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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178회 : 조선시대 관리,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2002.12.7.)
방송일: 20021207 조회수 : 13720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 역사스페셜 ]
-조선시대 관리,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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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치는 학생들 (보고)
막걸리 붓고 19
해마다 한 두 명의 목숨을 앗아가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신고식.
신고식은 새로운 사회로 진입 하는 새내기들의 통과의례다.
면신첩 보고 10
그런데 3-400년 전, 조선시대에도 신고식이 있었다.
면신례 그림 15
과거에 급제한 조선 최고의 엘리트. 그들은 관리가 되기 위해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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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타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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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1]
(서가, 책상위에 난중일기, 계암일록, 매암일기, 입조일기 등 올려져 있고)
(일기들 보면서)
우리가 조선시대를 알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사료중의 하나가 일기입니다
조선시대의 일기들은 현재까지도 꽤 많이 전해져 내려오는데요
대표적인 것이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율곡선생의 석담일기, 미암 유희춘 선생의 미암일기,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입니다.
일기의 내용도 무척 다양한데요.
사소한 일상생활을 기록한 것에서부터 임진왜란등의 커다란 역사적 사건이나 중국기행처럼 특별한 경험담을
담은 일기들도 있습니다.
(입조일기 들고)
그런데 여기 아주 흥미로운 일기가 있습니다.
제목은 입조일기. 입조는 벼슬아치가 조회에 들어간다는 뜻인데요.
이 일기는 조선시대 한 관리가 45년간의 관직생활을 기록한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일기중에서 이렇게 순전이 관직생활만을 기록한 일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흔히 조선시대 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차이가 많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차이가 나는 부분도 있지만 전혀 차이가 나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관리의 생활은 어땠을까요?
지금의 공무원들과 많이 달랐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한권의 일기를 단서로 그 궁금증을 풀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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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경기도 박물관 4 (보고)
박물관 내부 팬 8
현재 경기도 박물관에는 경기도 내의 각 문중에서 기증한 조선시대 유물들이 소장돼 있다.
고서 4
유물은 주로 양반의 생활사를 보여주는데,
화첩 3
각종 계모임을 그린 화첩
궤장 6
정년퇴임하는 관리에게 임금이 내린 궤장,
조영복 초상화 10
영조시대 대표적인 화가 조영석이 자신의 친형인 조영복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초상화 등이 눈에 띈다.
흰종이 펼쳐 책자 꺼내고 10 (2-3 초 후)
그 중에서 취재팀이 주목한 것은 조선시대의 한 관리가 남긴 일기다.
입조일기 팬 선고입조일기 8
입조일기는 원래 2권이었지만 1권은 없어지고, 현재는 원본 1권과 필사본인 선고입조일기가
두 사람 앉아 있고 3 전해오고 있다.
책 팬 12 (2-3 초 후)
300년 전에 씌여진 일기지만 보관상태가 무척 양호하다. 없어진 원본의 내용도 당시에 씌여진
내용 틸다운 5
필사본을 통해 빠짐없이 확인할 수 있다.
김용철 인터뷰(경기도 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선고 입조일기는 조중회의 아들이 당시에 전하고 있었던 입조일기를 그대로 써서 옮긴 책입니다.
책 펼치고 5 (2-3 초 후)
입조일기는 1736년 9월 20일.
내용 핀조명 7
과거에서 병과 5등으로 합격했다는 아주 간단한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다.
책 넘기고 4
그리고 일기의 끝은 1780년
내용 줌아웃 8
관직에서 은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모두 45년 간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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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걸어오고 10 (3-4 초 보고)
용인시 원삼면, 함안조씨 후손 집에
묘선사 현판 3
작은 사당이 하나 있다.
커텐 열고 7 (3-4 초 보고)
사당에 모신 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바로 입조일기를
조중회 초상화 16
쓴 조중회다.
관리시절 성격이 강직하여 영조의 총애를 받은 조중회는 이조와 병조, 공조판서 등 오늘날의 장관에 해당하는
관직을 두루 지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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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 인터뷰
입조일기에는 조중회가 45년간 관직 생활하면서 거쳤던 모든 관직 또는 물망에 올랐지만 임용되지 못했던
관직상황, 이런 것 까지도 모두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조선시대에 어떤 사대부들이 관료생활 ..
일생동안 어떠한 어떻게 관료생활을 해왔는지를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는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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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들고, 8
조중회는 신입관리 시절부터 관직생활에서 있었던 일들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는데,
입조일기 글씨 나오고 30
입조일기를 읽어내려가던 중 취재팀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보고)
한문 나오면
과거 급제한지 2개월 후 조중회는 드디어 관료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한글
조중회가 처음으로 받은 관직이 가주서. 가주서는 어떤 관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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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5 (2-3 초후)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지정된
승정원 일기팬 35
승정원 일기는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맡은 승정원에서 매일매일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기록 한 방대한
양의 일기다.
주서나오고
바로 이 일기의 기록과 정리를 맡은 이가 주서, 조선시대 정7품 관직이다.
그리고 주서옆에는 가주서를 두었는데, 가주서는 일종의 수습사원이다.
승정원 일기 14
승정원 가주서는 평상시엔 주서를 보좌하며 실무를 익히고 ,주서가 유고시엔 대신 승정원 일기를 써야한다.
가주서가 된지 얼마후,
책에서 분관 글씨 16
조중회는 이번엔 분관을 통해 승문원에 배치된다. 이때 조중회의 관직 역시 수습직인 권지.
