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장에서
윤여희
조카의 결혼식 날이다. 오랜만에 공들여 화장도 하고 무엇을 입을까 고민하다 드라이해서 잘 간수해 둔 한복을 곱게 차려입었다. 오랜만에 얼굴 보는 사촌들과 거동도 불편하신 집안 어르신들이 웃는 얼굴로 식장에 도착하였다, 서로서로 두 손 맞잡고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멋진 예복을 입은 신랑은 씩씩하고 의젓했다. 혼주석에 혼자 당당하게 앉은 여동생을 보니 가슴이 울컥했다. 남편과 고등학교 동창이며 같은 회사에 다녔던 제부는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쉰 살에 먼 여행을 떠났다. 일찍 회사를 퇴직한 후 시작한 사업이 마음처럼 되지않아 스트레스를 받은 탓인지 일 년의 투병 끝에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났다. 사랑 가득하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생활을 하던 조카들은 아버지의 부재를 너무 힘들어하여 지켜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영어학원과 태권도 도장이 부상하고 피아노학원이 쇠퇴하는 사회현상 탓에 동생은 20년 넘게 운영하던 피아노 학원을 폐업하게 되었다. 남편을 잃은 슬픔도 삭이지 못한 채 동생은 생활전선에 나서게 되었다. 동분서주하는 동생을 지켜보는 안타까움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 조카가 듬직한 사회인이 되고 어여쁜 신부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서글서글한 조카가 건강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성격 좋은 제부가 있었더라면 며느리를 맞게 되었다고 기뻐했을텐데 가슴이 아렸다.
가족 모임이 있었던 날, 동생은 조카의 결혼 준비도 벅찼을텐데 와이셔츠라도 사시라며 청첩장과 예쁜 봉투를 가족 모두에게 내밀었다. 가족의 사랑과 장학금으로 아이들이 잘 성장했으니 감사의 표시라고 말했다. 신부측 예단도 생략했을텐데 마음씨 넉넉한 동생답다. 평소 우스운 소리 잘하는 막내 동생은 “누나 와이셔츠만 입고 반바지 입고 가도 되나?” 온 가족의 폭소가 터졌다. 구십이 넘은 아버지는 “ 결혼식에 안갈려고 했는데 딸이 멋진 양복을 사줘서 참석할란다” 라고 하셔서 또 한번 웃음꽃이 피었다. 화기애애한 가족들이 모여 결혼식은 그야말로 축제가 되었다.
결혼식을 지켜보며 몇 년 전 우리 집의 결혼식이 생각났다. 어느 지인의 결혼식에서 축의금을 접수하기 위해 30분 동안 줄을 섰던 경험이 있었다. 축의금만 접수하고 바삐 떠나는 하객은 절대 초대하지 말자고 남편과 약속했었다. 혼주를 안다는 이유로 경사에 참석하는 일은 폐를 끼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도로도 막히는 주말에 타지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거의 하루를 투자해야 하는 상황을 알기 때문이다. 집성촌 시절에는 애경사에 동네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재물과 노동력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예식장에서 완벽하게 준비해주는 지금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도 해낼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품앗이 개념의 축의금은 받은 만큼 갚아야 하는 빚이 되기 때문이다. 평소 번잡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우리 부부는 조용하게 가족 행사로 치르고 싶었다. 삼십 년 근무한 남편 직장에도 아이의 결혼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나 역시 십 년 넘은 모임에도 청첩장을 보내지 않았다. 한 시간용 화환도 정중하게 사양하였다. 친정 직계가족과 시댁 식구 그리고 우리 아이를 어릴 때부터 지켜본 가까운 친구들만 초대하여 조촐하게 치렀다. 응원하고 축복해주는 분들께 축의금은 사양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다. 사촌 형제들 초대가 고민되었다. 칠 남매의 장남이신 아버지 형제들은 모두 오 남매씩를 두셨다. 외가쪽 사촌까지 다 모이면 대부대가 될듯하여 망설이다 과감히 생략하였다. 코로나 이전이라 작은 결혼식이 흔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친정엄마는 무슨 도둑 결혼식을 하느냐고 못마땅해 하셨지만 지나놓고 보니 네가 참 잘한 것 같다고 칭찬하셨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유별 떤다고 뜨악해하는 지인도 있었지만 소박하게 잘 치른 행사였다고 자부했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청첩장을 받으면 우리 부부는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참석한다.
조카 결혼식에 모처럼 친척들이 만나 반갑게 정담을 나누는 모습이 보기 좋다. 간결한 결혼식에 사촌들도 초대하지 않은 나의 선택이 잘한 것인지 갑자기 의문이 든다. 따뜻한 모임의 기회를 박탈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