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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방인』은 카뮈 생전에 완성되고 출판된 첫 번째 소설이다. 프랑스에서 1942년 5월 19일 판매되기 시작한 이 작품에서 뫼르소는 어머니의 사망을 전하는 전보를 받고, 장례를 치르고, 아랍인을 총으로 살해하고,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는다. 카뮈의 ‘부조리 사상’이 『시시포스 신화』라는 철학적 에세이와 더불어 『이방인』이라는 본 소설에서 제시되고 있다.
작가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1913년 ~ 1960년)
발표 1942년 간행
2. 작품해설
카뮈의 『이방인』은 그가 알제리에서부터 구상하기 시작해 1940년 6월에 집필을 완료했다고 알려져 있다. 프랑스가 전쟁에 패했을 때 카뮈는 클레르몽페랑 시로 피난을 가면서 타고 간 자동차의 트렁크 속에 『이방인』 원고를 싣고 갔는데, 그 원고는 그 후 느리고도 어려운 길을 거쳐 마침내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그리고 생전의 카뮈는 스스로 가장 ‘부조리한 죽음’이라고 말했던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이방인』은 “오늘, 엄마는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여 곧바로 “아니 어쩌면 어제였을지도 모른다.”라는 서술이 뒤따르는 간결한 문체와 밋밋하고 건조한 문장들이 독립적으로 병치되어 있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방인』은 ‘자기 자신과 사회에 대해 낯설게 느끼는 자’ 혹은 ‘사회가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하는 자’이고, 보통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괴팍한 인간’ 뫼르소가 등장한다.
주인공 뫼르소는 보통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괴팍한 인물로 비춰지기도 한다. 하지만 뫼르소는 어머니의 사망을 전하는 간결한 전보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보여주었을 것처럼 뒤이을 의례화된 장례절차에 따랐으며, 어떤 면에서는 보통사람과 마찬가지로 무난히 장례를 마쳤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슬픔이 외부로 표출되든 그렇지 않든 어머니의 죽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동반한다. 다만 뫼르소는 그 슬픔을 눈물이라는 매개를 통해 외부의 타인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여러모로 자신의 심리상태, 내면의 모습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진술했다. 요컨대 『이방인』의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에 의해서 유죄를 선고받았다고 할 수 있다. 작품 속 검사의 시각에서 보자면 그런 인간은 이미 살인의 마음을 품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며, 결국 법정의 판단은 그런 마음을 품은 모든 독자들에게 유죄를 선고할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카뮈의 『이방인』은 어머니의 죽음, 아랍인의 죽음, 뫼르소에게 선고된 죽음을 통해서 인간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뫼르소의 거짓 없는 자기 드러내기를 통해서 카뮈는 인간의 삶에서 ‘이방인’이었던 인간 존재가 부조리를 자작하도록 이끌고 있다. 정상으로 올려놓으면 다시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마는 바위 덩어리를 다시금 묵묵히 밀어올리기 위해서 아래로 내려가는 ‘시시포스’처럼, 『이방인』의 뫼르소는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우리 인간을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3. 등장인물
뫼르소 : 주인공으로서 ‘부조리’라는 개념을 구현하고 있는 정직한 인물.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 거주하는 젊은 사무원.
마리 카르도나 : 뫼르소가 전에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타이피스트.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바로 다음날 상중의 뫼르소와 밤을 함께 보낸다.
레이몽 생테스 : 뫼르소와 같은 층에 사는 이웃. 뫼르소에게 친구가 되어 달라고 제안하고 자신을 대신에 편지를 써주기를 부탁하며, 뫼르소와 마리를 문제의 일요일에 자신의 친구의 별장으로 초대하여 뫼르소의 아랍인 살해의 단초를 제공한다.
