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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4. 묵상글 ( 연중 29주간 금요일. - 원의와 반원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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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4. 연중 29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0.24 04:25
- 원의와 반원의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 인간의 비참함을 솔직히 토로합니다.
선을 바라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바라지 않는 악은 도리어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볼 때 법칙이 있음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그 법칙이란
바로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저를 봐도 그런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런 역동을 더 선명히 느낍니다.
예를 들어 저는 미사를 드릴 때 갈수록 그 신비에 깊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가장 거룩한 부분에서 거의 빠짐없이 신비를 깨는 생각이 훅 들어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잡생각이 훅 치고 들어옵니다.
어떤 때는 너무도 하찮은 것이 느닷없이 생각나고,
어떤 때는 거룩함과 정반대되는 음란한 생각이 들어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도 자주 반복되기에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정말 사탄이 신비에 들어가지 못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 가고자 하는 우리의 거룩한 원의에
반원의(反願意)가 안팎으로 항상 있습니다.
반원의가 안팎으로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신비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탄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밖의 사탄과 안의 반원의가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안의 욕망이 없을 땐 밖에서 사탄이 아무리 유혹해도 아무 소용이 없지요.
배가 고프고 술이 고플 때 먹자고 꾀야 그것이 유혹이 되고 넘어가겠지요.
그런데 내 밖 사탄의 준동에 내 안에서 반응하는 것을
바오로 사도는 “육의 나”라고 하고 프란치스코는 “육의 영/정신”이라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나 프란치스코처럼 하느님 체험을 강하게 했을지라도
육의 나나 육의 영이 내 안에서 말끔히 사라진 것이 아니고,
본능이 사라지거나 습관이 완전히 바뀐 것도 아니며,
맛들이고 길들어진 내가 완전히 바뀐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아마 육체의 내가 완전히 죽어야지만 사라질 것이고,
이 육체의 내가 살아있는 한 육의 나도 살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내 안에서 강력히 활동하실 땐 음성적으로 있다가,
곧 죽은 척 있다가 때가 되면 슬며시 다시 살아날 겁니다.
그러니 늘 깨어 있으라는 주님 말씀에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도둑에 대해서도 깨어 있고 주인님께 대해서도 깨어 있고,
본능과 습관과 육의 나에 대해서도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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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4. 연중 29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분별력의 지혜
“내적통합의 중심인 주 예수 그리스도”
지도자의 우선적 덕목이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지도자뿐 아니라 일상에서 지혜로운 분별력은 필수입니다. 속설로 머리가 나쁘면 나머지 지체들이 고생이 많다 합니다. 사실 책임자의 결단에 따라 공동체의 운명도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고 말들하지만, 머리를 빌릴 수 있는 것도 빌릴수 있는 머리가 있을 때 좋은 머리도 빌릴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A급 지도자에 A급 참모들, C급 지도자에 C급 참모들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이 그의 규칙서에서 아빠스의 자질중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것 역시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그는 자기의 명령에 있어서는 용의주도하고 깊이 생각할 것이다. 그 명령이 하느님께 관계되는 일이든 아니면 세속에 관계되는 일이든 분별있고 절도 있어야 할 것이니, ‘만일 내가 내 양의 무리를 심하게 몰아 지치게 하면 모두 죽어 버릴 것이다’하신 성조 야곱의 분별력을 생각할 것이다. 이밖에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다른 증언들을 거울삼아, 모든 것을 절도있게 하여 강한 사람은 갈구하는 바를 행하게 하고, 약한 사람은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
이런 분별력의 지혜도 결국 사랑에 기초함을 봅니다. 지혜와 사랑은 함께 갑니다. 시대의 징표를 알아보는 지혜도 시대를 사랑하는 순수한 열정에서 나옵니다. 맑은 눈으로 깊이 멀리 내다 보는 무욕의 지혜입니다. 탐욕으로 눈멀면 제대로,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참으로 올바른 시대정신과 역사의식를 지니기 위해 기도와 더불어 폭넓은 공부도 필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무지한 군중을 향한 질책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당시 이스라엘의 환경에 그대로 적용되는 너무 자명한 자연 날씨의 현상입니다. 서쪽의 지중해쪽의 바람은 비를 몰고 오고 남쪽 뙤약볕 사막에서는 열풍이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질책이 우리의 각성을 촉구합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하늘과 땅의 일기는 예측하면서 시대의 중요성은, 시대의 징조는, 징표는 왜 알아보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언행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음을 왜 눈치채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분별력의 잣대는 예나 이제나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좋은 분별력을 지니기 위한 첩경의 지름길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지혜를 추구하는 자라면 다음 옛 현자의 말씀도 유념할 것입니다.
“속이 비어 있으면 길게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것을 변명이라고 일컫는다.”<다산>
진정 진실하고 지혜로운 담백한 이에게는 변명이나 핑계가 없습니다.
“군자는 말을 아끼고 소인은 말을 앞세운다.”<예기>
동양에서의 전인적 인간상이 군자요 우리로 하면 성인입니다. 지혜로운 성인은 말보다는 <삶의 모범>을 앞세웁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입니다. 때를 기다리는 것이, 때를 아는 것이 지혜이자 겸손입니다. 때가 되면 지체없이 실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어지는 질책의 요지는 늦기 전에 제때에 화해하라는, 회개하라는 충고입니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불필요하게 일을 확대시키지 말고 초기에 해결하는 것입니다. 화해든 회개든 때를 놓치지 말고 즉시 결행하여 상생의 구원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지 말고 신속한 조처로 미풍으로 끝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이는 예수님처럼 태풍도 미풍으로 바꿉니다.
말그대로 상생의 지혜이자 상생의 구원입니다. 여기서 언제나 분별력의 잣대는 예나 이제나 하느님의 지혜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시대의 징표를 잘 알아보기 위해, 시의적절한 화해와 회개를 위해 우선적인 것이 통합된 자아입니다. 내적분열보다, 마음이 갈리는 것보다, 지혜로운 분별에 해로운 것은 없습니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어야 하는데 몸과 마음이, 마음과 마음이 분열되어 따로 있는 것입니다. 바로 바오로의 탄식도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내적갈등과 내적분열중에 내적통합을 호소하는 바오로는 물론 우리 모두에게 내적통합의 중심의 답은 예수님뿐입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가 답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자 내적통합의 중심인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갈수록 내외적 분열은 극복되고 내적통합에 지혜로운 분별력의 발휘하여 상생의 지혜와 구원을 이루며 살 수 있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내적통합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시고,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하며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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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4. 연중 29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이 시대”의 징표를 풀이하고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책망하여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56-57)
사실, 군중들은 자연의 징표나 자신 몸의 징표는 잘 읽고 대처하면서 ‘시대의 징표’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과 같은 거짓 지도자들의 판단에 의존하면서 책임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하고, 그들의 ‘회피’와 ‘위선’을 질책하십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시대의 징표’를 복음으로 읽어내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눈으로 읽으면서 또한 그러한 눈으로 세상을 읽고 있는 언론에 의존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루카 12,58)
“징조”를 잘 읽고 ‘바르게 행동하라’는 엄한 경고입니다. 곧 재판에 붙여지기 전에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역사의 징조를 읽으셨고, “때가 차자”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시어 빛을 비추셨습니다.
