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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믿음} 정이철 <그리스도의 인성이 연단되어 완전한 구세주가 되셨고 십자가만으로 영생불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이 까닭 없이 모독을 당할 때 자신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는 일로 여기며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다음은 {서철원 박사 교의신학 ③: 인간론} 152쪽에서 옮기는 글이다. 그동안 수차례 옮겼던 도돌이표 인용이다.
언약 백성이 받을 상급은 영원한 생명이다(창 2:9). 이 상급 곧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을 섬김으로 받는다. …(중략)… 하나님께서 동산 가운데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를 함께 두신 것(창 2:9)은 언약을 지켜 하나님 섬김을 잘하면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임을 표시한 것이다.
이른바 “원시 의義”로 의로웠던 첫째 아담(인간人間)은 ‘선악과 금령 행위(생명)언약’을 지킴으로써 의義를 얻어 영생에 이르러야만 했다. 바로 이것이 ‘예장 합동 꼴뚜기 Wolf이철’ 스승 서철원 목사님이 위 인용문에서 베푸신 가르침이다. 물론, 이 가르침은 서철원 목사님 스승이신 고故 죽산 박형룡 목사님 가르침1)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둔한” 이단 Wolf이철은 ‘스승 서철원 목사님 이 가르침을 따른 고경태 목사님’을 “아담은 영생한 상태로 지음을 받았다.”며 “이단”으로 단죄했을지언정 스승 서철원 목사님은 “이단”으로 단죄하지 않고, 위 링크 글에서 박형룡 목사님을 “이단”으로 단죄하며 “믿습니다. 아멘!”이라는 망령된 말로 주님의 종 박형룡 목사님을 조롱 모독한다.
다음은 {서철원 박사 교의신학 제3권: 인간론} 198쪽에서 옮기는 글이다. 이 인용 역시 도돌이표 인용으로서 <고경태 목사님께: 그리스도의 ‘경건’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칭의’를 낳은 ‘경건’입니다.>2)에서 옮겼던 글이다.
의는 하나님 앞에서 살 생존권을 뜻한다. 아담은 처음 창조 시에 원시 의를 받았으므로 영생을 요청할 권리를 받은 것이 아닌가? 처음 받은 원시 의보다 더 높은 의가 있는가? 계명을 지켜야 얻을 수 있는 의는 어떤 종류이고 어떤 수준인가? 이미 의의 상태에 있는 아담이 또 다른 의를 얻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아담은 처음 창조 시에 원시 의를 받았으므로 영생을 요청할 권리를 받은 것이 아닌가?”??????? 이른바 “세계적인 신학자”답지 않은 참으로 “아둔한” 물음이다. “아담은 처음 창조 시에 원시 의를 받았으므로 영생을 요청할 권리를 받은 것”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영생을 주려고 맺으신 선악과 금령 행위(생명) 언약’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담은 처음 창조 시에 원시 의를 받았으므로 영생을 요청할 권리를 받”았는데, {서철원 박사 교의신학 ③: 인간론} 152쪽에 적힌 서술, ‘개혁 신학의 행위(생명)언약’ 개념이 드러난 서술,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을 섬김으로 받는다. …(중략)… 하나님께서 동산 가운데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를 함께 두신 것(창 2:9)은 언약을 지켜 하나님 섬김을 잘하면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임을 표시한 것이다.”는 서술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처럼 {서철원 박사 교의신학 전집}에서 드러나는 ‘서철원 신학’은 좌충우돌 혼란스러운 신학이다. “섬김”이나 “지켜”를 ‘아담의 행위’로 독해하지 못하는 참으로 “아둔한” 신학이다.
‘성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하는 “아둔한” 이단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의 지혜가 자랐다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이다.”고 주장한다. 또한 “예수가 여호와 하나님이면, 예수가 십자가에서 받은 고통으로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해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울부짖은 것은 자작극, Show였을 뿐이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위 링크 글에서 이단 여호와의 증인 못지않게 “아둔한” Wolf이철은 고린도전서 1장 30절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를 인용한 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인격을 가진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부터 우리의 구주였고, 처음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완전한 자격과 능력을 가진 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왜 박형룡 박사께서는 지상에서 받으신 고난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단련하여 우리의 완전한 구주가 되시게 했다고 말하셨을까요?
“처음부터”??? ㅉㅉㅉ!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적힌 그리스도의 “의로움”, 그 의義가 ㅡ칼빈 선생님께서는 {기독교 강요}에서 “우리가 받는 의義는 그리스도 인성人性의 사역으로 이루신 의義다.”고 하셨는데, “인간人間이신 중보자”(딤전 2:5), 마지막 아담(人間) 그리스도께서 전全 지상 생애에서 이루신 것이 아닌ㅡ Wolf이철 해석대로 신인神人이신 그리스도께서 “처음부터” 가지신 의義, ‘그리스도 본질의 의(신성神性의 의義)’를 뜻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성인成人으로 장성할 필요가 없으셨다. 장성해 십자가에 달릴 필요도 없으셨다. 즉, ‘그리스도 자발(능동) 순종의 극치인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은 필요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즉 태어나시자마자 죽임을 당하면 되셨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헤롯 왕 유아학살’ 때 ‘피동(수동)’으로 죽임을 당하면 되셨기 때문이다.
