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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우일모(九牛一毛)
아홉 마리의 소 가운데 박힌 하나의 털이란 뜻으로, 매우 많은 것 가운데 극히 적은 수를 이르는 말이다.
九 : 아홉 구(乙/1)
牛 : 소 우(牛/0)
一 : 한 일(一/0)
毛 : 털 모(毛/0)
(유의어)
대해일속(大海一粟)
대해일적(大海一滴)
조족지혈(鳥足之血)
창해일속(滄海一粟)
창해일적(滄海一滴)
아홉 마리 소에 털 한가닥이 빠진 정도라는 뜻으로, 아주 큰 물건 속에 있는 아주 작은 물건이나, 여러 마리의 소의 털 중에서 한 가닥의 털 또는 대단히 많은 것 중의 아주 적은 것의 비유이다. 덩치가 큰 소의 털은 당연히 많다. 그래서 ‘쇠털같이 많다’는 속담은 수효가 셀 수 없이 많음을 비유한다.
소가 아홉 마리라면 더 셀 수가 없다. 아홉 마리의 소(九牛) 가운데 박힌 하나의 털(一毛)은 매우 많은 것 가운데 극히 적은 수를 말한다. 아울러 아주 큰 물건 속에 끼여 있는 하찮은 물건, 무시해도 좋은 것을 말할 때도 사용한다.
아득히 넓은 바다에 떠 있는 좁쌀 한 톨이란 뜻의 창해일속(滄海一粟)나 곡식창고 속의 사료 한 알이란 태창제미(太倉稊米) 등도 같은 의미를 가진 성어다.
중국 최고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이 쓴 글에서 이 성어가 유래했다. 본기와 열전 등으로 나눠 기술한 기전체(紀傳體)의 효시 사기(史記)는 역대 정사의 모범이 됐다. 불후의 역사서를 남긴 사마천은 그러나 최고의 악조건 속에서 이 책을 썼다. 한(漢)나라 무제(武帝)때 역사를 기록하는 태사령(太史令)으로 있었던 사마천이 친구를 변호하다 생식기를 잘리는 중죄를 받고 치욕 속에서 완성했기 때문이다.
이릉(李陵)이란 장군은 북방에서 날뛰던 흉노를 수차례 무찔러 큰 공을 세웠지만 5000의 적은 군사로 8만 대군과 싸우다 사로잡히고 말았다. 대노한 무제가 이릉의 가족을 목 베고 죄를 추궁하는 어전회의를 열었을 때 홀로 사마천이 변호에 나섰다. 이릉의 과거 전공과 인품을 이야기하며 무제의 처사가 심하다고 했다가 하옥된 뒤 궁형(宮刑)을 받았다. 사서를 완성하라는 부친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사마천은 이때의 심정을 친구에 보낸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에서 밝히고 있다. "만약 제가 형벌에 복종하여 죽음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숱한 소들의 몸에서 털 하나를 잃어버리는 격이니 땅강아지나 개미의 죽음과 무엇이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假令僕伏法受誅, 若九牛亡一毛, 與螻蟻何以異)?"
이렇게 해서 목숨을 이은 사마천이 저술에 착수한지 18년 만에 천고에 남을 사기를 완성하게 된 것이다. 아주 하찮은 것이라 자신도 무시하고 남에게서 무시당하기도 한다. 또 치욕에 견디는 것은 힘들다. 사마천은 죽었다면 숱한 쇠털 중 하나였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여 대작을 남겼다. 자신의 앞에 닥친 불행이나 수치를 이겨내는 지혜를 발휘해야 더 큰 앞날이 기다린다.
구우일모(九牛一毛)
아홉마리 소(牛) 중의 털(毛) 한개라는 말로, 많은 수 중에서 가장 적은 수를 뜻하며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일을 비유한 말이다. 구우(九牛)는 소 아홉 마리, 일모(一毛)는 하나의 털을 뜻한다. 즉, 아홉 마리의 소의 털 가운데 하나의 털이라는 것으로, 많은 것 가운데서 매우 적은 것을 말한다.
사마천(司馬遷)의 보임안서(報任安書)에 나온 '설사 내가 복종하여 죽임을 당할지라도 아홉 마리 소에서 한 개의 터럭을 잃는 것과 같아(假令僕伏法受誅 若九牛亡一毛 가령복복법수주 약구우망일모)'에서 비롯되었다.