4. 작품 줄거리
L’Étranger
『이방인』은 전체 2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는 여섯 개의 장으로, 2부는 다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
1장. 알제에 거주하는 젊은 사무원 뫼르소는 마랭고의 양로원으로부터 엄마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를 받고서 양로원으로 간다. 그리고 양로원 원장과의 대화, 문지기와의 대화, 문지기가 뫼르소에게 밀크 커피를 제공, 끝날 것 같지 않은 밤샘이 이어진다. 다음날 장례식을 마치고 알제로 돌아온다.
2장. 토요일이다. 잠에서 깨어나자 뫼르소는 해수욕을 하러 가고, 그곳에서 마리 카르도나를 만나 그날 저녁 영화관에 가고 함께 밤을 보낸다.
3장. 월요일. 뫼르소는 층계에서 살라마노 영감을 만난다. 그 영감은 같은 층에 사는 이웃이고, 그의 옆에는 구박덩어리 개가 항상 함께 있다. 그리고 같은 층에 사는 다른 이웃인 레이몽 생테스를 만난다. 그리고 레이몽과 친구가 된다.
4장. 한 주가 흘러간다. 토요일에 마리와 해수욕을 한다. 증인이 되어 달라는 레이몽의 부탁을 들어주고, 살라마노 영감이 방안에서 우는 소리를 듣는다.
5장. 레이몽이 한 친구의 알제 근처에 있는 조그만 별장에서 오는 일요일을 보내자고 뫼르소와 마리를 초대한다. 레이몽은 하루 종일 자기의 옛 정부의 오빠도 낀 한 패의 아랍인들에게서 미행을 당했다.
6장. 일요일에 뫼르소, 마리, 레이몽은 별장으로 간다. 그곳 해변에서 뫼르소는 아랍인을 권총으로 죽인다.
제2부
1장. 예심판사의 여러 차례의 심문이 이어진다. 예심이 11개월 동안 진행된다.
2장. 뫼르소의 감옥 생활, 마리의 면회와 감방에서의 뫼르소의 관심사들이 소개된다.
3장. 다시 여름이 되고, 재판이 시작된다. 심문을 통해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것, 마지막으로 어머니 시신을 보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 담배를 피우고 밀크 커피를 마셨다는 것이 알려진다.
4장. 뫼르소는 마치 이방인처럼 법정에 앉아 있다. 사람들이 그에 대해 말을 하면서도, 결코 그에게 의견을 묻지 않는 것이다. 검사의 눈에는, 뫼르소가 범죄를 사전에 계획했다는 것이다. 검사는 피고의 ‘냉담함’을 고발하면서 여러 사실들을 추적한다.
5장. 뫼르소는 형무소 부속 사제의 면회를 계속 거절하다가 결국 사제와의 면회를 하게 된다. 이후 뫼르소는 자신의 사형집행을 인정한다.
5. 작품 속의 명문장
“오늘, 엄마는 죽었다.”
이 번역문은 『이방인』 원문의 첫 문장, “Aujourd'hui, maman est morte.”(오주흐뒤, 마망 에 모흐뜨)를 옮긴 것이다. ‘죽었다’, ‘죽는다’라는 동사에 앞서는 ‘엄마는’이라는 주어의 자리에 모든 인간은 예외가 없다는 것을 카뮈는 말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방인』에는 죽음이 여럿 나온다. 먼저 엄마의 죽음, 아랍인의 죽음, 그리고 뫼르소의 선고된 죽음이 뒤따른다. 이 죽음들은 자연사, 살해, 그리고 법에 의한 죽음의 선고라고 할 수 있다.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숙명에 직면한, 아니 엄마의 배에서 나온 인간 존재 자체의 실존에서 엿보이는 ‘부조리’는 죽음에 대한 성찰로 이끌고 있다.
박완규의 책읽기 세상읽기] (42) ‘이방인’ - 소외된 인간상
기사입력 2020-01-16 14:58:07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세상을 낯설게 여기는 주인공 뫼르소의 이야기이다.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한 이 소설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는 구절로 시작한다. 북아프리카의 알제에 사는 평범한 직장인 뫼르소는 한 통의 전보를 받고 양로원을 찾아가 장례식에 참석한다.
