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_풍장의 시간 ●지은이_엄태지 ●펴낸곳_시와에세이 ●펴낸날_2026. 7. 7
●전체페이지_136쪽 ●ISBN 979-11-24212-12-7 03810/ ●신국판변형(127×206)
●문의_044-863-7652/010-5355-7565 ●값_ 13,000원
평범한 풍경에서 삶의 본질을 길어 올리는 시편
엄태지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풍장의 시간』이 ‘詩와에세이’에서 출간되었다. 엄태지 시인의 이번 시편들은 평범한 일상과 사물 속에서 존재의 시간을 길어 올린다. 버려진 자전거, 횡단보도를 건너는 노인, 꽃눈을 밀어 올리는 산수유, 철판을 접는 절곡공 등 시인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지나치는 풍경을 낯선 시선으로 응시하며 생의 본질을 묻는다.
경로당 봄볕 아래 자전거 한 대 삭아가네
안장 없는 안장에
넝쿨 풀 무성하게 올라앉아 있네
한때는 굴곡도 가뿐 사뿐 넘었을 거야
무소의 뿔처럼
바람을 가르던 푸른 질주
사이로 조금씩 뼈대들은 조금씩 어긋났겠지
망가진 뒤에야 주저앉게 되는 관절들처럼
바퀴는 멈췄을 거야
속력을 잃은 저 붉은 녹근육
페달 없는 페달에 바퀴 없는 바퀴가 굴러가네
차르르 바람 물결
시나브로 바람으로 돌아가는 풍장의 시간
풀들이 붉은 핸들을 잡네
뿌리로 내리는 풀빛 종소리
바퀴를 버린 자전거를 풀들은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일까
만장처럼 휘날리는 붉고 흰 꽃 무리
속도를 얻은 자전거 한 대가
빠르게 삭아가네 붉게
―「풍장의 시간」 전문
표제시 「풍장의 시간」은 경로당 한 편에 방치된 자전거를 통해 소멸과 순환의 시간을 그린다. 녹슨 자전거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지만 풀과 바람을 만나 새로운 생명의 일부가 된다. “풀들이 붉은 핸들을 잡네/뿌리로 내리는 풀빛 종소리” 같은 이미지는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자연으로 환원되는 풍장의 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클래식 오후 두 시」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노인을 오케스트라의 악공으로 바라보며 늙음마저 존엄한 예술 행위로 승화시키는가 하면 “겨울 눈보라를 견딘 힘으로/뿌리로 쭉쭉 빨아올린 지층의 기운을 받아서”(「우주 팽창론」) 산수유 꽃눈이 터지는 작은 순간에서조차 우주의 생성 원리를 발견한다. “가지의 뻗어감에 따라 하늘을 받아낸 잎과/잎을 연결해 가면 무수한 별자리들/모서리와 여닫이 이 장과 저 문갑이 성좌로 이어진다”(「목공소 골목」)는 시인의 시선은 나무와 가구, 그리고 우주를 하나의 생명 계보로 연결한다. 시인은 '나무는 가구다'라는 역설적 명제에서 출발해 목재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하늘과 별자리, 새와 바람을 품어온 존재임을 보여준다.
엄태지 시인 시의 가장 큰 특징은 사물을 바라보는 독창적인 은유와 생명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다. 버려진 사물, 늙은 몸, 노동의 현장까지 시인의 손을 거치면 생명의 서사를 품은 존재가 된다. 특히 “돌아간다는 말은 돌아온다는 말”이라는 시적 인식은 끝이 곧 시작이며, 소멸이 또 다른 생명의 출발임을 깨닫게 하며 우리 시대 서정시가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소박한 일상에서 우주를 발견하고, 사물 속에서 인간의 삶을 읽어 내는 엄태지 시인의 시는 독자들에게 깊이 있는 사유를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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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시인의 말·05
제1부
열쇠들·13
느티나무 베틀·14
풍장의 시간·16
사과꽃·18
오늘의 무게·20
기우는 구두들·21
겨울 향적봉·22
천사님께·24
둥지 건축학·26
목공소 골목·28
안부·30
꽃 다는 법·32
진다는 말·34
클래식 오후 두 시·36
월담의 원칙·38
시 값·40
제2부
풀여치·43
버려진 트럭·44
백운화상 초록 밭고랑 경작법·46
우주 팽창론·48
술 주 자에서 길 도 자 찾기·50
숯부작·52
달팽이·54
울음의 그늘·56
사과를 깎는 밤·58
꽃다지·60
절곡·62
죽음에 대한 질문·64
주름의 기원·66
신상품 대방출·68
조릿대 기도문·70
제3부
첨삭·73
쇠주전자별·74
천태산 별·76
배롱꽃이 피면·77
톱·78
옷걸이 성자·80
라일락·82
갈치·84
구름의 정체·85
불이라는 짐승·86
오리·88
울음이 산빛을 깨울 때·90
구두·92
이팝나무 국밥집·94
제4부
문짝·97
4월 저수지·98
구름이 되는 조건·100
폐가 2·102
가족사진·104
바람의 의식·106
조문·108
