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30일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마태오 23,27-32
“당신의 조상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을 때 우리의 대답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꼬집으십니다.
겉으로는 회칠한 무덤처럼 깨끗하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판단하시는 이유는 예언자들을 죽였던 이들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비록 조상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면 되는 것 아닐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조상들이 한 행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예수님은 인간의 힘으로 조상의 전통 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여기십니다.
조상은 곧 우리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전갈이 개구리와 함께 살고 싶었지만, 결국 자신이 전갈이라는 사실을 잊지 못하여 개구리도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는 동화가 있습니다.
자신이 전갈이었다는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엔 전갈의 본성이 나옵니다.
우리도 인간이라는 본성을 완전히 잊지 않으면 언젠가는 인간의 본성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원탁의 기사’로 유명한 아서 왕에 대한 전설을 많이 들었습니다.
아서 왕의 전설은 돌에서 검 엑스칼리버를 뽑은 후 자신이 영국 왕위 계승자임을 알게 된 어린 소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혈통을 깨달은 아서는 왕의 역할을 맡아 원탁의 기사단을 결성하고 이 땅에 정의를 가져오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을 극화하여 영화로 만든 것이 ‘킹 아서: 검의 전설’(2017)입니다.
아서의 아버지는 한 왕국의 왕이었지만, 동생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그는 전설의 검 엑스칼리버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자신이 돌이 되어 자신의 등에 칼을 꽂아 죽습니다.
나중에 자신의 혈통만이 그 검을 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천하게 자란 아서는 우연히 그 칼을 뽑을 기회가 생겼고 사람들 앞에서 그가 진정한 왕족임이 증명됩니다.
하지만 어린 아서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자기 친구들이 죽어가는 것을 볼 수 없어서 검을 다시 집어 듭니다.
그러자 검에서 큰 힘이 나와 자기 부모를 죽인 왕을 이기고 새로운 왕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영화 슈퍼맨도 그렇고 듄이라는 영화화된 소설도 같은 내용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혈통을 새롭게 깨닫고 새로운 소명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조상의 전통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믿음이 되고 그 믿음이 나의 본성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모세는 자신의 혈통에 대한 믿음으로 삶이 완전히 변화된 대표적인 성서의 인물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새로운 존재임을 믿고, 인간이었음을 잊어야 합니다.
그 길만이 조상의 죄에서 벗어나 하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조상을 바꾸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조상은 교회이고 그 시조는 그리스도와 성모님이십니다.
단군신화에 따르면 우리는 곰의 후손들입니다. 잘 참아낼 줄 알았던 곰이 결국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만약 자신을 곰의 후손으로 여긴다면 곰처럼 살 것입니다.
그러나 곰의 본성을 벗고 인간의 본성을 입었기에 우리는 곰을 닮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창조된 교회의 백성입니다.
우리 조상은 교회의 선조들입니다.
성인들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이 세속의 사람이냐, 교회이냐에 따라 우리 삶이 결정됩니다.
이는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조상이 운명을 결정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기 조상의 운명대로 살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30일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마태오 23,27-32
예언자의 삶은 언제나 고되고 슬프고 외롭습니다!
언젠가 예수님 입에서 직접 흘러나온 말씀들만 따로 모으고 추려서 나름 분석하고 정리해본 적이 있는데, 참으로 흥미롭고 은혜로웠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유형, 다양한 빛깔의 말씀들이 잘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때로 신음하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일으켜 세우고 되살리시는 따뜻한 위로와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때로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강력한 경고의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말씀의 강도가 너무 센 나머지 깜짝 놀랄 정도로 직선적이고 공격적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선 사람들을 향한 어투는 더없이 자상하고 친절하며,
과할 정도로 칭찬하십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어린이들을 향해서는 가르침의 내용이 너무나 쉽고 명쾌합니다.
그 누구도 당신 구원의 메시지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한 예수님의 배려가 돋보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언어는 신선하고 파격적입니다. 때로 직선적이고 공격적입니다.
거의 독설과도 가깝습니다.
그러나 세상 쉽고 재미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분 말씀에 매료된 수천, 수만 명이 언제나 그분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산상설교 때 예수님은 진복팔단(眞福八段)에 대해서 가르치셨는데, 오늘은 분위기가 완전 반대입니다.
