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레아칼라 화산
덜렁대고 빈틈 많은 성격은 언제부터 이루어진 걸까? 오죽하면 친정엄마는 시집가는 내게 ‘애기 아무 데나 빠뜨리고 다니지 마라’ 였다. 공중전화기 위에 놓고 온 책들, 화장실에 두고 온 소지품, 아침마다 열쇠 찾느라 외투를 뒤지는 분주함. 그러고도 큰 탈 없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천운이 아닐 수 없다. 아이들이 스무 살이 되자 처음으로 내게 하는 말이 “엄마 닮아 내가 허둥지둥하나 봐”였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비행기표만 사놓고 세부 일정도 없이 떠나는 일이 요즘은 다반사다. 지난 겨울에 간 홍콩, 마카오 경유 태국여행에서도 어찌 되겠지?하는 마음으로 갔다가 길을 잃고 난리도 아니었다. 묘하게도 그런 와중에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무사히 귀국까지 하고 나니 이제는 준비 없이 가는 여행에 인이 박혀 버렸다. 이번 하와이도 그랬다. 항공권과 숙소만 대강 정하고 진행하면서 하와이가 8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는지도 몰랐고 그 중 호놀룰루가 있는 오하우섬과 마우이, 빅아일랜드, 카우아이섬만 사람이 산다는 것도 여기 와서야 알았다. 그러니 마우이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 턱이 없었다. 미리 정한 숙소에서 공항 픽업을 와준다고 하니 오늘은 하루 쉬고 내일에나 스노쿨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우릴 픽업하자마자 과일바구니와 무스비(하와이 주먹밥) 점심, 그리고 일체의 해수욕 용품을 챙겨 해변에 데려다 주신다. 해수욕을 마치자 이번에는 할레아칼라 화산의 일몰을 보러 가자고 하신다. 코알라가 먹는다는 유칼립투스가 스스로 껍질을 벗고 마카다미아 열매를 주워 돌로 깨서 먹으며 정상을 오르는 길에 쌍무지개를 보았다. 오전에는 거북이와 수영했는데 오후에는 쌍무지개다. 마우이가 우리에게 행운의 신호를 보여준다. 그때까지도 몰랐다. 이곳의 분화구에서 혹성탈출을 찍었다는 것도. 정상으로 오를수록 바람은 살벌했다. 코너를 틀 때마다 차창 밖의 운해는 구름 위를 걷는 신선처럼 경이로웠다. 지는 해가 남긴 빛으로 구름은 달궈져 있다. 층운과 적운이 끝없이 펼쳐진 모습를 보며 파도는 밭처럼 보이고 구름은 바다처럼 보이니 물아일체는 바로 이것인가? 싶었다. 아찔한 산세를 돌아 돌아 정상에 올라 몰아치는 바람에도 아랑곳 않고 분화구 쪽을 내려다보았다. 우주인이 내려와 인간과 소통한다며 바로 이렇게 신령한 곳에서 이루어질 거란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토탈리콜의 화성처럼 풀 한 포기 없는 오렌지 오팔 원석이 끝도 없이 펼쳐진 장관이었다. 추위로 인해 일별하고 떠났지만 그 모습은 잊을 수가 없었다. 파카 속에 얼굴을 묻고 다시 차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일상의 오밀조밀한 삶에서 별세계의 황홀함 속에 빠지고 나니, 어쩌면 사전 정보 없이 찾아와 더 큰 동요를 얻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화무쌍한 날씨로 라면을 끓여먹으려고 가져간 준비물을 그냥 갖고 내려와 집에서 먹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할레아 칼라의 신령함은 눈앞에 아른아른거린다. 그곳은 바다와 하늘이 역전된 곳이자 지상과 천상이 맞닿은 곳이다. 하늘과 땅을 잇는 인간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용기를 준 곳이기도 했다.
덜렁대고 준비 없는 사람이라도 이 세상은 언제나 도움의 손길을 따스하게 내미니 완벽하게 살려 하기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말고 감사해하며 평소 복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감히.
첫댓글 천운을 타고 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