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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formance Data for Globalization-HongObong
Performance Data for Globalization-HongObong
홍오봉-세계화를 향한 퍼포먼스 데이터베이스
홍오봉은 한국의 행위미술을 이야기할 때 빠트릴 수 없는 퍼포머로 발돋움하고 있다. 그것은 홍오봉의 행위가 하나의 장르로 편성될 수 있을 만큼 형식과 내용- 사상과 의미에서 선배 퍼포머들의 권역에 진입했다는 뜻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이건용의 신체드로잉-논리적 이벤트-설화적 퍼포먼스가 한국 행위미술에서 하나의 굳건한 장르로서 자리 매김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홍오봉의 자연회귀적 신체행위-원형적 퍼포먼스-현실참여적 메시지가 나름대로 하나의 세계를 굳혀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회귀적 신체행위는 주로 야투를 중심으로 나타난다. 원형적 퍼포먼스는 수원에서의 컴아트그룹-현실참여적 메시지는 컴아트그룹 이후 국제적 활동기의 전형적인 모습들이다.
그 현실참여적 메시지의 시대를 정점으로 홍오봉은 20여년 동안 20여개 국가에서 40여회의 퍼포먼스를 관객과 나아가 세계인과 공유하고 세계인들과 만들어나가고, 세계인들과 공감했다. 이것은 홍오봉이 이미 지역을 넘어선 국제적 시야와 비전과 현재를 닦아 나가고 있으며 미래지향적인 발판을 굳혀나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다시 생각한다. 경기작가로서, 서울공화국의 높은 벽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국제무대에서의 활동을 역수입하는 방법밖에 없는가. 행위미술이라는 장르는 다른 분야에 비하여 세계로 통하는 지름길일 수 있는가. 홍오봉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행위미술이라는 이름의 신체와 신체언어로 답변한다.
정통正統으로 나아가다
행위라 했다. 그리고 미술행위라 했다. 나아가 퍼포먼스라 했다. 홍오봉의 퍼포먼스라 할 때 오늘날 어느 누구도 ‘Performance=실행-성능’으로 번역하지 않는다. 이제는 행위미술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퍼포먼스는 사실 이벤트-해프닝-바디아트 등의 이름을 업고 명명된 플럭서스나 비엔나그룹 등의 후속세대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는 퍼포먼스=행위미술이라는 도식으로 여긴다.
그 이유는 역사적으로 행위미술이라는 이름의 사조들 이를테면 해프닝Happening -이벤트Event -바디 아트Body Art -퍼포먼스Performance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미술의 양상이 ‘행위-behavior'를 ‘의미있는 형식’으로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이 의미있는 형식인가. 해프닝은 콘텍스트Context-이벤트는 사건Event -바디 아트는 장소성Cite Encounter-퍼포먼스는 설화성Narrative 을 그 형식으로 한다.
왠가. 미술은 행위의 산물이다. 결과로서의 흔적이다. 미술이라는 이름은 기술에서 비롯하기는 하되 과정이 아니라 결과였다. 과정으로서의 행위나 정돈되고 미적인 작업현장은 그 자체가 미술로 여겨지지 않았다. 최소한 미술에서 행위가 떨어져 나오는데도 20세기의 중반까지 시행착오가 있었다.
행위가 미술이 되어 미술사의 한 장르를 형성하고 규범화한 것은 1957년 카프로Allan Kaprow -커비Michael Kirby 등에 의한 해프닝의 이론화작업에서 비롯된다. 이르되, “해프닝은 각자 다른 칸막이 안에서 벌어지는 논리적인 연관이 없는 행위 등이 조합되는 일종의 극장 같은 형태라 정의할 수 있다Happenings might be described as a form of theatre in which diverse elements, including nonmatrixed performimg, are organized in a compartmented structure ”는 것이다.
나아가 안토닌 아르토드Antonin Artaud의 정의가 해프닝의 개념을 더욱 선명하게 밝혀준다. “해프닝은 움직임-조화-리듬의 요소가 동시에 중점적으로 나타나되, 음악 무용 팬터마임 모방극Mimicry의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가 1970년대 말 아발란치Avalanche 잡지에서 퍼포먼스가 소개되면서 일상화한다고 죤슨Ellen Johnson은 소개한다. 1971년 노만Bruce Nauman의 ‘퍼포먼스 복도Performance Corridor ’-1971년 버든Chris Burden의 ‘보관함Locker room piece’-1981년 앤더슨Laurie Anderson의 ‘이동하는 미국인Americans on the Move’ 등은 이전의 행위미술이라는 이름을 업은 비연극적이고 비상황적인 행위가 벽장 속에서 나와 일상화하는 단초가 된다.
퍼포먼스Performance는 원래 대중 앞에서 행하는 연기 혹은 기계의 성능 정도의 뜻을 가지는 보편명사였다. 골드버그Rosley Goldberg 는 퍼포먼스를 비상업적인 예술양상으로 이해한다. 즉 퍼포먼스는 “1970년대 컨셉츄얼 아트의 전성기에 싹튼 예술 표현의 매체로서 예술이 창작을 통한 예술적 산물이라기보다는 사고 팔 수 없는 아이디어이다”라는 것이다.
크림프David Crimp는 ‘그림을 무대에 올리는’이라는 표현으로 그림의 무대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것은 카프로나 아르토드의 초안에서 본다면 정면으로 도전하는 반역행위이다.