또한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도 끊임없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해석하고 응답해 왔습니다. 그것은 [교회문헌들], 특별히 [사회회칙들]에 잘 드러납니다. 곧 교회는 끊임없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늘의 사회, 윤리적인 문제에 적용하여 해석하고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2013년에 발표하신 교황 권고 문헌인 [복음의 기쁨]에서, “모든 공동체가 시대의 징표를 주의 깊게 살피도록 권고”(51항)하셨습니다. 그리고 돈이 우상화 된 ‘신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물질만능의 ‘물신주의의 병폐’와 ‘무관심의 세계화’ 등을 지적하시면서,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하는 교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난한 교회’, 곧 함께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공빈(共貧)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5년, 환경을 주제로 한 첫 번째 회칙인 [찬미받으소서]에서,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으로 기술만능주의와 왜곡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통합적이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다양한 차원의 대화와 생태 교육을 촉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찬미받으소서]의 후속 권고 문헌인 [하느님을 찬양하여라]에서는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하기 위해 ‘생태적 회심’을 호소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이 시대가 징표”를 읽고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라.”는 예수님의 촉구에 응답하며, 이 시대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 할 줄 알면서,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56-57)
주님!
세상의 빛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눈으로 시대의 징조를 읽어내고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대처하게 하소서.
시대의 방관자, 위선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말과 혀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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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4. 연중 29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생손앓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끔 손톱 옆이 갈라질 때가 있습니다. 가만히 두면 저절로 아물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성격이 급해서 그걸 뜯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상처가 덧나고, 일할 때도 불편하곤 합니다. 모기나 벌레가 물어서 부풀어 오르거나, 물집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때도 약을 바르면 곧 아물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성격이 급해서 그걸 긁거나 뜯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시간도 더 걸리고 상처가 생기게 됩니다. 내 몸은 며칠 지나면 아물고, 작은 상처로 남지만 기업과 국가의 정책이 그리되면 많은 이가 피해를 보게 됩니다. 기업은 큰 손실을 보게 됩니다. 미국 정부는 전문직 비자의 비용을 1,000불에서 100,000불로 올린다고 합니다. 자국의 전문직 인력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라고 합니다. 그런 정책이 생손앓이가 될는지, 작은 상처를 더 크게 덧나게 하지는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MAGA’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Make America great again’이라는 말의 줄임말입니다. 높은 관세와 강력한 이민국의 단속이 생손앓이가 될는지, 작은 상처를 더 크게 덧나게 하지는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불가에서는 선을 수행하면서 깨달음에 방해가 되면 부처의 가르침일지라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넜으면 배를 버리라고 이야기합니다. 폴 카퍼는 ‘열린사회와 적들’에서 인류의 철학적인 스승이라고 존경받는 ‘플라톤, 칼마르크스’를 비판하였습니다. 플라톤의 ‘국가’는 뛰어난 지도자가 통치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국가는 자칫 전체주의에 빠질 수 있고, 우생학을 근간으로 타 인종에 대해 억압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폴 카퍼의 열린사회는 뛰어난 지도자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발전시키는 나라였습니다. 이런 국가는 발전은 느릴 수 있겠지만 국가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칼마르크스는 역사를 필연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봉건사회, 자본주의 사회, 다음은 공산주의 사회가 될 것으로 예측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역사 인식은 맞지도 않고, 있지도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역사는 필연의 과정이고, 인류는 그런 필연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고민하고 성찰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얼마나 쉽게 자기모순에 빠지는 존재인지 보여줍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행하고 맙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절망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희망을 발견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성사와 공동체의 소중함을 깨닫는 시간이었고, 교황님 말씀처럼 ‘나눔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임을 자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을 찾듯이, 우리는 위기의 시대 속에서도 희망의 징표를 발견했습니다.
“인간에게는 경멸보다 찬미할 이유가 더 많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역병 속에서도 서로 돕고 나누며 인간다움을 지켜가는 모습에서 희망의 가능성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러한 희망의 시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상처를 긁어 덧내는 조급함이 아니라, 인내와 지혜로 상처가 치유되기를 기다릴 줄 아는 눈, 그리고 시대의 징조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읽어내는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던 것이라도 주님께 나아가는 길을 방해한다면 과감히 버릴 수 있는 용기, 그것이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입니다.
“주님,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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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4. 연중 29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하느님을 향한 끊임없는 탐색과 갈망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연결되는 관상적 공동체!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0월 23일 목요일- 마흔두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그리스도교는 살아 숨 쉬는 전통입니다.
관상은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변화하며, 고요 속에서도 행동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저자 캐시디 홀(Cassidy Hall)은 자신과 삶, 그리고 하느님을 더 깊이 이해하고자 끊임없이 길을 모색하며 관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과의 영적 연대 안에서 위로와 일치를 느낀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표현하는 방식은 서로 다를 수 있지만,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를 향한 끊임없는 탐구는 관상적 삶을 살아가는 많은 이에게 익숙한 내면의 감정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채워지지 않는 갈망, 혹은 목마름처럼 느껴지는 영적 갈증, 또는 방향 없는 듯한 고요한 아픔을 품고 살아갑니다. 이 아픔은 우리가 온 세상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종교나 영적 전통이 다르더라도, 관상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이 공통된 감각을 공유하는데, 그 사실을 인식할 때 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느낍니다.
관상적 삶은 지식을 얻기 위한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확신의 길도 아닙니다. 오히려 바로 그 점이 관상적 삶을 더욱 생생하게 하고, 본질적으로 역동적이게 만듭니다. 여정 중에 마주하는 "도착의 순간"들은 우리가 잠시 숨을 고르며, 지금 이 길이 옳은 방향임을 되새기게 해 줍니다. 비록 그 이유가 단지 우리가 지금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런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이 길이 결코 쉽거나 단순하거나 편안하도록 마련된 것이 아님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의 순간은 인생의 흐름 속에서 잠깐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왜냐하면, 월터 플루커 목사님(Rev. Dr. Walter Fluker)이 상기해 주듯이, "삶은 계속 흘러갑니다. 왜냐하면 삶 자체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1]...
이러한 순간들은 관상의 여정 속에서 우리를 격려해 주는 이정표와도 같습니다. — 이는 살아 숨 쉬며 자라나는 평생의 여정입니다. 우리는 이 탐색이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갈망은 계속됩니다. 실제로 [토머스 머튼]은 자신의 영적 회고록 『칠층산』을 라틴어로 이렇게 마무리했습니다: "Sit finis libri, non finis quaerendi." — "책은 여기서 끝나지만, 탐색은 끝나지 않는다." [2]
관상 전통 안에 살아간다는 것은 단지 끊임없이 탐색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또한 그 전통 안에서, 그리고 그 전통과 함께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화하라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관상의 뿌리 깊은 기원에 더욱 깊이 참여하고 뿌리내리도록 요청받는 동시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오늘날의 세상 속에서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될 수 있을지를 함께 살아내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관상의 길이 계속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리고 우리가 이 살아 있고 자라며 숨 쉬는 전통 안에서 참으로 살아 있기 위해서는, 그 길 또한 자라나야만 합니다.
홀의 영적 탐구는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의 넓고도 살아 움직이는 계보로 그녀를 이끌었습니다—토머스 머튼의 저작에서부터 사막의 교부들과 교모들의 지혜, 그리고 바바라 홈스 박사(Dr. Barbara Holmes)의 현대적 성찰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서로 다른 삶의 자리와 문화, 그리고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 고유함 속에서 하나됨이 있고, 그 공통된 영적 실타래는 우리를 서로 알아보게 하며 하나로 묶어 줍니다.... 다양한 목소리들을 통해 저는 그리스도교 관상이 살아 있는 전통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살아 있다'는 말은 그 전통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자라난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생명은 공간과 숨 쉴 여유, 그리고 변화에 대한 열림을 필요로 합니다. 살아 있는 것은 완전한 확신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그것은 곧 죽은 것이며,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자라나지 않으며, 새로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관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영적 역설입니다. — 그것은 전통과 변화, 고요함과 움직임이 함께 어우러지는 신비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제도화된 종교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은 많은 사람 중 하나입니다. 신앙 공동체 밖의 광야로 나아가는 여정은 처음의 상처보다도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리처드 신부님의 말씀은 제 영혼에 치유의 향유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제가 하느님께 대한 믿음 한 가닥이라도 붙들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제 키보드는 안도와 감사의 눈물로 젖어 있습니다. 이제 저는 어떤 형태로든 다시 세워가는 여정을 관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분명한 설계도는 보이지 않습니다—완벽주의자이자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던 저에게는 아쉬운 일이지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이 여정의 전체 핵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Jessica M.
