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구 시인 / up up up
60년댄가 김수영이 죽은 뒤이니까
하여간 칠팔십 년대 그 여름에서 쓴
"박문답5" 라는 시의 끝마무리를 나는
'이 시에서 끝에서 세 줄, 혹은 네 줄이
내 마음에 더욱 들지 않는다'로 끝냈는데
이제야 다시 보아하니
그 앞줄 그 앞의 앞줄이 더, 더 그 이상
내가 죽은 김수영을 읽고 있을 때
까치가 제 번 혹은 네 번 울고 날아간다
까치는 울면서도 날아갈 줄 알지마는
김수영은 죽어서도 노래하고
노래하면서도 욕을 할 줄 아는 시인이다
까치는 침묵할 줄 알지마는
김수영은 죽어서도 침묵하지 않고,
어쩌고저쩌고, 저쩌고어쩌고
지울 게 없을 때까지 다 지워버리고 싶어
다 지워내고 아무것도 없는 순수한 제로
깨끗한 공(空)의 상태에서 갓난쟁이로 아장아장
걸음마부터 배우고 다시 시작할 거야
새봄에 새로 새짝 솟아나듯이
up up up
- 시집 《지금도 나 그 한가운데에 서 있다. 도서출판 도훈 2021 -
정대구 시인 / 억새꽃
석양에 붉게 타는 그림자
그녀가 넘어간 오솔길 언덕배기 너머
어느 새 머리 허옇게 흰 그 남자
찬바람머리에 열심히 손을 휘저으며
금방이라도 따라잡을 듯
한쪽으로 온몸이 쏠리고 있다
그 손 엔간히 시리겠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린 여인인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건데
흘러가던 구름이 잠시 멈칫
문자 메시지를 날린다
호호호 하하하
너 아직도 청춘이구나
정대구 시인 / 가장 '을(乙)'의 비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서
하루 종일 구겨진 얼굴을 그냥 달고 들어갈 수는 없지
말끔히 지우고 밝은 표정을 달고 들어가
마누라와 아이들의 기를 살리고 그들에 의해 다시 구겨지기 위해서라도
꿀꺽, 울음을 가장(假藏)한 가장(假裝)의 달인 우리들의 가장(家長)
가장인지도 모르는 식구들에게 언제나 당당한 가장
안에서 마누라에게 자식들에게
부대낄 대로 부대껴도
밝는 날 아침 아무렇지 않게 새 얼굴을 달고 나가
또다시 당할 만치 당하고 들어와
꿀꺽 꿀꺽 울음을 삼키며 웃는
가장의 명수 당당한 가장 슬픈,
- 2013년 <유심> 11월호
정대구 시인 / 바쁘다 봄비
기척도 없이 봄비가
어느새 땅속을 노크했는지
동면에서 잠 깨어
쭉쭉
기지개를 켜며 기어 나오는 개구리
가만가만
간질이는 봄비의 속삭임에
몽긋몽긋
피어나는 개나리 진달래 꽃봉오리
뾰족뾰족
마른 나뭇가지 비비고
연초록 새순 돋고
살금살금 밟고 오는 봄비를 맛본
들판 여기저기 새싹 움트는 소리
파릇파릇 눈을 씻고
바쁘다 바빠
겨우내 감감하던 새소리
처음
빗쭈빗쭈 들려오는 아침
노란 옷 입고
올해 첫
학교 가는 아이들 같이
재재재 재잘거리는 봄비
정대구 시인 / 얼치기
왜 안 받아주나
마누라는 늙었다고 안 받아주고
서울 사는 자식들은
제가끔 바쁘다고 안 받아주고
가는 곳마다
조직 명단에 없다고 안 받아주고
수용할 공간이 없다고 안 받아주고
다시 시골 내려가면
도시를 기웃거린 놈
기름 냄새 먹물 냄새 싫다고
강아지풀도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고
어뜩비뜩 책상물림 얼치기
오나가나 푸대접
석양에
고
개
떨
군
그 사내
하, 공중부양하겠네
시집『위대한 김연복 여사』2016. 시인동네 시인선
정대구 시인 / 운무(雲霧) 속 제부도 가는 길
제부도 가는 길은
하루 두 번씩 열렸다 닫히는 모세의 길
물때에 맞춰 드나들어야 하는데
일부러 그랬는지 몰라서 그랬는지 바닷길 닫히어
꼼짝없이 섬에서 하룻밤을 함께한 청춘남녀도 있다지
오늘따라 길이 열렸는지 닫혔는지
바닷물인지 갯벌인지
하늘이 구름인지 안개인지
바다와 하늘이 젖는 둥 마는 둥
촉촉한 봄비의 베일 속에
보일락 말락 보이는
아스라한 섬 제부도 가는 길이 꼬리를 감춰
해무(海霧) 속 제부도 가는 길은
바다를 건너가는지 하늘을 나는 건지 뱃길도 찻길도 아냐
백마 타고 광야를 달리는 초인의 길
우주선 타고 우주로 가는 길
저마다 시인 되고 연인 되어
우주인 되어
우화등선(羽化登仙)
| 정대구(鄭大九) 시인 1936년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 숭실대학 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문학박사. 1972년 《대한일보》 신춘문예당선. 저서로는 시집으로 『나의 친구 우철동씨』 『겨울 기도』 『무지리 사람들』 『우리들의 배게』 『두 귀에 바퀴를 달고』 『수색쪽 하늘』 『남촌에 전화를 걸며』 『쌀을 씻으며』 등과 수필집 『녹색 평화』 논문집 『김삿갓 연구』 등이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