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바울 김창식 목사
"나는 우리 주 예수의 종이 된 은혜를 생각하면 하나님께 감사할 것 밖에 없다. ... 여러 곳으로 파송 받아 다니는 중에 이사한 수가 열번이나 되고 교회 없는 곳에 들어가 새로 설립한 교회가 48처요, 여러 교회로 돌아다니며 설교한 수가 125차요, 다른 교파에 속한 교회에 손님으로 가서 설교한 수가 45차인데 설교한 수를 총합하면 170차에 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 조선 안에 감리교회가 있는 곳은 아니 가본 곳이 별로 없게 되었다. 내가 30년 동안 교회에 몸바쳐 일하는 가운데 하루라도 병나본 적이 없고 한 주일도 빠지지 않고 참례하게 된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릴 일이다."
한국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 중의 한 분인 김창식 목사가 말년에 그의 교역 생활을 회고하면서 한 고백이다. 그는 1901년 5월 14일 김기범과 함께 서울의 상동교회에서 모인 선교사 연환회(제17회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들은 일찍이 복음을 받아들인 후 선교사들을 도와 조사로, 전도인으로 여러 해 수고하였으며, 그러던 중에 선교사들의 인정을 받아 4년간 선교사들로부터 신학교육을 받고, 이 연회에서 집사 목사 안수를 받았던 것이다. 1901년 5월호 {신학월보}는 이 사실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감목(D. H. Moore감독)께서는 몇 사람에게 거룩한 집사(deacon) 품(品)을 주실 새 먼저 권면하는 말씀과 경계하는 말을 하시고 시라돈(W. B. Scranton)씨와 조원시(G. H. Jeon)씨와 노블(W. A. Noble)씨가 감목과 같이 성단 위에 서서 강례를 차례로 보시고 기도하고 성품(聖品)받을 사람에게 물어보고 감목께서 김창식 김기범 양씨와 팔월(E. D. Follwell)씨 의원(醫員)에게 거룩한 품(品)을 주시고 기도하였으며, 맥길(W. B. McGill)씨 의원에게 장로 품을 주실새 또한 예문을 읽고 기도한 후에 여러 목사와 감목이 그 머리 위에 손을 안찰하시고 예를 행한 후에 또 기도하였으며, 또 묵시록 7장을 보시고 감목이 연설하여 가로되 직분을 받은 자는 반드시 윗사람의 말을 순종할지니라."
여기서 집사 목사와 장로 목사는 당시 감리교 장정에 의한 목사 직분의 구분이다. 즉 "장정 규칙을 본즉 목사의 성품(聖品)이두 가지 있나니 정품과 종품이니 정품은 장로(長老)라 하며 종품은 집사(執事)라 하니 집사 품 가진 사람이 교례(敎禮)를 다 행할 것이로되 성만찬만 행치 못하며 오직 장로가 성만찬 예행할 때에 도와줄 따름이나라."라고 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이들은 비록 성만찬은 집례할 수 없다는 제한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밖에 설교는 물론 세례와 혼례 등 모든 교회의 예식을 집행할 수 있는 집사 목사직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김창식 목사는 1857년 황해도 수안군 성동면 생금리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11살때부터 16살 때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고, 21살 때까지는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21살이 되던 해에 집을 나와 서울로 올라왔고, 그 후 8년간 돈을 벌어 가며 전국을 방랑하다가 29살 때에야 박노덕양과 결혼하였다. 결혼한 후 얼마 안되어 서양 선교사를 처음으로 만나 보았다. 그는 처음에는 외모와 풍문만 듣고 선교사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1888년 '영아소동'이 일어나 선교사가 아이들을 유괴하게 하여 잡아먹는다는 허황된 소문이 퍼져 서울의 공기가 험악해 지자 그는 이것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는 친지 이무영의 소개로 미국 감리교 선교사 올링거(F. Ohlinger) 집에 사환으로 들어가 5년동안 일했다.
그는 선교사 집에서 일하는 동안 주인 내외의 생활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으나 아무런 불의한 행동을 발견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본받을 만한 사람임을 깨닫고 감화를 받아 그들이 믿고 전하는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였다. 그러자 올링거 목사는 그에게 마태복음을 주며 5장부터 읽으라고 권하였다. 산상설교부터 읽기를 권하였던 것이다. 그것을 열심히 공부하고나자 올링거 목사 내외는 또 성경초등문답이라는 책을 주고 저녁마다 기독교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김창식은 사복음서를 거의 외우다시피 숙독하고, 아펜젤러 등 다른 선교사들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았다. 그가 35세가 되던 해에 올링거 목사가 귀국하자 그는 평양의 개척 선교사로 임명된 감리교 의료선교사 홀(W. J. Hall)을 도와 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93년 가족을 모두 데리고 평양으로 이주하여 홀의사를 도우면서 전도에 힘썼다.
그는 그의 "책임이 중대함을 깨닫고 모든 일을 복음이 가르친대로 행하기를 결심하고 또 평양의 여러 가지 악풍을 개선하여 그리스도의 교훈을 널리 전파하기로 뜻을 굳게 세웠다." 그러던 중 평양기독교인 박해 사건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1984년 5월 그가 받은 박해에 대해서 홀 선교사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그러한 극심한 고문으로 시달리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우리의 형제들을 목격했을 때, 나의 마음은 고통스러웠다. 외아문으로 부터 두 장의 전문이 목요일밤 이후 보내졌으나, 금요일 오후5시인데 아직 풀려나지 않았다.
여러 차례 죽음으로 위협받으며, 감옥에서의 36시간을 보낸 후, 6시에 모두 관찰사에 의해 끌려나와 맞고 풀려났으나, 집으로 오는 도중 내내 돌 팔매질을 당했다. 창식이는 너무 심하게 부상당하여 집으로 오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나는 그의 발 앞에 앉고 싶었다. : 그렇게 예수를 위해서 실신한 순교자를 나는 결코 전에 본 적이 없다."(Rosetta S. Hall, The Life of Rev. William J. Hall, 1897, 276쪽)
그는 그 해에 일어난 청일전쟁 중에도 다른 사람들은 다 피난을 갔지만 평양에 남아 뭇사람의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에 힘썼다. 앞에서 인용한 그의 말년의 고백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잘 이야기해 준다. 그는 1924년에 교역의 일선에서 물러나 의사가 된 외아들 김영진의 보살핌을 받다가 72세를 일기로 1929년 1월 9일 소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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