References
[1] Walter Fluker, “Jesus and the Disinherited,” Essentials of Engaged Contemplation,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August 2024.
[2] Thomas Merton, The Seven Storey Mountain, 50th anniv. ed. (Harcourt Brace, 1998), 462.
Cassidy Hall, “Queering the Living Tradition,” ONEING 13, no. 2, A Living Tradition (2025): 38, 39, 40. Available in print and PDF download.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Jesús Boscán, untitled (detail), 2021, photo, Venezuel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영적인 흐름과 변화를 향한 움직임은 마치 우리의 혈관을 흐르는 피처럼, 우리를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더 깊이 이끌어 갑니다—끊임없이 흐르고, 확장되며, 우리가 그 가르침을 배우고 몸으로 살아낼 때 우리의 이해를 새롭게 빚어갑니다. 바로 살아 있는 그리스도교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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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4. 연중 29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루카 12,58-59)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느님의 말씀께서 우리를 재판에 부치신다
우리가 합의를 보지 않으면 우리를 재판관에 넘겨 재판관이 우리를 옥리에게 넘기게 할 고발자가 누군지 알아봅시다. 어떻게든 그를 찾아내어 합의를 볼 일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고소합니다. 예를 들어,그대가 술을 마시려고 하면, 하느님의 말씀이 ‘그러지 마라’고 하십니다. 그대가 자주 극장에 가서 천박한 쾌락을 맛보려고 하면, 하느님 말씀이 ‘그러지 마라고 하시지요. 그대는 간음을 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도 하느님의 말씀이 말씀하십니다. ‘그러지 마라.’ 그대가 무슨 죄를 저지르려고 하건 그때마다 하느님 말씀이 ‘그러지 마라’고 하십니다 그대의 구원이 확실해질 때까지는 하느님 말씀이 항상 그대의 뜻에 반대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정직하고 도움이 되는 적대자입나까!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4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들이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께 젖을 먹인 가슴은 복됩니다!(루카 11,27).
듣는 사람, 곧 ‘하느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무엇을 알아듣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자, 본질적으로는 하느님과 하나이지만 하느님과 동등한 분으로 알아듣습니다 .참 하느님이자 참사람이신 한 그리스도: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지키는 자가 알아듣는 말씀입니다.(492)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노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 130
하느님께 맡겨드림
자신이 잘못된 기도를 하는데도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이 모든 것들이 기록되어 잇습니다. 이런 잘못된 기도는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또한 그 누구도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서 용기를 잃거나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의심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이러한 사례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잘못된 기도가 이루어 지면 곤궁한 상황이 더욱 나빠지거나 아예 그러한 기도를 한 사람이 행복한 삶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몰락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에서 우리는 무엇을 청하기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참으로 모릅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한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 등장하면 우리는 그것을 인내로써 견뎌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려야 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더 낫다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중재자이신 주님께서 이것에 대한 한 예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분은 “나의 아버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인간이 되어 오실 때에 가지신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즉시 당신의 마음을 비꾸시어 다음과 같은 기도를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39).
그렇기 때문에 “한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로마 5,1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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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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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4. 연중 29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떤 아이가 제게 묻습니다.
“신부님은 왜 아직도 그렇게 책을 많이 읽어요?”
아마 어른이 되면 공부할 필요가 없으니,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재미없어 보이는 책을 읽고 있으니 그 모습이 이상했나 봅니다.
책을 읽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첫째로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 안에 지식은 차고 넘치지만, 저의 지식은 너무나도 보잘것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경험하지 못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신부이기에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저의 경험은 너무나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자의 경험을 통해 간접적인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제일 중요한데, 저만의 소신을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지 않으면 그냥 뜬구름잡기식입니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구체적인 내용이 없이 열심히만 살 뿐입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저만의 소신을 만들어가게 됩니다. 어떻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를 만들어가면서, 이 세상을 더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책을 꾸준히 읽습니다.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분명히 성장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찾아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보내신 이 지구별에서 온전하게 생존할 수 있게 합니다.
주님께 꾸준히 나아가는 노력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알아가면서 겸손해질 수 있고, 세상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깨닫게 되고, 자기만의 신앙으로 주님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런 노력 없이 주님께 막연하게 “알아서 해주세요.” 한다면, 주님의 손길을 전혀 느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56)라고 꾸짖으십니다. 그들의 무지가 아닌, ‘위선’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들은 자연 현상을 분석해서 자기 일상(농사, 항해 등)에 대비할 줄 아는 지혜가 있었지만, 정작 자기 구원과 직결된 이 시대의 징표는 외면하고 분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 무엇보다 그분의 현존 자체가 바로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징표인데,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알아야 하고, 세상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기의 신앙을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먼저 당신이 원하는 것을 결정하라.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당신이 기꺼이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라. 다음으로 그 일들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곧바로 그 일에 착수하라.(H. L. 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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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4. 연중 29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맑고 단순한 시선으로 지금을 넓게 바라보고 멀리 바라보기 위해....
며칠 전부터 갑자기 쌀쌀해지긴 했지만, 요즘은 지난 몇 주간 쉼 없이 내리던 비가 잠잠해지고 늦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청명하고 아름다운 날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짧은 시간이겠지만 이 가을을 보내면서 가을이라는 계절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우리 삶도 가을 단풍처럼 아름다움의 향기를 풍길 수 있기를 기도해 봅니다.
가을처럼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순간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을 깨어 의식하고 받아들이는 영적인 민감함이 있어야 하겠지요?!
사람들은 "이제 가을이 없이 바로 겨울로 넘어가는가 봐!" 하고 말하지만, 사실 여전히 가을은 있습니다. 짧더라도 이 시간을 만끽하며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가을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 그런데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루카 12,54–56)
하늘의 징조는 보면서도, 시대의 징표는 보지 못하는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지금 이 순간을 보라고 초대하십니다.
관상은 과거에 머무르거나 미래를 점(占)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깨어 의식하는 삶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반복해서 강조하신 태도이며, 이것이야말로 관상적 삶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런 관상적 삶을 통한 진정한 식별은 복잡한 해석이 아니라, 단순하고 맑은 시선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종종 직선이 아니라 구불구불한 선들처럼 보입니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때로는 혼란스럽고 방향이 없어 보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 안에도 하느님의 손길과 인도하심이 숨어 있다는 엄연한 진리를 우리를 꼭 믿어야 합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구불구불한 선들이란 때로 우리 마음속의 낙서처럼,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나 생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관상은 그런 내면의 혼란을 억누르기보다 그런 어수선한 감정과 생각들을 의식하되, 거기에 붙잡히지 말고 그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고는 오로지 진정한 현실인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시간이요 공간입니다.
