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 왕을 참하라 (19)
8. 호색한(好色漢) 성종(成宗)
예종(睿宗)과 성종(成宗)
세조(7대)의 맏아들 의경세자가 19세로 요절한 후, 둘째 아들 해양대군인 예종도
즉위한지 겨우 1년 2개월만에 병사하고 말았다.예종의 나이는 스무 살도 채 못되었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침을 뱉은 자리에 종기가 생겨나
두 아들 다 죽었다지?거~봐! 모든게 인과응보(因果應報)야.
예종(睿宗)에게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으나 그때 나이 겨우 4살이었기 때문에
왕실에서는 다른 후보를 찾게 되었다.
후보자는 죽은 의경세자의 장남 월산대군 이정과 차남 자산군 이혈(李娎)이었다.
서열을 따진다면 당연 월산대군이 왕이 되어야 했으나, 세조비인 정희왕후는
한명회와 결탁하여 둘째인 12세 이혈(李娎)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도록 했다.
이혈의 장인이 한명회였던 것이다.
조선 왕조 최초로 수렴첨정을 하게 된 정희왕후는 자산군을 왕으로 세운 이유를,
"원자는 아직 포대기 속에 있고, 월산군은 본디 질병이 있다." 라고 둘러대었다.
세조 때부터 공신이었던 한명회는 장녀를 예종(睿宗)에게 시집보냈다. 시집 간 장순왕후 한씨는
아들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조리가 잘못되어 16세에 죽었으며, 얼마 후 인성 대군도 죽고 말았다.
한명회는 다시 둘째 딸을 의경 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에게 시집 보냈다. 즉 자산군은 숙모의
여동생과 혼인한 것이다.자산군이 성종(成宗)으로 즉위하면서 한명회의 둘째 딸은 공혜왕후가
되었으나 자식이 없었다.
성종(成宗) 즉위후 정희왕후와 한명회는 문무를 겸비한 구성군 이준이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하여
귀양 보내고 그간 세조가 허용했던 종친들의 정치참여를 법으로 금지시켰다.
결국 구성군 몰락사건은 종친을 등용하여 신권에 대항시켰던 왕의 히든카드를 신하들이 빼앗은
사건으로 신권이 왕권에 도전하는 계기가 되었다.왕위를 빼앗긴 제안대군과 월산대군도 죽을 때
까지 몸을 낮추고 어리석은 척하며, 풍류나 즐기면서 살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왕실의 종친은 술, 여자, 골프로 인생을 보내게 되었다.성종(成宗)은 특별한 치적은
없었으나, 조선 임금 중 밑에서 중간은 갔다.
그는 13세에 왕위에 올라 20세가 될 때까지 7년간 정희왕후가 수렴첨정을 했다.
그는 성품이 담대하여 형인 월산 대군과 함께 글을 읽다가 벼락을 맞아 죽은 어린 내시를 보고도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침착 했다고 한다.
성종(成宗)은 비교적 키가 작았던 조선 왕들 중에서 드물게 기골이 장대하고 키가 컸다고 한다.
장대하다니 아마 155~160센티 정도 되지 않았을까?정희왕후의 수렴첨정 기간 동안 임금이 되는
공부가 어느 정도 끝나자 성종(成宗)은 사냥과 술, 여자에 빠져 들었으며 이는 죽을 때까지 계속
되었다.이때가 조선이 가장 융성했던 시기였고, 주변에는 속썩이는 나라도 없었으니 왕이 주색에
빠지지 않으면 심심해서 못 살때였다.
아들 연산군이 마찬가지로 주색 잡기에 몰입한 것도 연산군이 아버지를 빼닮기도 했거니와 당시
시대가 평화로왔기 때문이다.성종 7년이 되어 한명회를 제외한 대부분의 훈구대신들이 사망하자,
성종(成宗)은 남은 훈구파에 대한 대항책으로 사림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이때 등용하여 키운 사람이 아들 연산군에 의해 부관 참시된 김종직이다.
김종직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연산군 때 다시 풀기로 하자.