수많은 소들 가운데 하나의 터럭이라는 구우일모(九牛一毛) 고사는 글자 그대로 볼 것 없는 하찮은 존재를 의미한다. 다른 표현으로 망망대해에 좁쌀 한 톨이라는 의미의 창해일속(滄海一粟)과 같다. 하지만 구우일모 고사 이면에는 인류의 장구한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의 비장한 심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인류 역사문학의 최고봉으로도 표현하는 사기(史記)라는 역사서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사기를 쓴 저자 사마천(司馬遷)의 일화에서 나온 고사가 바로 구우일모(九牛一毛)이다. 사마천의 역사 인식과 자신의 비장한 심정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사기의 내용을 볼 때, 과연 그가 왜 구우일모라 표현하고 ‘하늘의 도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天道是耶非耶 천도시야비야)?’ 하고 원망스럽게 외쳤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사기 열전을 보면 첫번째 인물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백이전(伯夷傳)를 제시하고 있다. 간략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 고대 은(殷)나라 폭군 주왕(紂王) 때의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이었던 백이와 숙제는 당시 서역(西域)의 백(伯: 국경 수비장)이었던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 소문을 듣고 주(周)나라로 들어가지만 주(周)나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문왕은 죽고 그 아들인 무왕(武王)이 즉위한 뒤였다. 곧 무왕의 신하가 된 두 형제는 충신으로 자신들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는데, 당시 천자인 은(殷)나라의 주왕이 주지육림(酒池肉林)을 일삼으며 학정(虐政)을 거듭하자 무왕은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이때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잡고 신하된 입장에서 왕을 시해한다는 것은 불가하다고 간언(叩馬而諫)을 하지만 무왕은 이를 뿌리치고 주왕을 제거하고 주(周)나라를 세운다. 낙담한 백이와 숙제는 '이러한 나라에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 하면서 주나라의 음식과 의복은 입지도 먹지도 않는다'하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만으로 연명하다가 결국 굶어 죽고 말았다.
백이와 숙제처럼 진정한 충신으로 의롭게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굶어 죽고, 천하의 대도적인 도척(盜척)과 같은 사람은 천도(天壽)를 다 누리는 일을 보면 과연 천도(天道)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를 사마천은 원망스럽게 탄식한 것이다. 더욱이 사마천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심정을 바로 고대의 백이와 숙제에게 의탁했다고 볼 수 있다.
한서(漢書) 사마천전(司馬遷傳)에 있는 그의 일생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사관(史官) 집안에서 난 사마천은 부친의 숙원이었던 중국의 역사서를 완성하고자 하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마천에게 큰 불행이 닥쳐오게 된다. 한(漢)나라 7대 황제(皇帝)인 무제(武帝) 때 5000의 보병을 이끌고 흉노를 정벌하러 나갔던 이릉(李陵) 장군은 열 배가 넘는 적의 기병을 맞아 초전(初戰) 10여 일간은 잘 싸웠으나 결국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듬해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난전(亂戰)중에 전사한 줄 알았던 이릉이 흉노에게 투항하여 후대(厚待)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안 무제는 크게 노하여 이릉의 일족을 참형(慘刑)에 처하라고 엄명했다. 그러나 중신을 비롯한 이릉의 동료들은 침묵속에 무제의 안색만 살필 뿐 누구 하나 이릉을 위해 변호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를 분개한 사마천이 그를 변호하고 나섰다. 사마천은 지난날 흉노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던 이광(李廣) 장군의 손자인 이릉을 평소부터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국난에 임할 용장이라고 굳게 믿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사가(史家)로서의 냉철한 눈으로 사태의 진상을 통찰하고 대담하게 무제에게 아뢰었다. '황공하오나 이릉은 소수의 보병으로 오랑캐의 수만 기병과 싸워 그 괴수를 경악케 하였으나 원군은 오지 않고 아군속에 배반자까지 나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패전한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하오나 끝까지 병졸들과 신고(辛苦)를 같이 한 이릉은 인간으로서 극한의 역량을 발휘한 명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옵니다. 그가 흉노에게 투항한 것도 필시 훗날 황은(皇恩)에 보답할 기회를 얻기 위한 고육책(苦肉策)으로 사료되오니, 차제에 폐하께서 이릉의 무공을 천하에 공표 하시오소서.'