그러나 많은 퍼포먼스의 정의 중에서 그림을 무대에 올린다는 강령은 오늘날 퍼포먼스의 불문율처럼 되어 있다. 홍오봉처럼 화가들이 행위를 할 때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퍼포먼스가 된다. 그러나 조각가가 행위를 한다? 그것은 설치미술의 영역에서 작가가 이름과 얼굴과 퍼포먼스의 콘텍스트를 빌려준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된다. 그만큼 퍼포먼스는 회화적인 것이다. 물론 퍼포먼스는 나름대로의 강령과 범주가 있다.
콜린스판 미술사전은 퍼포먼스를 진보된 독자적 예술형태로 승격시킨다. 퍼포먼스 아트는 해프닝보다 연극적이고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이벤트이지만 해프닝에 비해 관객참여가 지극히 제한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프닝에서 퍼포먼스로 이행하는 과정은 패스트푸드와 같이 다중 접근성을 가진 그리고 누구나 납득할만한 민주적인 행위였다. 이를테면 미술대학에서 미술의 콘텍스트를 익힌 화가라면 그 흐름 속에서 퍼포먼스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해프닝 등의 종래 행위에는 점진적 정예화는 인정하되 누적적 보편화는 배제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고추를 짜르거나, 벌거벗은 몸에 쇠꼬챙이를 꿰어 공중에 매달리는 행위처럼 인간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파괴되거나 파멸되는 경우까지 생겼다. 그래서 미술사라는 이름이 궤짝에서 나와 거리의 인파 속으로 묻혀들어가는 행위, 그것을 패스트푸드에 비유하게 된다.
그러나 과연 패스트푸드가 세계인의 식성과 건강을 위한 마지막 보루였던가. 슬로우 푸드의 등장은 미국식 식성의 문제점을 파헤치고, 육식의 문제점이 대두되면서 채소와 생선이 강화되는 중이다. 그렇다면 동양적인-한국적인 식단-조리 섭생법이 세계의 입맛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가.
한국인에게 매력적인 행위미술은 두가지가 하나로 결합되는 행위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한편으로는 미술행위의 결과로서의 미술적인 흔적이 남아야 행위미술로 기록될 것이라는 강박관념 때문이고 또 한 편으로는 한국미술사의 콘텍스트에서 미술을 업지 않은 행위는 해괴한 짓거리로 치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리기-칠하기-묻히기 등을 통해 행위가 끝난 다음에 사진이나 비디오 등으로 기록을 남길 수 있는 행위가 한국인의 선호하는 행위미술로 정착된 느낌이다.
홍오봉은 오랜 평면의 회화작업 끝에 행위를 선택했다. 이를테면 행위미술의 콘텍스트에서 본다면 정통이었다. 그렇게 서구미술의 콘텍스트에 익숙해질 무렵 자연으로 향하고, 퍼포먼스라는 이름 하에 행위와 결과를 결합하고, 이윽고 행위로 떨어져 나왔다. 그렇다면 서구미술의 정통노선과 같은 궤도를 걸어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한국 행위미술과는 무관히 서구의 콘텍스트를 체질화했다는 이야기인가.
뿌리내리기
홍오봉이 행위작가라는 이름으로 미술계를 풍미할 수 있는 배경에는 한국미술의 적어도 70년이라는 배경이 필요했다. 한국미술이라는 이름의 장르가 이 땅에 자리잡은 시대에서 본다면 70년이 지나서야 행위가 미술이고, 작가가 세계로 무대를 펼쳐나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뜻이다.
한국미술이라고 하자. 그것은 국지화한 국제양식이라는 점에서 시작하자. 상고시대부터 한국은 알타이-동이-불교-중국-남방문화의 용광로였다. 어떤 문화가 들어오건 이 땅에서 녹아 한국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수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외래사조들은 한국에 들어와서 어느 정도 생소한 시간을 보내고 난 다음에 한국화했다. 한국화하는 동안 한국의 예술가들은 왜 그것이 이 땅에 뿌리를 내려야하는가를 생각했다. 그리고선 자생성을 떠올렸다. 우리의 오천년 역사와 원형에 잇대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조가 우리에게 수입되었고, 배양되었고, 그리고 성장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생성에 대한 신념의 바탕에는 이 땅의 원형정신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원형정신이란 바로 오천년 농업사회에서 형성시켜온 이 땅의 신앙이요 감수성이요 자연발생적인 멋과 신명이었다.
한국의 예술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서정성-행위작가들에게 보이는 오채와 으스스한 굿당이나 신당같은 분위기-홍오봉이 교감예술제 등에서 보여주었던 강렬한 민족적 감수성 등은 비록 세계미술사의 문법을 빌어왔기는 하지만 원래 우리에게 있었던 것을 재발굴하는 도구로, 혹은 수단으로 세계미술의 콘텍스트를 빌어왔다는 의미로 자생성을 주장하는 작가나 평론가들에게 수용되었다. 그렇게 홍오봉은 한국미술의 원형적 정신을 갖추어 세계무대를 공략한 셈이니 단단히 한국미술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미술이 자생성을 내세워 외래사조를 한국화하는 것은 거의 양화라는 것이 수입되면서부터 60-7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다음이었다. 그토록 서구의 사조는 이 땅의 재래문화와 사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서력기원에서만 산출하더라도 2천년의 서구미술사가 이 땅에서 100년도 못된 세월 동안 수입되고 육화하여 체질화해나갔다는 것이다.
수입에서 육화의 시간은 근래로 들어오면서 주기가 짧아졌다.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지구촌이라는 개념도 좁아진 세태도 영향을 미쳤겠다. 그러나 한국인의 강인한 소화력이 외래사조를 거침없이 소화할 만큼 저력이 축적되었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행위라는 이름의 사조가 이 땅에 소개된 것은 1960년대였다. 양화가 수입된 지 50년만의 일이었다. 1957년 카프로의 해프닝과는 3년의 차이가 났다. 그러나 그 당시에 소개된 것은 앵포르멜이었다. 앵포르멜은 1920년대에 슐라즈-쉬네이데르 등의 동양적-선적인 그림에서 비롯하여 1950년대에 따삐에-포트리에 등에 의해 격식이 무시된 예술로 그 행보를 시작했다.
