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쓴 글은 주로 장기적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김일제 가문의 도래를 갖고서 그 의미를 부풀려 말해서는 곤란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고금문 계열의 주장이, 기존의 요동 내지 요서의 고조선을 무시하고, 진(秦)의 유민들이 동방으로 이주한 이래로 한국사가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과는 별도로 신라 가야의 김일제 후손 설에 대해 논의를 이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최근 최인호 작가의 "제 4의 제국"이라는 4부작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이 문제를 다시금 생각해보았습니다. 3부는 못봤지만, 1-2부에서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 것을 보면서 놓치지 않길 다행이었습니다. 1-2부에서는 가야의 건국 세력들의 계통을 추적하는 부분이 나왔는데, 흥미롭게도 고고학적으로도 가야의 건국 세력이 크게 2갈래(북방계와 남방계)로 나뉜다는 점이었습니다.
가야 김수로왕의 건국 설화를 살펴보면 천강 설화를 뼈대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설화는 고조선이나 부여, 그리고 유목민의 북방 세력에서 공통적으로 산견됩니다.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동복(유목민들이 쓰던 청동솥)이 출토된 것으로 볼 때, 최인호 작가님은 부여에서 탈출한 추모왕의 경우처럼 수로왕도 비슷하게 남하해온 유목민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런 반면, 대성동 고분의 인골을 체질인류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남방계라는 점에서부터 시작하여 허왕후를 대표로 하는 남방계 세력이 바다를 건너서 가야 지역에 도착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바로 이들 북방계와 남방계의 이주 경로가 어떠했을까를 생각해보기 위함입니다.
최인호 작가님은 정말 인도의 아요디아(아유타국)에서 배를 타고 바로 김해 지역에 도착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러면서도 그 거칠고 먼 바다를 건너 바로 도착했을까 하는 의문점이 남는다고 말하고 있지요. 즉 아유타국이라는 기록이 너무도 명백하게 남아있는 것과 쌍어의 흔적을 보면, 허왕후 세력이 인도로부터 온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이지만, 이들이 중간에 육지 경로를 거쳤다고 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김병모 교수님은 쌍어의 흔적을 중국 보주(普州) 지역에서 찾음으로써 아유디아 -> 중국 보주 -> 가야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남방계는 이렇게 이주해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 보주의 허씨 세력 "집단"은 한나라 내에 있으면서도 쌍어 문양을 비롯하여 아요디아에서의 문화적 특징들을 간직하고 있었으니, 김해 지역에 쌍어 문양이나 파사 석탑과 같은 이색적인 문물이 남아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북방계와 남방계가 만난 시점이 언제였는가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각에서는 허씨 세력과 인척 관계에 있던 김일제 가문이 곧 김수로의 출신 가문일 것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도 이에 대한 토론을 하면서 잠정 결론을 내린 것은 가야 왕실의 조상이 유목민이라 해도, 이미 한화(漢化)된 김일제는 아닐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김일제는 본래 흉노인으로, 선우의 휘하에 있던 휴도왕의 아들입니다. 한나라와의 전쟁 과정에서 휴도왕이 죽었고, 그 두 아들 김일제와 김윤이 포로로 한나라에 잡혀 생활하던 중 한무제를 죽이려 한 자객을 김일제가 물리쳐서 한무제의 신임을 얻기 시작했고, 이민족 출신으로서는 드물게 투후에 봉해졌습니다. 그리고 김일제의 후손들이 대대로 이 투후 벼슬을 물려받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김일제는 허씨 세력처럼 그 가문 자체가 문화를 간직하면서 이주한 것이 아니라, 한나라에 포로로 잡혀왔다가 벼슬을 받아 생활하는 등 유목민의 문화를 간직할만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후손들이 대대로 투후에 봉해질 정도면, 이미 완전히 중국인이 다되었다고 봐도 문제가 없습니다. 이들이 인척 관계였던 허씨 세력과 함께 바다를 건너 가야, 신라로 도착한 것이라면 이미 이들은 중국 문화를 갖고서 들어갔다고 보아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라와 가야의 유물들을 살펴보면, 전형적인 유목민 계통의 유물들이 꽤 후대에 까지 이어지는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최소 이렇게 오랫동안 유목민의 문화를 유지할 집단이라면, "북방(그것이 흉노이든 고조선, 부여이든)에서 직접 집단적으로 이주해온 유목민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가야의 경우처럼 북방계와 남방계로 뚜렷이 구분되는 이질적인 문화가 존재하려면, 중국 허씨 세력의 이동 경로를 따라 유목민 집단도 같은 경로를 거쳤을 것이라고 보긴 힘듭니다. 문화적 차원으로 보면 김일제가 이들의 조상은 아닐 것 같다는 것이 저의 잠정적인 결론입니다. 예전의 결론이 옳다는 쪽으로 다시 생각을 하게 되는군요...