무제는 진노하여 사마천을 투옥한 후 궁형(宮刑)에 처했다. 세인(世人)은 이 일을 가리켜 이릉의 화(李陵之禍)라 일컫고 있다. 궁형이란 남성의 생식기를 잘라 없애는 것으로 가장 수치스런 형벌이었다.
사마천은 이를 친구인 임안(任安)에게 알리는 글(報任安書)에서 최하급의 치욕이라고 적고, 이어 착잡한 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법에 따라 사형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한낱 ‘아홉 마리의 소 중에서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과 같을 뿐이니 나와 같은 존재는 땅강아지나 개미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나? 그리고 세상 사람들 또한 내가 죽는다 해도 절개를 위해 죽는다고 생각하기는 커녕 나쁜 말하다가 큰 죄를 지어서 어리석게 죽었다고 여길 것이네.'
사마천이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살아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사마천은 태사령(太史令)으로 봉직했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이 임종시에 '통사(通史)를 기록하라'고 한 유언에 따라 사기(史記)를 집필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기를 완성하기 전에는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중국 최초의 사서(史書)로서 불후의 명저로 꼽히는 사기 130여권이 완성되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사미천의 일생을 보면 그가 왜 백이와 숙제를 열전의 첫 번째 인물로 제시했는지, 또 왜 천도비야시야(天道是耶非耶)를 부르짖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구우일모(九牛一毛)
아홉 마리 소에 털 한 가닥이 빠진 정도라는 뜻으로, 대단히 많은 것 중 아주 적은 것의 비유이다.
한나라 7대 황제인 무제 때 장군 이릉(李陵)은 흉노를 정벌하러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다. 열 배가 넘는 적의 군사를 맞아 10여 일간 치열하게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듬해 뜻밖의 사실이 밝혀졌다. 전쟁 중 죽은 줄 알았던 이릉이 흉노에 투항해 후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분노한 무제는 이릉 일족을 참형하라고 명했으나 중신들은 무제의 얼굴만 살필 뿐 누구 하나 옹호하는 자가 없었다. 사마천이 그를 변호하고 나섰다. '소수의 보병으로 수만의 오랑캐와 싸우다 흉노에 투항한 것은 훗날 황제의 은혜에 보답할 기회를 얻기 위함일 것입니다.'
사마천은 흉노들이 가장 무서워한 이광 장군의 손자 이릉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나라를 구할 용장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이에 진노한 무제는 사마천을 옥에 가두고 궁형(생식기를 잘라 없애는 형벌)을 내렸다. 남자로서 너무나 수치스러운 형벌이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때의 일을 '이릉의 화(李陵之禍)'라고 부른다.
사마천은 옥중에서 친구 임안에게 자신의 참담한 심경을 밝힌 편지를 썼다. '내가 법에 의해 사형을 받아도 아홉 마리의 소 중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뿐이니, 나와 같은 자가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내가 이런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고도 죽지 않았으니 졸장부라고 여길걸세.'
아홉 마리 소 가운데서 뽑은 한 개의 털을 뜻하는 구우일모(九牛一毛)는 아주 많은 것 중에서 가장 적은 것을 비유하며, 친구에게 보낸 사마천의 편지가 출처다. '한서'나 '문선' 등에 나온다.
사마천이 이런 치욕을 견딘 것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자 함이었다. 당시 그는 태사령(조정의 사서)이던 아버지 사마담이 통사(通史)를 쓰라고 유언을 남김에 따라 사기(史記)를 집필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 후 중국 최초의 역사서로, 불후의 명저로 꼽히는 사기 130권이 완성돼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구우일모(九牛一毛)와 사마천(司馬遷)
아홉 마리 소에서 뽑은 털 한 가닥이라는 뜻으로, 엄청나게 많은 것 중의 아주 작은 부분, 즉 지극히 미미한 존재를 의미한다. 이 표현은 전체에 비해 아주 작은 부분이거나 대수롭지 않은 것을 비유할 때 사용된다. 예를 들어, 엄청난 재산을 가진 사람이 아주 적은 돈을 잃었을 때 그 금액이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구우일모는 어떤 상황에서 중요하지 않은 작은 부분을 나타낼 때 적합한 표현이다.
우리 일상에서 구우일모는 자주 사용되지는 않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매우 적절한 비유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규모 프로젝트에서 작은 실수가 전체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때, 그 실수를 구우일모에 비유할 수 있다. 이처럼 구우일모는 상대적인 규모와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유용한 표현이다.