사조의 육화기에 60년 미술협회에서 덕수궁 돌담에 앙포르멜이라는 이름의 대형 액션 페인팅 작품을 전시했던 벽 동인전의 가두전을 필두로 액션이라는 이름의 미술이 이 땅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행위는 행위의 결과로서의 궤적을 캔버스에 남기기 위한 의례적이고 일상적인 행위가 별도의 채널로 부각되었다는 의미를 가진다.
사람들은 행위의 결과를 보면서 행위를 짐작할 따름이지 행위 자체가 보여지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스투디오에서 화면과 씨름하다가 땀냄새가 지워진 중성적인 작품만 남고 작가는 식별할만한 크기의 이름만 전시되는 관행에 비해서는 혁명적인 변신이었다. 당시로서는 이런 해괴한 짓거리는 서구에서 이렇게 하느니라, 우리는 이 나라의 최고 엘리트니라는 똥뱃장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1967년에는 오광수의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이 한국청년작가연립전에서 소개되었다. 물감을 던져 만들어진 궤적을 보고 즐겼다는 광태사학파 적인 현실도피-귀족취향-유한취미적인 광태-광태사학파의 투묵처럼 우연과 행위의 과정을 기록하는 결과로서의 흔적을 ‘무대에 올린’ 구타이 그룹같은 비현실화한 사건-카프로 등이 주도했던 비논리-비연극적인 행태에서 벗어나 이 땅의 진솔하고 소박한 서민의 의식을 표방한 행위로 평가된다.
그래도 카프로의 행위에 비하면 10년이라는 세월이 사이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 세월이 약이었던가. 산발적인 행위는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행위를 촉발하는 단서가 되었다.
1989년에는 18작가의 행위미술제가 있었다. 행위는 보편화된 활동이었지만 행위를 보조하는 설치라는 도식을 업고 행위는 치러졌다. 이를테면 멍석을 깔아야 지랄이라도 나온다는 수수한 연상체계였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행위는 회화행위였고 설치는 소품이자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인의 신명과 흥 그리고 삶의 애환이 묻어 나올 수 있었고 ‘삶이나 예술의 정서-현실고발의 메시지 등의 극한의 추구하기 위하여 주제와 제목이 있는 행위자의 각본-연출-연기를 원초적인 무대와 소도구를 이용하여 주로 일인극의 형태로 보여주는 행위미술’라는 정의가 가능했다.
이를 줄이자면 ‘농축된 삶의 정서를 창고극장의 비논리적 막간극으로 번안한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미 카프로 류의 해프닝이 아니라 퍼포먼스 류의 퍼포먼스가 이 땅에 자리잡은 것이다.
그 삶의 정서란 육근병-박은수 등의 설치작품에서 한국인의 공동체의식-애니미즘적 분위기-농가부엌같은 혼돈속의 질서로 구현되었다. 이것은 ‘관객이 참여함으로써 작품으로 완결되는 분위기, 화면으로부터 돌출하거나 이탈하거나 유리되는 오브제의 주장력이 환경 속에서 극대화하는 미술’이라는 한국설치미술의 정의로 이어졌다.
이러한 양상은 홍오봉의 행위와 그 행위를 보조하는 설치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이를테면 「요왕할머니」는 굿당이나 신당같이 종이 등을 주렁주렁 매단 분위기는 그 안에서 행위가 일어나는 동안만 극적인 무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사람들이 그 안에 빽빽이 들어서야 분위기가 살아나는 그런 무대였다.
그리고 주렁주렁 달아맨 종이들은 바로 한국의 금줄이었다. 그것을 태우는 혹은 태운다는 것을 암시하는 행위는 나중에 태운 흔적으로서 남아 정화의 의식이나 또는 벽사의 의식과도 연결될 수 있는 설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80년대 한국은 설치와 행위 일변도의 예술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의 행위미술은 행위자가 행위를 끝내면 그것이 바로 설치미술이거나, 설치미술 속에서 행위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1989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청년작가전은 ‘화면이거나 화면에 부착되거나 화면을 외연하는 분위기를 가지거나 화면과 무관히 떨어져 나오면서도 시각적이고 연상적인 연결을 가지는’ 소도구 혹은 소품들이 집적-구조-공간-환경 등의 개념을 업고 설치라는 이름으로 묶여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설치미술Installation Art 은 서구에서 60년대에 자리를 굳히고, 70년대를 거쳐 80년대에 성행한 양상이다. 서구적인 맥락에서 정의하자면 작가나 관중 혹은 작가와 관중이 어떤 상황을 설정하고서 일정기간의 프로세스를 보여주는 형식의 미술이다.