그것은 복잡한 상징이나 해석이 아니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처럼, 구름은 구름이고, 바람은 바람이며, 고통은 고통으로 보이는 단순한 시선입니다. 우리가 눈을 감고 마음을 닫은 채 판단할 때, 우리는 현실이 아닌 과거를 보고, 하느님 현존과 이끄심의 참된 현실이 아닌 자기 에고의 확신, 즉 정체된 물과 같이 썩어 버 고정 관념 속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관상은 우리를 나무 위로 초대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이미 다가온 현실을 지금 이 순간 안에서 인식하는 것입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정글 속에서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은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는 사자를 볼 수 있지만 나무 아래 앉아 있는 사람은 사자가 오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무 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사자가 오는 것이 현재이지만, 나무 아래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미래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식별의 시작이요 관상적 삶의 시작입니다. 이 식별은 복잡한 해석이 아닌, 맑고 단순한 시선으로 지금을 넓게 바라보고 멀리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관상은 눈을 감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깨어나는 것이며, 참된 신앙은 에고의 확신이 아니라 경청과 식별의 여정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빛은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자리에 계신 하느님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많은 이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특별한 순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고, 구원의 시간이 도래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 제4항에서 오늘 복음 말씀을 현대에 적용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교회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놓친 기회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우리가 지금 이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식별하지 못함으로써 놓치고 있는 기회가 얼마나 많은지도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복음의 빛으로 오늘의 도전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선과 사랑으로 이 세상을 창조해 주셨기에, 우리는 악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물론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창조물을 절대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는 하느님께서 직접 걸으셨던 땅에 살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며, 이 땅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자상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여러분 자신이나 누군가의 잘잘못에 집중하지 말고 서로 안에서, 그리고 여러분 주변의 세상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올바른 일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시시비비에 눈이 어두워져 거기에 사로잡히게 되면 여러분은 그 감옥에 갇히게 되는 셈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잘못이나 자신의 억울함에만 집중할 때, 마음은 점점 닫히고, 하느님의 은총을 인식할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영적인 감옥에 갇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로 안에서, 그리고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일'이며, 진정한 자유의 길입니다!
주님,
저희는 때로 눈을 감고, 마음을 닫은 채
에고의 확신 속에 머무르며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단죄하기까지 합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두려움과 고집,
그리고 당신의 빛을 가리는 어둠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깨어 있으라. 눈을 떠서 보라." 하고요.
주님, 저희가 지금 이 순간을 보게 하소서.
과거의 그림자나 미래의 불안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당신의 현존을 인식하게 하소서.
구름은 단지 상징이 아니라, 곧 내릴 비 그 자체입니다.
당신께서 보여주시는 시대의 징표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현실 안에 있습니다.
저희를 나무 위로 올려 주소서.
나무 아래서 과거에 휩싸이거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저 위에서 이미 다가온 현실을 지금 이 순간 인식하게 해 주소서.
복잡한 해석이 아닌,
맑고 단순한 시선으로 당신의 현존을 의식하고 당신의 뜻을 식별하게 하소서.
이 식별 안에 저희가 깨어 있게 하시고, 당신의 빛을 따라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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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4. 연중 29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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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4. 연중 29주간 금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를 풀이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라고 부르십니다.
땅과 하늘의 징조를 풀이할 줄 안다는 것은
그만큼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다른 사람보다 영리합니다.
하지만 그 영리함을
시대를 풀이하는 데에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즉 시대를 풀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것은 하고 어느 것은 하지 않는 식으로
선택해서 행동하는 것이 위선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자기 능력을 사용하지만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데에는
자기 능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시대를 풀이하는 것은
지금 시대가 어디로 가는지 살펴보고
올바른 방향을 잡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각자의 모습, 특히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드러내기 바쁜 마음은
나를 화려하게 포장할 뿐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행여 추한 모습이 드러날까 두렵고
보게 되어도 내 모습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자신을 드러내는 행동을 멈추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나 자신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내가 드러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좋게 보아도
나의 정체성이 없는 상황에서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즉 나는 나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려놓은 그림, 사람들이 그려놓은 그림에 따라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이라면
그 화려한 모습이 행복이라면
그것을 쫓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행복인지 아닌지 돌아볼 여유도, 기회도 없이
그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나를 돌아보는 것을 잊어가기에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 생각할 틈도 없이
사람들이 말하는 화려한 모습만 쫓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잠시 멈추어 나를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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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4. 연중 29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2,54-59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오늘의 제1독서에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진솔한 고백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를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특히 이 구절이 내 이야기처럼 가슴에 콱 박히지요.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18-19) 신자분들 중에 죄를 짓고 싶어서 짓는 분들은 없을 겁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계명들을 실천하며 살아보고자 애를 쓰지만 뜻대로 안될 뿐이지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스멀대며 고개를 내미는 욕정과 탐욕, 교만과 이기심, 나태함과 안일함 때문에 무엇이 옳은 것인지도 알고 그대로 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본의 아니게’ 자꾸 옳지 않은 것들을 택하여, 나도 모르게 그것을 하고 있는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자책하게 되는 겁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위선자’라고 질책을 듣는 군중들의 현실도 그랬을지 모릅니다. 세상의 이치에 밝은 만큼 무엇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올바른 길인지도 잘 알았지만, 그 길을 걸어야 한다는 당위성도 분명하게 깨닫고 있었지만, 본의 아니게 혹은 어쩔 수 없이 그러지 못한 것이지요. 주님께서 알려주신 올바른 길을 걷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꿔야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온갖 이익과 편리함을 다 포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런 것들에 익숙해져 깊이 물들어 버렸기에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들의 신앙은 삶과 분리되어 버렸고, 말로는 자신이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 신앙인이라 주장했지만, 정작 행동과 삶은 주님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런 모습을 우리가 가장 조심하며 피해야 할 ‘위선’이라고 지적하신 것이지요.
우리 인간은 그 본성상 ‘하느님의 법’에 이끌리며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당신 모상대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 잘 판단해서 해야 할 ‘올바른 일’은 자꾸만 나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세상의 유혹들을 멀리하고 주님께 돌아서는 일입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자세로 날마다 자기 삶을 성찰하고 꾸준히 회개하며, 하느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뜻을 헤아리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래야만 세상 종말의 날에 이루어질 심판의 순간을 기쁘고 당당하게 맞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재판관에게 가기 전에, 즉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여러 이유로 갈등을 겪으며 반목하고 있는 형제들과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세상에서 꽁꽁 얽힌 증오의 실타래를 풀지 않고 방치했다가 지옥행 판결을 받게 되면, 내가 이 세상에서 잘못한 죄들을 완전히 다 보상하기 전까지 다시 하느님 품으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상 이치에만 밝은 헛똑똑이로 살지 말고 어서 빨리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따라야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내가 회개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단 한 순간도 헛되이 흘려보내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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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4. 연중 29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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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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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4. 연중 29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김종업로마노
하늘에는 생명이요 땅에는 죽음이다.
복음(루카12,54-59)
54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5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 하느님의 말씀이 하시는 일이다. 말씀 그대로 되는 것이다.
56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57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 모든 피조물들에게 올바른 일이란? 오른, 올바른 하늘의 진리(1+1-1), 곧 ‘선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의 악, 죄를 대속하시고 용서, 생명을 주는 그 선이 죽음, 그 사랑을 왜 진리로 깨닫지 못하느냐?’ 하심이다. 하늘과 땅이 그 진리를 말하고, 보존되고 있기 때문이다.(이사55,10-11참조)
58ㄱ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 나의 악, 죄를 대속하신 새 계약의 그리스도로 합의(合意), 셈하는 것이다.
(골로2,14) 14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선악의 법)들을 담은 우리의 빚 문서(죄악들)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 ‘믿습니다. 아멘’으로 받지 않으면~
58ㄴ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59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 선이 악을 대속하시고 생명을 주는 그 하나를 진리로 깨닫고 믿을 때까지다.(1-1=1) 선악을 나누어 둘로, 법으로 갖은 세상은 절대 믿지 못하는 하늘의 진리다.
살아 계셨던 예수님을 기억하며 자신의 뜻, 소원을 이루려는 사람, 또한 악을 대속한 선이신 그리스도의 용서를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그 선의 사랑이 진리로, 우주 만물 안에, 내 안에 가득하다. 갚을 수 있음이다.
(로마1,20) 20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힘, 사랑을 깨닫고 믿을 수 있도록 이끄시는 보호자 성령께 의탁하는 것이다. 말씀 안에 늘 머무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된다.(요한8,30-31 참조)
눈에 보이는 것에 갇혀서 엉뚱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에서 벗어나 생명, 자유를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진리다.