다음은 ‘칼빈주의자들을 적대시하신 웨슬리 목사님’에게 유전 받아 ‘칼빈주의자들을 적대시하는 본성’을 지닌 목사, 알미니우스주의 웨슬리안 장기영 목사에게 쓴 내 댓글이다. 성결교 장기영 목사가 2019년 2월 10일에 {페북} 자신의 담벼락에 <개혁주의 진영 내부에서 일어난 정이철 목사 vs 노승수 박사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논쟁에 관해>라는 제목으로 쓴 글, “비록 정이철 목사가 웨슬리의 제자가 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저는 교리에서 스스로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웨슬리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정이철 목사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율법 순종은 신자에게 전가하기 위한 대리적 순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라는 글을 담은 글에 쓴 내 댓글 일부다. 두 부분으로 나눠 옮긴다.
정이철 목사는 “예수님은 아담의 죄와 무관하게 태어나셨으므로 처음부터 거룩하셨습니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바른 주장입니다. 또한 정이철 목사는 “예수님은 능동 순종으로 율법의 요구에 부합하는 흠 없는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 주장 역시 저는 일단은 ‘바른 주장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장기영 교수님께 질문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에 부합하는 흠 없는 속죄제물이 되”시려면 꼭 능동 순종을 하셔야만 했습니까? 헤롯 왕 유아학살 때 아기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요구에 부합하는 흠 없는 속죄제물이” 아니셨습니까?
<장기영 교수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①>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금령은 ‘따 먹지 않으면, 살리라.’는 복을 포함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리셨던 기도에서 보는 대로 그리스도께 십자가 길은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으신 길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십자가 순종은 ‘적극(능동) 순종’이 아닌 ‘소극(수동) 순종’이었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떠나신 주님께서는 십자가 길로 적극 나아가셨습니다. 이 점에서 십자가 순종은 주님의 ‘흠 없는 온전한 순종’에서 ‘극치’를 보여준 ‘적극(능동) 순종’이었습니다.
그분께서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분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고, 그분 경건하심 때문에 들으심을 얻으셨느니라. (히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분의 많은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3)
그러므로 주님의 ‘온전한 순종’으로서 이른바 ㅡ‘살리라.’는 복과 얽힌ㅡ “적극(능동) 순종”과 ㅡ‘죽으리라.’는 저주와 얽힌ㅡ “소극(수동) 순종”은 ‘구별’할 수 있으나 ‘분리’할 수 없습니다. ‘구별’하지 않고 ‘분리’해 버리면, ‘십자가와 부활을 분리해 버린 춘천 한마음교회 김성로 목사 같은 이단’이 태어납니다.
그런데 주님의 대속에서 ‘흠이 없는 제물로서 마지막 아담’이 중요했다면 헤롯 왕 유아학살 때 주님께서는 ‘당연히 흠이 없는 분’으로서 속죄 제물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속죄 제물로 삼으실 수 있었습니다. 또한 어린 시절 유월절에 예루살렘성전으로 가신 주님 역시 ‘당연히 흠이 없는 분’으로서 속죄 제물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것처럼 요셉이나 생모 마리아로 하여금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 양으로 바치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두 경우에서 주님의 순종은 ‘수동’일까요, ‘능동’일까요?