그렇게 각 기관을 돌며 실무를 익힌지 3년만인
12
1739년. 조중회는 정식관직인 설서로 임명된다. 설서는 세자의 교육을 맡은 세자시강원 강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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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 인터뷰
권지는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들이 성균관 승문원 교서관 훈련원 별식 이런 것들에 분관되어서 관직에 임용되기
전까지 말하자면 일종의 견습관원이라고 할까요. 오늘날의 수습이나 서리와 비슷한 그런 직책이 권지입니다/
과거 급제자가 적체되면서 보통 6-7년 정도 권지생활을 거친 이후에 정 9품 실직에 임용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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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조일기 10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들은 정식 관리가 되기전 긴 수습기간을 거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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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2]
(입조일기 들고)
조선시대에도 수습사원이 있었군요.
초보관리에게는 실무를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또 인사적체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 수습사원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요즘 기업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습사원이 조선시대 관리사회에도 있었다고 하니 무척 흥미롭습니다.
(병풍 내려와 쫙 펼쳐지고, 김홍도 평생도다 )
(MC 평생도 하나하나 보면서 멘트)
지금 보시는 이것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화가 김홍도가 그린 평생도입니다.
조선 후기에 양반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평생도는 양반의 일생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건들을 그린
일종의 기록화인데요. 과연 양반들이 중요시했던 것은 무언인지 보겠습니다.
먼저 돌잔치를 하는 모습이군요.
다음 그림은 아이가 훌쩍 자라서 성인이 됐는데요,
혼례를 치르기 위해 신부집으로 가는 신랑의 모습입니다.
(3일 유가 그림 타이트)
이번엔 이 그림을 자세히 보시죠.
말을 탄 주인공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있고 악대들도 보입니다.
주인공이 머리에 어사화를 쓴걸로 봐서 과거 급제후에 3일 유가,
요즘으로 치면 축하퍼레이드를 하는 모습입니다.
(수찬행렬 그림 타이트)
그 다음 그림엔 주인공이 관청으로 행차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요. 처음으로 관직을 받고 출근하는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이 평생도를 보면 주인공의 관직이 어디까지 갔는지 알 수 있는데요
이 그림을 보시죠.
행차가 무척 호화롭죠. 바로 정승의 행차입니다.
(정승행차 그림 타이트)
이 평생도는 돌잔치에서부터 관직에서 은퇴해 회혼식을 치르기까지의 개인사가 그림으로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그림의 상당수가 관직에 있을때의 모습입니다.
그만큼 조선시대 양반에게는 과거에 급제해 관리가 되는 것이 무엇보다 영광스러운 일로 기억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준근의 기산풍속도-신래불리기 묵희 내려오고)
(MC F.I 그림속의 사람들 지켜보다가 , 그림 앞으로 나오고)
이 그림속의 인물들을 유심히 보시죠.
무슨 일인지 관리들이 한 사람의 양팔을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머리 부분을 유심히 보십시요. 어사화를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사람임을 알 수 있는데요.
또 이 앞을 보면, 한사람이 붓을 들고 있는데,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습니다.
아마도 붓으로 과거급제자의 얼굴에 먹칠을 하려는 것 처럼 보이는데요.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이 과거급제자는 이런 놀림을 당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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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모니터 앞,피디와 신선생 2 (보고)
마이크로 필름 걸고 9
과거 급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규장각 사료속에서 취재팀은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화면 돌아가고 4 (보고)
화면 보면서 얘기 2
정조시대 선전관청에 걸어두었다는 목판.
화면의 탁본팬 6
목판의 제목은 선전관청면신소입이정절목이다
면신 11
면신은 신참을 면하게 해준다는 뜻으로 오늘날의 신고식에 해당한다.
비망 7
그런데 주목할 것은 신입관리의 신고식에 대해 임금이 직접 그 폐해를 지적하고 절차를 바로 잡도록
내용 틸다운 8
한 것이다.
신병주 인터뷰
이것은 왕명의 전달이나 호위를 맡은 부서인 선전관청에서 당시 신참들이 들어왔을 때 아주 이렇게 보면
괴롭히는게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신참들을 면신하는데 있어서 잘못된 관행들을 바르게 고쳐보자고 하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규정집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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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모 소장과 인사 7
신입관리의 면신이 어떻게 행해졌기에 임금까지 나서 개선하려 한 것일까?
면신첩 꺼내는 정소장 11 (2-3 초 후)
정승모 소장이 취재팀에게 보여준 이 문서는 19세기말 한 관리가 치른 신고식이 담겨있다
신귀 글씨 3 (보고)
정승모 인터뷰
1892년에 수문장 벼슬을 얻은 거 같아요.
그래서 수문청에 들어가면서 선배들에게 신참의식을 하면서 받은 문서 같습니다
면신첩 틸다운 10
수문청 관리들이 새로들어온 신입관리 임도호에 건넨 한 장의 문서. 문서의 맨 뒤에는 선배관리
수결 5
들의 사인이 적혀 있다.
팬 신귀 핀조명 16
문서의 맨 앞에는 신귀라는 글자가 보인다. 당시 신입관리를 부르는 이름이다.
신귀아래엔 임도호의 이름이 거꾸로 적혀있는데 선배관리들의 장난기가 엿보인다.
문서 풀 20
문서의 내용을 보면 선배관리들은 임도호에게 좋은 술과 진수성찬을 즉시 바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조선시대 신입관리들은 이렇게 선배들을 위해 잔치상을 차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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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갑 인터뷰
잔치상을 차리는데 3,5,7,9 이렇게 홀수로 나가죠. 가령 예를 들어서 청주가 세병이다. 물고기가 세 마리
다음엔 안주가 세접시 과일이 세접시 이런식으로 3의 숫자로 시작해가지고 상을 차려서 다섯 번 진행이
됩니다. 그리고 나서 5의 숫자로 올라가죠. 5의 숫자로 올라가가
지고는 세 번의 상이 차려지고 7,9에 가서는 마지막으로 면신이 끝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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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암일록 펼치고 5
잔칫상뿐만이 아니다.
