핵심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한 단어를 고르라면, 바로 이 글자, 學이었다.
2. 성경의 첫 글자와 논어의 첫 글자에 관하여
1) 신정근은 그의 책 「논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사랑이다」(한길사)의 1장에서 기독교의 계시와 유교의 학습을 비교 대조한다. 그리하여,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를 맞대결시킨다.
2) 신정근의 생각에 절반은 동의하지만, 나는 대결시킨 접점을 그가 잘못 짚었다고 본다.
3) 복음서의 첫 글자와 대조해야 한다. 복음서의 첫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4) 그러니까 한 사람, 한 인격, 한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복음서와 한 사람의 말과 말로 이루어진 논어를 비교하는 것이 옳다.
5) 그렇게 보면, 배울 학에서 시작하는 논어의 지성주의적이고 도덕적이고 학구적인 측면과 한 사람에서 시작하는 복음서의 실천적 측면은 다를 수밖에 없다.
3. 학과 습의 해석
1) 학은 이한우에 따르면, 아이가 양손으로 책을 펴들고 있는 모양새다. 그런데 주자에 의하면 그냥 배운다, 는 뜻이 아니다. 본받다 이다. 그런 점에서 주지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후에도 나오지만, 효와 제를 다한 후에 여력이 남거들랑 학문을 하라는 구절이 그 강력한 증거이다. (위에서는 주지적이라고 한 것과 상충되는 것을 어떻게 해결, 해소할 것인가?)
2) 그러므로 학(學)은 “명확히 사람됨을 배운다는 뜻이다”(이한우, 23)
3) 이 대목에 대한 배병삼의 해석이 좋다. 그에 따르면, 유교적 인간, 공자가 바라본 인간다운 인간은 ‘배운’ 인간이 아니라 ‘배우는’인간이다. 자기 질문이 있고, 다 안다고 깝치지 않고, 끝까지 파고 드는 절실한, 목마른 자이다. 그런 점에서 “「논어」적 인간은 ‘영원한 결핌의식’에 시달리는 사람이다.”(25쪽)
4) 사람됨을 배우는 구체적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학과 습이다.
5) 저 습(習)자는 주자가 말한 대로, 새가 날개짓을 백번 한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반복, 반복, 또 반복이다.
6) 세종대왕의 공부법, 백독백습 & 김시습의 이름이 바로 여기서 온 것이다.
4. 시(時)에 관하여
1) 번역본 마다 좀 다르다. 하나는 ‘때때로’이고,
2) 다른 것은 ‘때에 맞춰’이다.
3) 때때로, 는 힘이 남으면 공부하라는 구절을 여기에 잇대어 보면, 인과 덕, 예와 지를 갖추는 중간중간에 익히라는 뜻이다.
4) 때에 맞춰는 예전에 어른들이, 공부도 다 때가 있다고 할 때의 그 때이다. 배운 것을 그날 곧 바로 복습을 해야지 미뤄두면 배운 것(學) 자체를 까먹는다. 그런 뜻으로 해석하면 때에 맞춰도 가능하다.
5) 그런데 나는 시편 1편의 2절이 생각난다. 그곳에서 시인은 토라를 ‘주야로 묵상’한다고 한다. 주야란,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이 아니다. 하루 종일을 말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토라를 읊조린다는 뜻이다. 그리고 묵상하다는 단어의 히브리어 ‘하가’도 반복적인 되뇌임, 되새김을 말한다.
6) 그러므로 시편에서 주야로는 ‘무시로’의 뜻이다.
7) 토라를 무시로, 항시 입으로, 몸으로 읊조리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토라가 뇌에 각인되고, 몸에 새겨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아도, 마치 자동반사처럼 토라가 내 몸에서 반응을 하는 경지를 말한다.
5. 열과 낙의 차이
6. 배병삼은 습과 열 사이의 긴 시간적 공백을 가정한다. 학과 습의 지난한 과정과 단계를 거친 어느 순간에서야 주체할 수 없는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
7. 붕(朋)
1) 여기서 붕(朋)은 그냥 친구나 벗이 아니다. 주자의 해석처럼, 동지(同志), 곧 같은 뜻을 품은 이들이다. 그렇다면, 이 맥락에서 벗은 학문에 정진하는 이들, 그리하여 그 즐거움을 알기 위해 애쓰는 자, 그 즐거움을 맛보았기에 공자가 말한 대로 고기 맛도, 술 맛도 모른채 호학하는 이들일 것이다.
