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를 담뿍 잡아 기폭을 올리고
온다던 그 배는 어이 하여 아니 오나
수평선 바라보며 그 이름 부르면
갈매기도 우는구나 눈물의 연평도
태풍이 원수더라 한많은 사라호
황천 간 그 얼굴 언제 다시 만나보리
해 저문 백사장에 그 모습 그리면
등대불만 깜박이네 눈물의 연평도
작사 김문응 / 작곡 김부해
[최숙자]
최숙자(崔淑子)(1941년 ~ 2012년 1월 6일)는
대한민국의 가수, 성악가였다.
1957년 데뷔했으며 히트곡은 개나리처녀,눈물의 연평도,처녀뱃사공,
갑돌이와갑순이,어머니 전상서 등이다.
사망:2012년 1월 6일, 향년 7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눈물의 연평도에 얽힌 이야기]
‘눈물의 연평도’는 1964년에 발표된 최숙자의 히트곡이다.
4분의 2박자 트위스트 곡으로 멜로디는 흥겹지만 가사 내용은 그렇지 않다.
연평도의 슬픈 사연이 그림을 보는 듯 잘 묘사돼 있다.
‘눈물’, ‘황천’ 등 노랫말 속의 단어들이 그런 분위기를 읽게 한다.
노래는 1959년 9월, 한반도를 휩쓸었던 태풍 사라(Sarah)호에 희생된
어부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작사가 김남풍(김문응) 선생은 그 때의 눈물겨운 사건을 노랫말로 엮어
숨진 어부들의 넋을 달랬다.
그 때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사람은 전라도 어민이다.
조기떼를 쫓아 연평도까지 갔을 때 불어 닥친 사라호로 변을 당했다.
추석명절을 앞뒤로 나흘간 휩쓴 사라호 태풍으로 사망 및 실종 800명,
이재민 37여만 명으로 피해가 엄청났다.
연평도는 눈물바다가 됐다.
후유증이 수년간 이어지는 가운데 ‘눈물의 연평도’ 노래가 만들어져 연평도
사람과 유족들의 마음을 달랬다.
‘눈물의 연평도’는 분단시대를 몸소 겪으며 살아가는 섬사람들의 잃어버린 꿈이요,
못 다 부른 노래이기도 하다. 살아남은 어촌사람들의 외로움은 눈물이고 한이 됐다.
연평도 사람들 중 중·장년층들은 요즘도 ‘눈물의 연평도’를 자주 부른다.
술자리나 회식, 즐겁거나 슬플 때 빠지지 않는 곡이다.
특히 지아비를 잃고 홀로된 아낙들이 애창한다.
‘눈물의 연평도’는 당시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하며 국민애창곡이 됐다.
이미자, 조미미, 하춘화, 김상진 등 다른 가수들도 리바이벌해 취입했다.
연평도전망대의 조기전시관 앞에 ‘눈물의 연평도’ 노래비까지 섰다.
사각형의 콘크리트 받침돌 위 비석 앞면엔 노래 1절, 뒷면엔 2절이 새겨져 있다.
노래비는 M47전차를 전시한 등대공원 아래에 있다.
노래를 취입한 최숙자(1941년 출생) 인기는 하늘을 치솟았다.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씨는 자신의 저서 ‘인생 나의 40년’(1999년 10월)에서
“이미 중견가수 소리를 들었지만 여전히 무명이었다.
그러나 최숙자는 ‘눈물의 연평도’가 크게 히트하면서 인기가 대단한 톱 가수
대열에 진입해 있었다”고 털어놨다. ‘개나리 처녀’ ‘나룻배 처녀’ ‘효녀심청’
‘모녀기타’ 등을 부른 최숙자는 ‘가는 봄 오는 봄’을 백설희와 듀엣으로 불러
연속 상종가를 쳤다.
특유의 구성진 음색에 기교가 넘쳤던 가수다.
그는 대중적 인기를 끈 가수이긴 했으나 음반과 방송을 통해서만 활동하고
무대엔 자주 서지 않았다. 1977년 미국으로 이민가서 생활하다가
2012년1월6일 지병으로 향년7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우리나라 3대 어장의 한 곳인 연평도는
가요 ‘눈물의 연평도’ 바람에 더욱 유명해졌다.
1968년까지만 해도 ‘조기의 섬’이었다.
해마다 4월 중순에서 6월 초까지 조기 철이 되면 북적댔다.
전국 각지의 어선들이 조기떼를 따라 이곳에 몰려들었다.
성어기엔 3000~5000척으로 큰 어장을 이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