선악의 법을 깨고 그 법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다. 곧 율법과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리다.
☨영원한 보호자이신 진리의 성령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먹고, 마음에 지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도록, 늘 함께 하시어 말씀으로 저희 모두 안에 충만(充滿) 하소서. 진리로 자유하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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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4. 연중 29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공유
김건태 신부님_회개의 삶
우리 인간에게 주신 천주 성령의 가장 큰 선물 가운데 하나는 판단력 또는 분별력입니다. 세상의 일에 관하여 사람들은 어떤 상황을 판단하고 위험 수위를 측정하며 그에 걸맞은 행동을 결정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음을 자랑할 때가 참 많습니다. 사실 자랑할 만도 합니다. 예수님이 군중에게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하고 개탄하시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 이 판단력 행사가 필요한 곳은 세상일이 아니라, 이 시대, 곧 요한 세례자가 예고했고 예수님이 몸소 하느님의 능력을 표징으로 보여주시며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다가오고 있는 이 시대에 관한 일입니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가장 귀가 어두운 사람은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을 판단하는 일에서, 문제는 듣기를 마다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조언이나 충고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내부의 소리, 양심의 소리는 들어야 하는 데도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스스로 판단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양심이 일러주는 그 길이 마음에 내키지 않거나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회개는 잘못된 의식을 전환하고, 몸에 밴 귀한 버릇을 포기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성실하지 못했음을 반성하는 일을 가리킬 것입니다. 마음을 바꾸어 양심의 소리만은 따르겠다는 결심을 앞세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귀가 어두운 사람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각각의 세대는 결정적인 시대를 살고 있으며, 우리의 미래는 이 시대에 관한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은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은 오늘 우리가 겪어야 할 사건들과 만나는 사람들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선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들어야 합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절박한 부르심, 사랑 실천을 독려하는 간절한 부르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너무나 자주 듣기를 마다하여 어두운 귀를 들이대거나 자랑하는 무례를 범할 때가 많았음을 반성하며,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일례로 소개하시는 장소는 준엄하기로 이름났던 로마 법정입니다. 한번 소송이 펼쳐지면, 그 과정이 가혹하기 이를 데 없던 법정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법정의 이 냉혹한 현실을 상기시키시면서, 재판관 앞에 서기 전에 합의를 봄으로써 최악을 모면하도록 권고하십니다. 이 권고를 통해서 예수님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수도 있는” 최후의 심판 날에도 두려움이나 초조함 없이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회개의 길을 걸어갈 것을 독려하십니다.
따라서 너무 늦지 않도록 회개를 결심해야 합니다. 무자비한 판관으로서의 주님이 아니라, 한없이 자비로우신 판관으로서의 주님을 뵙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결단은 회개입니다. 회개를 망설일 때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하고 물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 성령께서 우리에게 큰 선물로 내려주신 판단력을 기초 삼아, 회개만이 준엄한 징벌을 모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가슴에 새기며, 등 돌린 삶에서 주님을 향해 다시 돌아서 신앙의 길을 망설임 없이 걸어나가는, 은혜로운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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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387
10월24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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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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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서울대교구 가브리엘(장위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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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시대는 임마누엘 주님과 함께 하는 구원의 시대요 축제의 시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말씀 한 마디를 건네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56) 특히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못하느냐?”냐는 표현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지금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시대! 얼마나 은혜로운 시대인지 모릅니다. 하느님의 육화강생으로 인해, 이제는 임마누엘 주님과 항상 함께 하는 시대입니다. 구원의 시대요 축제의 시대입니다.
예수님 탄생 이전은 암흑의 시대였지만 탄생 이후는 광명의 시대입니다. 그전은 슬픔과 고통의 시대였지만 이제는 축제와 환희의 시대입니다. 이전의 시대는 죄와 죽음의 시대였지만 이제는 예수님 탄생으로 인해 구원과 생명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슬퍼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통곡할 필요도 없습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 우리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우리 곁에, 우리 안에 와계시며 우리 매일의 삶을 동반해주십니다. 죽는 순간까지 함께 하실 것이며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는 순간조차 우리를 지켜보실 것이며, 죽고 나서까지 확실하게 애프터서비스해주실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가까이 다가오신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과 함께 매일 매일 축제를 벌여야 할 새 시대인 것입니다. 더 이상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 이상 괴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미래를 확실하게 책임져주실 것이니 매일 그분께 맡기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서 충만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요?
우리가 지내고 있는 이 시대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인한 구원의 시대이자 축복의 시대입니다.
더 이상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그저 단순하게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하느님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것, 비천한 죄인인 우리의 발을 씻어주신 사랑의 하느님을 따라 우리도 이웃 사랑에 투신하는 것, 그저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의 품안에서 행복해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지금 이 시대에 대한 올바른 해석에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은총이 뒤따를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고통이 고통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슬픔이 슬픔이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하느님의 위로 속에서 살기 때문에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의 풍랑 앞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면서도 눈부신 미소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거듭되는 불운과 실패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꾸준히 나아갈 것입니다. 깊은 슬픔 속에서도 희망의 창문을 활짝 열어놓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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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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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고소하는 자는 누구이고, 화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현실적이고 긴급한 경고를 하십니다. “네가 고소인과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길에서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너는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은 마치 한 편의 법정 드라마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이라는 길을 걸어 마지막 재판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정에 ‘고소인’이 동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고소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끔찍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도대체 나를 고소하는 자는 누구이고, 그와 화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고소인이라 하면, 묵시록에 나오는 ‘악마’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고소인이 악마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소인은 재판관의 편에 서서 정의를 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재판관이 하느님이시라면, 고소인 역시 하느님의 편에 선 존재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심어두신 ‘양심’ 이며, 우리를 당신께로 이끌기 위해 주신 ‘거룩한 법’ 입니다. 결국 우리를 고소하는 것은 외부에 있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바로 내 안에서 울리는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창세기의 야곱 이야기는 이 진실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을 가장 두렵게 한 것은 형 에사우의 군대였지만, 정작 그의 발목을 잡고 머뭇거리게 만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양심’이었습니다. ‘나는 형을 속이고 얻은 이 장자권을 가지고 과연 합당하게 살았는가?’ 이 양심의 고소가 야곱을 뜬눈으로 밤을 새우게 했습니다. 그가 이 고소와 화해하는 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야뽁 강가에서 정체 모를 존재, 즉 하느님의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하다가 마침내 엉덩이뼈가 부러지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힘과 교만, 잔꾀를 상징하는 뼈가 부서지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온전히 하느님께 매달릴 수 있었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는 자신을 고소하던 양심의 실체인 형 에사우를 만납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형 앞에서 땅에 일곱 번 엎드려 용서를 구하고, 마침내 형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양심의 고소는 우리를 벌주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교만을 부수고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게 하려는 그분의 초대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양심의 소리를 외면할 때, 그것은 우리 영혼을 가두는 가장 끔찍한 감옥이 됩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를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비범함을 증명하기 위해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살해합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순간부터 그의 양심이 그를 고소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경찰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쫓깁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사람들의 모든 눈길과 대화가 자신을 고발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의 방은 문자 그대로 감옥이 되고, 그의 삶은 지옥이 됩니다. 결국 그는 이 양심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죄를 고백하고 나서야 비로소 구원의 길로 들어섭니다.
