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분이 미국 개역 표준판(RSV)의 신약 성경 서문을 보신다면 "새 계약(New Covenant)이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New Testament)을 의미합니다"라고 언급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영어에는 언약을 뜻하는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테스타멘트(Testament)와 커비넨트(Covenant)가 그것입니다. 커비넨트는 보통 의미의 언약을 말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같은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그는 하나의 언약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이 언약이란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에서 맺어진 것입니다. 계약은 한편만으로는 가능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둘 혹은 그 이상의 상대와 맺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인간과 두 번의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우리들은 이제 이 두 언약을 비교해 보려고 합니다. 히브리서 8:7에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라고 합니다. 두 언약 모두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는 조건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첫 언약 (옛 계약)
첫 언약은 처음에 아브라함과 맺어졌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에서 다시 맺어졌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본 성경연구를 통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 큰 민족을 이루어 주실 것, (2)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하실 것, (3) 그에게 땅을 주실 것, (4) 이 땅의 모든 족속이 그의 후손으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음을 배우셨습니다(창 12:1-7). 이 언약의 표로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할례 받을 것을 요구하셨습니다(창 17:1-14).
이 언약은 그 후 수 백년 후에 모세의 율법에서 다시 맺어질 때까지 기록으로 남아있지는 않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으로 이루어진 언약을 재확인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해야하는 규칙들을 덧붙였습니다. 그것은 (1) 돌 판에 기록한 십계명(출 20:1-17, 30:27-28)과 (2) 언약서(출 24:7)라 불리는 율법의 기타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오직 유대인에게만 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만 존속하였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맺어진 법이라기보다는 문자적으로 맺어진 법입니다. 유대인들은 규칙적으로 하나님께 동물의 피를 드려 그것으로 그 언약을 세운 것이었습니다(히 9:18-21).
이 옛 계약은 몇 가지 일들을 성취했습니다. (1)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유대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는 것과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하시겠다는 것과, 땅을 주시겠다는 것. (2) 죄의 본성을 드러냈다는 것, 즉 범죄를 더욱 가했다는 것(롬 5:20). (3) 사람들로 하여금 해마다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히 10:3). (4)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새 언약을 맺을 동안까지만 한시적으로 효력을 갖는다는 것, 즉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었다는 것 등입니다(갈 3:19-25).
둘째 언약 (새 언약)
새 언약은 말할 것도 없이 옛 언약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예레미아 선지자는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새 언약을 맺으실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렘 31:31-34). 이 예언은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겠다고 하신 약속을 성취하신 것입니다(창 22:18). 예수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셔서 이 세상 모든 족속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주시는 복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의 내용은 신약 성경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큰 차이점을 든다면 첫 언약이 유대 민족과만 맺어진 것인데 비해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과 맺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새 언약의 우주적인 특성이 갈라디아서 3장 26-29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나 구별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이와 같이 새 언약의 약속은 어떠한 민족이나 남자나 여자나 부자나 빈자나 차별 없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두 언약이 맺어진 방법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옛 언약은 동물의 피로써 언약을 맺었지만 새 언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맺어졌습니다(히 9:11-15). 새 언약은 옛 언약에서처럼 문자적인 언약이 아니라 영적인 법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 3:6)." 예를 들면 옛 언약에서는 살인하지 말라고 하였으므로 만일 형제를 미워하고 마음속으로 멸시한다 하더라도 죽이지만 않는다면 그는 율법을 어긴 것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이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을 범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요일 3:15). 이와 같이 새 언약에서는 단순히 문자적으로 죽이는 것만 금한 것이 아니라 죽이기 이전의 심리적인 상태의 올바르지 못한 관계부터 금한 것입니다. 결국 쓰여진 문자의 법만 지킬 것이 아니라 그 문자 뒤에 숨어있는 영적인 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옛 언약은 죄가 무엇인지 그 본성을 드러낼 뿐이지만 새 언약은 죄를 제거한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납니다. 즉, 옛 언약에서는 죄가 무엇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지만, 새 언약에서는 죄 사함 받는 길을 제시하여 주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새 언약은 옛 언약과 같이 잠정적인 언약이 아니라 영원한 언약입니다. 옛 언약에서는 죄의 본성을 들어내어 가르쳐 주었지만 영원히 용서받는 길은 제시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죄 사함을 받는 방법에 대해서 전 장에서 배웠기 때문에 반복하는 것은 피하겠습니다.