과거 중국에서 시행되던 궁형(宮刑)은 남성의 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이었다. 이 형벌을 선고 받으면 많은 죄수가 미련없이 죽음을 선택했다. 차라리 죽음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불의의 사고로 신체의 일부를 잃은 개인은 타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게 마음까지 병든다고 한다. 심리학적 실험을 통해서도 확인된 사실이다.
구우일모(九牛一毛), 앞 두 글자 '구우(九牛)'는 '아홉 마리 소'다. '일모(一毛)'는 '털 한 올'이다. 이 두 부분이 합쳐져 '아홉 마리나 되는 소 가운데 겨우 털 한 가닥'이란 의미가 성립한다. '넓은 바다 가운데 좁쌀 한 알'을 뜻하는 '창해일속(滄海一粟)'과 함께 '매우 적음'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사마천은 한(漢)나라의 역사가다. 특이하게 그의 초상화엔 수염이 없다. 사기(史記) 집필을 겸하며 순탄하게 고관 벼슬을 하던 40대 중반에 민감한 사건에 연루되어, 궁형을 선고 받고 고환을 제거당했기 때문이다.
동양의 헤로도토스로 칭해지기도 하는 사마천(司馬遷)은 사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천문, 달력, 기록 등을 담당하는 고위 관료인 태사령(太史令) 신분이던 부친의 권유로 20대 초반에 중국 각지를 답사하며 역사가의 자질을 키웠다. 35세에 부친을 여의었고, 3년 후 태사령 지위에 올랐다.
사마천은 42세부터 부친의 유언을 받들어 역사서 편찬에 본격 착수했다. 그가 죽음 대신 궁형을 선택한 것은 이미 착수한 사기 저술 임무를 완성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죽는 선택을 한다고 해봐야 아홉 마리 소 가운데 고작 털 한 올이 없어지는 그런 일에 불과할 걸세." 궁형을 선택할 때의 참담한 심경을 사마천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구우일모는 여기에서 유래했다.
사기 집필과 관련해 사마천은 세 번의 큰 결단을 내렸다. 첫째, 42세에 사기 집필에 착수했다. 둘째,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47세에 죽음 대신 궁형을 선택했다, 셋째, 역사서 춘추(春秋)를 저술한 공자의 서술 방식이나 유교 이데올로기에 자신을 스스로 가두지 않았다.
그는 사기를 집필하면서 노자의 도교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기록된 여러 인물과 관련 일화들도 천편일률적이지 않다. 내용과 형식 모두 딱딱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덕분에 요즘에도 고전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의 필독서로 꼽힌다.
사기의 열전(列傳)엔 무려 500명 이상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단조롭지 않고 무척 입체적인 느낌을 준다. 고대 중국의 문장가, 학자, 정치인, 무인, 자객과 협객, 해학가, 관료, 상인 등 시대를 풍미한 인물들의 일화가 주된 내용이다. 분량도 사기 전체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바른 것을 북돋우기 위해 '열전'을 짓는다. 즉, 재능이 뛰어나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때를 잃지 않거나 천하에 공명을 이뤄나가는 이들을 위해 썼다. 사마천이 직접 요약한 열전 저술의 취지다.
그는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와 세상의 부조리를 사기에 투영하며 남은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그가 부당한 억압에 저항하고 결국 통쾌하게 복수까지 하는 인물들을 많이 다루고 부각한 이유다. 가능하면 권문세가보다 약자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사마천은 궁형이 집행된 직후 이렇게 하늘을 향해 절규했다. "이것이 내 죄인가! 이것이 내 죄인가! 몸이 훼손되어 이제 쓸모가 없게 되고 말았구나."
사기를 집필하며 그는 ‘창자가 하루에도 9번 뒤틀리는(腸一日而九回)’ 육체적 고통을 견뎌야만 했다. 여름철엔 악취를 풍겨 가족들도 그와 거리를 뒀다. 내면과의 치열하고 고독한 전투를 마친 대(大) 역사가의 위엄이란 바로 이런 걸까?
사기 어디를 읽어봐도 분위기나 필체에서 패배자라는 자의식을 발견하기 어렵다. 비이성적 전횡을 휘두르던 권력에 의해 신체의 중요한 한 부분을 제거당하거나 죽어야 하는 갈림길에서, 그는 ‘구우일모’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일관된 의지로 사기를 완성하고 청사(靑史)에 미명(美名)을 남겼다. 놀랍고 왠지 위안도 된다.