책 팬 15
광해군시대에 관리를 지낸 김령의 일기에는 또 다른 면신례의 내용이 나온다. 신입관원시절 김령은 회자를
하느라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회자 글씨 나오고 12 (2- 3초후)
회자는 신입관리들이 밤마다 선배관원의 집을 찾아다니며 명함을 돌리는 일이다.
박홍갑 인터뷰
관청의 선배들에게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자기가 어떤 사람이다라는 걸 알려야되죠. 그래서 찾아다니면서
갖고다녀야 하는 것이 인제 명함종이입니다. 명함종이는 샛길 자자에다 종이 지자를 써서 자지라고 하는데
그 자지를 들고서 선배를 찾아가는데 그 자지가 그 종이가 굉장이 두껍고 큽니다.
그러니까 무명 한 필로 세 장 정도로 바꿀 정도로 비싸다고 그래요.
사진 과 민영익 명함 11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의 명함은 구한 말 민영익이 보빙사로 미국에 갔을 때 사용한 명함이 유일하다.
명함 11
크기는 지금의 명함과 비슷하지만 두께가 훨씬 두껍다. 종이가 비싼 시대에 두꺼운 명함을 만들
명함 풀샷 3
기 위해서는 그만큼 경제적 부담이 컸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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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외경 3 (보고)
임꺽정 사진 팬 이두호 7
조선시대 신입관리가 치른 면신례의 내용중엔 육체적인 학대도 빠지지 않는다.
밑그림 틸다운 색칠하고 8
성현의 수필집인 용재총화에는 신입관리를 괴롭힌 각양각색의 면신례 내용이 기록돼 있는데,
작업하는 이두호선생 9
취재팀의 의뢰로 만화가 이두호 선생이 그 내용을 그림으로 옮겨보았다.
색칠하고 7 (보고)
거미잡기 풀 3
이것은 일명 거미잡기다.
틸업 거미잡는 신참 8
신입관리에게 지저분한 벽에서 거미를 잡게 한 뒤
구정물 마시는 신참 8
그 손을 씻은 물을 마시게 했다.
겨울철에 고기잡기 12
한겨울에도 강에 들여보내 맨손으로 고기를 잡게 했고,
오물뿌리기 17
선배들의 관직과 이름을 외우게 한 뒤 틀리면 온 몸에 오물을 뿌렸다.
통나무 들기 13
무거운 통나무를 들지못하면 구타를 하기도 했고
숙직서기 8
신입관리가 들어오면 보름 이상 숙직을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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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과거시험장 17
조선시대 과거에 합격한 신입관리들은 전국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된 최고의 엘리트들이다.
그런 이들에게 면신례를 하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박홍갑 인터뷰
면신례의 유레는 고려말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고려말이 되면 권문세족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고 권세가의 어린 자제들이 관료로 진출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죠. /그 어린 자제들이 과거에 급제해서 관직에 나가면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수반이 되죠.
그래서 조선성종 때에 대학자였던 성형이 용재총화라는 책을지었는데 그 책에 보면 어린 자제들이 너무
권세가의 어린 자제들이 진출하기 때문에 그 권세를 누르고 존비의 엄격함 또는 권세가들의 권게 이런 것들을
억누르기 위해서 실시를 했다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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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실록 34
조선시대에 오면서 신입관리의 통과의례로 정착한 면신례는 점차 그 폐해가 드러나는데,
그 극단적인 예가 단종 1년에 일어난 정윤화 사건이다.
종기병을 앓고 있던 정윤화가 면신례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결국 목숨을 잃은 것이다.
박홍갑 인터뷰
조선시대 면신례의 후유증이나 부작용은 굉장히 컸습니다.
왜냐하면 경제적인 침학 또는 육체적인 가학 이런 것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데 결국 이런 과다한 상차림 때문에
가난한 선비들은 그런 상차림을 부담할 수 거 엇ㅂ어가지고 그 관직을 기피하는 경향도 있었고 또는 심지어는
장시치 부유한 장사치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있었고 심지어는 소를 잡아가지고 상차림을 했으니까
그 당시 농경사회에서 소라는 건 굉장히 중요했고 국가에서도 소를 도살하는 것을 금지시켰거든요.
그런 상태에서 소까지 잡았다는 그런 병페 이럴것들이 경제적인 폐단이 될거고 육체적인 가학 때문에 결국은
죽음으로 몰고 간다든지 아니면 같이 참석했던 기생들, 이런 사람들이 매맞아 죽는 사건들도 실록에 보면
나타납니다.
잔치 그림 10
조선시대의 신입관리들은 이렇듯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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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3]
(이두호 선생이 그린 면신례의 그림들 뒤에 펼쳐져 있고)
조선시대 양반자제의 최고의 이상은 과거에 급제해 관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장성할 때까지 과거공부에 매달립니다.
아마도 과거에 합격하는 것은 지금의 고시에 합격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을텐데요
그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 후 신입관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렇게 혹독한 면신례였던 것입니다.
물론 면신례가 새로운 조직에 적응하고 선배들과의 단합을 꾀한다는 순기능도 있었을테지만 해가 갈수록
많은 문제점이 나타나자 면신례를 폐지해야 논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면신례는 폐지되지 않았는데요. 조선시대 거의 대부분의 관리들은 혹독한 면신례를 거친후에야
정식관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식관리가 된 후 관리의 생활이 어떠했을지 궁금해지는데요. 입조일기에는 관리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대목
들이 나옵니다.