하늘 공작소·110
거미·112
양파·114
나비가 사라지는 시간·116
시 쓰는 밤·118
민들레 영토·120
금성동 산5-1번지·122
책 무덤·124
시인의 산문·125
■ 시집 속의 시 몇 편
경로당 봄볕 아래 자전거 한 대 삭아가네
안장 없는 안장에
넝쿨 풀 무성하게 올라앉아 있네
한때는 굴곡도 가뿐 사뿐 넘었을 거야
무소의 뿔처럼
바람을 가르던 푸른 질주
사이로 조금씩 뼈대들은 조금씩 어긋났겠지
망가진 뒤에야 주저앉게 되는 관절들처럼
바퀴는 멈췄을 거야
속력을 잃은 저 붉은 녹근육
페달 없는 페달에 바퀴 없는 바퀴가 굴러가네
차르르 바람 물결
시나브로 바람으로 돌아가는 풍장의 시간
풀들이 붉은 핸들을 잡네
뿌리로 내리는 풀빛 종소리
바퀴를 버린 자전거를 풀들은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일까
만장처럼 휘날리는 붉고 흰 꽃 무리
속도를 얻은 자전거 한 대가
빠르게 삭아가네 붉게
―「풍장의 시간」 전문
노인이 횡단보도를 건넌다
순간 객석이 된 왕복 육 차선
차들은 주름의 악기를 바라보고 서 있다
당겼다 밀었다
묵음으로 잠깐 멈췄다
다시 한 보 높여도 늘어지기만 하는 악보
느닷없이 객석에 앉은 관객들
한 소절 청음을 들어보자는 건지
일제히 비상등을 켠다
그러든지 말든지 제 음보만 유지해 가는 늙은 악공의
밀었다 당겼다
한 곡을 건너는 소품의 시간
음과 음 사이가 팽팽해졌다
풀어졌다 출렁출렁 호흡이 가빠지는 횡단
주름의 악공이
제 주름의 악보를 제 주름의 악기로 제 주름을 연주해 가는
클래식 오후 두 시
―「클래식 오후 두 시」 전문
산수유나무가 그 딱딱한 꽃눈 껍데기를 민다
미는 꽃잎과
밀리지 않으려는 껍데기의 대치
겨울 눈보라를 견딘 힘으로
뿌리로 쭉쭉 빨아올린 지층의 기운을 받아서
민다,
빠끔하게 터지는 꽃잎 팽창
열린 사이로 보이는
우주 팽창론
꽃잎 두께만큼 우주가 팽창한다는 론
산수유나무가 밝혀 나타내 보이는 설
정통에서는 이설이라고 취급 안 한다는데
믿거나 말거나 이맘때면 온 힘을 다해 주장을 펼친다
암 나야 믿지
꿀벌들도 벌써 야단법석으로 모여들지 않니 꽃
우주가 노랗게 팽창한다
―「우주 팽창론」 전문
그가 무아지경 철판을 접는다
찍어내는 건 문짝
제 집 한 채 없다는 절곡공이 문을 접는다
철커덕 내려왔다 올라가는 쇠날
제 집 아닌 제 집의 문을 접는 그의 일과는 무소유
한 치 오차 없이 정확하게 꺾는 삽십 년 무공이지만
야간작업에 연장 근무까지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제 손가락도 접혀 들어간다고
열 개 중 하나 잘려 나갈 각오로
죽을 때까지 여닫아도 다 못 닫을 문을 찍어 낸다
제 한 채 집을 짓기 위해
기계 한 부품처럼 돌아가는 밀고 받아내는 하루
꺾일 데서 정확하게 꺾이지 않으면 안 된다
불량은 하루치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철커덕거리는 절곡공의 아침에서 야간까지
한 생이 철커덕거린다
무겁게 내려앉는 휴일 쓸쓸한 명상이 한 끼의 밥이
철커덕철커덕 돌아간다, 천만 근의 쇠날
하나를 접으면 집 한 채가 접히고
하나를 접으면 깜빡깜빡 야간의 불이 켜진다
―「절곡」 전문
■ 시인의 말
연장통을 쏟아 놓고 정리한다.
이 한 권의 연장통,
조이고 깎아 맞추는 편편의 연장들
새롭게, 아귀가 딱딱 맞게, 반듯하게 세워지기를,
이 또한 녹슬고 바람에 흩어질 풍장의 시간이겠지만
삭아 흘러내리는 것이 꽃이 된다는
내 시집 한 권
닦고 기름치고 가지런하게 앉혀 놓는다.
2026년 여름
엄태지
■ 표4(약평)
엄태지 시인은 자연과 사물을 통해 “닫혔다 열리는 빛의 세계”를 노래한다. 달, 구름, 별, 이팝나무, 감나무, 살구꽃, 꽃다지와 같은 자연물에 기대고, 세탁소, 경로당, 시장 등 일상의 공간 속에서 자전거, 구두, 열쇠, 저울, 호미, 망치, 주전자, 옷걸이 등의 사물에 눈빛이 닿아 있다. 또한 칼국수, 자장면, 술, 소머리국밥과 같은 서민의 음식과 달팽이, 풀여치, 나비, 개, 오리 등의 생명체와 더불어 생생한 삶의 풍경을 이룬다. 시인은 작은 것에서 큰 세계를 읽어내고, 평범한 풍경 속에서 맑고 그윽한 삶의 의미를 획득한다. “속도를 얻은 자전거 한 대가/빠르게 삭아가네”라는 구절에서 드러나듯, 생성과 소멸, 삶과 죽음을 통찰하며 우주적 이미지로 확장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안과 밖이 통하는/새들은 환한 구멍을 향해 날아”가고, “돌아간다는 말은 돌아온다는 말”이라는 불교적 세계관을 통해 삶의 근원을 성찰하면서 ‘풍장의 시간’을 환하게 즐기고 있다._양문규(시인)
■ 엄태지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2018년 『시와정신』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문의 가는 길』이 있다.
첫댓글 엄태지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풍장의 시간』이 ‘詩와에세이’에서 출간되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큰 관심과 사랑(지금 교보문고, 알라딘 등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