위 링크 글에서 예장 합동 꼴뚜기 Wolf이철이 이단시한 글, ‘{박형룡 박사 교의신학 전집 제4권: 기독론} (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351쪽에 적힌 글, “지상 생애 중의 모든 수난은 그의 인성을 연단하는 풀무가 되어 그를 완전한 구주로 되시게 했다.”는 박형룡 목사님 글은 히브리서 2장 10절~18절과 5장 8절~10절 “그분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를 짧게 해석하신 글이다. 짧게 해석하신 글이긴 하지만, ‘해 아래 새것이 없는 해석’으로서 ‘과거 개혁 교회 정통 해석을 배워, 하신 해석’이다. 그런데 서철원파 Wolf대운은 고故 존 머레이 목사님을 내세워 거짓증거를 일삼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3) 그러나 20세기 개혁 신학의 거목巨木 존 머레이 목사님께서는 이 히브리서 구절들을 두고 ‘존 머레이 {구속} 장호준 역 (서울: 도서출판 복 있는 사람, 2011)’ 41쪽~45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밑줄도 한가지다.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라고 말하고 있는 히브리서 2장 10절~18절과 5장 8절~10절만큼 그리스도의 순종이 그리스도 자신과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를 잘 표현한 곳도 드물 것이다. 그분은 고난으로 온전하게 되셨을 뿐 아니라, 그렇게 온전하게 되셔서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이 본문들을 연구할수록 다음과 같은 교훈이 명백해진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 구속을 성취하신 것은 단순히 성육신 때문만이 아니다. 둘째, 그분의 죽음만으로 구원이 성취된 것도 아니다. 셋째, 예수님이 구원의 주인이 되신 것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기 때문만도 아니다. 넷째, 구속을 위한 요구의 정점인 십자가상에서 죽음은 그분 순종의 삶이 절정에 이른 행위였다. 저항할 수 없기 때문에 속절없이 맞이한 죽음이 아니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이 유순하게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순종이란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순종의 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순종의 이면에 있으면서 순종의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내면의 경향성과 의지와 결심과 결단도 포함한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순종 행위의 절정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저주받은 나무 위의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이 아닌, 그런 순종을 뒷받침하는 내면의 경향성과 의지와 결연한 선택을 염두하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자기 희생과 순종의 탁월한 행위로써 자기 생명을 내려놓기로 하신 우리 주님의 거룩한 결단과 의지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온전한 인간으로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더구나 히브리서 이 본문들은 이런 질문이 타당할 뿐 아니라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본문들은 그리스도께서 순종을 배우셨고, 그것도 고난을 통해서 배우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한다. 그분은 고난을 통해 완전해지시고 그 완전을 통해 구원의 주가 되셔야 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완전은 죄에서 거룩으로 나아가는 성화와 관련된 완전은 아니다. 그분은 항상 완전하셨고, 악의가 없으셨고, 순전하셨다. 죄인들과 다르셨다. 하지만 순종에서만큼은 완전에 이르는 여정을 지나셔야 했다. 순종을 배워야만 하셨던 것이다. 우리 주님의 생각과 마음과 뜻은 시험과 고난이라는 혹독한 용광로에서 주조돼야ㅡ연마된다는 표현을 써도 되지 않을까ㅡ 했다. 오류가 없는 지혜와 영원한 사랑으로 예비된 정점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시되,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시험과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기 때문이다. 기꺼이 저주받은 나무에 달려 죽기까지 자원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실 정도로 그분의 마음과 생각과 의지가 온전하게 빚어진 것은, 성부의 뜻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준행하는 죄 없는 삶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기 때문이다.
이런 순종과 그것을 배우는 삶의 여정을 통해 구원자로서 완전하게 구비되셨다. 완전한 구원자로 넉넉히 준비되신 것이다. 모든 고난과 유혹과 고통을 통해 이룬 준비였고, 이는 그리스도께서 맡으신 일을 이루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극적인 요구를 충족할 방편이 됐다. 그리스도를 전혀 부족함 없는 완전한 구원자로 구비하게 한 것은 십자가에서 정점에 이른 이와 같은 순종이었다. 굴욕으로 점철된 온 삶의 여정을 통해 배우시고 나타난 순종이 그분이 구원의 대장으로 완전하게 구비하게 했다는 말이다. 그분이 고난을 통해 배우시고 고난을 통해 온전해지시고 십자가상 죽음이라는 고난을 통해 정점에 이른 순종이야말로 구원의 주인 되신 그분의 사역과 성취를 정의할 수 있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순종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 순종으로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일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종을 인위적이나 추상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분의 완전한 인성이 가진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 이룬 순종이요, 그분의 고유한 온 인격으로 힘써 이룬 순종이요, 일생을 통해 온전히 구현해 낸 순종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께 있는 영원한 가치와 효력을 드러낸 순종이다. 우리는 그분과 연합함으로 이 순종에 참여하고, 그에 따른 모든 은택을 누린다. 이런 순종을 통해 모든 구원론의 중심 진리인 그리스도와 우리의 친교와 연합의 중요성이 극명히 드러난다.
이런 순종에 관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포괄적으로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고, 구속을 성취함에서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능동으로 일하셨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연단”이라는 말을 쓰신 박형룡 목사님이 예장 합동 꼴뚜기 Wolf이철 주장대로 “이단”이면, “연마”라는 말을 쓰신 존 머레이 목사님도 이단이다. 그뿐만 아니라, Wolf이철의 언월도인 {서철원 박사 교의신학 제4권: 그리스도론}에 ‘그리스도의 “발육”, “재능의 발달”’이라는 말을 쓰신 서철원 목사님 역시 이단이다.
…(다음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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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형룡 박사 저작 전집 제3권: 교의신학 인죄론} (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이 책 [제5장: 행위언약에서 사람]에서 이를 다루고 있다.
2)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195
3) “Wolf대운”은 ‘예장 합동 수원 경성교회 김대운 목사’를 뜻한다. 다음 글을 보라.
https://blog.naver.com/ktyhbgj/221456765882
4) 다음에 쓸 글 제목은 <이단들처럼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정이철 목사는 정신 차리기 바란다. ⑪: “아둔한” 이단 서철원 목사님께 “좋은 가르침” 받기를 바란다.>다. 허리가 좋지 못한 내 개인 사정 때문에 이 제목으로 글을 쓰지 못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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