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해서 해탈이 안 되는 이유를 말한다
소위 공(空), 좀 어렵게 말하자면 I AM(자존자),
불생불멸의 우주에 변만(遍滿)해 있는 자존자, 무시 이전의 스스로 있는 자존자,
진여, 힌두교에서 이야기하는 범(梵, Brahman), 이것을 보는 경계가
다시 말해 본성을 보는 경계가 견성(見性)이올시다. 그 경계를 견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는 것 가지고는 해탈이 안 됩니다. 보는 것 가지고는 해탈이 아닙니다.
그 경계하고 나하고 하나가 되어 버려야 됩니다. 계합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 계합은 붓다의 위(位)에 올라가서 계합이 됩니다.
붓다의 자리에 가서 완전히 계합이 됩니다.
그래서 법신불이 생기고, 법신불의 유형의 영구적인 지복의 몸인
보신(報身)이 생기는 거예요. 계합이 되어서 그 계합이 된 그것이
이목구비가 갖추어진 불신(佛身)이 생기는 거예요.
아직도 이 불신이 생기는 것을 부처님 이후로 누구도 모릅니다.
그런데 더 깊은 것이 있어요.
불신이 생기는 이유를 알아야 되는데 여러분, 그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붓다는 압니다. 불신이 생기는 이유가 있어요.
저 절대계, 현상계를 넘어가서, 상대세계·유무의 세계·시비의 세계·상대의 세계를
넘어간 저 세계를 본체의 세계라 그래. 본체계.
그러니까 본체의 실상을 봐버린 것이 견성이어요. 견성.
그런데 거기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적멸로 들어갈수록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니르바나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 세계는 언어로 표현 못해요.
이미 현상세계를 넘어 버리면 언어도단(言語道斷)이 되고,
심행처멸(心行處滅)이 되는 거예요. 심행처멸이 되어버려.
여러분, 견성한 사람들이 선문답을 하잖아요. 선문답을 못 알아듣잖아요.
그 자리를 뚫어 본 사람(들어가 본 사람)은 알아들어요.
그런데 그 선문답이 다가 아니어요. 그것을 해탈로 인정해 줄 수가 없어요.
해탈로 인정해 줄 수 없어. 해탈을 하려면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나(我)라고 하는 생각이, 이 몸뚱이에 대한 착이 떨어져 버려야 되요.
거기가 아라한인 거예요. 거기가 해탈의 자리예요.
그래서 주~욱 선정으로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해탈의 자리까지 갈 때 많은 선정이 있습니다.
《아함경》에 나옵니다. 네 선정이 있어요.
초선정(초선), 이선, 삼선, 사선. 그다음에 무색계 네 선정이 있어요.
무색계 정이 네 개가 있어요. 그걸 통과하면 이제 멸진정이 있어요.
그것이 아라한 정이어요. 아라한 삼매예요.
그런데 대승불교로 오면 이제 보살이 드는 삼매, 붓다가 드는 삼매가 주~욱 나와요.
그것을 학승들은 구분 못해요. 그래서 우리 영산불교에서는 아라한 삼매,
보살의 많은 삼매, 보살의 많은 삼매 중에서 아주 높은 삼매가 십지보살이 드는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 그리고 해인삼매(海印三昧),
《화엄경》을 썼다고 하는 해인삼매. 거기에서도 붓다가 드는 삼매는
백천삼매라고도 하고, 대적광삼매라고도 하고, 대적정삼매라고도 하는데,
그걸 들면 붓다인 거예요. 그건 들 수가 없어요.
해인삼매에서도 대적정삼매에 들려면 바위에다가 계란 때리기와 같다고 그래요.
출처:2011년 자재 만현 큰스님 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