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의 살아있는 현장, 루브르 박물관(1793년)
수많은 유물 뒤편엔 戰爭이 있었다
우리가 전쟁사를 살펴볼 수 있는 방법은 여럿입니다. 역사서부터 시나 소설, 그림, 사진, 전쟁을 다룬 영화까지. 그리고 건축으로도 전쟁사를 살펴볼 수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전쟁은 건축물을 부수기도 했지만 새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낳은 여러 산물 중 하나인 건축물을 통해 전쟁사의 한 페이지를 살펴보는 ‘건축, 전쟁사를 말하다’가 올 하반기부터 새롭게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전 세계에서 관람객이 가장 많은 박물관은 어딜까? 바로 프랑스 수도 파리의 중심 리볼리가에 있는 루브르 박물관이다. 2018년 누적 방문객 수는 1000만 명이라고 한다. 궁전을 개조한 루브르 박물관은 소장품 수와 질 면에서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영국 대영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힌다.
12세기 앵글로노르만족 침입 막는 요새로 출발한 루브르
하지만 유명 관광지이자 박물관으로 알려진 루브르가 애초엔 적의 침략을 막는 요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박물관은 1193년 필립 오귀스트 2세의 명으로 앵글로노르만 족의 침입을 막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파리 시 방어벽 외곽에 착공됐다. 루브르 지하 전시장에서는 성벽 길이 73m로 네모난 성 모양을 한 중세시대 당시 요새로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요새가 루브르 궁전이 되기까지 수 차례에 걸친 건물 확장공사가 이뤄졌다. 1528년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프랑수아 1세가 건축가 피에르 레스코에게 명해 낡은 건물을 부수고 그 터에 르네상스식 궁전을 짓게 하면서 왕의 거처가 된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배경은 전쟁
루브르 궁은 어떻게 박물관이 됐을까? 그 배경을 알고 싶다면 프랑스 대혁명의 절정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루브르 궁에 박물관이 개관하기 한 해 전인 1792년 8월 10일은 파리 민중이 봉기해 800년을 이어 온 프랑스의 왕정을 타도한 역사적인 날이다. 프랑스 대혁명은 1789년 7월 14일부터 1794년 7월 28일에 걸쳐 일어난 자유주의 혁명이다.
프랑스 대혁명을 두고 전쟁이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 그 중심에는 전쟁이 있다. 프랑스는 18세기 들어 혁명 전야까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년), 7년 전쟁(1756~1763), 미국 독립 전쟁(1775~1783년)을 비롯한 여섯 차례의 큰 전쟁에 관여했다. 또한 프랑스 대혁명은 전쟁의 발단이 됐다. 1792년 혁명의 불길이 번져오는 것을 두려워한 이웃나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이 전쟁을 시작했다. 이른바 프랑스 혁명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 전쟁 중 가장 유명한 전투는 발미 전투다. 프로이센 군에게 계속 밀리던 프랑스 혁명정부의 군대가 1792년 9월 20일 프랑스 동북부의 발미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해 전황을 역전시켰다. 자원 모집된 의용군들이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프로이센 군대를 물리친다. 자신감을 얻은 프랑스는 대프랑스 동맹에 대해 결사항전을 외치며 전 국민이 참여하는 대규모 국민 전쟁 시대의 서막을 올리게 된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궁전에서 박물관으로 변모
대혁명 초기 사회 곳곳에서 교회 건물과 왕실 거주지, 그리고 국가 기념물 등을 중심으로 시민들의 파괴 행위가 이어졌다. 고대 시대에 자행됐던 약탈 행위와는 구별되는 정치적 의도가 담긴 행위였다. 결국 과도한 양상으로 치닫게 되면서 국가 문화유산이 모두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자아내게 됐다. 또한 혁명의 진전에 따라 박물관의 필요성도 커졌다. 1789년 11월 2일 교회 재산의 국유화 조치, 1792년 4월 8일 망명자 재산 몰수에 관한 법의 제정, 1792년 8월 10일의 혁명과 왕정 폐지로 엄청난 양의 문화재가 국민의 재산이 됐기 때문이다. 그 많은 문화재를 보관할 장소로 루브르가 적격이었다.
1793년 7월 23일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혁명정부는 새로운 공화국의 탄생을 극적으로 선보일 기회로 루브르를 이용한다. 혁명정부가 국민을 위해 루브르는 국가의 걸작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천명한 것이다. 1793년 8월 10일 루브르 박물관이 드디어 문을 열었다.
38만 점 소유한 루브르의 전시품들은 어디서 왔을까?