그렇다면 왜 문무왕릉비문에 투후 이야기가 나올까..를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데, 어쩌면 당시 신라의 유력한 정치 세력으로 김유신 가문이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유신 가문과 결탁했던 김춘추 계열로서는 실제 여부와는 상관없이 신라와 가야의 공동 시조로 투후 김일제를 내세웠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완전한 주장은 아니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단인님과 미주가효님께서는 중국인을 시조로 조작하는 것은 전형적인 수법이라 하셨는데, 당시 신라인들에게 자신들의 조상을 중국인으로 윤색해야할 필요성이 있었을지가 의문스럽기는 합니다. 아직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것이 일반화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인이라는 상징성보다는 당시 신라 내부의 정치적 상황이 오히려 김일제 시조설이 나온 주요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 고금문 계열의 주장처럼 진(秦)나라 유민 -> 휴도왕으로 이어진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설령 휴도왕이 정말로 진나라 유민의 후손이라 하더라도, 휴도왕은 이미 진나라의 정체성이 아닌, 유목민의 정체성을 갖고 있던 인물입니다. 이는 진나라 왕실의 조상이 난생설화를 갖고 있던 동이족 출신이라 해서 진나라를 동이족 국가로 볼 수 없는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그래서 저는 진지망인 -> 휴도왕, 김일제 가문 -> 신라, 가야 김씨 설은 너무 작위적인 연결일 뿐이라고 봅니다. 문무왕비문에 나오는 진백(秦伯)이 정말로 진나라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지도 불분명합니다.
@ 그리고 소호금천씨 -> 휴도왕, 김일제 역시도 가능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기의 기록에 흉노를 제전욱의 후손이라 한 것과 마찬가지일 뿐이라고 봅니다. 소호금천씨에서 신라 김씨가 비롯되었다는 것은 김부식의 관념일 뿐입니다.
저는 분명히 제 글에서 할 말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해가 안된다면 수번 다시 찬찬히 읽어보십시오. 글 실력이 좋다고 말할 계제는 결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횡설수설하며 말을 돌리는 스타일은 아니니까요. 제 글을 읽어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전 더이상 고금문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신의 첫 표기가 '│'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것이며, 여기에서 모든 문자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또 무엇으로 증명하시렵니까? 일반인들이 모두 수긍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설명해주십시오. 이걸 제시하고서 이렇게 믿어라~ 라는 식의 말씀만 하신다면, 역사를 학문적으로 따지지 않고 종교처럼 신봉하는 자가 아닌 이상은 그 누구도 신뢰하지
神(│)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고요...저 문무대왕비의 기록은 秦韓인으로 불리는 [진지망인]이나 흉노계 김일제의 후손으로 왕망과 함께 新나라를 세웠다가 실패를하여 [도망자 신세가 된 김씨세력들]이 모두 같은 흉노계(김씨)라는 것을 말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김부식이 이 비문을 인용하지 않은 것은 '흉노'를 오랑캐로 보았기 때문인 것이 아니고, 저 비문의 출처 자체가 김부식이 보기에 바로 '괴력난신의 하나였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즉, 김부식이 버린 '괴력난신'이라는 것들이 모두 '허무맹랑한 것'들이었던 것이 아니고 사실은 '실제의 사건을 교묘하게 은유하거나 비유한 것들'이 상당히 포함되어있었다고 보인다는 것입니다. 저 비문의 내용들도 그런것들 중에 하나로 본다는 것입니다....저 비문은 신라인들이 애써서 남긴 그들 자신들의 정체성을 증언하는 실제의 기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만일 신라인들이 '족보사기'를 칠려고 했다면 일본 천황들처럼 천조대신이나 국상입존을 들먹였을 것입니다. 김일제후손들은 실존인물이면서 중국왕조(한나라)에 대해서 반역을 한 사람들이므로 신라인의 입장에서 허위로 기재할 이유가 전혀없는 대상이라고 봅니다.
역사는 추리로 끝나는 학문이 아닙니다. 김일제 가문의 도래를 사실로 본다고 가정하고 역사를 해석하면, 신라와 가야 지배층의 유물들이 전형적인 유목민의 양식을 띠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할까요..? 김일제는 집단적으로 유목민의 문화를 이끌고 온 사람이 아니라 단지 포로로 이끌려온 사람이었고, 그 후손 몇대에 걸쳐서 한(漢)나라 투후라는 벼슬을 받았습니다. 이런 가문이 유목민 문화를 간직할 수나 있었을까요. 가능성 제기 정도로는 가능할지 모르나, 만약 그 주장을 인정받고자 한다면 이러 저러한 문제들을 더 해결해야 합니다.