여기에는 장소-관중-상황이 등장한다. 어느 요소도 무시할 수 없지만 관중이 없는 설치미술이란 의미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독자적인 설치미술이거나 행위의 주변으로서의 설치는 미니멀 아트의 미학을 닮았고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설치미술을 이야기하면서 미니멀과의 상관관계를 논하려면 한국 설치미술이 너무나 잡다하고 꾀죄죄하고 설화적이나 설명적인 부분이 많다는 대목과 상충된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 서구를 휩쓸었던 설치미술은 미니멀 아트의 연장선상에서 공간 및 전시공학과 관객참여의 미학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러므로 벽에 걸린 화면이 아니라 전시장 전체가 화면이 된다는 설치미술의 강령하에 화면은 최대한 단조로워야하며 관객이 그 사이에 들어가야 작품으로 완결되면서 관객이 바뀔 때마다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 관객은 화면의 구성요소가 된다. 빨간 옷을 입은 여인은 빨간 점-모자를 쓴 신사는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에서처럼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이 된다. 하지만 실제 그 화면의 일부분으로서의 관객들은 스스로가 작품을 보는 존재이면서 작품과 함께 보여지거나 사진 등의 기록으로 남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생각지 않고 작품 속으로 혹은 무덤덤하게 혹은 고소를 머금고 스쳐지나갈 따름이다.
그러나 홍오봉의 설치는 설치 자체로서 한국의 자생적인 설치의 자연스러운 연출이 배경이 된다. 이를테면 홍오봉이 행위를 위해 전시장 혹은 야외라는 공간에 연출한 설치는 때로 농촌의 부엌이나 광-때로 아이를 낳는 출산실-때로 삼신할매나 용왕할머니에게 비는 의식의 현장으로 성격지워진다.
그것은 일견 무질서와 혼돈을 느낄만큼 어지럽게 모든 것이 흐트러져 있지만 나름대로 공간에서 영역과 권능과 역할과 기능을 가진 소품들이다. 농촌의 부엌이 그러하지 않던가.
그 현장은 작가가 구상하고 설치하였으되 한번 설치되면 그 때는 작가의 권역을 떠나 독자적인 공간으로 보는 사람에게 인식되고, 전율을 느끼게 하고, 어디선가 이미 본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한국적인 감수성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이윽고 행위가 벌어지면 그 행위는 마치 어지럽기 짝이 없는 부엌에서 바리바리 쌓은 땔감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곁불이 옮겨 붙지 않게 하면서도 용케 거대한 무쇠솥이 걸린 아궁이에 솥이 녹을만큼 불을 때는 아낙네의 취사행위, 그 안정된 질서를 닮는다. 분명 그것은 서구의 미니멀적인 설치의 개념을 빌어오되 신앙적인 행위와 삶으로 각인된 한국의 감수성이었다. 그렇게 홍오봉의 세계는 짙은 한국적 감수성을 담고 있었다.
퍼포먼스 역시 당시 한국미술에서 굳건한 위상을 자랑하고 있었다. 1989년 이두한-안치인-이불-윤진섭이 주도했던 청년작가전의 퍼포먼스는 동일한 플로트에 의한 행위의 반복에 의한 심화와 발전, 장소와 관객에 따라 다른 상황과 반응양상 및 해석을 가진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이를테면 해프닝의 문법이 재구성되거나 파괴되는 시점에 90년대 퍼포먼스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다분히 당시 서구에서 퍼포먼스라고 부르는 행위미술의 양상과는 다른 것으로 분석되었다. 허구의 논리보다는 비논리적인 일상을 논리적으로 표출하면서 일회적인 현상을 비디오나 영화-사진과 슬라이드 등으로 고정한다는 것이 당시 서구의 퍼포먼스였기 때문이다.
홍오봉의 행위 역시 그 뼈대는 서구의 것이었다. 사실 세계미술사를 주도한다는 서구-혹은 구미의 행위들이 없었다면 이 땅의 행위미술가들이 설 땅이 얼마나 비좁겠는가. 한때 판토마임이라는 행위가 이 땅에 선보인 일이 있었다. 철저히 서구의 삐에로를 흉내낸 복장과 마임으로 사람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 흐름은 호기심 이상의 반응을 얻지 못하고 한때 이 땅의 백성들을 매료시켰던 서커스의 한 장면처럼 대중의 망각 속으로 사라졌던 것이다.
한국의 행위작가들은 그러한 한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고국에서 날지 못하면 세계에서는 기어갈 수도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땅의 백성들이 보고자 하는 것, 그 백성의 어깨를 들먹이게 하고 얼쑤 장단이 나올 수 있도록 하는 이를테면 흥과 신명을 깔아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일관된 미학을 내세웠다. 가끔 다른 분야의 행위자들이 끼어들기는 했지만 주류는 역시 미술가들이었다. 이를테면 미술의 콘텍스트가 공통의 코드로 서로 다른 행위자들을 결속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위미술이라 하면 자신들이 하고 싶지만 세상의 이목이 두려워 차마 벌이지 못하는 찬란한 변신을 행위자들이 보여줄 것을 기대하면서 행위미술의 현장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 기대에 부응하여 행위자들은 때로 자학적이거나 가학적인, 때로 외설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래서 예술을 빙자한 누드나 닭의 목을 베는 장면이나 피를 뽑아 뿌리는 등의 행위가 등장하기도 했었다.
홍오봉의 행위에서도 현상적으로, 표면적으로는 대리만족이라 할 만한 요소들이 검출되었다. 홍오봉의 초기 작품에서는 한술 더 떠서 연극적인 요소까지 도출되었다. 그것은 기획되고, 연출되고, 그리고 연기된 이후에 필요하면 다시 재연될 수 있고, 커튼 콜까지도 가능한 행위라는 점에서 분명 서구의 해프닝이나 이벤트 등의 미학과는 배치되어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분석해보면 홍오봉의 행위에서 두 번 ‘공연’된 행위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넘치는 아이디어를 펼치기도 바쁜데 그 행위를 기록하고 분석하고 자료할 틈이 있겠느냐는 느낌이 들만큼 행위는 무궁무진하게 넓게, 그리고 깊게 연행되고 있었다. 행위의 문법은 정제되고 단순화해서 이윽고는 이벤트에 준하는 단일메시지 혹은 이브 끌렝이 보여주었던 ‘단일음교향곡’과 같은 단조로우면서도 강렬한 메시지로 통일되고 있었다.
