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련선원(玉蓮禪院) - 한국 고유 불교 문화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곳
대한불교조계종의 직할교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창건 시기와 창건자는 알 수 없다. 670년(문무왕 10) 원효가 백산사라 이름을 정하고, 910년(성덕왕 9)에는 최치원(崔致遠)이 이 절에 은둔하여 참선하였다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서기910년(성덕왕9년)에 최고운선생이 백산사에 은둔하여 참선했다. 1635년(인조13년) 해운선사가 옥련암을 개칭 하였으며, 1976년 대웅전을 중창하면서 옥련선원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92년 50척 높이의 미륵대불을 세웠으며 미얀마의 고승인 우의자난다 스님이 가져온 세존 진신사리 12과와 미륵 삼부경을 봉안한 유서깊은 곳이다. 또한 한국 고유의 불교, 문화, 예술 및 건축사의 추이를 이해하는데 특히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사찰로 1998.10.17 전통사찰 제28호로 지정되었다. 삼국시대의 마애미륵석불과 신라시대의 불상으로 추정되는 부석불석상 등 여러 가지 탱화가 있다.
[옥련선원의 유물]
유물로는 삼국시대의 마애미륵석불 및 신라시대의 불상으로 추정되는 부석불석상이 있다. 또, 1992년 1,500톤의 화강석으로 제작한 약 15m 높이의 미륵대불이 있다. 이 불상은 국내 최대의 석조 좌불상으로 법주사의 은진미륵과 함께 한국 불교의 명물로 꼽힌다. 이밖에 진신사리 5과를 모신 사리탑과 임진왜란 때 죽은 무명고혼(無名孤魂)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임진왜란 천도비가 있다.
옥련선원 마애지장보살좌상(玉蓮禪院 磨崖地藏菩薩坐像)-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
옥련선원 내 삼성각(三聖閣) 뒷산에는 예로부터 인근 주민들의 신앙대상으로 전해 오는 관덕암(觀德巖)이라는 바위군이 있는데, 이 바위군에서 벼락을 맞아 떨어져 나온 바위 면에 보살좌상 1구가 새겨져 있다. 이 바위는 벼락을 맞아 깨어지면서 거꾸로 박혀있기 때문에 보살좌상은 아래위가 거꾸로 되어 있다.
얕게 조각되었던 보살좌상은 근래에는 붉고 푸른 페인트가 칠해졌던 모습이 뚜렷한데, 바위가 떨어지면서 깨어졌는지 이후에 인위적으로 훼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거의 대부분 훼손되어 윤곽만 남아 있으나, 다행히 선각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은 남아 있어 성격 파악에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 보살좌상은 얼굴과 머리 부분을 음각으로 표현하였는데, 머리 위에는 육계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고 이마 윗부분에 두건대(頭巾帶)가 뚜렷하여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음이 분명한 점으로 보아 지장보살상으로 생각된다.
또한 얼굴과 머리 부분을 음각으로 표현한 이외에는 두광과 신광, 몸체, 연화좌 등 모든 부분을 양각으로 표현하였으나, 그 조각이 얕아서 암각화와 같은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불화의 맥락에서 고찰해야 할 필요가 있다. 광배의 처리를 볼 때 17~18세기에 조성된 불화들의 광배에서 이 보살좌상의 광배에서 볼 수 있는 방사선 무늬의 표현을 볼 수 있어 이 마애지장보살좌상이 조선 후기인 17~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게 한다.
옥련선원이 위치한 백산은 경상좌수영이 있었고, 백산의 정상부에 첨이대가 있는 등 남해를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사명대사와도 관련이 깊은 곳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어 옥련선원의 마애지장보살좌상은 해난구제와 수군의 귀의불(歸依彿)로서 역사적 의의가 깊다고 하겠다.
아울러 부산 지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마애불인 동시에 상호와 머리 부분을 음각으로 표현하고 다른 부분은 양각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 등 조선시대 뿐 아니라 우리나라 조각사 연구에 자료적 가치가 있는 유물이다.
울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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