“나는, 언제나 다름없는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이제 엄마의 장례가 끝났고, 나는 다시 일을 하러 나갈 것이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뫼르소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은 그에게 파리의 사무실에서 일할 것을 제안한다.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사장은 그에게 삶의 변화에 흥미를 느끼지 않느냐고 묻는다.
“나는, 삶이란 결코 달라지는 게 아니며, 어쨌건 모든 삶이 다 그게 그거고, 또 나로서는 이곳에서의 삶에 전혀 불만이 없다고 대답했다.”
연인인 마리와의 관계도 이런 식이다.
“저녁에 마리가 찾아와서,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마리가 원한다면 우리가 결혼할 수도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말했던 것처럼,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뫼르소는 한 아파트에 사는 이웃 레몽에게서 친구의 바닷가 별장에 함께 가자는 제안을 받고 수락한다. 해변에서 레몽의 옛 애인 때문에 아랍인들과 싸움이 벌어진 뒤 그들 중 한 명이 비스듬히 누운 채로 칼을 뽑아들자 뫼르소는 주머니에 있던 레몽의 권총을 그러쥐었다.
“빛이 강철 위에서 반사되었고, 번쩍하는 긴 칼날 같은 것이 되어 내 이마를 쑤셨다. 그와 동시에, 눈썹에 고여 있던 땀이 단번에 눈꺼풀 위로 흘러내려서 미지근하고 두꺼운 막으로 눈꺼풀을 뒤덮었다. 내 두 눈은 이 눈물과 소금의 장막에 가려서 캄캄해졌다.”
그 순간 방아쇠를 당겼다.
“나는 땀과 태양을 흔들어 털었다. 나는 내가 대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었던 어느 바닷가의 그 특별한 침묵을 깨뜨려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된 그는 엄마의 장례식에서 냉담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법정에서는 정작 살인죄보다는 그가 패륜아라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아마도 나는 엄마를 사랑했겠지만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거였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많게건 적게건 바랐던 적이 있는 법이다.”
재판장이 아랍인을 살해한 동기에 대해 묻자 그는 태양 때문이었다고 답한다. 사형 선고를 받은 뒤 그를 찾아온 사제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될 테니 이제라도 죄의 짐을 벗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죄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남들이 나에게 가르쳐주었을 뿐이었다. 나는 죄인이었고, 죄의 대가를 치르고 있었고, 나에게 그 이상을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뫼르소는 세상의 기호들이나 게임의 법칙, 다시말해 살아가는 법에 서툴다는 게 다른 사람들에게 문제가 된 것이다.
‘이방인‘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끝을 맺는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주고 희망을 비워버리기라도 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이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이방인’의 미국판 서문에서 카뮈는 이 소설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 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는 한마디로 요약한 바 있다고 했다.
“나는 다만, 이 책의 주인공은 유희에 참가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은 자기가 사는 사회에서 이방인이며 사생활의 변두리에서 주변적인 인물로서 외롭게, 관능적으로 살아간다.”
문학평론가 김화영은 ‘유희’에 대해 “사회적인 관습에 따라 연출하게 되는 일종의 ‘연극’, 사회생활의 필요에 의하여 하게 되는 거짓말 따위를 의미한다”고 했다.
카뮈의 ‘작가수첩 I’에는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결혼, 출세 등등)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했는데 패션 잡지를 읽다가 문득 자신이 얼마나 자신의 삶(패션 잡지에서 말하는 바로 그러한 삶)과 무관한 존재였는가를 알아차리게 되는 사람”이란 구절이 있다. 장차 소설 제목이 되는 단어인 ‘étranger’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이 대목이 ‘이방인’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어 ‘étranger’는 여기서는 ‘무관한’으로, 소설 제목으로는 ‘이방인’으로 번역된다. ‘낯선’, ‘생소한’, ‘국외자’ 등의 의미도 있다.