(입조일기 기록 나오고)
(出榜歸路落馬)
출방귀로낙마. 퇴근하는 길에 말에서 떨어졌다.
이 기록에 의하면 관리가 출퇴근을 할 때 말을 타고 다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요
출퇴근 길이 멀었기 때문에 말을 타고 다녔던 걸까요?
조선시대 관리의 출퇴근 길을 한번 따라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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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광화문 줌인 9
아침 저녁 출퇴근 차량으로 홍수를 이루는 광화문 세종로.
달리는 차들 6
300년전에도 이곳은 출퇴근 관리들로 붐볐다
풍속화/홍문관 수찬행렬 26
조선시대 홍문관 수찬의 출근행렬이다.
홍문관 수찬은 정6품 하위관리로 , 말고삐를 끄는 좌견과 함께 대여섯명이 출근 길을 호위하는데,
멀찌감치 앞서가는 이 사람이 안롱을 들고 길을 비키라고 소리를 친다.
평생도, 정승행차 24
홍문관 수찬과는 달리 정승의 행차에는 수십명의 하인들이 호위하고 있다
안롱
행렬앞에 있는 이 사람은 비올 때를 대비해 가마덮개인 안롱을 들고 있다.
호상
그옆 사람이 들고 있는 것은 호상. 정승이 사용하는 휴대용 의자다.
정승이 탄 평교자 3
또 눈길을 끄는 것은 정승이 탄 화려한 가마.
디졸브 평교자 실사 10
평교자라고 불리는 이 가마는 정1품관리 즉 정승만 타고 다닐 수 있다.
초헌 탄 대신 2
고관들이 타고 다닌 교통수단으로는 초헌이 있다
초헌 12
바퀴가 달린 이 수레는 2품이상 즉 판서들만이 탈 수 있다.
남녀 타는 풍속화 4
나이든 대신들은 주로 남여라고 불리는 단순한
남녀 4
형태의 가마를 타고 다녔다.
정연식 인터뷰
높은 고위관원들이 쓰는 평교자라는 것이 있고
2품관이상 판서급들이 쓰는 초헌이라는 것이 있고 노 대신드리 쓰는 남녀라는 것이 있고 도 다른 가마들이
있는데 정3품의 당상관들이 쓰는 것이지 당하관이나 무관이나 00벼슬을하는 음관들을 탈수가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마를 타고 출퇴근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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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학 연구소 외경 4
관리들의 출퇴근 길을 확인하기 위해 관청의
지도앞에서 설명 4
위치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전우용 인터뷰
서울학 연구소 상임연구위원
광화문과 중심지역인 관아 , 종묘와 사직같은 것은 전부 이 청계천 이북에 배치됩니다. 경복충 창덕궁,
창경궁 종묘 사직이 전부 청계천 이북에 배치되면서 이것이 관청이라든가 중요한 국가적 시설들이 밀집하는
지역으로 자리잡게 되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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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풀 샷 9
경복궁앞 현재 정부종합청사가 자리잡고 있는 세종로는 조선시대에도 주요 관청들이 들어서 있던
차도에서 얘기하고 4
행정의 중심지였다.
나각순 인터뷰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남쪽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그러니깐 동쪽 방향으로는 가장 가깝게 의정부가 있었고 그 다음에 이조,
그 다음에 한성부 그 다음에 호조, 기로고사 쭉 동쪽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쪽 서쪽 방향으로는 예조, 형조, 병조 공조가 있었고
세종로 11
조선시대 세종로는 양옆으로 6조의 관청이 들어서 있다해서 6조거리라고 불렸다.
당시의 6조거리를 복원해 보면
서울 복원 20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중심으로 오른쪽엔 의정부-이조-한성부-호조가
왼쪽엔 예조-중추부-사헌부-병조-형조-공조가 들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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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부감 14
그렇다면 관리들의 거주지역은 어디쯤이었을까?
현재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주택가가 형성돼 있다.
하옥 지붕들 4
경복궁 동쪽에 위치한 종로구 가회동엔
철문 들어서고 13
윤보선 전 대통령의 가옥이 있다.
(2-3초 보고)
지금은 서양식이 많이 가미된 형태로 개조됐지만
으리으리한 건물 14
원래 이곳은 한말에 지어진 세도가의 집으로 당시 양반가로서는 최대 규모인 99칸 집이었다고 한다.
하마비 3
대문앞에는 당시 양반가의 흔적이 남아있다.
대문앞에 있는 돌 보며
소슬대문 앞에 노둣돌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인들이 말을 타거나 가마를 탈 때 쉽게 오르기
위해서 발을 디디고 올라타는 그런 돌이 되겠습니다.
팻말 팬 골목 9
가회동을 포함해 전통가옥촌을 이루고 있는 이 일대가 조선시대 고위관리들의 거주지였다
나각순 인터뷰
한성부시대에 5부중의 북부에 해당되는 지역이었고 특히 이지역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어서
왕궁으로 출퇴근하는 관리들이 집단으로 주거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바로 높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죠.
그런 의미에서 그 이전에는 북쪽에 있으니까 북촌이라 했고 그 이전에는 웃대, 우대 이런 말을 쓰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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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틸다운 주택가 13 (3-4 초 후)
북촌과 함께 조선시대 고위관리들의 거주지로 꼽 힌 곳이 장동이다. 경복궁 서쪽에 위치한 장동은
으리으리 주택들 4
당시 순화방이라 불린 고급주택가였다.