이처럼 우리를 고소하는 양심과의 화해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그 길을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닭이 울었을 때, 그의 양심은 그 어떤 칼보다도 날카롭게 그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그런 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화해의 본질을 깨달아야 합니다. 양심과의 화해는 ‘주님, 다시는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교만한 자신감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주님, 저는 또 넘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자신의 비참함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참된 화해는, 그런 나약한 나를 아시면서도 당신 아드님의 피로 나의 죄를 언제나 기꺼이 씻어주시는 주님의 무한한 자비에 의탁하며, 눈물로 그저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그 사랑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의로움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야곱처럼 땅에 일곱 번 엎드려 나의 죄와 무력함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얼굴을 내 이웃 안에서 발견하며, 그분을 찬미할 수 있는 상태, 그것이 바로 의로움입니다. 노예 상인이었던 존 뉴턴이 ‘나 같은 비참한 죄인 살리신’ 주님의 놀라운 은총을 노래했던 것처럼, 나의 죄가 클수록 그분의 자비는 더욱 놀랍게 빛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고소인, 즉 율법과 양심과 완전히 화해했다는 최종적인 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 받은 용서를 다른 이들에게 흘려보내는 ‘용서의 실천’입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에바 모제스 코르 여사는 자신을 고문했던 나치 의사를 용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서는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과거의 고통이라는 감옥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나를 고소하던 과거의 원한과 상처로부터 나 자신을 풀어주는 마지막 열쇠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나를 고소하는 자는 율법과 양심입니다. 그리고 그와 화해하는 방법은 명확합니다. 첫째, 나의 죄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둘째, 절망하는 대신 나를 용서해주시는 주님의 자비를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그 받은 사랑으로 나의 잘못을 용서하신 주님처럼, 나 또한 다른 이들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용서받고도 용서하지 않는 양심의 가책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양심은 정의 시스템이기 때문에 받은 것은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길을 걸어갈 때, 자비로운 가죽옷을 입은 사랑받는 자녀로 당당히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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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생손앓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끔 손톱 옆이 갈라질 때가 있습니다. 가만히 두면 저절로 아물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성격이 급해서 그걸 뜯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상처가 덧나고, 일할 때도 불편하곤 합니다. 모기나 벌레가 물어서 부풀어 오르거나, 물집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때도 약을 바르면 곧 아물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성격이 급해서 그걸 긁거나 뜯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시간도 더 걸리고 상처가 생기게 됩니다. 내 몸은 며칠 지나면 아물고, 작은 상처로 남지만 기업과 국가의 정책이 그리되면 많은 이가 피해를 보게 됩니다. 기업은 큰 손실을 보게 됩니다. 미국 정부는 전문직 비자의 비용을 1,000불에서 100,000불로 올린다고 합니다. 자국의 전문직 인력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라고 합니다. 그런 정책이 생손앓이가 될는지, 작은 상처를 더 크게 덧나게 하지는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MAGA’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Make America great again’이라는 말의 줄임말입니다. 높은 관세와 강력한 이민국의 단속이 생손앓이가 될는지, 작은 상처를 더 크게 덧나게 하지는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불가에서는 선을 수행하면서 깨달음에 방해가 되면 부처의 가르침일지라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넜으면 배를 버리라고 이야기합니다. 폴 카퍼는 ‘열린사회와 적들’에서 인류의 철학적인 스승이라고 존경받는 ‘플라톤, 칼마르크스’를 비판하였습니다. 플라톤의 ‘국가’는 뛰어난 지도자가 통치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국가는 자칫 전체주의에 빠질 수 있고, 우생학을 근간으로 타 인종에 대해 억압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폴 카퍼의 열린사회는 뛰어난 지도자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발전시키는 나라였습니다. 이런 국가는 발전은 느릴 수 있겠지만 국가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칼마르크스는 역사를 필연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봉건사회, 자본주의 사회, 다음은 공산주의 사회가 될 것으로 예측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역사 인식은 맞지도 않고, 있지도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역사는 필연의 과정이고, 인류는 그런 필연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고민하고 성찰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얼마나 쉽게 자기모순에 빠지는 존재인지 보여줍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행하고 맙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절망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희망을 발견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성사와 공동체의 소중함을 깨닫는 시간이었고, 교황님 말씀처럼 ‘나눔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임을 자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을 찾듯이, 우리는 위기의 시대 속에서도 희망의 징표를 발견했습니다.
“인간에게는 경멸보다 찬미할 이유가 더 많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역병 속에서도 서로 돕고 나누며 인간다움을 지켜가는 모습에서 희망의 가능성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러한 희망의 시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상처를 긁어 덧내는 조급함이 아니라, 인내와 지혜로 상처가 치유되기를 기다릴 줄 아는 눈, 그리고 시대의 징조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읽어내는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던 것이라도 주님께 나아가는 길을 방해한다면 과감히 버릴 수 있는 용기, 그것이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입니다.
“주님,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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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이찬우 다두 신부님]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면 그날 날씨가 어떤지 알아봅니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하루를 준비합니다. 하루 전에 날씨를 가늠하기도 합니다. 밤에 별빛이 밝은 날은 다음 날 해가 쨍쨍합니다. 무릎이 쑤시고 허리가 아프면 어김없이 다음 날 비가 옵니다. 그래서 무릎이 쑤시면 늘 우산을 준비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날씨를 알아보고 그에 맞추어 준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솔직히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지금 살아가는 세상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 아프고 고통스럽기에, 그저 이 순간을 살아가기에도 벅차고 빠듯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자꾸 내일로 미룹니다.
라이트 형제가 맨 처음 만든 비행기는 공중에서 겨우 십이 초 머물렀다고 합니다. 시작은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것없었지만, 그들의 첫 시도가 있었기에 지금의 비행기도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일치하기를 바란다면 그분께 가는 여정을 망설여서는 안 됩니다. 그 길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여기서 행동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12,58)라고 하시며, 미루지 말고 행동하라고 하십니다. 나는 어떤지 생각해 봅시다. 지금 해야 할 기도와 선행을 자꾸 미루고 있지는 않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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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54-59: “법정으로 가는 길에서 화해하도록 힘써라.”
사람은 날씨의 변화를 보며 내일 비가 올지, 바람이 불지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세상의 징표는 읽을 줄 알면서 정작 하느님께서 우리 삶 안에 주시는 구원의 징표는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죽음과 심판 이전에 회개하고 화해할 기회가 주어졌음을 일깨워 준다.
예수님은 “너를 고소한 자와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58절) 하신다. 여기서 ‘재판관’은 종말에 우리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우리는 모두 죄인으로서, 살아있는 동안에야만 하느님의 자비를 통해 죄의 빚을 탕감받을 수 있다. 죽음 이후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고, “마지막 한 닢까지”(59절) 갚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이 구원의 때이며, 회개와 화해의 시간이 지금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성 치프리아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자비의 시기이고, 회개의 시간이지만, 심판이 시작되면 은총의 문은 닫히고, 각자는 자기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De Lapsis, 28) 성 아우구스티노 역시 우리를 일깨운다: “오늘은 네가 고쳐야 할 날이다. 내일은 아직 네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내일을 약속하지 않으셨다. 오늘을 주셨을 뿐이다.”(Sermones, 169, 15) 또한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지상 생애가 끝나면 우리는 단 한 번의 죽음을 겪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이때 각자는 자기 삶을 책임지며,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따라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게 된다.”(1021항 참조)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빚’을 지고 산다. 하느님께 지은 죄, 이웃에게 지은 잘못, 마음속에 남은 분노와 미움….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의 길, 화해의 길을 열어 주신다. 고해성사를 통해, 또 서로에게 용서를 청함으로써 우리는 빚을 탕감받을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 하지” 하고 미루다 보면, 마지막 순간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을 수 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간절히 요청한다. 아직 살아 있을 때 화해하라.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용서를 청하라.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주님의 자비를 붙잡아라.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의 때이다.