철학자 이정우는 저서 ‘탐독’에서 ‘이방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의미가 완전히 발가벗겨진 세계, 그 세계에서 인간은 완벽한 무의미 앞에 서게 된다. 그 세계에서 인간은 이방인이다. … 거기에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자신의 의미, 세계의 의미, 삶의 의미를 다시 써야 하는 것이다. ‘이방인’은 존재론적 의식의 통과의례이다.”
그가 말한 대로 무의미 앞에 서서 세계와 삶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쓰는 것이 ‘이방인’이 남긴 숙제이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해볼 만한, 그리고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부조리한 세상에서 의미를 찾아내면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소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첫댓글 이방인/장혜령
빛은 잘 들어옵니까
이상하지.
세입자가 관리인에게, 그리고
우리가 죄수에게 묻는 질문이 동일하다는 것은
불 꺼진 독방의 내부는
누군가 두고 간
불펜 잉크처럼 캄캄하다는 거,
의도 없이도 흐른다는 거
처음 타본 비행기와
어깨가 기울어진 한 남자의 뒷모습
그의 휘파람을
존경한다고 교도소장은 말했다
크고 두터운 손으로, 아버지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래, 바람은 불어옵니까
진주식당의 여자는 국수 대신
빨래를 솥에 넣었고
예수기도회의 붉은 자전거 옆에는
북경반점 오토바이가
모든 질문에
전학생의 시점으로
생각했지
경도와 위도 선상에서
초조해질 때마다
별들 사이에 있다는 건, 더 확고해졌으니까
동료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삼키는 연습을 하는
수배자처럼
배후가 없는 비밀이 몸속을 떠돌고
깡통 속엔
씹다 뱉은 성냥들이
붉게 차오르곤 했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더 말할 것은 없습니까
들판 같은 책상 위로
캥거루 한 마리가 뛰어간다
빛은 잘 들어옵니까
바람은 불어옵니까
이상하지,가
둘 수 없는 것의 안부를 묻는 일
어디선가
새들의 농담이 들리고
그의 배후를 바라본 것은, 저 나무가 유일하다
이방인 / 김영승
버스비 900원
버스 타서 죄송하다고
百拜謝罪하며 내는 돈
화장실 100원
오줌 눠서 죄송하다고
백배사죄하며 내는 돈
아들 고등학교 신입생 등록금 사십오만 구천오백팔십 원
학교 다녀 죄송하다고
백배사죄하며 내는 돈
상갓집 부조금 3만 원
살아 있어 죄송하다고
백배사죄하며 내는 돈
공중전화 100원
말 전해서 죄송하다고
백배사죄하며 내는 돈
돼지고기 한 斤 8,000원
처먹어서 죄송하다고
백배사죄하며 내는 돈
서러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을 수 있는 것이다
恨이 있기 때문에
含笑入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방인 / 김은상
불멸이 오고 불멸이 떠나가는 순간을
나는 아그네스라 부른다.
눈보라가 망쳐버린 공중,
그곳에만 무지개는 아름다웠고
달의 하현엔 늘 폐허가 고여 있었다
그대라는 오해를 사랑하였다.
길흉에 대한 예감은 지도가 아니었으므로
순록은 기별 없는 유목을 마쳤다.
신앙도 신념도 잃은 지 오래인데,
버드나무 안에 우물을 그려두었다.
하루 종일 추운 공중을 바라보다가
사는 일이 불륜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을 모든 이별을 위로하기 위해
바람이 불어온다 쳐도
동쪽은 늘 똑같은 동쪽,
누구나 한번쯤 그대를 기다린 적 있다.
번개처럼 천둥처럼 잉태한 아그네스를
나는 사치라고 말한다.
눈보라를 걸어 귀향한 순록의 울음,
거울 속의 불면을 간질이고 있다.