김상헌 집터 표지석 8
특히 이곳은 조선후기 세도가인 안동김씨의 집단 거주지로도 유명했다.
안동김씨의 일가문중에 이 지역에 세가하는 사람들을 장동 김씨라고 불렀죠.
바로 그 집안이 조선 후기 60년 세도정치를 이끌어갔던 집안이 바로 본 터전이 이 곳입니다.
서울 풀샷 25
입조일기의 저자인 조중회도 바로 이 장동에 살고 있었다.
조중회의 출근시간을 알아보자.
장동에서 육조거리까지는 약 1킬로미터, 말타고 20분거리다.
창덕궁까지는 약 3킬로미터, 출근시간은 약 1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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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4]
(한쪽엔 시계, 한쪽엔 한성지도 펼쳐져 있고)
(지도앞에서)
당시 한성은 신분이나 직업별로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궁궐이나 관청 옆의 북촌엔 고위 관리들이 모여 살았고 지금의 남산지역에는 하급관리나, 관리가 되지 못한
양반들이 모여살았죠.
지금의 종로쪽에는 시전상인들이 ,을지로쪽에는 의관이나 역관들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번엔 출퇴근 시간을 볼까요?
(시계옆에서, 멘트에 따라 묘시, 진시 표시)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관리들의 출근시간은 여름엔 묘시 즉 5시에서 7시 사이였고
겨울엔 조금 늦춰져서 7시에서 9시 사이였다고 합니다.
요즘과 비교하면 여름엔 조금 빠르고 겨울은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위 관리들은 직장과 아주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기 떄문에 출퇴근 시간을 맞추는데는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입조일기 기록 뜨고)
(以病不得任進故政院啓辭請罪 特命拿?)
그런데 이 기록을 보시죠.
입조일기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병으로 직무에 나아가지 못하였는데 승정원에서 이 사실을 임금에게 알리고 ,
임금이 잡아들여 조처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조중회가 하급관리 시절의 일입니다. 조선시대엔 한 하급관리가 결근한 사실을 임금에게까지 보고했던
것입니다. 이 한가지 사실만 보아도 조선시대 관리로 지내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조선시대 관리가 과연 하루 일과를 어떻게 보냈을지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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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건물 줌인 3
광화문 네거리 ,
표지석 옆에 두사람 5
세종문화회관 건너편에 비석이 하나 서 있다.
비석의 글씨 4
경조아문터. 옛 한성부가 있던 곳이다.
건물 틸다운 6
매일 아침 한성부 관리들은 바로 이곳 6조 거리로 출근했다.
류시원 인터뷰
전 서울시 문화재과장
옛날에는 출퇴근 격식이 굉장히 까다로웠습니다. 낮은 사람들이 미리 출근해 있다가 한성판윤이 출근하시면
일반서리가 한성판윤이 출근하십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면 좌윤 우윤 모든 관리들이 계급에 따라서
대문밖에서도 기다리고 대문안에서도 기다리고 섬돌위에서도 기다리고 계급에 따라서 위치가 다 정해져
있습니다. 거기서 한성 판윤을 맞습니다.
한성부 복원 31 (3-4 초 후)
한성부는 사무실과 호적창고 등 여러 개의 건물이 하나의 청사를 이루는데 이 청사에 모두 90여명의 관리가
근무했다. 관리들의 주요업무는 호적의 작성과 보관, 마부와 마차관리, 그리고 도성안의 치안 관리였다
건물 팬 두사람 풀 11
한성부 관리의 근무시간은 평균 10시간. 관리들은 점심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인터뷰
옛날에는 도시락이라든지 이런게 없기 때문에 식량사정도 있고 그래서 9월서부터 1월 사이에는 두끼만 먹고
간단한 간식 정도 주고, 한여름에는 그것 가지고는 어려우니까 세 끼도 먹고,
뭐 일정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요즘같이 일정하지는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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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팬 9 (2-3 초 후)
당시 조선시대의 국립대학인 성균관에는 예비관
기숙사 3
리들의 기숙사가 있었다.
양현재 현판 4
양현재가 그곳이다.
문열고 들어가고 13 (7-8초 보고)
현재 양현재는 성균관 대학교 동양학부 석박사 과정 학생들이 사용하고 있다.
기숙사 팬 9
조선 시대 성균관 유생들은 한 방에 두명 씩 생활하며 다가올 과거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발들 4 (보고)
태학계첩보면서 4
성균관유생들에게는 점심이 주어졌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태학계첩 8
영조시대 성균관의 구조를 그린 태학계첩.
그림 팬 진사식당으로 11
당시 건물중에서 취재팀의 눈길을 끄는 건물이 있다. 성균관 동쪽 끝에 위치한 진사식당이다.
식당 팬 10
진사식당은 현재 성균관 예절학교로 사용되고 있다. 진사식당으로 들어서면
내부 3
입구에 빈공간이 보인다.
도기장소 가리키고 5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도기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이상만 성균관 의례국장
바로 여기가 도기장소입니다. 그래서 출입하면서 자기 이름밑에 동그라미를 해서 식사를 했다는 증표를 남깁
니다.
조선왕조실록 32
현재 도기의 실물은 남아있지 않지만 조선왕조 실록을 통해 도기의 내용을 알 수 있다. 도기는 일종의 출석부로
식사를 할때마다 유생들은 자신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아침 저녁 하루 두 번만 식당에 드나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점심을 굶었다는 뜻이다.
