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데로 나아갑시다
히브리서 6:1-3 2024/03/17 사순절 5주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6: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평안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 자녀와 이웃들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라는 독일 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이 ‘신은 죽었다’라고 체념하는 허무주의자들을 향하여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신은 어디에 있지?’ 그는(허무주의자) 부르짖었다.
나 너희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가 신을 죽여 버렸다’
‘너희와 내가! 우리 모두는 신을 죽인 자들이다!’
(중간생략)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여 버렸다!
어떻게 우리는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이 글에서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하나님에게 등 돌린 허무주의자들을 향한 고발이었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허무주의자들을 향하여 좀 과격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신을 죽여 버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기대하지 않는 불행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눈 먼 사람 둘이 예수님을 뛰 따라 가면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새)마9: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시는데, 눈 먼 사람 둘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치면서 예수를 뒤따라 왔다.
그러자 우리 주님이 눈 먼 사람 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새)마9:28 예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셨는데, 그 눈 먼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어떻습니까?
허무주의로 가득한 이성의 시대, 무신론으로 가득한 불신의 시대,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마도 대부분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하실 수 있으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막9:22)
이것이 새로운 변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창조적 변화 곧 하나님의 구원을 꿈꾸지 못하는 이성의 시대 살아가는 이들의 답변이자 핑계일 것입니다. ‘하실 수 있으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 교회가 고백해야할 아주 분명하고 선명한 대답이 하나 있습니다.
눈 먼 사람 둘의 증언인데 바로 이 말씀입니다.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눈뜨고 살아가면서도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는 영적 장님들을 향하여 이렇게 증언하십시오.
1. 이 세상 어딘가엔 남이야 알든 말든
착한 일 하는 사람 있는 걸 생각하라
2. 이 세상 어딘가엔 청빈을 감수하고
덕행에 힘쓰는 이 있는 걸 생각하라
3. 이 세상 어딘가엔 탐욕과 분심 눌러
얼굴이 빛나는 이 있는 걸 생각하라
4. 이 세상 어딘가엔 하늘을 예경하고
이웃을 돕는 사람 있는 걸 생각하라
둘째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죽인 살인자
그 죄인을 구원 할 분을 우리가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일까요?
과연 어느 누가 하나님을 죽인 살인자들을 구원해 낼 수 있을까요?
가장 강력한 역설인데, 사람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맹세입니다.
(새)겔33:11 너는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내가 내 삶을 두고 맹세한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한다. 너희는 돌이켜라. 너희는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거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는 왜 죽으려고 하느냐?' 하여라.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이 죽었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자들,
그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죽인 살인자(허무주의자/무신론자)들,
그 악인들에게도 하나님은 자신의 맹세를 통하여 구원의 길은 열어 놓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도 죽이고 자신도 죽이는 어리석은 길, 불행의 길에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돌이킬까요?
마태가 찾은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마18: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어, 낯설지만 새로운 변화들을 잘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새)마5: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낯설지요
현실에서는 무척 낯선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새로운 변화를 어린 아이들과 같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큰 변화,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 더 볼까요?
(새)마5:4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역시 낯설지요
현실에서는 무척 낯선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새로운 변화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큰 변화,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와 같이 변화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대제사장/바리새인)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제자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어린 아니에게 나타나심
여기서 변화의 시작,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이 이끄시는 변화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지요.
그런 다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를 깊이 고민한 말씀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첫째 하나님을 받아들였다면, 하나님의 가르침 곧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완전히 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설명하고 다시 교육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말씀의 기초인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완전히 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새)히6:1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제쳐놓고서, 성숙한(완전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①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는 회개와
②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6:2 ③세례에 관한 가르침과
④안수(병자를 위한 안수)와
⑤죽은 사람의 부활과
⑥영원한 심판과 관련해서, 또 다시 기초를 놓는 일이 없어야 할 정도로 완전히 그 기초를 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 이후 사람들은 말합니다.
‘가슴만 뜨거우면, 믿음의 확신만 있으면, 교리도, 신학도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자유’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작 종교개혁을 이끈 지도자 마르틴 루터는 이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다시 교육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 기초를 완전히 성도들이 깨우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민 속에서 탄생한 책이 바로 ‘대교리문답(1529)’입니다.
서문을 보겠습니다.
스스로를 돌이켜 보십시오.
당신들이 믿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당신들의 지식수준은 바닥입니다.
수준 높은 박사인 줄 착각하지 마십시오.
혹여 이전에 잘 알고 있었을지라도, '이건 내가 이미 통달한 거야',
'이거 다 아는 거야'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 생각에 교리문답서를 다 알고 있고, 식은 죽 먹기처럼 쉽게 보여도(사실 평생 배워도 그렇게 될 수 없지만) 매일 읽고 숙고하고 함께 말할 때마다 거기서 새롭게 배울 것과 열매들을 계속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읽고 대화하고 생각할 때 성령이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교회가 약속하고 정한 매 시간마다 참석하셔서,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들을 잘 배우시고, 깊이 깨우치시고, 내것으로 완전히 다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들(하나님의 말씀을)을 잘 알게 되었다면, 거만 떨지 말고, 하나님의 완전 곧 성숙한 믿음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완전한 데’
바로 이 말씀에 이르는 것입니다.
레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마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제가 설교를 준비할 때, 늘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마음으로의 변화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생각으로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마칠 때 마다 꼭 이런 말씀으로 마쳤던 것입니다.
빌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왜냐하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새)히6:4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고, 또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장차 올 세상의 권능을 맛본 사람들이
6:6 타락하(는 일들을 너무 쉽게 목격하기 때문입니다)면,
타락, 그것은 더 크고 심각한 문제를 만듭니다.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①그들을 새롭게 해서 회개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②하나님의 아들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고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니체가 말처럼, 하나님을 죽이는 동조자가 되지 마시고
첫째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들 곧 하나님의 말씀 듣고 탐구하는 일에 열심을 내십시오. 어린아이가 공부하는 것처럼 낯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수용하시고 배우십시오.
둘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자리가 어디인지 잘 살피시고, 그 성숙(완전)의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새로운 변화, 새로운 구원의 역사가 날마다 선물처럼 펼쳐질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찬송가 302장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보면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폐단과 마주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마음 약하여 못가네
무슨 말입니까?
신앙의 수용, 신앙의 변화, 신앙의 성장 앞에서 우리가 지금 멈추어 서 있다는 것입니다.
왜요?
파도 때문입니다.
인생의 파도, 시련의 파도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찬송가 302장의 시인을 이렇게 말합니다.
후렴입니다.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왜 우리가 찰싹거리는 내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힘차게 저어가야 합니까? 바로 그 길이 오늘 본문이 말한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담대하게, 내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힘차게 저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