지난번은 가르침의 서두가 ‘행복하여라’였는데, 오늘은 ‘불행하여라.’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 27-28)
특히 마태오 복음 23장은 제목부터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입니다.
23장 전체가 위선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신랄한 질책의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거듭 ‘불행하여라.’른 반복하시며, 그들의 위선과 이중성, 형식주의와 권위주의를 강력하게 경고하십니다.
2천년 세월이 지난 지금 읽고 있는 저도 섬뜩하고 가슴이 찔리는데, 예수님 시대 당사자들을 얼마나 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까요?
또 많은 당사자들은 분노와 적개심으로 이를 갈았을 것입니다.
계속되는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 말씀은 적대자들의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갔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걸고 말씀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언자의 삶은 고되고 슬프고 외롭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거대한 구조적인 악 앞에서, 그칠 줄 모르는 불의 앞에서, 정말이지 웃픈 현실 앞에서 ‘이건 정말 아니다.’며 크게 외치는 것은 곧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추종하는 길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강론>
(2023. 8. 30. 수)(마태 23,27-32)
<회칠한 무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마태 23,27-32).”
무덤에 회칠을 하는 것은, 그것이 무덤이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덤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이고, 사람들이 무덤이라는 것을 모르고 접촉했다가 부정 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본래의 의도를 생각하면,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은 위선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관습을 모르는 이방인들이라면, 그것이 무덤이라는 것을 모르는 채로 하얗게 회칠한 모습만 보고 아름답다는 생각만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위선자들을 가리켜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그런 이방인들을 기준으로 해서 표현하신 것입니다.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에서,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 때 하신 말씀이 연상됩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드는구나(마태 21,13).”
사람들은 건물의 겉모습만 보면서, 성전이 거룩하고 장엄하다는 생각만 하지만(마르 13,1),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보셨고, 그곳이 ‘강도들의 소굴’로 변질되었음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장엄한 건물들이 모두
허물어지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마태 24,2).
당시의 성전은 글자 그대로 ‘회칠한 무덤’이었을 뿐입니다.
<교회의 ‘거룩함’은 건물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성전을 잘 짓는 것보다 교회답게 잘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의 ‘거룩함’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를 구경하러 가는 관광객이 아닙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서 살기를 희망하는 사람이고, 들어가서 살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 ‘삶’은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운전할 때의 모습을 하나의 예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단속하는 경찰이 있고, 감시 카메라가 있고, 보는 사람들이 있을 때에는 교통 법규를 잘 지키면서도,
경찰도 없고, 카메라도 없고, 보는 사람들이 없을 때에는 교통 법규를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 위선이고, 회칠한 무덤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보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늘 지켜보신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을 ‘감시자’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늘 지켜보시는 것은 ‘감시’가 아니라 ‘보호’이고, ‘사랑’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 사랑과 보호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다른 사람이 위선자인지 아닌지를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속을 꿰뚫어보시는 분이니까 위선자를 위선자로 바로 알아보시고 꾸짖으셨지만, 우리는 남의 속을 모릅니다.
성인이 아닌데도 겉모습만 보고서 성인이라고 떠받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위선자가 아닌데도 위선자라고 함부로 비난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우리는 남의 위선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볼 때 하는 나의 행동과 보는 사람들이 없을 때 하는 나의 행동은 같은가? 다른가?”
예수님 말씀에서,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유대인들이 옛날의 예언자들과 의인들을
공경하는 것은 위선일 뿐이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옛날에 죽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의 무덤을 만들고 꾸미는 일을 잘했다고 하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면서 자기들은 옛날의 성인들을 공경한다고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것은 거짓, 즉 위선이었습니다.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것처럼, 그들도 세례자 요한을 죽였고, 예수님과 사도들을 박해하고 있고, 이제 곧 죽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라는 말씀은, “그 아비에 그 자식이다.”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라는 말씀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너희 조상들이 남겨 놓은 것을 행함으로써 조상들의 죄를 완전히 채워라.”이고, 이 말씀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죽여서 조상들의 죄를 가득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역설법’을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죄가 가득 차면 하느님의 심판과 벌이 내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싶다면 조상들이 덜 채운 죄를 완전히 채워라.” 라는 말씀이 되는데,
사실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싶지 않다면, 조상들이 했던 그런 짓은 하지 마라.”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