우리는 모두 법정으로 가는 길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화해와 회개의 시간을 주신다. 이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말고, 주님의 자비로 우리 영혼을 깨끗이 하며,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자. 그럴 때, 우리는 재판관이신 주님 앞에서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으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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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늘 그렇게>
루카 12,54-59 (시대를 알아보아라, 늦기 전에 화해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늘 그렇게>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56-57)
불신의 시대에
늘 그렇게
오롯한 믿음을
절망의 시대에
늘 그렇게
새하얀 희망을
증오의 시대에
늘 그렇게
뜨거운 사랑을
홀로의 시대에
늘 그렇게
굳건한 함께를
배척의 시대에
늘 그렇게
살가운 포용을
탐욕의 시대에
늘 그렇게
끝없는 나눔을
죽임의 시대에
늘 그렇게
애타는 살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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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루카 12,54ㄴ-59)
1)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라는 말씀은, “날씨 예측은 잘하면서, 메시아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은 왜 알아보지 못하느냐?”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메시아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메시아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말은,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종말과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회개는 지금 당장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는 지금,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종말의 시대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세속 일은 잘하면서, 영적인 일은 왜 하지 않느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인간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세속적인 일들과 물질적인 일들은 잘 알고, 또 잘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과 영혼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위선자들’이라고 꾸짖으시는 것은, 그들이 모든 일에서 잘난 체를 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날씨에 관한 말씀은, 21장에 있는 무화과나무에 관한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 21,29ㄴ-33)
당시에 그 지역에서는 여름이 추수철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추수는 심판을 상징합니다.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라는 말씀은, “여름이(추수가,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아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라는 말씀도 종말과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 일들이 완성될 날이 가까이 와 있다는 뜻입니다.
3)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종말의 표징입니다. 또 병자들을 고치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등,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들도 종말의 표징입니다.(루카 11,20)
4)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라는 말씀은, “너희는 왜 회개하지 않느냐?”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올바른 일’은 ‘회개’를 뜻하고, ‘판단’은 실행을 뜻합니다.>
이 말씀에서 세례자 요한이 했던 말이 연상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루카 3,7ㄴ-9)
세례자 요한도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라고 말하면서,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했을 때, 당시 사람들은 심판이 곧 닥친다고 생각했는지 요한에게 몰려가서 ‘회개의 세례’를 받았는데, 그 일은 아마도 일종의 군중심리 같은 것이 작용했던 일로 보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라 분위기에 휩쓸려서 회개하는 척만 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즉 “말로만 회개한다고 하지 말고 삶으로 실천하는 진짜 회개를 하여라.” 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군중심리는, 또는 당시의 분위기는,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이면서 금방 식어버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기 전에, 즉 지금 살아 있는 동안에 회개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인생이란, 이쪽 세상에서 저쪽 세상으로 가는 여행이고, 동시에 하느님의 심판대를 향해서 가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회개와 보속을 완전히 실행하기 전에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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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적인 사정에 민감하라>
어르신들은 지혜가 많으신 분입니다. 많이 배우지 못해 지식은 풍부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분도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는 늘 차고 넘칩니다. 제비가 낮게 날고 있는 것을 보면서 비가 올 것을 예상했고, 개미의 움직임을 보면서 장마에 대비했습니다. 서쪽에서 밀려오는 구름을 보며 비를 예상하고 남풍이 불면 더위를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이렇게 지혜 있는 사람들은 자연의 징조를 읽어냈고 거기에 맞는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의 지혜에 밝은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무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기적들과 가르침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관심 부족이 아니라 외면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바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옛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기득권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에 시대의 뜻을 올바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시대의 징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체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선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시대의 뜻은 겉모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나를 비워낼 때 하느님의 뜻을 만나게 됩니다.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바뀌기를 기대하지 말고 먼저 내가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환경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하나의 촛불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 할 일을 오늘 복음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재판관에게 가기에 앞서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루카12,58).는 것입니다. 화해가 쉽지는 않지만, 재판정에 서서 판결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5,24) 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에페4,26) 하고 권고합니다.
더더욱 판결을 받아 감옥에 가게 되면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말씀이든 ‘나는 아니야’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어떤 말씀이나 강론을 들으면 “저 얘기는 아무개를 두고 하는 얘기야!”, “그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 하고 자기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대의 징표를 읽는 사람은 “모두가 나를 두고 하는 말씀이야!” 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대는 하느님을 잊어가는 시대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정신이 아주 사소한 틈새까지 파고들어 우리를 정복하려고 들고 그에 따라서 우리는 더욱 영적인 사정에 둔감해지는 시대입니다”(함께야).
이런 시대를 올바로 분별하려면 세상의 지혜를 찾지 말고, 주님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심판의 마지막 날이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회개할 기회입니다. 진정한 변화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한순간도 헛되이 하지 않기를 빕니다. 단풍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곧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겨울을 맞이할 것입니다. 아름다움의 절정에는 내려놓아야 할 과정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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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경덕 베드로 신부님]
찬미예수님,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따라 가슴 깊이 저에게 박히는 듯 싶습니다.
신학교에서는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학교 전체가 긴장감으로 휘감깁니다. 시험 시작 전 교수신부님께서 문제를 내주시기 전 긴장해 있는 저희를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오랫동안 당신은 신학교에서 생활하셨고, 많은 신학생들을 보아왔노라고 하셨지요. 신부님께서는, 우리 신학생들은 분명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다가오면 어찌 될지 잘 알면서도 수업시간엔 절대 긴장하지 않는다고. 평소에 조금은 더 긴장하고 정신 차리면 이러한 분위기는 조금은 편한 분위기가 될텐데...
그리고나서 저희 모두에게 다시 말씀 하셨지요. “너희는 내가 어떤 문제를 낼 줄 아니?” 아무도 교수신부님께서 어떠한 시험문제를 내실지 알 수 없었기에 대답할 수 없었고, 공부한 것이 잊혀지지 않기를 희망하면서 빨리 시험을 보길 희망했습니다.
그 때 그 신부님께서는 저희를 향해서 환한 미소를 지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학생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시험문제도 아니고, 시험결과는 더더욱 아니고, 바로 시험을 보기까지의 과정이야”라고 하셨습니다.
순간 저희 모든 반은 의심이 들었습니다. 학교에서 가장 힘든 과목중 하나인 이 시간에 시험이 없어지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희망과 알 수 없는 두려움들이 뒤섞였습니다. 그 순간 신부님께서는 “지혜로운 신학생들이 아직까지도 내 말을 듣고도 징표를 읽어내지 못함이 이스라엘 군중과 같네”라고 하셨고, 저희 모두는 큰 소리로 환호를 했고, 대학원 2학년 마지막 시험은 무사히 마쳤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땅과 하늘의 징표를 풀이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표를 풀이할 줄 모르는 것에 대해 조금은 답답해 하십니다.
용서와 화해.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또다른 이름들인 것이였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모두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리석은 실수를 많이 저지르고 맙니다. 중요한 일을 두고서는 용하다는 점장이를 찾고, 젊은 이들은 타로카드나 인터넷 점을 치기도 합니다.
본당에서 사제가 점장이나, 운세를 보지 말라고 하면, 신자분들은 말씀하십니다. “신부님께서는 중요한 일을 두고 아무것도 알 수 없고, 말씀해주시지도 않는다”고.
사제는 정말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거 하나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점장이와 운세보기가 가까워지면 분명 하느님과 거리가 멀어지고, 그러한 것은 곧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는 이들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과, 정작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그 일들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바람결에 흩날리는 재와도 같음”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아합왕은 자신이 병이 나자, 하느님께 여쭙지 않고, 이방신의 제사장에게 가서 자신의 병을 문의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에는 하느님도 없고, 하느님의 사람이 없어서 헛된 것에 자신의 명을 맡기고, 하느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가?”하고 말입니다.