▶️ 九(아홉 구, 모을 규)는 ❶지사문자로 玖(구)와 동자(同字)이다. 다섯 손가락을 위로 펴고 나머지 손의 네 손가락을 옆으로 편 모양을 나타내어 아홉을 뜻한다. ❷상형문자로 九자는 숫자 '아홉'을 뜻하는 글자이다. 九자는 乙(새 을)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새'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九자의 갑골문을 보면 사람의 손과 팔뚝이 함께 그려져 있었다. 고대에는 又(또 우)자처럼 사람의 손을 3개의 획으로만 표기했었지만 九자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구부러진 팔뚝까지 그린 것이다. 九자는 구부린 사람의 팔뚝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본래의 의미도 '팔꿈치'였다. 그러나 후에 숫자 '아홉'으로 가차(假借)되면서 본래의 의미는 더는 쓰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후에 肘(팔꿈치 주)자가 따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九(구, 규)는 ①아홉 ②아홉 번 ③많은 수 ④남방(南方), 남쪽 ⑤양효(陽爻), 주역(周易)의 양수(陽數) ⑥오래된 것 ⑦많다 ⑧늙다 그리고 모을 규의 경우는 ⓐ모으다, 모이다(규) ⓑ합하다, 합치다(규)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아홉 겹으로 구중궁궐의 준말을 구중(九重), 많은 영토를 구유(九有), 아흔의 한자어를 구십(九十), 한 해 가운데 아홉째 달을 구월(九月), 나라의 영토를 구주(九州), 넓은 하늘을 구건(九乾), 아홉 마리의 소를 구우(九牛), 땅의 가장 낮은 곳을 구지(九地), 사방으로 곧게 십자로를 이루고 옆으로 여러 갈래로 된 도시의 큰 길을 구규(九逵), 맑게 갠 가을 하늘을 구민(九旻),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를 구미호(九尾狐), 아홉 층으로 된 탑을 구층탑(九層塔), 아득히 먼 거리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구만리(九萬里), 구멍이 아홉 뚫린 탄을 구공탄(九孔炭), 국화과의 여러해살이 풀을 구절초(九節草), 아홉 마리의 봉황을 수놓은 베개를 구봉침(九鳳枕), 여러 가지 꽃무늬를 놓은 아름다운 장막을 구화장(九華帳), 아홉 마리 소에 털 한가닥이 빠진 정도라는 뜻으로 아주 큰 물건 속에 있는 아주 작은 물건을 이르는 말을 구우일모(九牛一毛), 아홉 번 구부러진 간과 창자라는 뜻으로 굽이 굽이 사무친 마음속 또는 깊은 마음속을 이르는 말을 구곡간장(九曲肝腸), 아홉 번 꺾어진 양의 창자라는 뜻으로 세상이 복잡하여 살아가기 어렵다는 말을 구절양장(九折羊腸), 아홉번 죽을 뻔하다 한 번 살아난다는 뜻으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겪고 간신히 목숨을 건짐을 이르는 말을 구사일생(九死一生) 등에 쓰인다.
▶️ 牛(소 우)는 ❶상형문자로 뿔이 달린 소의 머리 모양을 본뜬 글자로 소를 뜻한다. 뿔을 강조하여 羊(양)과 구별한 글자 모양으로, 옛날 중국에서는 소나 양을 신에게 빌 때의 희생의 짐승으로 삼고 신성한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에 글자도 상징적이며 단순한 동물의 모양은 아니다. ❷상형문자로 牛자는 ‘소’를 뜻하는 글자이다. 牛자의 갑골문을 보면 뿔이 달린 소의 머리가 간략하게 그려져 있었다. 갑골문에서부터 소전까지는 이렇게 소의 양쪽 뿔이 잘 묘사되어 있었지만, 해서에서는 한쪽 뿔을 생략해 ‘절반’을 뜻하는 半(반 반)자와의 혼동을 피하고 있다. 농경 생활을 하는 민족에게 소는 매우 중요한 동물이었다. 느리지만 묵직한 힘으로 밭을 갈거나 물건을 옮길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편 소는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牛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제물(祭物)’이나 ‘농사일’과 관련된 뜻을 전달한다. 그래서 牛(우)는 성(姓)의 하나로 ①소(솟과의 포유류) ②별의 이름, 견우성(牽牛星) ③우수(牛宿: 28수의 하나) ④희생(犧牲) ⑤고집스럽다 ⑥순종(順從)하지 않다 ⑦무릅쓰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소 축(丑), 짐승 축(畜)이다. 