‘공연’이라 했다. 연극적인 기획과 구성과 연출로 무대위에 동일한 양상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홍오봉의 세계순회행위전은 비슷한 양상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렇다면 두 번 공연된 행위가 없다는 말과는 상반되는 현상이 아닌가. 그래서 다시 단일음 교향악이라는 말을 썼다.
그 행위는 같은 외면적인 양상이 단일음을 연주하는 첼로의 선율을 닮았다. 그러나 그 소리와 떨림과 반향에서 두 번 같은 소리일 수 없다. 더욱이 홍오봉같이 영감이 넘치는 작가에게 무대의 배우처럼 연출된 성량과 모션과 감정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이르자면 홍오봉의 저력이자, 한국행위미술의 저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홍오봉이 이러한 한국행위를 지켜보면서 스스로의 세계를 성숙시켰던 90년대에 들면서 한국미술은 뜻밖의 반격을 받게 된다. 5천년 역사를 통하여 경주-개경-서울 등의 수도를 중심으로 문화예술이 꽃피고 독점되었던 지극히 권위적인 패턴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서구의 새로운 문물이나 예술사조가 서울에 수입되어 일정기간 검증되고 회자되다가 지방으로 확산되는 이를테면 문화하향현상의 역류를 예고하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지방자치제의 정착과 IMF 경제체재는 당시까지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던 예술가들의 대이동으로 나타났다. 비교적 작업여건이 좋으면서 서울과의 연계가 쉬운 수도권으로 옮겨간 예술가들은 슬금슬금 정착하거나 지방작가들의 움직임에 합류하게 된다. 건축장식물 및 지방문화재단과의 연계를 위해 주민등록을 옮기는 예술가들도 낯선 이야기가 아니었다.
광주비엔날레 이후 비엔날레 신드롬이 뜨거워지면서 페스티벌-이벤트-축제 등이 난무했다. 그 뿐이랴. 전 국토 박물관화-전국민 미술인화라도 부르짖듯 경향각지의 골목골목마다 미술관 박물관들이 들어서고 있다.
수원에서 싹이 트다
여행자유화와 인터넷은 그나마 남아 있던 서울이라는 철옹성을 허물어나가고 있다. 그 조짐이 조심스레 점쳐지던 90년대초, 나는 「京畿엇더니잇고」라는 제목으로 수원에서 열리는 전시회의 전시평문을 쓰면서, 블랙홀처럼 이 나라를 삼키는 서울과 맞닿은 위성도시 수원에서 서울시민증을 받으려고 줄을 서는 지방작가들에게 지역작가의 다섯 차원을 설명한 적이 있었다.
지역적 현실에서 고통받는 작가는 일차원-역사적-물적-인적자원이 덧붙여지면 2차원-세계무대로 향하는 시선은 3차원-미술사를 향하는 의지는 4차원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블랙홀의 중력을 이길 만큼 자신을 절차탁마하련다는 의지는 5차원적인 것이라고 맺었다.
수원, 1969년 미협 수원지부가 결성되고 1979년 경기청년작가회의 첫 전시가 크로바 백화점 화랑에서 열렸다. 이르되, 경기도 미술문화발전에 활약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하품나는 선언문이 발표되었던 곳이다. 물리적인 연대만으로 본다면 서울 혹은 한국미술사에서 기록하는 미술협회와는 최소한 20년, 청년작가회는 서울의 한국미술청년작가회에 비한다면 5년의 시차가 있다. 이후 완만하게 수원 미술의 의식화가 진행된다.
1979년의 포인트 전시는 사변적인 구조이론과 미래에 대한 비전을 결합시킨다는 의지를 천명한다. 1983년의 시작회는 젊은 열기로 새로운 시도에 몰두한다고 창립전의 의의를 밝힌다.
1988년 이후 구상계열의 경기형상회와 경기현대작가회의 현대미술 계열로 나뉜 가운데 경기현대작가회의 멤버 중에서 이경근-홍오봉-김석환-황민수에 의해 1990년 컴아트 그룹이 활동을 시작한다. 당시 경향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미술운동에의 선망과 반작용, 지역적 자존심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창립으로 이어졌다.
당시 자연을 향한 한국의 젊은 작가들의 집념이 가시화된 미술운동으로서 야투-겨울대성리-바다미술제-컴아트 쇼 등의 그룹활동이 있었다. 야투는 금강과 공주를 배경으로, 겨울대성리는 화랑포 강변을 중심으로, 바다미술제는 광안리 바다와 백사장을 무대로, 컴아트쇼는 수원이라는 인문환경을 내세우지만 한국인의 자연친화적이고 원형적인 자연관과 물신관에 접맥되어 있었다.
이들 세 작업의 공통점이라면 농경민족의 전통에서 비롯된 소품이나 소도구, 나아가 매체와 색채가 십분 동원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오색천이나 짚-새끼 등은 금기나 벽사의 의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구神具 들이자 자연에 의탁하여 현재를 위무하고 미래를 추측하는 점복占卜 의 소품들이었다.
홍오봉은 이 지방문화가 용트림하는 역사적인 시기에 거대한 자연지향적인 미술의 큰 두 갈래라 할 수 있는 야투와 컴아트에서 주도적인 입장을 지켜왔다. 야투野投 는 1981년 8월 공주 금강백사장에서 40여 회원에 의해 창립전을 가졌다. 홍오봉은 고승환의 권유로 창립멤버로 참가하여 10년 세월 성숙의 시기를 갖는다.