정연식 인터뷰
서울여대 인문과학부
원래 옛날에는 기본적으로 1일 2식이죠. 근데 해가 길어지거나 특별한 노동을 하거나 그러면 낮에 간단하게
먹는, 조그만 소량을 먹는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점심이라는 것이 너무나 소량이기 때문에 끼니수로 포함할 수 가 없으니깐 물론 끼니에 넣는
사람도 있지만은 일반적으로는 두끼라고 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습니다.
공고상 18
대부분의 관리들이 점심을 굶었지만, 점심을 먹는 관리들도 있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한 고위 관리들은 노비가
점심상을 관아까지 직접 날라오 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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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계첩 열고 6
조선시대 기록화인 금오계첩을 통해 퇴근후 조선
병조모임 4
시대 관리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남지기 기로회도 8
조선시대 관리들은 각종 회식이 잦았는데 이것은 은퇴한 관리를 축하하기 위한 회식이다
임오사마 방회도 8
이 그림은 임오년에 과거급제한 동기생들의 모임을 묘사하고 있다.
산 틸다운 호조낭관계회도12
또 관리들이 따로 관청에서 회식을 갖기도 했다 호조관리들이 관청노비의 음식시중을 받으며
개인상 차림 4
회식을 하고 있다.
모임 탈아웃 10
하루 근무를 마치고 조선관리들은 이렇듯 다양한 회식에 참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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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5]
(뒤에 함안 조씨 제사 지내는 그림)
(입조일기 기록 옆으로 뜨고: 式暇)
입조일기의 저자인 조중회는 1753년 4월 22일 식가를 받고 나왔다고
일기에 적고 있습니다.
식가란 관리에게 주는 정식 휴가를 말합니다. 화면에 보시는 것처럼 주로 집안에
기제사가 있을 때 식가를 받았는데 기간은 보통 일주일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관리들도 요즘의 공무원처럼 휴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관리가 쉬는 날은 총 몇일이나 됐을까요?
(달력 내려오고, 멘트에 따라 빨간 동그라미 쳐진다)
조선시대 헌법인 경국대전에는 관리의 휴가와 휴일규정이 있는데요.
매달 1일 8일 15일 23일이 정기 휴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설날, 단오, 연등회, 추석 명절을 쉬었고,
소한 대한 입춘 동지 같은 24절기에 해당되는 날도 휴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두 휴일을 더해보면 일년에 60일인데요.
2002년도 올 한해의 휴일이 64일,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녹패 손에 들고)
그렇다면 월급수준은 어떠했을지 궁금한데요.
지금 제가 손에 들고 있는 이 종이는 녹패라고 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월급지불명세표인데요.
여기 이름과 관직이 씌여져 있는데 이 관직에 따라서 녹봉이 달랐다고 합니다.
과연 조선시대 관리들의 월급은 얼마나 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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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길 팬 6 (3-4 초후)
마포구 창전동엔 지하철 6호선
광흥창역 4
광흥창역이 있다.
걸어가는 두사람 7
취재팀은 광흥창을 찾아보았다.
올라오고 13
지하철 역에서 주택가 안쪽으로 5분정도 들어서 자 언덕배기에 작은 비석이 하나 서 있다.
나무 팬 비석 14 (3-4 초후)
비석은 이곳에 조선시대 관리들의 녹봉을 저장하고 배급하던 광흥창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멀리 한강 틸다운 10
창고터 바로앞에는 한강이 내려다보인다. 곡식을 이곳까지 운반하는데 주로 뱃길을 이용했다.
나무 팬 사당 8
안전한 뱃길을 기원하기 위해 창고 바로 옆에는 사당을 지었다.
공민왕 사당 7
무사히 광흥창으로 들어온 곡식들은 다시 관리들의 녹봉으로 지급됐다.
전문가 인터뷰
지급하는 방식은 대개 각 품계에 따라서 녹봉의 양이 정해지지요. 직접 현물을 지급하던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바로 중앙에 봉급담당관으로부터 일정한 표찰을 받아서 그걸 가지고 이 창고에 와서 직접 창고 관리에게 그걸
보여주고 거기에 해당되는 양을 수령해가는 이런 형태가 바로 오늘날 그런 봉급지급하는 것과 같은 형태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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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종이 펼치고 9
녹봉을 받기위해서는 수령증이 필요했다. 바로 이것이 조선시대 녹봉지급증서인 녹패다
조영복 녹패 틸다운 12
녹패는 호조에서 발행하는데, 녹봉을 받는 관리의 이름과 관직 그리고 녹패 발 행책임자의 이름이 적혀 있다.
경국대전, 녹과 36
녹봉의 양은 경국대전에 명시돼 있다. 녹봉은 관직에 따라 모두 18등급으로 구분되는데
경국대전에 규정된 수량대로 봄 여름 가을 겨울 일년에 네 번 지급된다
최고 관직인 정1품이 봄철에 받는 녹은 백미 1석, 현미 12석, 조 1석, 콩 12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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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풀샷 4
조중회가 과거 급제후 임명받은 설서의 녹봉이 얼마나 되는지
쌀 나르고 3
직접 확인해보기로 했다.
봄 녹 풀샷 3
설서는 정7품으로 녹과는 제 13과, 설서가 봄에 받는 녹은
녹 팬 16
백미가 1석, 1석은 오늘날의 89킬로그램 기준으로 화면상의 두포대에 해당한다
현미가 3석, 조가 1석, 콩이 3석이다.
연봉 10
이를 연봉으로 계산하면 백미가 3석, 현미 15석, 조 2석, 콩 5석, 밀 3석이다.