새 언약이 옛 언약을 어떻게 대체하는가?
예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5:17). 그의 죽으심으로 통해 그리스도는 옛 언약을 성취시키셨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의 목적이 완성되었으며, 그 율법은 새 계약으로 대체가 되었습니다.
다음 성경 말씀을 살펴보십시오.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 10:9)."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4,6)."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 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엡 2:14,15)" 이상의 말씀들을 살펴볼 때 우리가 아직도 옛 언약 아래 있다고 아무도 주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위의 말씀들은 또한 안식일 (혹은 토요일)을 지켜야한다는 주장이 그릇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명령은 모세 율법중의 일부였으나 안식일을 포함하여 옛 언약을 지켜야한다는 언급은 신약에서 결코 되풀이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동물 희생을 드려야하고 이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의무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드리는 매주 첫날도 안식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날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날이라고 부릅니다(계 1:10).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의 구원은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십자가 달렸던 강도는 세례를 받지 않고도 구원을 얻지 않았는가?" 그 강도가 세례를 받았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예수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그는 이 약속을 옛 언약이 아직 유효한 때인 그가 죽기 전에 하셨습니다.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히 9:17)."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 전에 하신 약속이지만 그리스도의 죽음 후에 그 효력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새 계약은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영원한 언약"입니다(히 13:20).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그는 우리에게 하늘나라에 마련한 영원한 집에 살게 하실 것입니다. 복음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이 계약을 성취하시는지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습니다.
출처:해미교회
---------------------
소금(ἅλας, 할라스)은 하나님의 창조물질 중에 하나입니다. 빛이나 물처럼 동물에 꼭 필요한 물질로서 이 땅에 어마어마한 양이 존재합니다. 암염(巖鹽) 상태로 존재하는가 하면, 흙이나 물, 동식물의 몸, 어디든지 소금이 있습니다. 바닷물의 소금함량이 3.33%밖에 되지 않지만, 그 양을 측정(測定)해 보면, 450만 입방마일(약1,875만 입방km)의 소금덩어리가 생긴다고 합니다. 이를 다시 환산하면, 유럽대륙 14개 반을 만들 수 있을 만큼이라고 하니 실로 어마어마한 양임에 분명합니다.
소금의 화학명은 염화나트륨이며 분자식은 NaCl입니다. 소금은 나트륨과 염소가 동일한 비율로 결합되어 이루어지는 정입방체의 결정이지만, 대체로 불순물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 그 결정이 불규칙하고 색상도 다양합니다. 소금을 영어로 “salt”라고 하는데 이는 라틴어의 “sal”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소금농도 0.9%는 생명의 기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기가 자라는 엄마 뱃속의 양수, 사람의 피, 세포, 링거액의 소금농도가 모두 0.9%라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체내 염분 균형이 깨지면 각종 병균으로 부터 공격받을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병원에서 환자에게 링거 주사부터 놓는 이유도 이와 같은 원리입니다. 소금이 몸에 들어오면 위액의 염산이 되어 살균작용이나 소화작용을 돕고, 피와 섞여 몸 구석구석을 돌면서 세포 속의 노폐물을 새 물질로 바꾸어 신진대사를 촉진하기도 합니다.
인류가 소금을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000년경으로 추정됩니다. 유목생활을 하던 원시시대에는 우유나 고기를 먹음으로써 그 속에 들어있는 소금 성분을 자연스럽게 섭취할 수 있었지만, 점차 농경사회로 바뀌어 식생활이 곡류나 채소를 위주로 하게 되면서 따로 소금을 섭취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따라서 소금의 생산지인 해안이나 암염, 염호가 있는 지역에는 자연스럽게 수렵민이나 농경민이 그것을 얻기 위해 모여들었고 교역의 중심지로서 점차 국가 간의 교역로가 발달되었습니다.