2) 그리고 춘추 시대의 말기의 혼란상을 극복하려는 드높은 이상을 품은 자들도 벗이라 할만하겠지.
3) 배병삼은 왜 친구가, 그것도 멀리 있는 친구가 찾아오느냐고 묻는다. 그것은 불역열호의 경지에 이르른 것이 멀리 있는 벗들에게까지 흘러, 그가 나의 공부의 수준을 알고 싶어 찾아 온 것이라 했다.
4) 함께 공부하다가 멀리 갔던 친구가 서로의 공부 수준을 학인하고, 헤어진 시간 동안 딴 짓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한 것을 서로 확인하고 기뻐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겠다.
8. 성내지 않는 사람이 군자
1) 공부는 그 자체로 목적, 곧 위기와 수기의 학문이라는 것. 그리고 그 자체로 즐거워하라는 것, 어떤 수단이 아니라는 것.
2) 학문의 목적이 자기를 다스리는 것이라고 했다면, 성내는 것은 아직 학문이 미성숙한 것이라 하겠다.
3) 학문의 기준을 타인과의 비교가 될 때, 성내게 된다. 인정 욕구와 인정 투쟁!
4) 공자는 뒤에서(학이 16)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라고 했다.
2장
有子曰,“其爲人也孝弟,而好犯上者,鮮矣,不好犯上,而好作亂者,未之有也.君子務本,本立而道生.孝弟也者,其爲仁之本與!”
유자왈, 기위인야호제, 이호범상자선의, 불호범상, 이호자란자 미지유야. 군자무본, 본립이도생, 효제야자, 기위인지본여
1. 유자에 관하여
2. 「논어」는 사람됨, 사람됨됨이를 ‘효(孝)’에서 찾는다. 효가 있는 자는 윗 사람을 치고 받고 대들지 않는다.
1)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그의 행함을 보면, 그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것이고
2) 그의 그됨을 감출수 없는 곳이 하나 있으니, 바로 가정이 아니겠는가.
3) 사람됨은 가정, 가족 내에서 학습되어야 한다.
4) 그러니 세상을 바꾸려는 자, 그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관계요, 흉, 허물이 없는 가족 관계 안에서 자신을 입증, 증명하여야 한다.
5) 아무래도 사람을 사용하는 군주나 리더의 자리에서 말한 것이지 싶다. 신하와 직원으로 채용하려는 자가 가정에서 안하무인이라면 정부나 직장에서도 불보듯 뻔하지 않겠는가.
6) 혁명가적 인물은?
3. 근본에 관하여
1) 여기서 군자에 대한 논의는 뒤로 물린다.
2) 근본에 힘쓴다고 했을 때의 근본은 맥락으로 보면, 바로 효, 이다.
3) 참된 도, 곧 사람이 걸어가는 길은 근본에 집중할 때 생겨난다. 그러니까 효를 다하는 것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말.
4) 그리고 그럴 때에 사람 사는 세상이 오고야 만다는 긋.
5) 수직적으로는 효, 수평적으로는 제, 이 둘을 다하는 것이 사람 사이의 관계(정약용)를 측정하는 가늠자인 것이다.
6) 종교개혁 당시의 슬로건, Ad fontes!와 비교
3장
子曰,“巧言令色,鮮矣仁!”자왈, 교언영색, 선의인
1. 교언영색, 곧 번지르르한 말고 표정을 꾸며서 말하는 것, 그것 자체가 나쁘다 할 수 없다. 그래서 공자는 드물다고 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 드물다,를 아예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까지 지나치게 밀고 나갈 것은 아니라고 본다.
2. 일단, 말과 표정으로 그 진심을 가리고, 위장하고 포장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조심, 멀리 하라 경계하고 당부하는 것으로 봐야지 싶다.