이 주제로 신농님께서 sorgai 님과의 토론으로 조금은 예민해져 계신 것 같아서 답글 쓰기가 조금은 조심스러워집니다... 그러나 충분히 이해해 주실 것으로 보고 간단히 말씀드립니다. ...카오스는 김일제의 후손들이 유목민의 풍습을 신라에게 전했다고 하지 않앗습니다. 그리고 역시 신라인들이 유목민의 유물을 한반도에 남겼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즉, 현재 한반도 남부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는 유목민의 흔적은 '신라'와 무관하다고 보고 있습니다....물론 이것이 현재로선 '추측'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만... 전체적인 정황으로는 한치의 빈틈도 없이 맞아떨어지고 있다고 보고있습니다....
'신라'에 대해서 한가지만 말씀드리면,... 물론 여기저기 모든 기사들이 모두 하나의 틀 속에서 기록되고 잇었다고 보고 있긴하지만, 삼국유사에 소개되는 '처용가'에 그 해답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힌트들을 지워버린 사서이지만 삼국유사는 그 힌트들을 알리려고 일부러 쓴 사서임에 틀림없더군요....
신농님, 저는 신농님이 고금문을 공부했다는 주장에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동양 문자, 즉 한자의 시작은 신농이라는 신(│)이라는 글자로부터 설명이 시작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첫 과목부터 이해를 못하시는데 어찌 고금문을 공부했노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설명은 사전지식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일반인에게 무작정 이해시키기는 곤란하지요. 그럼 벌써 고대인류사회의 혼인방식부터 설명해야 하니까요. 안그렇습니까? 그 내용을 이해 못하시니 고금문을 신뢰 못하겠다는 푸념이 나오시는게지요. 먼저 '서청고감/전록'에 있는 화폐(│)에 대한 설명부터 살펴보시기를 권합니다.
님 스스로가 일반인들에게 이해가 가도록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님은 단지 그것을 종교의 대상으로 믿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제가 들어가본 고금문 카페도 원시반본이니 신농씨 하나님이니 하여 종교와 역사를 혼동하는 것을 보았는데, 학문은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이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그 카페에서 활동하면서 신뢰할 만한 논리적 근거들을 본 적이 없어서 스스로 벗어났습니다. 그럼 저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히 한 것 같군요...
말씀 잘 하셨습니다. 학문은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이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원시반본이니 하는 주장은 저도 들어본 바 없습니다. 우리는 논리적이고 실증적으로 역사를 증명하자는 것이지 우격다짐으로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신농님은 자신의 필명에 대한 개념조차도 없으면서 고금문을 하셨다고 하시니 제가 한가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신농님은 고금문 공부를 위해서 어떤 자료를 가지고 공부하셨는지 알려주시면 님을 이해하는데 제가 도움이 될 것같습니다.
님도 학문을 그렇게 보신다면, 당장 l 가 신농을 가리킨다는 것을 증명해 보십시오. 일반인 모두가 수긍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저 역시 고금문에 빠져있을 때 이 닉네임을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고금문은 거진 신뢰하지 않으며, 이 닉네임도 이미 미련이 없습니다. 단지 이 닉네임으로 오랫동안 활동했기 때문에 저를 아는 분들께서 혼동하지 않기를 바라며 바꾸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자꾸 닉네임을 갖고 트집잡지는 마시지요. 저는 고금문 카페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http://cafe.daum.net/weizhaogen 주소까지 알려드렸으니, 이제 저에 대해서 더이상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참고로 이 카페 운영자님이 소남자
님이 고금문을 하셨다니 출처만 알려드립니다. ① 사고전서 전록 │패 ② 설문해자 申와 神 ③ 兄癸유(역대종정이기관지 권3-45항) ④ 금문신고 화폐집 19-38p(여기 말고도 더 있지만 일단 여기서.) ⑤ 商子丁立父유(경오심실이기관지) ⑥ 우리말 하나님의 어원 등입니다. 이 정도면 고금문을 공부하셨다니 제 의도를 아실 겁니다. 그리고 김대성이라는 분 직접 만난 적은 없으나 그분의 행적은 너무도 자세히 잘 알고 있습니다. (더 거론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저에게 고금문카페를 알려주실 이유가 없을 텐데요. 신농님 자신이 금문을 정말 연구했는냐가 키포인트니까요. 토론은 신농님과 하는 것이지 다른 분에게 일일이 사전지식까지 설명하면서 논하기에는 무리한 부탁이라는 것은 신농님 스스로가 더 잘아시지 않습니까? 고대사를 하려면 일단 고천문과 인류사회의 혼인풍속을 알고 있어야 하고, '고대사회'는 한번쯤 읽어본 사람이라야 토론이 될 것이니까요. 그러니 신농님만 제 의도를 아시면 됩니다. 거기다가 비교적 최근에 저술된 '가족의 역사'(이학사, 앙드레 뷔르기레르 외 공저)가 자세하고도 이해가 쉽게 설명되어 있더군요. 한번 참고하세요.