성종(成宗)의 치세를 평가하면 그는 좋은 시대에 왕위에 올라 큰 과오없이 왕위를 수행한, 그냥
백성들에겐 겨우 밥값이나 한 왕이었다.성종(成宗)은 재위 16년(1485)에 조선의 기본법인 '경국
대전' 을 반포했고, 유교정치의 기틀을 확립했다.또한 두만강과 압록강 이북으로 군사를 주둔시켜
여진족을 토벌하는 등 내치와 외치를 그저 그런대로 이끈 왕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별 성과는 없었지만...
금삼(錦衫)의 피, 폐비 윤씨
성종(成宗)은 대단한 호색한이었다.성종은 3명의 왕후와 9명의 후궁 등 모두 12명의 부인을
두었고, 16명의 왕자와 12명의 공주와 옹주를 두었다.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 한씨가 19세의 나이로 자식없이 죽자 후궁 윤씨가 제헌왕후로 책봉되었다.
별 볼일 없는 집안 출신이었던 윤씨가 왕비가 되자 다른 후궁들이 반발했으며, 이어서 투서사건이
일어났다.이 투서사건으로 비상과 굿하는 방법이 쓰인 '방양서'가 발견되어 윤씨의 투기가 문제되기
시작했다당시 윤씨는 세조비인 대왕대비 정희왕후와 성종의 모친인 인수대비 한씨에게 모두 미움을
받고 있었다.윤씨는 성종(成宗)이 자신만을 사랑해주기를 원했으나 12명이나 되는 후궁과 수백명의
궁녀들에게 성종이 둘러싸여 있으니, 여자라면 거절할 줄 모르는 성종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일이었다.
어느 날!
성종(成宗)이 총애하는 후궁과 함께 있을 때 윤씨가 그곳에 뛰어 들었다가 성종에게 뺨을 얻어 맞는
일이 터졌다.뭘 할때 들어 갔다가 얻어 맞았지?이때 윤비가 성종(成宗)의 얼굴을 할퀴었다는 얘기가
있다.이 사건 이후로 윤비에게 냉랭하게 대하던 성종(成宗)은 투기사건으로 대왕대비가 폐비문제를
의논케 하자 얼른 찬성하여, 여러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종 10년 왕비 폐출교서를 반포했다.
윤씨가 쫓겨날 때는 연산군은 이미 원자로 책봉되어 있을 때였다.
폐출된 윤씨는 민가로 쫓겨났으나, 대부분의 대신들이 윤씨에 대한 처우가 너무 심했다며 그녀를
동정했다.후에 성종(成宗)이 내시를 시켜서 윤씨의 생활을 염탐하게 했는데,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다
하여 성종은 사약을 내렸다.윤비는 사약을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다가, 아마 눈물이 피와 섞여
나왔나보다.수건을 어머니 신씨에게 주며,"우리 아이가 다행히 목숨을 보전하거든 이것으로 나의
원통함을 말해주고, 나를 임금이 거동하는 길 옆에 장사하여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 달라." 고 유언했다.
그래서 신씨는 그녀를 건원동 길 왼편에 장사지냈다.
윤씨가 폐출될 때 연산군은 4살이었고, 사약을 받았을 때는 7세였다.
세자가 13살이 되었을 때 윤씨의 뒤를 이어 왕비가 된 정현왕후 윤씨에게서 진성대군(중종)이 태어났다.
성종(成宗)이 사망할 때 세자 융(연산군)은 18세였고, 진성대군 이역은 6세였다.
1494년 세자 융이 10대 임금으로 즉위하여 연산군의 시대가 열렸다.
음욕의 화신 어을우동
어을우동은 성종대의 숭문원 관리 박윤창의 딸로서 왕실 친척인 태강수 이동에게 시집을 갔는데,
처음부터 행실이 좋지 않았다.어을우동은 음욕을 못 참아 상대를 가리지 않고 정을 통했는데, 노비부터
고관 대작까지 걸리는대로 같이 잤다고 한다.이건 병으로, 음욕과다증이라고 부른다.
수많은 인물들이 어을우동과의 스캔들에 관련되자 조정도 곤혹스러워졌다.
고위급은 증거불충분으로 없는 것으로 처리했고 일부는 유배를 보냈으며, 어을우동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다음은 (20편) 연산군의 치세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