3. 말의 실체 곧 내용에 치중하기 보다는 듣는 이의 귀를 사로잡는 것에만 신경 쓰지 말라는 뜻으로 보자.
4. 이한우의 해석처럼, 공자는 눌변, 그러니까 유창한 달변 보다는 자구 하나,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자신의 마음을 실어 말하는, 천천히 생각하면서 말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5. 배병삼 : 교언영색하는 사람은, 사람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대상으로 대하는 사람이다(33쪽).
4장
曾子曰,“吾日三省吾身,爲人謀而不忠乎?與朋友交而不信乎?傳不習乎?”
증자왈, 오일삼성오신, 위인모이불충호 여붕우교이불신호 전불습호
1. 증자, 증삼에 대하여
2. 여기서 삼성이 재벌회사 삼성의 이름이다.
3. 증자는 세 가지 측면에서 자신을 반성하였다.
1) 일과의 관계 : 충(忠) - 불충
2) 타인과의 관계 : 신(信) - 불신
3) 학문과의 관계 : 습(習) - 불습
4. 자기 성찰에 대하여. cf. 소크라테스
5장
子曰,“道千乘之國,敬事而信,節用而愛人,使民以時.”
자왈, 도천승지국, 경사이신, 절용이애인, 사민이시
1. 천승(제후국)과 만승(천자국)에 대해서, 그리고 한 승에 대해서
2. 가장 주목할 단어는 도(道)이다. 인도하다, 이끌다는 뜻으로 “공자는 정치를 ‘지배 행위’로 보지 않고, 이끄는 것, 즉 ‘교도 행위’로 보고 있다.”(배병삼, 36쪽)
3. 경사, 신, 절용, 애인, 사민이시, 이 다섯을 배병삼은 탈관료주의, 정책 목표 달성을 통한 신뢰 형성, 재정의 절약, 노동력의 축적, 민간 경제의 활성화로 읽는다(37쪽)
4. 다섯으로 보기 보다는 셋으로 보는 것이 더 맞을 듯 하다.
5. 여기서 인(人)과 민(民)의 차이에 관해서. 이한우, 47쪽 참조
1) 인(人)은 사람, 타인, 지배계층을 뜻한다
2) 이 문맥에서 지배계층이다.
6장
子曰,“弟子,入則孝,出則悌,謹而信,汎愛衆,而親仁.行有餘力,則以學文.”
자왈, 제자, 입즉효, 출즉제, 근이신 범애중, 이친인, 행유여력, 즉이학문
1. 맥락 이해 : 앞의 것이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도리, 이번 것은 장차 군주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도리(이한우, 49)
2. 제자는 어린 사람을 말한다.
3. 여기서 공부는 특정한 기술이 아니라, 문(文), 글을 배운다는 것이다(배병삼, 38쪽). But 이한우는 문(文)을 “글이 아니라 ‘애쓰는 것’으로 풀이”한다(50쪽).
4. 요지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사람이 먼저 된 연후에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5. 공부의 목적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7장
子夏曰,“賢賢易色,事父母,能竭其力,事君,能致其身,與朋友交,言而有信.雖曰未學,吾必謂之學矣.”
자하왈, 현현역색, 사부모, 능갈기력, 사군, 능치기신, 여붕우교, 언이유신, 수활미학, 오필위지학의
1. 자하에 대하여
2. 앞 구절에 이어 배운다는 것, 공부한다는 것에 관한 말이다. 참된 공부는 글자를 익히고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는 지식 기술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도덕과 성품을 함양하는 것이 공부이고, 그런 자가 지성인이다.
3. 또는 학문 혹은 이론 보다는 실천을 강조한다.
8장
子曰,“君子不重,則不威,學則不固.主忠信.無友不如己者.過則勿憚改.”
자왈, 군주부중, 즉불위, 학즉불고, 주충신, 무불여기자. 과즉물탄개
1. 여기서 논란/쟁점이 되는 것은 학즉불고에서의 고, 이다.
1) 견고하다와 꽉 막히다의 양가적 의미를 지닌다.