야투는 야구용어로서 필드들 에서 던진다라는 뜻을 가진다. 들꽃과 같은 생명력을 산탄총처럼 자연에 뿜어내는 열기가 다시 인간에게로 환원하기를 기대한다는 친환경적인 작품강령처럼 야투의 작품은 작고 소박하고 은밀하다. 시각적-물리적 크기보다 심적-영상적 효과가 더 크게 보이는 작업들이었다. 자연을 공감하는 신체의 의식을 상징화한다고 정의할 수도 있다.
홍오봉은 이러한 작업에서 신체가 조화롭게 충만하고 농축되면 행동화하여 신경망으로 퍼지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주체의식과 신체성이 결합하여 다시 가역반응으로 신체를 조화롭고 충만하게 한다는 것이니 이를테면 자기충전적인 사고와 행위의 순환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홍오봉은 당시를 회고하여 매우 신앙적인 멤버들의 신앙적인 행위와 행태에 따라 작업이 나름대로의 일관성을 갖고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그 일관성은 신앙적인 것일 수는 있지만 한국의 자연을 한국적인 원형과 연결시키기에는 제한적이었음도 지적하고 있다.
당시 홍오봉의 작품은 「거미줄타기」,「여치의 일생」 등 인간과 자연의 신선한 교감과 조화로운 미적 탐색을 통해 자연환경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작업이었다. 장소를 옮겨다니며 제작-기록된 작품들은 「물고기」 「학」 「단풍으로」 「물결채취하기」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신체가 자연을 만나 반응하고 적응하는 과정을 주제로 하는 지극히 자연친화적인 작품이었다.
1990년 수원 최초의 설치미술전으로 평가되는 수원문화원의 「나 비 뿌 리 전」에 참여했던 홍오봉은 ‘5백원짜리 동전을 나뭇가지에 앉혀 학의 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경인일보에서 소개한 작품을 선보인다.
1990년대 수원미술의 큰 흐름은 컴아트그룹과 슈룹에서 발견된다. 「다섯칸전」을 중심으로 모인 작가들이 그해 5월에 판을 벌인 컴아트쇼는 이경근-홍오봉-김석환-황민수가 주체가 되어 일견 무모한 도발을 시도한다.
수원성곽이라는 거대 인문환경의 앞에서 생명의 원천인 자연에 대하여 자연친화적인 설치를 벌이고 그 위에 인간의 행위를 덧붙인다는 지극히 단순한 시높시스를 떠올릴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절대장소와 인문환경으로 확산되는 자연과 자연으로 환원하는 인간의 소통을 목표로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소통을 내세울만큼 지역사회의 장벽은 두터웠을 것이다. 거대한 성벽을 감싸 안을 만큼 거대규모의 작품을 구상하여 실현에 옮긴다는 것이 하나의 장벽이라면, 행위미술이거나 퍼포먼스라는 이름도 생소한 수원이라는 지역사회에서 퍼포먼스의 개념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 관객들에게 의미와 개념을 전달하고 공감을 유도한다는 것은 성벽보다 높은 장벽이었을 것이다.
컴아트는 그 장벽들을 행정과 규모로 벌충했다. 지역과 연관된 기업과 단체의 협찬을 얻어내는 한편 성벽을 압도할만한 작품규모로 대적했던 것이다. 시기적으로 여건이 성숙했다는 사례는 국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1990년에는 대우 옥포조선소에서는 내가 「현장.환경」이라고 부르는 대형 프로젝트가 진행중이었다. 조선소의 자구능력에 대한 당국의 따가운 눈총을 완화하기 위한 안간힘이기도 했다. 11명의 작가들에게 의뢰하여 조선소의 폐자재와 작업시설, 장비 및 인력, 그리고 제작비를 제공하여 제작된 작품의 절반을 작가가 가지고 절반을 전시한다는 대단한 프로젝트였다.
이성옥-장식 등 조각가들의 작품은 평소 다루지 못한 거대 자재를 마음껏 활용하여 그 기념비적 성격이 돋보였다. 반면 이승택-이건용-윤영석 등 설치작가들은 다분히 상징적이며 설화적인 작품을 통해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지만 단위작품의 한계를 넘기 어려운 절대환경 속에서 고전하는 인상도 없지 않았다.
그렇게 본다면 컴아트 등의 작업은 애초에 주어진 절대구조물과 절대환경이라는 악조건을 극복한다는 전제하에서 구상-기획-제작-표현-전달이 이루어졌으므로 결과적으로 더욱 환경과 밀접한 또한 환경에 접근적인 프로젝트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될 수 있었다.
지역사회의 따가운 감시의 눈총은 친환경적인 수성물감을 선택하여 완화시켰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미친 짓거리’가 아니라 ‘미술’이라는 단서를 작품의 요소요소에 깔아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신의 몸과 옷과 깔아놓은 멍석, 혹은 바닥에 깔린 캔버스라고 부를 수 있는 화면은 언제나 행위자들을 따라 다녔고, 행위자들은 미술적인 행위의 원초적인 연상체계를 동원하여 그림을 그리고, 물감을 뿌리거나 칠하고, 자신의 몸에 물감을 바르는 등의 바디 페인팅까지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퍼포머들의 열정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면 지역주민들의 이해와 반응은 대수함수.. 라기보다 더하기 빼기 정도의 단순수식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컴아트 그룹의 작업에서 연극적인 요소가 언제나 약방의 감초처럼 아니 오히려 연극적인 퍼포먼스라고 할만큼 드라마틱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학부모 학예발표회라 할만큼 음악-무용-연극 등 지역의 문화예술인의 많은 참여는 경우에 따라서 컴아트 전체의 성격을 희석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나아가 퍼포머들의 잠재의식과 방어의식 역시 큰 역할 어쩌면 장애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지역사회의 이해 폭을 증진시키고 컴아트의 저변을 확대하는 일방, 멤버들은 「나비뿌리전」 「작업일지전」 「성곽환경전」 등을 통해 내실화의 작업을 병행했다. 이를테면 관객과 무관한 내면의 은밀한 고해를 위해 별도의 장을 펼쳤다고 할 수도 있을 만큼 이 작업들은 카타르시스적인 요소들이 강했다.