루브르 박물관의 넓이는 약 6만600㎡(약 1만8000평)다. 규모가 방대한 루브르 박물관은 드농관과 쉴리관, 리슐리외관 등 3개 동으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이집트 고대 유물관과 근동 유물관, 그리스와 에트루리아, 로마 유물관, 이슬람 미술관 등 8개의 세부 전시관이 포함된다. 박물관은 함무라비 법전과 밀로의 비너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등 38만 점의 예술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 중 약 3만5000점이 전시되고 있다. 그곳에서 관람객들은 기원전 4000년부터 19세기까지 예술사 흐름은 물론 인류 역사를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많은 유물은 어디서 가져온 것일까? 답은 ‘전쟁’이다. 루브르 박물관은 프랑스가 벌인 전쟁에 따라 소장품 규모가 바뀌었다. 사실 서구의 박물관들이 그러하듯 루브르의 소장품도 대부분 다른 나라에서 약탈해왔다.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은 “역사는 문명을 창조했지만 침략자는 문화재를 약탈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유리 피라미드가 상징하는 것은?
루브르 박물관 입구에는 유리 피라미드 조형물이 있다. 프랑스 혁명의 시작점이 된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200주년인 1989년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이오밍 페이가 공모에 당선돼 완성했다. 루브르 박물관 중앙에 위치한 이 피라미드는 루브르의 외관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매우 혁신적인 시도였으며 과거와 미래를 투명하게 연결하는 상징이라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이 유리 피라미드는 프랑스가 이집트와의 승전으로 얻은 전리품 중 하나를 상징화한 건축물인지 관심 있게 사유하는 관광객은 드물다. 이집트로부터 수많은 유적을 들고 왔지만 정작 거대한 피라미드는 직접 옮길 수 없기에 이렇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루브르 박물관은 12세기 요새로 시작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700년이 넘는 전쟁사를 간직하고 있다. 다음 시간에는 오늘날의 루브르 박물관을 있게 한 인물을 만나 보자.
나폴레옹은 전리품을 모았고 勝者의 역사는 예술로 기록했다
1794년 벨기에 침공 후 수집 시작
약 5000점에 달하는 전리품 약탈
집권 시기 ‘나폴레옹 박물관’ 개칭
박물관 입구 ‘카루젤 개선문’ 세워
워털루 전쟁 후 전리품 일부 반환
카루젤 개선문의 모습. 1808년 나폴레옹은 1805년까지의 전쟁 승리를 기념해 루브르 박물관 입구에 카루젤 개선문을 세웠다.
루브르 박물관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의 전쟁사가 있다. 나폴레옹은 1784년 파리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뒤 1785년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 때 코르시카국민군 부사령관으로 취임했다. 1799년 11월 쿠데타 성공으로 실권자가 된 그는 1804년부터 1815년까지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를 지냈다. 영국과의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대패했으나 오스트리아를 무너뜨리고 신성로마제국을 멸망시켰으며, 프로이센과 러시아 제국을 굴복시켜 유럽 대륙을 제패했다.
유럽 최고의 예술품 소장한 루브르
전쟁을 많이 벌였던 루이 13세와 루이 14세 시기까지도 프랑스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이용해 왕궁의 문화재 소장품을 늘리는 것을 고려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달랐다. 프랑스를 모든 문명 세계의 순수 예술품을 한곳에 모아 놓은 공인된 중심지로 만들려는 열망을 품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집권 시기에 루브르 박물관은 유럽 최고의 예술품을 소장한다. 나폴레옹은 전쟁 승리로 약 5000점에 이르는 전리품을 프랑스로 보냈다.
1794년 벨기에 침공 이후부터 나폴레옹은 본격적으로 유럽 전역의 교회와 궁중에서 전리품 수집을 시작했다. 1796~1797년 이탈리아 원정으로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해 카스틸리오네 전투, 아르콜 다리 전투, 리볼리 전투 등으로 오스트리아가 주축을 이룬 대프랑스 동맹군을 격파했다. 나폴레옹은 각 분야 전문가와 학자들을 대동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주요 예술품을 포장해 루브르 박물관으로 보내는 것은 프랑스 군대의 주요 업무였다.
이집트관 신설은 이집트 원정의 결과물
프랑스 혁명정부는 전략적 요지인 이집트를 식민지로 만들어 영국을 막고자 했다. 또한 급격히 떠오르는 나폴레옹을 프랑스로부터 멀리 격리하려고 이집트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798년 5월, 나폴레옹은 3만8000여 병력과 350척의 함선으로 툴롱을 출발해 이집트 원정을 떠났다. 그해 7월 카이로에 진군해 맘루크족과의 피라미드싸움에서 승리하고 이집트를 장악했다.