2) 그러므로 공부하는 것이 사람을 견고, 단단하게 만든다는 뜻으로도 해석 가능하고
3) 공부하지 않으면, 사람이 고집불통이 된다, 즉 공부는 사람을 유연하게 만든다는 것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4) 군자에게 무거움, 무게가 있기 위한 방법을 알려준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단단하다는 해석이 맞을 듯.
5) 그러나 신중함이라는 뜻으로 읽으면, 고집불통으로 해석하는 것도 괜찮다. 공부하지 않으면 사람을 고집불통으로 만든다는 해석도 맘에 든다.
2. 위의 것 보다 더 논란이 되는 것은 무불여기자이다. 자기만 봇한 자를 친구 삼지 말라는 구절이다.
1)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자기 보다 나은 자를 자꾸 본 받고 배우려고 하라고 보면 무난하다.
2) 어디서나 스승이 있다고 한 공자의 말을 여기에 갖다 붙이면, 어디에서나, 누구에게서나 배우려고 하지 않는 자와 벗 삼지 말라, 어울리지 말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공부하지 않는 이들과 붙어 다니지 말라!
3) 부정적으로 해석한다면, 자기 보다 나은 자가 그와 친구가 되어 주겠는가? 모순이 발생한다
4) 나는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싶다.
5) 부모가 되고 보니, 저 말을 나도 자식에게 하고 있고, 말하고 싶다.
6) 과즉물탄개와 연결한다면, 자기를 부단히 학습하고 더 나아가 자기 잘못을 고치려 들지 않고, 나는 원래 이래, 라는 전혀 배움도, 반성도, 성장도 없는 이들과 어찌 벗, 즉 동지(同志)가 되겠는가?
7) 묵적, 곧 묵자(墨子)는 이 주장에 대해 비판한 것으로 안다. 찾아 볼 것!
9장
曾子曰,“愼終追遠,民德歸厚矣.”
증자왈, 신종추원, 민덕귀후의.
돌아가신 분의 장례를 정성을 다해 치르고, 먼 조상 또한 잊지 않고 추모하는 것이다.
2. 요는, 그것이 왜 백성의 백성다움도 두터워지느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군주와 군주의 제사 행위가 왜 백성에게 덕이 되고, 백성을 덕스럽게 하는가?
3. 배병삼.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만남이고, “죽음에 대한 존중심을 싹틔우면 그것은 삶에 대한 존중으로 전환되고, 급기야 전체 사회의 인민이 미풍양속을 스스로 쌓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기 때문이다(43-44쪽).
4. 부모와 조상에게 효를 다하는 본을 보이고, 그것이 자연스레 흘러 백성들도 본받게 된다는 뜻으로 보인다.
5. 군주가 자신의 수기를 먼저하라는 뜻(이한우, 62).
10장
子禽問於子貢曰,“夫子至於是邦也,必聞其政,求之與?抑與之與?”
자금문어자공왈, 부자지어시방야, 필문기정, 구지여. 억여지여
子貢曰,“夫子溫良恭儉讓以得之.夫子之求之也,其諸異乎人之求之與?”
자공왈, 부자온량공검양이득지. 부자지구지야, 기제이호인지구지여
1. 자금이 공자의 제자인지, 자공의 제자인 손자제자인지 아니면 비판자인지 확증하기 어렵다.
2. 그의 질문 내용으로 봐서 당시 공자의 행위에 대한 비판 혹은 조롱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3. 여기서 논란이 되는 구절, 곧 끊어 읽기를 어디서 할 것인지가 토론이 되는 것이 온량공검양이득지, 이다.
1) 온량공검양, 이득지로 읽기도 하고
2) 온량공검, 양이득지로 읽기도 한다.
3) 통상적으로는 1)으로 해석한다. 저 다섯 단어로 인해 정치에 대해 자문을 받는다는 것이다.
4) 다산 정약용은 2)의 해석을 취한다. 온량공검이 양, 그러니까 겸양으로 통해서 드러나고, 그리하여 정치적 지위를 얻었다는 것이다.
5) 내면의 힘, 곧 여기서 말하는 내면은 지식과 학문, 인격을 가리킨다. 그것으로 끌어당기는 것, 매혹 시키는 것, 매력을 느끼게 하여, 그들이 스스로 물어오고, 그들이 공자에게 지위를 주었다는 것이다.