소금은 고대국가인 중국, 이집트, 페르시아 등 여러 나라에서 행정적으로 소금의 생산 및 공급을 통제했으며, 생활필수품인 소금을 화폐로 사용했습니다. 로마에서는 군인이나 관리의 봉급을 소금으로 주었는데, 이를 “병사에게 주는 소금돈”이라 하여 라틴어 “salarum”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급료를 샐러리(salary)라고 하는 것은 그 일의 잔존자취(remaining vestige)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고 하셨습니다. 소금(ἅλας, 할라스)은 음식의 맛을 조절하는 양념으로 사용되었고, 종교의식에서 거룩한 제사, 즉 소제(레 2:13)와 번제(겔 43:24)의 예물 위에 뿌리는 데도 사용되었으며, 변하지 않는 성질 때문에 하나님과의 영원불변한 언약을 맺거나(민 18:19) 충성을 맹세하는 과정에서 징표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피우는 향을 만들 때도 들어갔고(출 30:35), 새로 태어난 아기를 위해 의학적 목적으로 소금을 뿌렸으며(겔 16;4), 방부제로 쓰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필요성에 의해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주로 비유적인 측면에서 소금의 역할과 가치를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는 것에 대한 언급은(눅 14:34-35) 흔한 이야기지만 제자들의 희생을 강조하는(막 9:49) 매우 중요한 의미(意味)를 지니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인생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찾고, 세상에서 역동적인 사랑을 실천하며 부패를 막아내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안 됩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었다는 것은 나트륨(염분)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로서 소금으로서의 그 효력을 잃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소금이 바보(못 쓰게)가 된 것을 말합니다. 소금이 바보가 되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입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자면 소금이 그 맛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염화나트륨(NaCl)은 완전한 화합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소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소금은 어린아이처럼 작고 미미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섬김은 자기희생, 겸손, 사랑,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김, 절제와 경건 등의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크리스천은 이 땅에서 소금의 직무를 감당하는 자들입니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
세상을 이기게 하는 소금 언약
그리스도인의 배타성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물과 기름처럼 보입니다. 경건한 사람일수록 세상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육신의 쾌락이기 때문에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그런 세상 사람들의 요구를 사단의 유혹이라고 생각하고 피하려고 합니다. 점점 그들과 거리가 생기고 마침내는 그들과 어울리지 못해서 높은 담이 생기고 맙니다. 그렇다면 경건한 생활을 위해서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은 피할 수 없는 것일까요?
성경은 여러 곳에서 믿지 않는 자들과 일정한 거리를 둘 것을 요구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죄에 물들지 않도록 세상을 멀리하고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가 그들 속으로 들어가 그 곳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이중적인 말씀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를 우리는 고민해야 합니다. 논어(論語)에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자로(子露)편에 나오는 말로 남과 사이좋게 지내기는 하나 무턱대고 한데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조화를 이루되 부화뇌동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공자는 군자를 화이부동(和而不同) 하는 사람, 소인을 동이불화(同而不和)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화는 남의 의견을 잘 조화하는 것이고, 동은 맹목적으로 남의 의견을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제나라 경공이 사냥에서 돌아올 때 간신 양구거가 수레를 몰고 나아가 경공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를 보고 경공이 양구거를 칭찬하자, 재상인 안영은 이를 국끓이기에 비유하여 양구거의 행실을 비판하였습니다. 즉 요리사가 고기 국을 끓일 때 싱거우면 소금을 넣고, 짜면 물을 붓듯이 임금이 하는 것에 대해 잘못이 있으면 바로 잡아 주어야 하는데 양구거의 행동은 짠 국에 소금을 더 넣고, 싱거운 국에 물을 붓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하되 결코 그들의 행실을 본받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마 23:3).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화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범죄하게 되면 그 범죄한 손과 발을 찍어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애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막 9:50)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말씀처럼 소금을 가지고 그들에게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소금은 방부제를 의미하는데 썩지 않기 위해서 즉 죄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는 소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소금에는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 이 소금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구약에서 소금은 하나님의 언약을 의미합니다. 이 사실을 레위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레 2:17).