첫댓글 신농님! 필명을 신농으로 하셨으면 신의 첫 표기가 '│'임을 아실 겁니다. 그럼 여기서부터 모든 기록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아실 것이고, 조선이라는 글자의 시작이 이분으로부터 시작된 것도 이해하실 겁니다. 그런데 고조선을 어디서 찾으시는지 묻고 싶네요.
신농님이 생각하시는 동이란 어떤 개념입니까? 우선 그것부터 알려주시지요.
저는 분명히 제 글에서 할 말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해가 안된다면 수번 다시 찬찬히 읽어보십시오. 글 실력이 좋다고 말할 계제는 결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횡설수설하며 말을 돌리는 스타일은 아니니까요. 제 글을 읽어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전 더이상 고금문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신의 첫 표기가 '│'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것이며, 여기에서 모든 문자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또 무엇으로 증명하시렵니까? 일반인들이 모두 수긍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설명해주십시오. 이걸 제시하고서 이렇게 믿어라~ 라는 식의 말씀만 하신다면, 역사를 학문적으로 따지지 않고 종교처럼 신봉하는 자가 아닌 이상은 그 누구도 신뢰하지
않을테니까요. 그럼 저는 장기적 관점에서 생각해보아야 할 점들을 제시하였으니, 반박에 급급하지 마시고 곰곰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어찌 되었든 저나 님이나 잃어버린 한국사를 복원하기 위해 고대사를 공부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神(│)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고요...저 문무대왕비의 기록은 秦韓인으로 불리는 [진지망인]이나 흉노계 김일제의 후손으로 왕망과 함께 新나라를 세웠다가 실패를하여 [도망자 신세가 된 김씨세력들]이 모두 같은 흉노계(김씨)라는 것을 말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김부식이 이 비문을 인용하지 않은 것은 '흉노'를 오랑캐로 보았기 때문인 것이 아니고, 저 비문의 출처 자체가 김부식이 보기에 바로 '괴력난신의 하나였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즉, 김부식이 버린 '괴력난신'이라는 것들이 모두 '허무맹랑한 것'들이었던 것이 아니고 사실은 '실제의 사건을 교묘하게 은유하거나 비유한 것들'이 상당히 포함되어있었다고 보인다는 것입니다. 저 비문의 내용들도 그런것들 중에 하나로 본다는 것입니다....저 비문은 신라인들이 애써서 남긴 그들 자신들의 정체성을 증언하는 실제의 기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만일 신라인들이 '족보사기'를 칠려고 했다면 일본 천황들처럼 천조대신이나 국상입존을 들먹였을 것입니다. 김일제후손들은 실존인물이면서 중국왕조(한나라)에 대해서 반역을 한 사람들이므로 신라인의 입장에서 허위로 기재할 이유가 전혀없는 대상이라고 봅니다.
역사는 추리로 끝나는 학문이 아닙니다. 김일제 가문의 도래를 사실로 본다고 가정하고 역사를 해석하면, 신라와 가야 지배층의 유물들이 전형적인 유목민의 양식을 띠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할까요..? 김일제는 집단적으로 유목민의 문화를 이끌고 온 사람이 아니라 단지 포로로 이끌려온 사람이었고, 그 후손 몇대에 걸쳐서 한(漢)나라 투후라는 벼슬을 받았습니다. 이런 가문이 유목민 문화를 간직할 수나 있었을까요. 가능성 제기 정도로는 가능할지 모르나, 만약 그 주장을 인정받고자 한다면 이러 저러한 문제들을 더 해결해야 합니다.
이 주제로 신농님께서 sorgai 님과의 토론으로 조금은 예민해져 계신 것 같아서 답글 쓰기가 조금은 조심스러워집니다... 그러나 충분히 이해해 주실 것으로 보고 간단히 말씀드립니다. ...카오스는 김일제의 후손들이 유목민의 풍습을 신라에게 전했다고 하지 않앗습니다. 그리고 역시 신라인들이 유목민의 유물을 한반도에 남겼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즉, 현재 한반도 남부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는 유목민의 흔적은 '신라'와 무관하다고 보고 있습니다....물론 이것이 현재로선 '추측'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만... 전체적인 정황으로는 한치의 빈틈도 없이 맞아떨어지고 있다고 보고있습니다....
