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광섭
꽃은 피는 대로 보고
사랑은 주는 대로 부르다가
세상에 가득한 물건조차
한 아름 팍 안아보지 못해서
전신을 다 담아도
한 편(篇)에 2천원 아니면 3천원
가치와 값이 다르지만
더 손을 내밀지 못하는 천직(天職)
늙어서까지 아껴서
어릿궂은 눈물의 사랑을 노래하는
젊음에서 늙음까지 장거리의 고독!
컬컬하면 술 한 잔 더 마시고
터덜터덜 가는 사람
신이 안 나면 보는 척도 안 하다가
쌀알만한 빛이라도 영원처럼 품고
나무와 같이 서면 나무가 되고
돌과 같이 앉으면 돌이 되고
흐르는 냇물에 흘러서
자국은 있는데
타는 놀에 가고 없다.
(『동아일보』, 1969. 5. 3)
[어휘풀이]
-어릿궂은 : 어리궂은. 매우 어리광스러운
[작품해설]
이 시는 40년이 넘는 세월을 두고 시를 써 온 노경의 시인이, 시인의 세계와 그 일생을 진지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다. 화자가 생각하는 시인이란 존재는 ‘꽃’과 ‘사랑’으로 대유된 아름다움과 진실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보통 사람들은 부귀영화에 대해 온몸을 내던지지만, 시인은 오직 시 한 편을 위해 온몸을 불사른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해서 탄생시킨 시 한 편의 고료는 겨우 2, 3천원에 불과할 뿐이다. 세상의 부귀와는 분명 ‘가치와 값이 다르건만 / 더 손을 내밀지 못하는’ 것이 시인의 타고난 천성(天性)이다.
한편 시인은 ‘늙어서까지’ 시간과 정열을 아껴 쓰는 부지런한 정진을 통해 일견 어리석고 궂은 것처럼 보이는 ‘비극적 사랑’을 평생 동안 고독하게 노래하는 사람들이며, 때로는 ‘술 한 잔’으로 허전한 마음을 달래며 인생의 긴 여정을 쓸쓸히 가는 사람들이다. 신명이 나지 않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쌀알만한’ 가치라도 있는 글감이라고 생각하면 놓치지 않고 그것을 작품화한다. 어떤 소재를 선택하든지 간에 시인은 그것과 혼연일체가 되어 자신의 영혼을 불어넣음으로써 마침내 그것을 살아 번득이는 하나의 위대한 예술품으로 만들어 낸다. 흐르는 강물처럼 세월이 흘러가도 시인의 정신은 한 편의 시로 남아 있음에 비해, 시인의 육신은 이미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이렇듯 김광섭은 시인을 세속적 욕망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고독의 깊은 늪에서 평생을 자신과 싸우며 오직 시 한 편을 위해 모든 것을 불사르는 거룩한 존재로 그리고 있다.
[작가소개]
김광섭(金珖燮)
이산(怡山)
1905년 함경북도 경성 출생
1924년 중동학교 졸업
1932년 와세다대학 영문과 졸업, 극예술연구회 참가
1945년 중앙문화협회 창립
1950년 『문학』 발간
1952년 경희대학교 교수
1956년 『자유문학』 발간
1957년 서울시문화상 수상
1961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974년 예술원상 수상
1977년 사망
시집 : 『동경』(1938), 『마음』(1949), 『해바라기』(1957), 『이삭을 주을 때』(1965), 『성북동
비둘기』(1969), 『반응-사회시집』(1971), 『김광섭시전집』(1974), 『동경』(1974),
『겨울날』(1975), 『김광섭』(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