나폴레옹은 이때 고고학자와 천문학자, 수학자, 화학자, 사서, 인쇄공, 토목기사, 광산기사, 화가, 인문학자 등 175명을 데리고 유적지 탐사활동에 나섰다. 이 중에 고고학자 도미니크 비방 드농이 동행하면서 전리품 약탈 수가 급격히 늘었다.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게 바로 루브르 박물관의 드농관이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오귀스트 불라르의 ‘라 레뷰’(1901). 1810년 나폴레옹이 말을 타고 카루젤 개선문 뒤를 지나가는 기병대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루브르 박물관
로마 개선문 모방한 카루젤 개선문
나폴레옹은 영국과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 등 유럽의 여러 나라와 싸운 ‘나폴레옹 전쟁’(1799~1815)을 벌이며 유럽 전역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나폴레옹의 쿠데타 1주년 기념일인 1800년 11월 9일에 루브르 박물관은 고대 조각들을 전시한 고대 미술관을 개관했다. 루이 16세 때 ‘중앙예술박물관’이라는 명칭을 얻은 루브르 궁은 1803년 나폴레옹 집권과 함께 나폴레옹 박물관을 뜻하는 ‘뮈제 나폴레옹’으로 바뀌었다. 1804년 황제로 즉위한 나폴레옹은 세계 최고의 박물관을 건립해 전쟁의 전리품을 국민, 더 나아가 인류에 재분배하겠다고 공표했다.
나폴레옹은 1805년 10월 울름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12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동맹군에 승리했다. 1806년에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이겼다. 1807년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러시아와 프로이센군을 격파했고, 1809년 7월 바그람 전투에서 승전고를 울렸다. 나폴레옹은 1805년까지의 전승을 기념해 루브르 박물관 입구에 1806년부터 1808년까지 3년간의 공사 기간을 거쳐 카루젤 개선문을 세웠다. 프랑스 제국을 있게 만든 군대 ‘그랑드 아미’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였다.
로마의 셉티므 세베르 개선문을 모방했다. 이는 나폴레옹이 로마제국을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카루젤 개선문의 높이는 14.6m, 너비는 19.5m이다. 문 위에는 나폴레옹이 1797년 이탈리아 원정 때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에서 가져온 네 마리의 청동상이 있었다. 하지만 1815년 워털루 전쟁 패배 후 이탈리아에 반환됐다. 대신 1828년 프랑수아 조제프 보시오가 여신상을 중심으로 한 마차와 병사의 상을 만들었다.
1811년 나폴레옹 박물관은 절정에 달했다. 고대관은 확장돼 400개 이상의 조각상을 전시했으며 그랑 갤러리에는 9개의 전시실에 1176점의 그림을 선보였다. 다만 이베리아 반도 전쟁의 실패와 영국 침공 포기로 두 지역의 작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장군 보나파르트의 미완의 초상’(1797). 이 작품은 자크 루이 다비드가 나폴레옹이 장군이었던 시절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린 초상화이다. 세 시간 만에 나폴레옹이 자리를 뜨는 바람에 미완으로 남았다. 사진=루브르 박물관
워털루 전쟁 패배, 루브르에 불러온 영향
모든 걸작을 다 모아 놓은 단 하나의 박물관을 만들려는 황제의 바람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 원정 실패 이후 몰락의 길을 걷는다.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의해 전쟁에서 패배하고 다음 해에 실각하게 된다. 유배됐던 엘바 섬에서 도망쳐 나와 권력을 다시 잡고 1815년 워털루 전쟁을 벌이지만 영국과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연합군에 패배하면서 쓸쓸한 최후를 맞는다. 이후 1815년 빈 회의에서 오스트리아와 영국, 프러시아, 러시아, 프랑스 간의 평화조약이 체결됐다. 이 결과로 루브르로 보내졌던 전리품들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1815년 7월부터 11월 사이에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시대에 약탈해온 회화 2065점, 동상 280점, 청동 289점, 에나멜(페인트 작품) 1199점이 원 소유국으로 반환됐다. 이는 전체 전리품의 5분의 4에 해당한다.
이후 복고왕정과 함께 부르봉가의 루이 18세가 즉위하면서 루브르 박물관은 나폴레옹 박물관에서 다시 왕립박물관으로 명칭이 바뀐다.
루브르 박물관은 나폴레옹의 재위하에 전형적인 국가 박물관이 됐고 이후 전 세계 국립박물관의 본보기가 됐다. 나폴레옹은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1807), ‘장군 보나파르트의 미완의 초상’(1797), 화가 앙투안 장 그로의 ‘아일라우 전투의 나폴레옹’(1807), ‘자파의 페스트 격리소를 방문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804) 등의 작품으로 루브르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만약 나폴레옹의 전쟁이 없었다면 루브르 박물관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