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슬프게 하는 교단의 황폐화를 보아라
애통한 마음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다섯 살 어린이 도 그 앞에서 묵념한다.
교육의 죽음에 천년전 추모객도 하늘의 비가 되어 내린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잠22:6)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엡6:1~2)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6:4)
가르칠 바를 가르쳐라
교단이 무너지면 나라는 망한다
오 통제라! 교육아!, 교육아!
전교조가 신성시한 참교육이 이것인가?
가르침에 대한 신성함으로
교사는 희생, 헌신, 사랑으로, 인사의 길을 가고
스승의 길을 간다
스승의 권위를 찾아다오
'나도 서이초 교사다'
서울 서초구 서이초등학교 운동장 앞 추모공간에 추모가 슬픈 빗물이 되었다
아이들의 희망을 키우고 멋진 인생을 꽃 피우기를 다짐하고 선 교단
20대 새내기 교사가 숨진 초등학교 앞에는 땡볕 아래에서 검은 옷을 입은 선생님들의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교권 침해에 늘 노출돼 있는 교원들의 울부짖음
서울 서초구 서이초등 새내기 교사의 극단적 선택 이후 학부모의 교권 침해 사례가 재확산되고 있다.
학부모의 표를 얻으려고 학생인권조례를 만들어 교권은 추락하고
학생·학부모의 인권·학습권은 강화되어 교단이 황폐화되고 있다.
추모공간에 “학부모가 죽였다. 교육청도 공범이다. 너희들은 살인자다.”
학부모 민원 대응도 못하고 어려 아픔을 겪고 꾸역꾸역 긴 세월을 버틴 교원의 눈물의 호소
'고작 1년 반 근무하면서 교사가 민원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 들어 왔다’
'언젠간 나도 겪을 수 있는 일이기에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나는 너였다', '나는 당신입니다'
학교에서 교권 침해로 어려움을 겪는 것이 비단 특수한 상황이 아님을 드러내며
고인과 연대하는 교사들의 메시지였다.
학교 교육 현장에서 생기는 문제들을 교사 개인의 열정으로 해결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교사도 있었다.
'교사로서 사명감과 열정으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지만
무차별적인 민원, 어떤 보호 장치도 없는 현실이 힘들다’
'교사 혼자 감당하는 시스템'의 변화의 필요성을 토로했다.
후배 교사들은 지켜주지 못했다
미안함과 반드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다짐을 표했다.
'미안해요. 선배 교사인데 도와줄 수가 없었네요’
'후배님. 외로운 날들에 함께 해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고인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교권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
교사들이 남긴 추모의 글들은 하나같이 교권추락의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음을 증언한다.
포스트잇 벽은 한 교사의 죽음으로 학부모 민원 대응,
학교 폭력 등 교육 현실의 문제들이 공론화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일선 교사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고 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는 이제 막 시작이다.
악성민원들은
1.교사가 교무실에서 학생지도를 아동학대,
2.아동의 비싼 옷에 물감이 묻었는데 어쩔거냐 항의,
3.“음료수 마시면 살찐다”는 지도를 아동학대로 사과 요구,
4. 팔 다친 학생에게 “상태가 악화되니 앉아라”는 것은 정서학대,
5.교사가 학생에게 눈 홀겼다고 아동학대,
6.친구를 괴롭히는 학생을 말리던 중에 몸 스쳤다고 “교사가 때렸다”고 항의’ 등이다.
학부모 악성 민원들, 상상을 초월한다.
걸핏하면 '고소·고발'로 '교원의 법적 보호'가 시급한데,
학생지도를 아동학대로 몰아가는 학부모들의 표를 의식한 국회의원들의 입씨름 중에 교단은 무너진다.
학교가, 교단이 언제 부터 어찌하여 이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
김영삼이 전교조를 활성화 시키고
김대중이 이해찬을 교육부 장관에 앉혀 학교 교육을 전교조에 통째로 맡겨
인성 교육은 간곳 없고 정치 이념 교육 뿐이었다.
자유민주주의에 투철한 노련한 교원들을 정년단축이라는 폭탄으로 추방하니
전인 교육은 사라지고 교권은 여지없이 추락하고 말았다.
새내기 교사의 극단적 선택이 너무 분하고 가엾다.
교육현장을 죽인 정치권들의 작당으로 교육은 망하고, 나라는 망하였다
죽음의 진실을 파헤처라
다섯 살 어린이 도 그 앞에서 묵념했다.
억울한 슬픔에는 내일이 필요하다.
내일은 떠난 이가 밝히지 못한 진실을 해명해주기도 하고 그의 훼손된 명예를 되찾아주기도 한다.
모든 조문은 너무 늦은 행위이지만 그래도 떠난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려는 남겨진 이에게
조문은 귀중한 절차다.
고통을 목격하고 그 감각을 배우는 것은 어른에게도 각오가 필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애도는 자신의 삶을 위한 다짐이기도 하기에 필수적이며 어린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배려가 필요할 수 있겠지만 그 경험에서 어린이를 배제해야 하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뜻밖의 슬픔을 겪으면서 찾아올 기쁨도 더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 자란다.
애도에 꼭 필요한 것이 더 있다. 시간과 방향이다.
우리가 느끼는 감각 중 가장 더디게 찾아오는 것이 슬픔이어서 애도는 서두를 수가 없다.
겪어낼 시간을 주지 않았을 때 슬픔은 존재를 무참히 부수거나 아예 감각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이시켜버린다.
슬픔이 어두운 위력을 갖는 것은 이런 부분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보았다. 슬픔으로 부서져버리거나 슬픔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버린 사람들을.
우리의 어린이들이 그 어느 쪽이 되는 일도 바라지 않는다.
조문에는 방향도 있어야 한다. 무엇을 왜 슬퍼하는지,
누구의 죽음을 슬퍼하는지 선명하게 알아야만 슬픔의 되풀이를 막는다.
발령 2년차 초임교사가 세상을 떠났다.
그를 기리는 조문의 시간이 오후 4시까지라는 공고를 보았다.
그의 제자이기도 한 자신의 자녀에게 조화를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학부모의 글을 보았다.
슬픔을 모르게 키우고 싶은가. 그건 사람을 기르는 방식이 아니다.
애통한 마음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