용례로는 소의 젖을 우유(牛乳), 소의 뿔을 우각(牛角), 소와 말을 우마(牛馬), 소를 부려 밭을 갊을 우경(牛耕), 소를 잡는 데 쓰는 칼을 우도(牛刀), 소의 가죽을 우피(牛皮), 소 걸음이란 뜻으로 느린 걸음을 우보(牛步), 소의 궁둥이로 전하여 세력이 큰 자의 부하에 대한 비유를 우후(牛後), 소의 수컷으로 수소를 모우(牡牛), 소의 암컷으로 암소를 빈우(牝牛), 털빛이 검은 소를 흑우(黑牛), 소싸움 또는 싸움 소를 투우(鬪牛), 식용할 목적으로 사육하는 소를 육우(肉牛), 주로 일을 시키려고 기르는 소를 역우(役牛), 쇠귀에 경 읽기란 뜻으로 우둔한 사람은 아무리 가르치고 일러주어도 알아듣지 못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우이독경(牛耳讀經), 소가 물을 마시듯 말이 풀을 먹듯이 많이 먹고 많이 마심을 우음마식(牛飮馬食), 소 잡는 칼로 닭을 잡는다는 뜻으로 큰 일을 처리할 기능을 작은 일을 처리하는 데 씀을 이르는 말을 우도할계(牛刀割鷄), 소가 밟아도 안 깨어진다는 뜻으로 사물의 견고함의 비유를 우답불파(牛踏不破), 소를 삶을 수 있는 큰 가마솥에 닭을 삶는다는 뜻으로 큰 재목을 알맞은 곳에 쓰지 못하고 소소한 일을 맡기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을 우정팽계(牛鼎烹鷄), 소 궁둥이에 꼴 던지기라는 뜻으로 어리석은 사람은 가르쳐도 소용이 없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우후투추(牛後投芻), 양으로 소와 바꾼다는 뜻으로 작은 것을 가지고 큰 것 대신으로 쓰는 일을 이르는 말을 이양역우(以羊易牛) 등에 쓰인다.
▶️ 一(한 일)은 ❶지사문자로 한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젓가락 하나를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하나를 뜻한다. 一(일), 二(이), 三(삼)을 弌(일), 弍(이), 弎(삼)으로도 썼으나 주살익(弋; 줄 달린 화살)部는 안표인 막대기이며 한 자루, 두 자루라 세는 것이었다. ❷상형문자로 一자는 ‘하나’나 ‘첫째’, ‘오로지’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一자는 막대기를 옆으로 눕혀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막대기 하나를 눕혀 숫자 ‘하나’라 했고 두 개는 ‘둘’이라는 식으로 표기를 했다. 이렇게 수를 세는 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그래서 一자는 숫자 ‘하나’를 뜻하지만 하나만 있는 것은 유일한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오로지’나 ‘모든’이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一자가 부수로 지정된 글자들은 숫자와는 관계없이 모양자만을 빌려 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一(일)은 (1)하나 (2)한-의 뜻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하나, 일 ②첫째, 첫번째 ③오로지 ④온, 전, 모든 ⑤하나의, 한결같은 ⑥다른, 또 하나의 ⑦잠시(暫時), 한번 ⑧좀, 약간(若干) ⑨만일(萬一) ⑩혹시(或時) ⑪어느 ⑫같다, 동일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한가지 공(共), 한가지 동(同),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무리 등(等)이다. 용례로는 전체의 한 부분을 일부(一部), 한 모양이나 같은 모양을 일반(一般), 한번이나 우선 또는 잠깐을 일단(一旦), 하나로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음을 고정(一定), 어긋남이 없이 한결같게 서로 맞음을 일치(一致), 어느 지역의 전부를 일대(一帶), 한데 묶음이나 한데 아우르는 일을 일괄(一括), 모든 것 또는 온갖 것을 일체(一切), 한 종류나 어떤 종류를 일종(一種), 한집안이나 한가족을 일가(一家), 하나로 연계된 것을 일련(一連), 모조리 쓸어버림이나 죄다 없애 버림을 일소(一掃), 한바탕의 봄꿈처럼 헛된 영화나 덧없는 일이라는 일장춘몽(一場春夢), 한 번 닿기만 하여도 곧 폭발한다는 일촉즉발(一觸卽發), 한 개의 돌을 던져 두 마리의 새를 맞추어 떨어뜨린다는 일석이조(一石二鳥), 한 가지의 일로 두 가지의 이익을 보는 것을 일거양득(一擧兩得) 등에 쓰인다.