6) 이와 관련해서 이한우는 술이 11의 구절을 인용한다. 부(富)를 억지로 구하지 않는다는 것.
7) “수기(修己)하되 치인(治人)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또 기회가 왔을 때는 치인의 과제를 피해서도 안 된다. 다만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나아가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공자의 나아가고 물러나는 진퇴(進退)의 도리이다.”(68쪽)
11장
子曰,“父在觀其志,父沒觀其行,三年無改於父之道,可謂孝矣.”
자왈, 부재관기지, 부몰관기행, 삼년무개어부지도,가위효의
1. 지인(知人)에 관한 것이다. 사람됨됨이를 효로 파악한다.
2. 부모의 뜻에 충실하느냐의 여부로 판정하는 것인데, 보수적인 색채를 지울 수 없다.
3. 그러나 다산의 해석을 들어보면, 달라진다. 여기서 아비를 군주로 보는 것이다. 전임 왕이, 전직 대통령이 물러 난 뒤에도 그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정약용은 풀이한다. 아직 서툰 신왕이 임의로,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경계이고 경고인 것이다.
12장
有子曰,“禮之用,和爲貴.先王之道,斯爲美,小大由之.有所不行,知和而和,不以禮節之,亦不可行也.”
유자왈, 예지용, 화위귀. 선왕지도, 사위미, 소대유지. 유소불행, 지화이와, 불이례절지, 역불가행야.
1. 정치와 조직 관리의 백미는 화(和), 곧 조화일 것이다. 아무리 올바른 원칙이라 할지라도 공동체의 질서를 깨뜨리는 정책이라면 재고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느린 듯이 보여도 결국은 이룸이 있다. 해서, 공자는 선왕의 정치를 잘 살펴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로마서 12장 3절을 보라!
2. 그러나 화목하고 돈독함을 추구한다면서도 원칙이 없다면, 그것은 얼마 못 가 혼란을 초래하는 것은 자명하다.
1) 그렇다면 예란 무엇인가?
2) 여기서 배병삼은 예(禮)를 차이지움으로 본다. 부모와 자녀, 임금과 신하의 차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
3) 르네 지라르!
4) 그리고 바울이 말한 몸(soma)로서의 교회!
5) 따라서 공동체는 서로 다름과 하나됨의 긴장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13장
有子曰,“信近於義,言可復也.恭近於禮,遠恥辱也.因不失其親, 亦可宗也.”
유자왈, 신근어의, 언가복야. 공근어례 원치욕야 인불실기친, 역가종야
1. 약속 혹은 말은 의에 합당해야 한다. cf. 미생지신
1) 개인 끼리의 약속이나 말이라도 공적인 차원에서 정당해야 하고, 그럴 때 실천.
2) 하물며, 치자요 군주요 리더랴!
2. 공손한 것이 예에 어긋나면 비굴함, 굽신거림, 알랑거림에 다르지 않다. 자기를 지키면서도 질서에 맞게 공손해야 한다.
3. 문제는 이 대목이 마루 종(宗), 그러니까 리더가 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 그렇다면, ‘인불실기친’은 누군가가 기대는 사람이 되더라도, 그를 은근히 무시하고 아래 사람으로 하대하지 않는 것, 여전히 친밀함과 친근함을 유지하고 자신에게 기대는 사람을 대하는 그가 바로 리더이고, 리더가 될 수 있다.
4. “종가, 종주국은 다 힘(폭력)에 의한 지배체제가 아니라, 정당성과 관계적 맥락에 의해 획득된 지위다. 즉, 종가는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혈연적 정당성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다.”(배병삼, 56)
5. 참조. 이한우. 친한 사람을 잃지 않는 사람을 종주/리더라 할 만하다(80쪽).
14장
子曰,“君子食無求飽,居無求安,敏於事而愼於言,就有道而正焉,可謂好學也已.”
자왈, 군자식무구포, 거무구안, 민어사이신어언, 취유도이정언, 가위호학야이
1. 군자란?
1) 치자를 말한다. 일반 백성이 아니었다.