'신라'에 대해서 한가지만 말씀드리면,... 물론 여기저기 모든 기사들이 모두 하나의 틀 속에서 기록되고 잇었다고 보고 있긴하지만, 삼국유사에 소개되는 '처용가'에 그 해답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힌트들을 지워버린 사서이지만 삼국유사는 그 힌트들을 알리려고 일부러 쓴 사서임에 틀림없더군요....
신농님, 저는 신농님이 고금문을 공부했다는 주장에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동양 문자, 즉 한자의 시작은 신농이라는 신(│)이라는 글자로부터 설명이 시작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첫 과목부터 이해를 못하시는데 어찌 고금문을 공부했노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설명은 사전지식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일반인에게 무작정 이해시키기는 곤란하지요. 그럼 벌써 고대인류사회의 혼인방식부터 설명해야 하니까요. 안그렇습니까? 그 내용을 이해 못하시니 고금문을 신뢰 못하겠다는 푸념이 나오시는게지요. 먼저 '서청고감/전록'에 있는 화폐(│)에 대한 설명부터 살펴보시기를 권합니다.
님 스스로가 일반인들에게 이해가 가도록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님은 단지 그것을 종교의 대상으로 믿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제가 들어가본 고금문 카페도 원시반본이니 신농씨 하나님이니 하여 종교와 역사를 혼동하는 것을 보았는데, 학문은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이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그 카페에서 활동하면서 신뢰할 만한 논리적 근거들을 본 적이 없어서 스스로 벗어났습니다. 그럼 저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히 한 것 같군요...
말씀 잘 하셨습니다. 학문은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이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원시반본이니 하는 주장은 저도 들어본 바 없습니다. 우리는 논리적이고 실증적으로 역사를 증명하자는 것이지 우격다짐으로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신농님은 자신의 필명에 대한 개념조차도 없으면서 고금문을 하셨다고 하시니 제가 한가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신농님은 고금문 공부를 위해서 어떤 자료를 가지고 공부하셨는지 알려주시면 님을 이해하는데 제가 도움이 될 것같습니다.
님도 학문을 그렇게 보신다면, 당장 l 가 신농을 가리킨다는 것을 증명해 보십시오. 일반인 모두가 수긍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저 역시 고금문에 빠져있을 때 이 닉네임을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고금문은 거진 신뢰하지 않으며, 이 닉네임도 이미 미련이 없습니다. 단지 이 닉네임으로 오랫동안 활동했기 때문에 저를 아는 분들께서 혼동하지 않기를 바라며 바꾸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자꾸 닉네임을 갖고 트집잡지는 마시지요. 저는 고금문 카페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http://cafe.daum.net/weizhaogen 주소까지 알려드렸으니, 이제 저에 대해서 더이상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참고로 이 카페 운영자님이 소남자
김재섭 님의 제자라 하시니, 님께서 아시는 사이이실지 모르겠군요.
님이 고금문을 하셨다니 출처만 알려드립니다. ① 사고전서 전록 │패 ② 설문해자 申와 神 ③ 兄癸유(역대종정이기관지 권3-45항) ④ 금문신고 화폐집 19-38p(여기 말고도 더 있지만 일단 여기서.) ⑤ 商子丁立父유(경오심실이기관지) ⑥ 우리말 하나님의 어원 등입니다. 이 정도면 고금문을 공부하셨다니 제 의도를 아실 겁니다. 그리고 김대성이라는 분 직접 만난 적은 없으나 그분의 행적은 너무도 자세히 잘 알고 있습니다. (더 거론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저에게 고금문카페를 알려주실 이유가 없을 텐데요. 신농님 자신이 금문을 정말 연구했는냐가 키포인트니까요. 토론은 신농님과 하는 것이지 다른 분에게 일일이 사전지식까지 설명하면서 논하기에는 무리한 부탁이라는 것은 신농님 스스로가 더 잘아시지 않습니까? 고대사를 하려면 일단 고천문과 인류사회의 혼인풍속을 알고 있어야 하고, '고대사회'는 한번쯤 읽어본 사람이라야 토론이 될 것이니까요. 그러니 신농님만 제 의도를 아시면 됩니다. 거기다가 비교적 최근에 저술된 '가족의 역사'(이학사, 앙드레 뷔르기레르 외 공저)가 자세하고도 이해가 쉽게 설명되어 있더군요. 한번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