관계자 쌀 만지며 설명 7
이 곡식들을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관계자 인터뷰
쌀은 연가격으로는 67만원 정도 되겠고, 현미는 15가마로서 3백7만원정도, 차조는 두가마로서 96만원
백태는 다섯가마로서 187만원 밀은 세가마로서 59만원정도 되고 연봉으로따지면 그때 당시 가격과 지금
현재의 가격이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현재 가격으로 따지면 720만원 정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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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집 8 (2-3초 후)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시대 관리의 녹봉엔 포도 포함돼 있다.
자로 재고 5
포 1필은 22미터. 정7품 13과의 경우 일년동안 포 한필씩 말린 것들 9
모두 7필의 포를 지급 받는다. 이 포의 가격은 얼마나 될까?
박술녀 인터뷰
한복 디자이너
포가 굉장히 종류가 다양하구요. 굵기도 육안으로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다양하긴 하지만
이렇게 굵은 것은 제가 산 기억으로 보통 아마 한 20만원에서 30만원선이라고 하면요.
이렇게 고운 것은 한 70에서 90에서 100만원 까지
포 팬 7
가장 비싼포를 기준으로 할 때 포의 가격은 7백만원
양곡+ 포 6
결국 정7품 관원의 연봉은 1420만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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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트래킹 6
당시의 녹봉이 관리들의 경제생활에 어느 정도
모현관 보이고 6
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금고 열고 7 (2-3초 보고)
선조시대, 미암 유희춘이 11년 동안의 일상생활
미암일기 줌아웃 30
을 꼼꼼하게 기록한 미암일기다. 미암일기에는 모두 17회의 녹봉을 받은 기록이 보이는데, 그중 규정된 양을
받는 경우는 3분의 1에 불과했다.
(기록 보고)
건물 팬 14
일기를 기록하던 당시 미암은 지방에 살고 있는 가족과 떨어져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하고 있었다.
생활비가 훨씬 더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자료, 기록 보이고 18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미암이 일기에 기록해놓은 녹봉의 사용처다.
녹봉은 주로 노비의 월급을 지급하는데 사용되고 있었다.
(기록 보고)
이성임 인터뷰
조선시대 양반경제사 전공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는데 사용을 하고 있어요 자기 노비이긴 하지만 올라와 있는 노비들한테 매달 일정액을
상여로서 지급하기도 하고 중국에서 서책이라든지 조복이라든지 약재라든지 준비하는데도 상당한 비중을
사용하구요. 또 서울에서 부인이 필요한 단자라든지 명주라든지 이러한 사치품을 사들이기도 하구요
나무 틸다운 15
조선시대 양반들은 대부분 자신의 토지에서 거둔 수확으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녹봉은 그들의 경제생활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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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6]
(녹 소품 쌓아두고)
종7품 관리가 일년중 겨울에 받았던 녹이 여기에 있습니다.
겨울에 받는 녹은 다른 계절에 비해서 양이 적은 편인데요 현미가 4섬. 콩이 2섬. 베가 1필입니다.
보통 가족과 노비를 합해서 식솔들이 10여명이라고 할 때 딱 0개월을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그런데 생활비라는 것이 먹는데에만 드는 것이 아닙니다.
책도 사봐야 하고 옷도 사야 하고 제사도 지내야 하고 손님도 접대해야 하고 , 여기저기 드는 돈을 감안할때
조선시대 관리의 급료가 무척 작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이런 의문을 품으시는 분들이 계실겁니다.
왜 조선시대 양반들은 녹도 얼마 받지 못하는 관리가 되기 위해 그렇게 과거 공부에 매달렸을까 하고 말입니다.
신분사회인 조선시대에서 관리가 되는 것은 양반신분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한 집안이 4대에 걸쳐 관리에 나서지 못하면 더 이상 그 후손들은 양반신분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품계석 차례로 서고, 그 사이를 지나며)
조선시대 관리의 품계는 종9품에서 시작 정1품까지 올라갑니다.
정9품은 오늘날의 9급공무원에 해당되겠죠.
종7품은 요즘으로 치면 행시에 합격한 5급공무원에 해당합니다.
종 2품은 차관, 정 2품은 장관 그리고 정 1품은 지금의 국무총리와 같은 관직입니다.
입조일기를 쓴 조중회는 종7품에서 시작해서, 정2품 병조판서까지 오르는데 45년이 걸렸습니다.
참으로 긴 세월이 아닐 수 없는데요.
그나마 문과 급제자의 약 25%만이 청요직이라고 부르는 주요관직에 오를 수 있었으니 예나 지금이나 승진이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인사고과를 어떻게 매겼을까요?
관리의 인사를 왕이 단독으로 처리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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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조선시대에는 엄격한 인사관리제도가 있었다]
입조일기 10
조중회의 입조일기는 조선시대의 관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임용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름들 12
관리의 임용시기가 오면 신하들은 회의를 거쳐 세명의 후보를 추천한다. 이중에서 한사람을 왕이 낙점하는
것이다.
그래픽 21 (3-4 초후)
조중회가 가주서의 후보명단에 올랐을때의 기록은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보통 후 보명단은
적격자 순으로 올리는데 왕이 신하의 의견을 존중해 첫 번째 인물을 낙점한 것이다.
신병주 인터뷰
조선시대의 어떤 관리 임용에 있어서는 국왕이 전권이 행사한다기 보다는 결국은 어떻게 보면은 하나의 여론이
될 수 있겠죠.
여론을 중시했고 거기에서 인사의 하나의 검증시스템이 일부 있었다는 것을 의미를 합니다.
그리고 검증된 인사를 하나만 올리는게 아니라 최소한 세명을 올리게 함으로써 그것을 왕을 중심으로 논의가
되어서 한사람을 선택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어떻게 보면 안전한 관리의 임용이 이루어졌다 볼 수 있습니다.