컴아트그룹의 탈 장르적인 노력, 관객과의 간극을 줄이려는 노력들은 비디오 및 멀티비전 상영회 이승택 초대강연회 등으로 나타났다. 외부작가들의 참여 역시 컴아트의 새로운 활력소였다. 평소에는 출입금지라는 철옹성 같은 팻말이 버티고 있었던 성벽 주변의 잔디밭은 이불 같은 대형작가들과 관객들이 한시적으로 점거하여 뜻을 펴는 장소가 되기도 하고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장이 되기도 했다.
홍오봉은 1991년 컴아트를 통해 「나의 누이 혜경궁 홍씨」를 발표했다. 「홍씨 이야기」「소생」은 그 연장선상에서 기획되었다. 1988년 작고한 선비先妣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지만 정조대왕과 사도세자 그리고 혜경궁 홍씨를 내세워 객관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한국 퍼포먼스의 큰 획을 긋는 거대한 동력이었다.
한국적인 스토리보드와 지역정서의 적절한 안배, 퍼포먼스 혹은 행위미술의 원천적 장애물이라 할 수 있는 연극적 요소의 역이용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유령처럼 혹은 관속에서 걸어나온 시체처럼 으스스한 천으로 감싼 홍오봉이 땅을 판다. 땅 속에는 행위를 위해 미리 시차를 두고 묻어두었던 족보가 있다. 그 족보를 읽는 장면을 보는 관객은 족보의 이름들이 모두 홍씨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를테면 홍오봉의 가족사 혹은 씨족사를 행위와 퍼포먼스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5천년 농경사회라 하지만 족보는 조선시대 봉건왕조의 유학을 배경으로 기록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이전 족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가계나 혈족제도는 모계사회를 대신하여 부계사회가 승계하던 때부터 하나의 불문율로서 이 나라 이 땅의 백성을 구속하고 결속하고 그리고 유지하던 거대한 흐름이었다.
홍오봉은 그렇게 소재에서 한국인의 뿌리깊은 뿌리의식을 들고 나옴으로써 자신의 작품관과 작가관이 우리의 원형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었다.
컴아트 그룹의 해외교류활동은 값진 결실이었다. 93년 장안문에서 천안문까지-94년 북경교감예술제-96년 수원국제교감예술제-98년 98국제교감예술제 등은 수원-서울-세계라는 거래선에서 서울을 빼고 세계에 연결하는 일종의 직거래 형식의 이벤트였다.
그것은 홍오봉 행위의 세계화를 가능하게 하는 도화선이라 할 수 있었다. 한국미술과 한국행위미술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야투와 컴아트의 바탕에서 저력이 형성되었다면 야투와 컴아트를 탈퇴하고 독자노선을 개척하면서 홍오봉의 도약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앞에는 세계가 손을 벌리고 홍오봉의 자리를 예비하고 있었다.
홍오봉의 새
홍오봉은 스스로 '한국 퍼포먼스계의 마당발,‘ ‘퍼포먼스 네트웤 그 자체’라고 평가한다. 그것은 20여년의 세월동안 매진한 작품의 숫자에서도 압도적일 뿐 아니라 그 연행 범위가 국제적이라기보다 세계적이라는 데서 오는 자신감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홍오봉은 1981년부터 2001년까지 30여편의 대표작을 내세운다.
단원, 대청호, 월미도행위전 때 작품발표2001-1994 : 화이트 스타/ 20C와 21C/ 퍼포먼스를 살려주세요/ 5.18/ 영혼/ 돈/ 인간/ 테크노 뮤직/ 인체 드로잉/ 비너스와 함께/ 새와 나/ 물고기와 나/ 책과 나/ 에이즈 데인저/ 정선아라리/ 왜 한국은 통일하지 않는가
컴아트그룹 때 작품발표1993-1990 : 정조 효대왕/ 요왕 할머니/ 나의 누이 혜경궁 홍/ 홍씨 이야기/ 생명/ 소생/ 나는 누구인가/ 만남, 진행, 헤어짐 그리고 비밀
야투 자연미술연구회 때 작품발표1991-1981 : 물 물고기/ 왜 돌아오지 않는가/ 종이배로/ 단풍으로/ 목련으로/ 조개로/ 파이프로/ 여치로/ 호파기/ 시각에서 청각으로/ 신체 측정/ 종이 비행기 드로잉/ 시간 줍기
그 20년간의 족적은 가이 전설적이다. 공주야투자연미술제<1981-1991>-수원컴아트예술제<1990-1993>-인천월미도행위미술제<1995-1997>-대청호국제환경미술제<1996-2001>-부산바다미술제<1995-2001>-광주비엔날레․서울국제행위예술제․단원국제행위미술제<2000>-일본․타이랜드․중국․홍콩․마카오․캐나다․스위스․독일․이태리․폴란드․루마니아․헝가리․유고슬라비아․리투아니아국제행위미술제<1991-2001> 등 참가 기록은 가이 그 범위와 규모를 짐작케 한다.