▶️ 毛(터럭 모)는 ❶상형문자로 芼(모)는 동자(同字)이다. 사람의 눈썹이나 머리털이나 짐승의 털 모양으로, 본디는 깃털의 모양이라고도 하지만, 老(로)의 옛 자형(字形)의 머리털을 나타내는 부분과 닮았다고 한다. ❷상형문자로 毛자는 ‘털’을 뜻하는 글자이다. 毛자는 본래 새의 깃털을 그린 것으로 금문에 나온 毛자를 보면 양 갈래로 뻗어있는 깃털이 표현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毛자는 새나 사람, 짐승의 털을 포괄하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심지어 털처럼 보이는 것까지 毛자가 쓰이고 있어 사용범위가 매우 광범위하다. 상용한자에서는 毛자가 부수로 지정된 글자는 단 1자밖에 없지만, 부수 이외에 글자에서는 모두 ‘털’과 관련된 뜻을 전달하고 있다. 그래서 毛(모)는 (1)동물의 몸에서 깎아낸 섬유(纖維). 털 (2)십진(十進) 급수(級數)의 단위(單位)의 하나. 이(厘)의 아래, 곧 이(厘)의 10분의 1이며 분(分)의 100분의 1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터럭(몸에 난 길고 굵은 털), 털 ②모피(毛皮) ③희생(犧牲) ④짐승 ⑤풀(=芼), 식물 ⑥나이의 차례(次例) ⑦털을 태우다 ⑧잘다, 자질구레하다 ⑨가볍다 ⑩없다 ⑪가늘다 ⑫가려 뽑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터럭 호(毫), 터럭 발(髮)이다. 용례로는 털이 붙어 있는 짐승의 가죽을 모피(毛皮), 사람의 몸에 난 온갖 털을 모발(毛髮), 털구멍을 모공(毛孔), 털실로 짠 피륙을 모직(毛織), 털뿌리를 모근(毛根), 털뿌리가 살갗 밖으로 나온 부분을 모간(毛幹), 담요를 모포(毛布), 모피의 털이 붙어 있는 겉면을 모면(毛面), 털로 만든 물건을 모물(毛物), 털 가진 짐승을 모족(毛族), 털로 만든 방한구를 모구(毛具), 털끝 만한 작은 일이나 죄를 하나하나 들추어 냄을 모거(毛擧), 온 몸에 털이 많이 난 사람을 모인(毛人), 짐승의 몸에 난 털의 길이를 모장(毛長), 몸에 털이 있는 벌레를 모충(毛蟲), 땅이 메말라서 곡물이나 푸성귀 같은 농작물이 잘 되지 아니함을 불모(不毛), 다리에 난 털을 각모(脚毛), 털이 빠짐 또는 그 털을 탈모(脫毛), 몸에 털이 많음을 다모(多毛), 빽빽하게 난 털을 밀모(密毛), 콧구멍의 털을 비모(鼻毛), 털을 옮겨 심음을 식모(植毛), 가는 털을 호모(毫毛), 뿌리의 끝에 실같이 가늘고 부드럽게 나온 털을 근모(根毛), 얼굴에 난 잔털을 면모(面毛), 털을 깎음을 삭모(削毛), 머리털을 물들임을 염모(染毛), 묵은 털이 빠지고 새 털이 나는 일을 환모(換毛), 모수가 스스로 천거했다는 뜻으로 자기가 자기를 추천하는 것을 모수자천(毛遂自薦), 아주 끔직한 일을 당하거나 볼 때 두려워 몸이나 털이 곤두선다는 말을 모골송연(毛骨悚然), 새의 깃이 덜 자라서 아직 날지 못한다는 뜻으로 사람이 성숙되지 못하고 아직 어림을 모우미성(毛羽未成), 배와 등에 난 털이라는 뜻으로 있으나 없으나 문제가 되지 않음을 복배지모(腹背之毛), 일의 가닥이 자차분하고도 어수선함을 비유하는 말을 잠사우모(蠶絲牛毛), 털만으로 말의 좋고 나쁨을 가린다는 뜻으로 겉만 알고 깊은 속은 모름을 이모상마(以毛相馬)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