이 소금 언약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하나님이 하신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들어 올려 나 주에게 바친 거룩한 제물은, 내가 너와 너에게 딸린 아들딸들에게 영원한 분깃으로 모두 준다. 이것은 너와 너의 자손을 위하여 주 앞에서 대대로 지켜야 하는 소금 언약이다”(민 18:19)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아론에게 한 말씀입니다. 아론은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는 역할이 주어졌고 그와 자손들에게는 땅의 분깃이 없으며 오로지 하나님이 그들의 분깃입니다. 그 분깃에 대한 약속이 바로 소금 언약입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 역시 아론의 직무인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벧전 2:9). 그러나 이 직무는 구약의 율법에 의한 아론의 직무와는 다른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새로운 제사장이신 주님으로부터 위임을 받은 믿음의 제사장 직무입니다. 아론이든 멜기세덱이든 제사장의 분깃은 여호와입니다. 그 사실을 소금으로 확정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소금을 두고 화목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품고 화목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주님은 우리들의 대제사장이 되어서 화목제물이 되었듯이 우리들도 그렇게 해야 하는 의무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들에게는 영원히 누릴 수 있는 분깃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과 화목하기 위해서 나아간다면 어떤 불이익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손해 볼 일이 결코 없을 것이라는 약속이 소금 언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 올려 바친 제물은 곧 아론과 그의 자손들에게 영원한 소유가 되어 풍족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듯이 우리가 소금을 품고 나간다면 우리들에게는 어떤 손해도 입지 않고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보장해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이 아니냐”(대하 13:5)
하나님은 다윗의 자손인 우리들에게 이 세상을 소금 언약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믿음으로 소유한 보증은 곧 소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속에 소금을 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으며, 그것을 우리들에게서 빼앗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요 10:28)
경건한 그리스도인일수록 세상에서는 ‘쪼다’가 되는 까닭은 목회자들의 부족한 가르침이 한 몫을 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경건을 오로지 교회 안으로만 묶어둔 편협한 가르침이 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주일에는 여행이나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는 절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든 저렇게 변하든 상관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도피성으로 명동 성당을 찾는 이유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세상의 소리에 귀를 막고 그들과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 교회에 대해서 세상은 외면하는 것은 아닙니까? 세상과 어울린다고 해서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만 두려워했지 세상에 영향을 주는 것에 대해서 자신감이 없는 것이 아닙니까? 목회자들은 세상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대학을 다니고 그리고 목사가 됩니다. 거친 세상과 맞선 경험이 적은 그들에게 어떤 면에서 세상은 두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물들어 있습니다. 이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변화시키고 정복할 능력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것을 전략적으로 전술적으로 개발하여 세상에 들어가되 그들에게 물들지 않는 요령들을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침투하는 전술 전략을 개발하려는 실용적 신학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으로부터 소금 언약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에 소금을 품고 그들에게 나가 화목할 것을 주님은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경건한 쪼다가 되어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이 말씀처럼 우리가 세상에 나가게 되면 온갖 환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술자리의 유혹, 부정한 일에 관여해야 하는 강박,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요구 앞에 서게 됩니다. 이것을 극복하기란 환난을 겪는 것만큼이나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 우리가 담대할 것을 주님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담대함이란 그냥 배짱을 부리거나 오기를 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세상에서 더욱 고립되고 왕따만 당할 뿐입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우리가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이 우리의 요구를 듣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소금 언약으로 이미 약속하신 것이며, 그 약속은 제사장 직무 속에서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즉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비결은 우리 각 사람이 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감당하려는 마음의 동기가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화목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우리가 세상에서 제물이 되고자 한다면 주께서 세상을 이길 믿음과 그에 맞는 전술 전략을 상황에 맞도록 주실 것입니다.
주일마다 교회에서 대표기도를 할 때 항상 하는 말이 세상과 짝해서 죄를 지은 것을 용서해줄 것을 구하는 내용입니다. 이 얼마나 처량한 넋두리입니까?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어디로 가고 주마다 세상에서 진 죄만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경건한 쪼다짓’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입니까?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우리의 믿음은 바로 소금 언약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약속에 대한 믿음만 있다면 세상을 넉넉히 이길 것입니다. 그 소금 언약은 곧 우리가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받은 주의 군사들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우리를 어디로 보내시는 것입니까? 교회롭니까? 아니지요. 세상이 아닙니까?
출처: http://cafe.Godpeople.com/healinghouse
글 / 장봉운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