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릉도원 찾아 이 산등성이 저 골짝 헤매지 말라”
신선세계 봄이 다해 꽃 시들어 쇠잔하나,
산호나무 우거진 숲에 해가 밝고 밝구나…
무릉도원을 찾아서 헤매지 말라.
괜스레 신은 닳고 옷만 헤어진다.
눈앞에는 언제나 빛나는 세상이다.
선사는 그 빛나는 세상에서도 모습을 감췄다.
땅에서는 낱낱 것을 찾아다니며 살펴야 하지만 하늘에서는 단번에 모든 것을 본다.
강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구구절절 설명을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한 마디 말로 모든 것을 꿰뚫는다. 계속 채찍을 휘둘러야 한다면 훌륭한 말이 아니다. 한 번의 채찍소리로 천리를 내닫는 법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만년(萬年)의 세월과 한 생각(一念)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보지만, 지혜로운 이는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미 지혜가 열렸기에 만년이 곧 일념에 다 포용되며 일념으로 만년을 관통하는 것이다.
말은 간단하지만 이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위와 같은 초월적 경지는 언어의 개념으로 풀이되는 것이 아니다. 공부의 맛을 좀 안 사람들이라도 대개 끝없이 설명을 해야 기뻐하지만, 초월적 경지에 이른 사람은 설명 자체가 필요 없는 것이다.
자, 어떻게 하면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위산 영우(山 靈祐, 771~853)선사는 백장(百丈)선사의 법제자이다. 제자 앙산(仰山)선사와 더불어 위앙종의 종조(宗祖)로 꼽힌다.
15세에 건선사(寺)의 법상율사 아래 출가하여 대소승 경전과 계율을 연구하였다. 23세에 강서지방으로 건너가 백장선사를 뵈었는데, 바로 제자로 받아들여 윗자리에 앉혔다고 한다.
어느 날 백장선사가 옆에 서 있는 영우스님에게 물었다. “누구냐?” “영우입니다.” “화로 속에 불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해라.”
한참을 살핀 후 답했다. “없습니다.”
백장선사께서 직접 화로를 깊숙이 헤쳐서 작은 불씨를 하나 찾아낸 후, 들어 보이면서 말씀하셨다. “이게 불이 아닌가?”
영우스님이 깨닫고서 절을 한 뒤에 자기의 견해를 펴니, 백장선사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잠시 나타난 갈림길일 뿐이다. 경에 이르기를 ‘불성을 보고자하면 마땅히 시절인연을 관찰해야 한다’고 하였다. 시절이 이르게 되면 마치 미혹했다가 홀연히 깨달은 것 같고 잊었다가 문득 기억해낸 것과 같아서, 비로소 그것이 본래 자기 물건이었지 남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살피게 된다.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깨달아 마치면 깨닫지 못한 것과 같고, 마음이 없으면 또한 법도 없다’고 하셨다. 이는 다만 허망하게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따위의 마음이 없고, 본래의 심법(心法)이 원래 스스로 갖춰진 것을 말한다. 자네가 이제 그렇게 되었으니, 잘 보호해 지녀라.”
백장선사는 영우스님에게 위산(山)에 가서 도량을 만들라고 했다. 처음에는 원숭이와 벗하여 도토리 등으로 연명하였으나 점차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절을 이루게 되었다. 대장군인 이경양(李景讓)이 황제께 아뢰어 동경사(同慶寺)라는 이름을 내리게 되고, 다시 상국(相國, 정승)인 배휴(裵休)가 와서 지도를 받음으로 해서 천하에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40여년 지도하면서 41명의 깨달은 제자를 두었고, 그 수제자가 앙산(仰山)선사이다. 위산에서 83세로 입적하셨고, 황제는 대원(大圓)선사라고 시호를 내렸다.
본칙 원문
擧 山五峰雲巖 同侍立百丈 百丈問山 倂却咽喉唇吻作生道 山云却請和尙道 丈云 我不辭向汝道 恐已後喪我兒孫
본칙 번역
이런 얘기가 있다.
위산스님과 오봉스님과 운암스님이 함께 백장선사를 모시고 서 있었다.
백장선사께서 위산스님에게 물었다. “목구멍과 입술을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말하겠느냐?”
위산스님이 말하였다. “오히려 스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길 청하옵니다.”
백장선사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하는 것은 사양치 않겠으나, 이후에 나의 자손을 잃을까 염려되는구나.”
강설
백장선사께서 멋진 잔치를 베푸셨다. 만일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백장 노인네가 베푼 잔치지만 스스로가 주인공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노인네가 소득 없는 잔치를 베풀겠는가.
백장선사께서 제자 위산스님에게 날카로운 양날의 칼을 내밀며 한번 잡아보라고 시험을 하셨다. 아차하면 손이 날아갈 판이다. “입 꽉 다물고 말을 해 보라!”
위산스님은 스승 백장선사께서 아끼던 제자였다. 바로 스승의 칼자루를 뺏어서 스승을 겨누는 솜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스승님께서 입도 벙긋 말고 말씀해 보시지요.” 이 얼마나 멋진 솜씨인가. 그렇다고 함부로 흉내를 내다간 죽을 수도 있다. 백장 노인네의 솜씨는 그래도 제자보다는 한 수 위다. 뺏긴 칼자루를 얼른 되뺏어서 그 칼의 광채를 보여주었다. “말해줄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하면 모두가 눈멀고 말 것이다.” 참으로 노련한 솜씨이다.
송 원문
請和尙道 虎頭生角出荒草
十洲春盡花凋殘 珊瑚樹林日)로다
황초(荒草) 거친 풀숲. 가시덤불.
십주(十洲) 신선들이 산다는 열 가지 이상향. 온갖 진귀한 보석 등이 나온다는 세상임.
송 번역
오히려 스님께서 말씀하길 청한다 함이여,
호랑이 머리에 뿔 생겨 가시덤불 나오네.
신선세계 봄이 다해 꽃 시들어 쇠잔하나,
산호나무 우거진 숲에 해가 밝고 밝구나.
강설
설두화상이 제1구와 제2구에서 “오히려 스님께서 말씀하길 청한다 함이여, 호랑이 머리에 뿔 생겨 가시덤불 나오네”라고 하여 위산의 솜씨를 칭찬하셨다.
백장선사의 질문은 거친 가시덤불이었다. 정말 칼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가시덤불에 상처투성이의 몰골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스승의 솜씨를 꿰뚫고 있는 위산스님이었다. 빈손에 칼자루를 쥐어준 격이니, 바로 호랑이가 머리에 뿔까지 돋은 셈이었다. 그리고는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스승에게 덤비니, 천하의 백장선사가 아니었다면 혼비백산하고 말았을 것이다.
송의 제3구와 제4구에서 설두선사는 “신선세계 봄이 다해 꽃 시들어 쇠잔하나, 산호나무 우거진 숲에 해가 밝고 밝구나”라고 하여 두 선사의 진면목을 보여주셨다.
목구멍과 입술을 놀려 가장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면 무엇이 될까? 신선들이나 사는 이상향인 십주일 것이다. 봄날 화려한 꽃 가득한 이상을 그리던 사람들에게 백장선사와 위산스님은 순식간에 그 꽃을 지게하고 말았다.
그러면 무엇이 남을까? 꿈을 깬 사람은 무엇을 볼까? 무릉도원을 찾아 이 산등성이와 저 골짝을 헤매지 말라. 괜스레 신은 닳고 옷만 헤진다. 눈앞에는 언제나 빛나는 세상이다. 하지만 백장선사와 위산스님은 그 빛나는 세상에서도 모습을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