이렇게 크게 나누어보면 야투시대-컴아트 시대-국제활동시대로 대별될 수 있다. 그 첫 번째인 야투자연미술제를 통해 홍오봉은 자연 속에서 자연과 호흡하는 은밀한 감성, 그리고 자연이 보여주는 코드를 해독하여 자신의 조형언어로 승화하는 이를테면 암호해독술을 터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작업은 컴아트시대를 지나 다시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에의 관심으로 이어질 때 굳건한 뼈대를 제공한 것으로 이해된다.
1990년 수원의 컴아트그룹을 창립하고 인간과 자연-인문환경과 자연환경 그리고 전통문화와의 교감을 목표로 「혼부르기」「소생」「생명」「정조효대왕」「나의 누이 혜경궁홍씨」「홍씨전」「요왕할머니」 등이 선보였다. 당시 홍오봉의 이러한 행위들은 한국 행위미술의 새로운 기원을 여는 것으로 평가될 수있다. 그것은 원형적인 탐구, 흥과 신명을 부르는 사위, 신비적인 의식화행위, 족보를 내세운 뿌리찾기 등의 복합적인 그러면서도 한민족의 깊은 잠재의식에 잇대어 있었다.
1995년 인천 월미도 행위미술제를 창립, 월미도의 본래 수려한 모습을 되살리고 상업화로 황폐해진 섬을 문화의 섬으로 기능하게 한다는 취지로 발표된 「돈, 나는 누구인가」 「Aids-Danger」 「바다로부터, 책」 등이 발표된다. 돈은 몸에 돈을 붙이는, 마치 걸어 다니는 돈벌레처럼, 인간이라는 유충이 들어있는 나방의 고치처럼 돈은 홍오봉을 감싼다.
‘한 20만원 들더군요’ 라고 홍오봉은 말한다. 퍼포먼스를 통하여 IMF경제하의 어려운 시대상황을 반영하여 과연 우리에게 돈이 무엇인지 반문한다. Aids-Danger는 무제한 개방된 성문화 속에서 건강한 삶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한 계몽의 의미를 담는다. 나는 누구인가에서는 자아 찾기를 통해 인간성회복을 꾀한다.
1996년 청주 대청호 국제환경미술제에서 발표된 「새와 나」는 자연과 인문환경의 파괴에 경종을 울리고 인간의 정신과 신체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를 모색하려는 작품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조류숭배사상이 짙게 깔려 있다.
우리의 원형문화에 의하면 새는 하늘을 나는 태양과 같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또한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새에 의탁하여 하늘로 올라간다고도 생각되었다. 꿩은 날아가면서 꿩꿩꿩꿩하고 우는 바람에 하늘에 고한다 하여 고천告天 의 새로 생각되기도 했다.
홍오봉이 내건, ‘새가 죽으면 인간도 죽는다’는 메시지는 환경 메시지 이전에 우리의 원형적 신앙의 죽음에 대한 경고라고도 볼 수 있다. 새의 이미지 드로잉을 짓뭉기고 세이빙 크림-풍선-색종이 뿌리기 등의 과정을 통하여 홍오봉은 원초적인 행위의 의미를 부여한다.
1999년 하남환경미술제에서 발표된 「새천년의 새」 역시 환경과 생명시대의 개막을 선포한다는 의미가 있지만 그 바탕에는 역시 뿌리깊은 조류숭배사상이 자리한다.
1999년 광화문 환경 프로젝트 초대 퍼포먼스인 「새」 역시 이러한 범주로 볼 수 있다. 또한 「Aids-Danger-새」 등 새의 주제는 환경과 엇물려 계속적으로 등장한다.
새는 1996년에 인사동에서 알을 깐 이후에 껍질을 버리고 날아올라 가는 곳마다 날개짓을 한다. 부산 강화 제주 뿐 아니라 방콕과 알프스까지 날아간 것은 분명 한국의 새였다. 그러면서도 세계의 조류숭배사상과 접목되고 그들의 원형으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헤세Hermann Hesse는 말했다.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그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이다. 아프락사스는 헤세에 의해 연결되는 동과 서, 인류 공통의 안식처이다.
그렇다면 홍오봉의 아프락사스는 어떤 것일까. 홍오봉은 스스로 미적신체행위, 혹은 다이얼로그 퍼포먼스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작품을 체계화한다. 그것은 인문환경과 자연환경-인간과 자연-인간과 인간-육신과 정신 등의 상호작용을 경기문화재단의 사이버갤러리를 통해 공개한다는 것이다.
총체적인 미적 ‘신체창고’ 이를테면 퍼포먼스 데이터베이스로 코팅한 신체를 전면에 내세워 표현하고 그 결과로서의 작품을 관객과 공유한다는 것이다. 이우환이 말하는 ‘장소성’은 그러니까 홍오봉에게는 신체에 코팅된 퍼포먼스 데이터베이스가 된다.
1997년의 제4회 NIPAF일본국제행위미술제 에서 홍오봉은 투우이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유목민처럼 세계를 유랑하면서 작가와 관객을 만나고자 한다는 뜻을 밝힌바 있다. 어찌 유목민처럼 대지와 지역과 지역주민에 빚만 지고 유랑하겠는가. 그 목적은 그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이고 올바른 존재가 되는 것이라 했다. 그렇게 홍오봉의 새는 날아오를 것이다.
미적신체행위의 퍼포먼스 데이터베이스... 그것이 홍오봉의 아프락사스일까. 거기에는 이미 인위적인 지역구분과 한국이라는 껍질을 깨고 세계미술사의 콘텍스트를 향해 비상하는 작가에게 지역작가라는 껍질은 의미가 없어 보인다.
2004-2019
김영재(Kim Young-jai, 미술사상가,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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