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를 스캔하고 있다
최연숙
내가 재미있는 사람이었다니요, 역설과 아이러니, 패러독스가 뒤섞여
나도 나를 거꾸로 읽는 날 자주 있는데요
며칠 이포에서 안개가 밀려왔어요, 엷은 겨울 숲빛 아메리카노와 연식이 오래된 소나무 향기 같은 에스프레소 사이의 넘나듦과 넘나들다가 뒤섞인 빛처럼, 묘한 뉘앙스의 눈빛일지라도 재미있다잖아요
안개는 언제 걷힐까요, 자주 지루하기도 하고 앞날이 흐릿하기도 하지요, 그제가 어제인 듯 경계가 모호한 그녀처럼, 우리 사이엔 늘 유빙이 떠다녀요, 모서리끼리 근접하여 아찔할 때도 있지요
딱 부러지고 다부지다니 간혹 느슨한 재미라도 있어야 하잖아요, 영화도 책도 재미있어야 보고 읽는 걸 하물며 나를 읽는 재미 없으면 그렇잖아요, 음악이 내 몸을 연주하듯 느끼며 유영하며 넘보는 재미, 그렇게 한 페이지씩 넘겨 가는 거래요
아바타 2, 영웅을 공유하기로 한 날 하필 남편이 다리 수술을 해야 한대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11번 3악장에서 전쟁광 푸틴이 왜 지금까지 꽃잎들의 목을 자르고 있는지 피의 일요일*을 세밀히 읽어야 해요, 동서양을 넘나들며 사람 읽는 재미만큼 즐거운 일도 없는 것 같아요
문득 하루* 읽는 재미를 말해주고 싶은 밍밍한 너
* 피의 일요일: 1905년 페테르부르크의 동궁 광장에서 일어난 노동자 학살사건
* 하루: 고양이 이름
모든 그림자에는 상처가 살고 있다
산책길에 줄지어 선 그림자
나무의 그림자를 관통해 제트기처럼
빠르게 지나간 고양이
나무는 옹이를 더 깊이 숨겼다
물리고 물려 곪은 데가 진득한 고양이도
호피 무늬 털만 보여줄 뿐이다
아픔은 아픔끼리 통하는지
바위는 어둠 속으로 깊어진 상처를
가끔 몸을 뒤틀며 보여주기도 했다
저 수억만 년 물의 역사로
석탑을 쌓은 주상절리의 조화도
물의 상처가 만들어 낸 비경이다
햇볕이나 달빛에 상처를 말리다가
밤이면 별의 그림자를 피워내기도 한
크고 작은 상처의 꽃들
꽃은 꽃끼리 부둥켜안기도 한다
꽃은 꽃끼리 밀어내기도 하다가
딱딱해진 딱지를 떼어내기도 하는데
꽃을 피우지 못한 상처는
다른 상처의 꽃을 보지 못한다
모든 그림자에는 상처가 살고 있다
내 시에도 꽃자리 푸른 싹이 돋고
튼실한 열매가 맺기를
화무오일홍이다. 점점 빨라지는 꽃의 개화 시기가 기후의 변화를 체감하게 한다. 산책길에도 들꽃들이 피었는가 싶으면 지고 금방 다른 종류들이 자리를 차지하곤 한다. 남도 답사를 다녀올 일이 생겨 해남과 강진을 둘러보았다. 남녘과 시차를 두고 피고 지던 꽃들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피더니 내 사는 곳과 같이 신록이 우거지고 있었다. 빨리 가고 오는 것들이 자연뿐이겠는가. 누군가 세상을 떠났다는 기별이 잦고 태어났다는 소린 가물에 콩 나듯 하니 그 또한 마음 쓰이는 일이다.
카를 구스타프 융의 그림자 이론 (The Shadow Theory)에서는 그림자는 무의식의 측면을 말하며 우리가 평소에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창조적 능력인 빛의 원천이 있는 반면 어두운 그림자도 있다는 것이다. 밝음과 어둠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으로 선과 악이 함께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우월과 열등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그림자 투영의 척도에 따라 상처를 입기도 하고 입히기도 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세상의 모든 생물은 어떤 형태로든 상처를 입는다.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상처 입은 모습을 발견하면 연민과 동정을 불러일으킨다. 산책길 나무의 그림자에서 옹이를 보았다. 그 옹이는 상처로 생긴 것이었다. 그만큼 자라기까지 비와 바람과 척박한 땅에서 살아내기 위해 치러야 하는 악전고투의 세월을 읽었다. 나무의 상처는 그림자에 숨기고 있어 나무의 마음이 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산을 오르다 바위를 자세히 보고서야 우리가 무생물이라 생각하는 ‘돌 역시 상처를 입는구나!’ 했다. 물의 상처가 주상절리를 만들어 내듯 상처들은 햇빛과 달빛의 도움을 받기도 하며 별의 그림자 속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도 한다. 어떤 상처든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면 다른 상처에 핀 꽃을 알아보지 못한다. 우리가 살펴야 할 상처는 그림자마다 살고 있다. 모든 사물의 그림자를 통해 보게 되는 상처와 그 상처가 피울 꽃을 보는 예리한 마음의 눈이 필요할 뿐이다. 시집의 표제 시 「모든 그림자에는 상처가 살고 있다」의 탄생 배경이기도 하다.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라는 책은 제목부터 깊이 있는 글쓰기를 주문하고 있다. 시 쓰기란 내 삶 읽기인 동시에 사람 읽기이지 싶다. 사물의 본질에 천착하여 깊이 읽어내 모든 사람이 감동하는 작품을 쓰는 일은 쉽진 않지만 사람 읽는 일은 흥미롭기도 하다. 어떤 시인이 내가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던졌다. 천성이 밝아 밝은 분위기 주도는 잘하지만 재미있는 사람이란 말은 처음 들었다. 시 「누군가 나를 스캔하고 있다」의 배경 이야기다. 내가 무심코 하는 말이나 행동이 누군가에게 읽히고 있었던 것이다. 아주 잠깐 나를 향한 그의 묘한 시선이 무섭게 다가왔다. 나도 누군가를 읽기도 하면서도 기실 나 자신은 잘 읽지 못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자신을 잘 읽는다면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일이 덜할 텐데 말이다. 책을 통해, 문화와 예술과 사회를 통해 끊임없이 나를 읽다 보면 좀 더 잘 읽을 날이 올 것인지, 요원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가끔 길고양이 하루를 읽는 일이 즐겁다. 녀석은 아주 예민하여 나의 조그만 행동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며칠 찾지 않았더니 나의 부름에 쌩하고 고개를 돌려버린다. 나를 심심하면 가끔 오는 사람으로 분류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고양이를 읽는 것이 나를 읽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더 세밀하게 읽어내 불화가 없게 해야지 싶다. 앞산이 나날이 푸르다. 내 시에도 꽃자리 푸른 싹이 돋고 튼실한 열매가 맺기를 두 손 모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