책 그래픽 20
관리들에게는 매년 6월과 12월 두차례의 인사고과가 시행됐다.
입조일기에 의하면 인사고과는 상중하로 매겨졌는데 열차례 고과에서 모두 상을 받아야 한품계 승진할 수 있다.
경국대전 분경 21
조선시대 인사관리가 얼마나 엄격했는지를 알 수 있는 조항이 있다.
바로 인사청탁을 금지하는 분경 금지법이다. 이를 어길시엔 곤장 100대 또는 3천리 유배라는 엄벌에 처해졌다
신병주 인터뷰
분경이라는 말은 원래 분추경리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즉 이익을 쫓아서 분주히 쫓아다니는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분경이라는 말은 고려시대서부터 계속 나왔던 풍습인데 어떻게 보면 권세가라든지 왕의 친인척을
쫓아서 이 자신의 이권이라든가 문제를 청탁하는 ,오늘날로 치면 로비의 대표적인 형태입니다.
경국대전에 글씨들 20
인사비리를 막기 위해 분경 대상도 확대되는데 정3품 이상의 당상관 , 인사권을 쥐고 있는 승정원의
이방 병방 승지, 그리고 판결권을 쥐고 있는 사헌부 등에서 일하는 관리 집에 사사로이 드나드는 것을 금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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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트래킹 7
분경금지뿐만이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탄핵활동도 활발했다
반구정 팬 5 (2-3 초후)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한 반구정은 황희정승이
사당 외경 4
여생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영정 줌인 16
조선조기의 명재상이자 청백리의 표상으로 잘 알려진 황희 정승. 그는 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무려 18년 동안
영의정을 지냈다.
반구정 보이고 8
그런데 황희정승이 영의정에 오르기전 잠시 관직에서 물러난 일이 있었다.
강 줌 아웃 12
사헌부에 투옥된 한 사람의 감형을 부탁한 일이 드러나 탄핵을 받았던 것이다.
탄핵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루어졌다.
조선왕조 실록 43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된 분경으로 처벌받은 기사는 33건, 탄핵기사는 수만건에 이른다.
그만큼 조선시대는 관리들의 잘못에 대해 엄격했다.
(기사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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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갑 인터뷰
조선왕조실록을 보면은요. 거의 탄핵기사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왜 그렇게 되냐면 그만큼 동료들이라든지 같은 여러 관직군에 있어서 여러 사람들이 제대로 정치를 할 수
있도록 그것을 도와주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탄핵을 많이 하게 되죠.
그래서 오늘날과 같이 그런 탄핵보다는 진정 국가를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 바른 길을 위해서 탄핵을 하는
그런 기사들이 굉장히 많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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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도 틸업, 9
이런 제도속에서 명예롭게 관직생활을 마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궤장연회도첩 열고 5
사궤장연회도첩은 조선시대 관리의 일생에서 가
그림 1 13
장 명예로운 순간을 담고 있다.
영의정 이경석이 은퇴하자 헌종이 이경석의 집으 로 선물을 보낸다.
그림 2 19
왕이 내린 교지를 낭독한 후 이경석에게 선물이 전달되는데,
(의자 타이트에서)
왕의 선물은 의자와 지팡이, 이를 궤장이라 했다
그림 3 8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경석을 위해 왕이 마련해준 축하연이 펼쳐진다.
의자 풀샷 6 (2-3 초후)
왕이 은퇴하는 노신하에게 주었던 궤장은 현재 의자 틸업 8
그 실물이 전해오고 있다. 의자는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접이용으로,
등받이 부분 14
뒤로 기댈 수 있도록 등받이가 비스듬히 누워있고,
(2-3 초 후)
팔꿈치를 괼 수 있도록 고안돼 있다.
궤장 풀샷 16
궤장을 만드는 부서가 따로 있을정도로 조선시대 궤장의 의미는 특별했다.
궤장은 오랜 공직을 마
마친 관리에게 돌아가는 최고의 영예였던 것이다
궤장 풀샷 4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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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7. 클로징]
(가운데 궤장 있다 , MC F. I)
이것이 은퇴하는 신하에게 임금이 내린 궤장입니다.
(지팡이 들어보고)
무척 위엄이 있어보이는 지팡이인데요. 의자에 한번 앉아보겠습니다
(의자에 앉아보고, 팔꿈치 괴고)
비스듬히 누울 수 있도록 만들었군요.
나이든 신하를 생각하는 임금의 마음이 자알 느껴지는 그런 의자입니다.
(의자에서 일어나고)
조선시대에는 관리가 일흔이 넘으면 왕에게 관직에서 물러나겠는 뜻을 밝힙니다.
일종의 정년퇴직인데요. 정2품이상 고위관리를 지낸 신하가 정년퇴직을 할 때 임금은 이 궤장을 내립니다.
지팡이 짚고, 의자에 기대누워있어도 좋으니 왕의 곁에서 좀 더 일을 해달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만큼 조선시대에는 오랜 관직생활을 거친 경륜있는 관리들을 존중했고,
관리들 역시 임금으로부터 궤장을 받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여겼던 것입니다.
(입조일기 글씨 뜨고, 배경에 입조일기 화면 뜨고)
오늘 우리는 조중회가 쓴 입조일기를 통해 조선시대의 관직생활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조선시대의 관리운영시스템이 어떠했는지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인사비리를 최소화하기 위해 아주 엄격한 인사고과를 적용했습니다.
그런 관리 시스템이 있었기에 청백리라고 하는 청렴한 관리가 다수 배출될 수 있었고 ,
궁극적으로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500년이라는 오랜 세월 지속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