이방인의 낙타 / 김승희
이방인은 이방인이어서
고향이 없다
이방인은 고향에서도 이방인이기에
고향도 타향이고 타향도 고향이다
그 역(逆)도 가하다
이방인은 주소가 없고
이방인은 논도 없고 밭도 없고 과수원도
저수지도 없고
그냥 점, 이방인은 하늘만 쳐다본다
땅에 재산이 없으니
모든 재산은 하늘에 있도다‥
점이 선이 되는 순간을 하염없이 기다리지만
하늘도 그의 소유는 아니다
소유가 아니어도 하늘을 갖는 것은 비난할 일은 아니다
광화문 네거리에 나가서
저것은 내 하늘이다!라고 외쳐보라
아무도 너를 제지하지 않는다
경찰도 군인도 검찰도 의사도 최루탄도 아무도 너를
구속하거나 심판하지 않는다
그것을 보면 하늘이 얼마나 값싼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무가지 신문처럼 지하철 입구에 쌓아놓아도 손이 안 간다
이방인! 하고 부르면
나는 새가, 하늘의 구름이, 달리는 시냇물이 손을 흔든다
점이 선이 되려는가
이방인에게도 그만큼의 연고는 있다
광화문 네거리 모퉁이에서 커피를 마시고
베네치아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리고
뉴욕 맨해튼 예일 클럽에서 시 낭독을 하기도 한다
맨해튼의 고층 빌딩 아래서
저것은 나의 하늘이다!라고 외쳐도
아무도 나를 체포하지 않는다
(아래 계속)
(위에서 이어)
아무도 나를 체포하지 않는다
나는 고발당하지도 않는다
이방인은 현지의 위조지폐,
구름의 언어를 가진다
오직 하늘만이 그의 자취를 안다
그림자처럼 엑스레이 사진처럼
초음파 영상처럼 뿌연 점들이 먼지로 부유하는 환각,
존재의 면적, 김환기나 이성자의 점화(點畵),
이방인들만이 점화를 그리는데
괜찮은 것일까? 점이 점이어도, 점이 선이 되지 않아도
정말 괜찮은 것일까?
자전을 하면서 공전을 해야 좋은 삶이라는데
살기는 살았다
하늘의 낙타
이방인은 구름으로 점점이 사막의 시를 쓰며 간다
이방인/ 박소란
먼 곳에 사는 네가 사진을 한장 보내주었다
자, 선물!
초록이 매끈하게 펼쳐진 이국의 공원이 거기 있었다
비현실적인 풍경이네, 비현실적이라
좋아하고 답장을 보냈다
그곳을 한참 들여다보니 조그만사람이 보이고
그는 관광객인가보다
더 조그만표지판을 유심히 살피고 있군
좋은 곳에서 좋은 구경을 했으면
좋은 사람을 만나 좋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비현실적인
그 길을 나 대신 오래 걸었으면
걷다 지치면 공원 모퉁이 벤치에 앉아 오래 쉬었으면
눈을 감고
눈을 감고
어쩐지 위엄이 서린 커다란 나무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군
좋은 삶을 점 쳤으면
지금쯤 넌 잠이 들었겠지 거기는 한밤중일 테고
공원도 문을 닫았을거야
아직 잠들지 못한 사람들이 새카만 꾸러미를 움켜쥐고 공원 입구를 서성인대도
공원 뒤편 어디선가 총성이 울리고 한 떼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병원으로 이어진 길에 여러 대의 앰뷸런스가
늘어선대도
좋은 꿈을 꾸었으면
어김없이 나는
아침을 맞는다 YTN을 보며
흰 우유에 달달한 시리얼을 말아 입에 넣고 우물거린다
반쯤 지워진 간밤의 악몽을 연하게 내려 마신다
(아래에 계속)
(위에서 이어)
문을 나선다
문밖 환한 풍경이 나를 당기고 거리는 하나같이 깨끗하군 사람들은 하나같이 친절하군
누군가 다가와 웃으며 말을 건다
웨어 아 유 프롬?
좋은 꿈,
좋은 꿈을 꾸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