2) 그것이 공자에 이르러서 도덕적 품성과 학문적 실력을 고루 갖춘 자로, 그 뜻이 진화한다.
3) 배병삼. 논어에서 군자는 이상적 인격체로도, 정치적 지배자로도 쓰인다. 여기서는 이상적 인격체.(57쪽)
4) 그러나 나는 이 단어에서 군자란 도덕적 인격체를 가리킨다기 보다는, 군주이면서도 도덕적 품격을 갖춘 이를 군자라고 해석한다.
5) 이한우는 군자를 군자가 아니라 군자가 되려는 자로 해석한다. 좋다.
2. 결국에 가서 군자는 호학하는 자이다. “군자를 군자답게 만드는 내용물이 호학이다.”(배병삼, 57)
3. 자신의 안일과 안위를 구하는 자는 자기 욕망에 휘둘리게 마련. 공동체와 사회의 유익을 뒷전으로 내밀치게 된다. 그 자신이 사람다움(仁)을 잃는데 어찌 사람을 다스리고 지도하겠는가.
4. 이한우는 여기서 민어사 = 민어언을 강조한다. 신어언 = 욕눌어언이다. 행동은 민첩하게, 말은 느리고 신중하게!
15장
子貢曰,“貧而無諂,富而無驕,何如?”자공왈, 빈이무첨, 부이무교, 하여?
子曰,“可也,未若貧而樂,富而好禮者也.”자왈, 가야, 미약빈이락, 부이호례자야
子貢曰,“詩云,‘如切如磋,如琢如磨’,其斯之謂與?”자공왈, 시운, 여절여차, 여탁여마, 기사지위여
子曰,“賜也,始可與言詩已矣,告諸往而知來者.”자왈, 사야, 시가여언시이의, 고제왕이지래자
1. 자공 : 한 때 가난했으나 가장 부유한 제자. 공자의 후원자
2. 자공 입장에서는 그만한 경지도 다다르기 힘든 것이다. 내 생각도 그렇다. 가난 속에서 비굴하게 아첨하고 굽신거려서라도 탈피하고픈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의 힘든 싸움을 싸우면서 자신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3. 그러나 공자는 자공을 한 단계 위로 끌어올린다. 외부적 조건에 휘둘리지 않고, 휘말라지 않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보다 적극적으로 인과 예를 추구하는 것이 군자인 것이다.
4. 여기서 그 유명한 구절, 절차탁마(切磋琢磨)가 나온다.
1) 시경의 한 구절을 자공이 인용함
2) 뼈를 끊고, 뿔을 갈고, 옥을 쪼고, 돌을 갈고!
3) 마치 자신을 저리도 무섭고 혹독하게 단련하라는 것, 온 정성, 그러니까 온 맘과 온 몸 다해 인과 예에 다가서는 것, 그렇게 하라는 것이 공자 선생님의 뜻이 아니냐고 자공이 약간은 자신감을 갖고, 그러나 절대적 확신을 갖지 못하고 조심스레, 소심하게 반문한다.
5. 시에 대해서는 좀 더 찾아볼 것.
16장
子曰,“不患人之不己知,患不知人也.”
자왈, 불환인지불기지, 환부지인야
1.“학이”편의 첫 구절로 돌아온 것이다.
2. 배병삼. “유교에서 인생이란 내내 배움에 목마른 길”(65쪽)
3. 자신의 길, 뜻을 세우고, 만나는 사람에게서 배우고, 문자와 지식이 아닌 성품과 도덕의 함양을 통해서 군자에 이르는 길을 나서는 자는, 오롯이 그 목표를 따라 길을 걸을 뿐, 용맹정진하고 매진할 뿐, 타인의 평가와 시선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4. 내 공부가 미진하여 남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되는 것, 그것이야 말로 근본적 문제가 아니겠는가. 여기서 학이의 첫 구절에서 멀리서 벗이 찾아온다고 했던 것과 연결하면 되겠다.
그러니까 내 공부가 깊어지지도 않고, 남도 알아주지 못하는 지지부진한 공부, 그게 가장 문제다.
5. 또한 공부의 목적을 분명히 하라는 추상같은 공자님 말씀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