점을 보는 것이 사제에게 미안한 것이라서 죄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점을 보는 것이 봉헌금 보다 많아서 죄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바쳐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가슴에 날카롭고도, 푸르게 날이 선 비수를 꼽는 행위이기에 죄라고 부르는 것이며, 정작 중요한 것이 하늘의 것이 아닌 세상의 것이라고 하기에 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느님 사랑의 징표를 읽어내야 합니다.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신 하느님 사랑의 징표를. “주님 제 가슴은 지금 당신의 사랑열정으로 불타고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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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등 우리의 감각 기관을 통해서 세상을 파악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눈이나 귀를 통해 얻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그 이면에 더 깊은 배경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더 나아가 때로는 눈이나 귀가 우리를 속일 수도 있고, 반대로 우리가 온전히 우리의 선입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착각하고 있음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눈앞에 다가오는 하느님의 나라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징표로 마치 불가사의한 기적과 같은 일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기적 가운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지극히 일상적인 삶이 정상적으로 자리를 잡을 때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고 존중받는 세상, 저마다 열심히 일하면서 자신의 인격과 소명을 완성시킬 수 있는 세상, 사랑으로 서로의 부족한 면을 채워 주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소박한 세상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우리가 시대의 징표를 잘 읽어 내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점점 발전해 가는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려면, 우리 세대가 가진 과제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의 표징은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우리의 오늘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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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왜관수도원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향하여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고 질책하십니다.
일기 예보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늘 자연을 살피면서 기후를 예측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서쪽에는 지중해가 있었기에 바다가 있는 서쪽에서 구름이 몰려오면 비가 올 것을 예상하였고, 남쪽의 사막 지대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더워질 것을 예측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늘과 땅의 변화를 풀이할 때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어떻게 이 시대의 징표, 곧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가르침과 기적을 주신 것을 보면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냐고 질책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선자라고 하시는데, 이때 말씀하시는 위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속은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선한 척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보고 들으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시대의 징표’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관련된 표징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선뜻 나서서 신앙을 고백하지도, 회개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내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결코 시대의 흐름을 올바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신앙에서도 주저하고 망설이면서,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태도로는 하느님을 알 수도, 신앙을 실천할 수도 없습니다.
마음을 열어서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용기를 내어 신앙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신앙을 통해서 앎이 깊어지고, 신앙생활이 어떤 맛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어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하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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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아이가 제게 묻습니다.
“신부님은 왜 아직도 그렇게 책을 많이 읽어요?”
아마 어른이 되면 공부할 필요가 없으니,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재미없어 보이는 책을 읽고 있으니 그 모습이 이상했나 봅니다.
책을 읽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첫째로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 안에 지식은 차고 넘치지만, 저의 지식은 너무나도 보잘것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경험하지 못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신부이기에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저의 경험은 너무나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자의 경험을 통해 간접적인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제일 중요한데, 저만의 소신을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지 않으면 그냥 뜬구름잡기식입니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구체적인 내용이 없이 열심히만 살 뿐입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저만의 소신을 만들어가게 됩니다. 어떻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를 만들어가면서, 이 세상을 더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책을 꾸준히 읽습니다.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분명히 성장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찾아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보내신 이 지구별에서 온전하게 생존할 수 있게 합니다.
주님께 꾸준히 나아가는 노력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알아가면서 겸손해질 수 있고, 세상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깨닫게 되고, 자기만의 신앙으로 주님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런 노력 없이 주님께 막연하게 “알아서 해주세요.” 한다면, 주님의 손길을 전혀 느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56)라고 꾸짖으십니다. 그들의 무지가 아닌, ‘위선’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들은 자연 현상을 분석해서 자기 일상(농사, 항해 등)에 대비할 줄 아는 지혜가 있었지만, 정작 자기 구원과 직결된 이 시대의 징표는 외면하고 분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 무엇보다 그분의 현존 자체가 바로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징표인데,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알아야 하고, 세상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기의 신앙을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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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징조'를 잘 읽고 ‘바르게 행동하라’는 엄한 경고>
오늘 복음은 '이 시대'의 징표를 풀이하고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책망하여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56-57)
사실 군중들은 자연의 징표나 자신 몸의 징표는 잘 읽고 대처하면서 ‘시대의 징표’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과 같은 거짓 지도자들의 판단에 의존하면서 책임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하고, 그들의 ‘회피’와 ‘위선’을 질책하십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시대의 징표’를 복음으로 읽어내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눈으로 읽으면서 또한 그러한 눈으로 세상을 읽고 있는 언론에 의존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루카 12,58)
'징조'를 잘 읽고 ‘바르게 행동하라’는 엄한 경고입니다. 곧 재판에 붙여지기 전에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역사의 징조를 읽으셨고, '때가 차자'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시어 빛을 비추셨습니다. 또한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도 끊임없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해석하고 응답해 왔습니다.
그것은 교회 문헌들, 특별히 <사회회칙들>에 잘 드러납니다. 곧 교회는 끊임없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늘의 사회, 윤리적인 문제에 적용하여 해석하고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2013년에 발표하신 교황 권고 문헌인 <복음의 기쁨>에서, “모든 공동체가 시대의 징표를 주의 깊게 살피도록 권고”(51항)하셨습니다.
그리고 돈이 우상화 된 ‘신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물질만능의 ‘물신주의의 병폐’와 ‘무관심의 세계화’ 등을 지적하시면서,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하는 교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난한 교회’, 곧 함께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공빈(共貧)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5년, 환경을 주제로 한 첫 번째 회칙인 <찬미 받으소서>에서,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으로 기술 만능주의와 왜곡된 인간 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통합적이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다양한 차원의 대화와 생태 교육을 촉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찬미 받으소서>의 후속 권고 문헌인 <하느님을 찬양하여라>에서는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하기 위해 ‘생태적 회심’을 호소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이 시대가 징표'를 읽고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라.'는 예수님의 촉구에 응답하며, 이 시대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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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 할 줄 알면서, ~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56-57)
주님!
세상의 빛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눈으로 시대의 징조를 읽어내고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대처하게 하소서.
시대의 방관자, 위선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말과 혀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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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56)
<이 시대의 의미와 해야 할 일!>
오늘 복음(루카12,54-59)은 '시대를 알아보아라.'는 말씀과 '늦기 전에 화해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날씨의 변화에 대해서는 민감하면서도, 이 시대의 중요성에 대해 둔감한 이들의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늦기 전에 얼른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세상 것과 세상 이치에는 엄청 밝으면서도, 하느님의 것과 하느님의 뜻에는 둔감한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지적입니다.
세상 것과 세상 이치에 밝은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말이 많고 시끄럽습니다. 드러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것에 대해 관심이 많고, 그 뜻을 따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조용하고 겸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시대'는 '예수님 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결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결정적인 시간의 의미를 지닌 '카이로스의 때'입니다.
지금 우리 안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AI(인공지능)'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표지가 되었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분열의 모습도 보이고, 지금의 미국처럼 자국의 이익만을 바라보는 집단이기주의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또한 심각한 기후변화의 위기도 보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세상이 간과하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꼭 실현되어야 하는 하느님의 것과 하느님의 뜻을 더 바라보게 합니다.
'하느님의 것과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뜻'은 '사랑'입니다. '생명'입니다. '지구공동체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 존엄성의 실현'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얼른 해야 할 일은 '화해와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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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57)
변화를 온 삶으로
받아들이는
단풍처럼
하느님의 뜻을
우리들 또한
받아들임이
올바른
순리입니다.
올바른 판단이란
진리 앞에서
자신을
성찰할 줄 아는
내면의 성실한
성숙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따르는 힘은
결국 깨어 있는
양심에서 나옵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리 똑똑해도
무엇이 옳은지
보이지 않습니다.
올바른 판단은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비롯된 신앙의
행위이며,
하느님 뜻에
순종하려는
영적 식별의
열매입니다.
때를 알아보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며
하느님 앞에서
자유로이 서는
용기에서
시작됩니다.
올바른 일을
우리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판단은
우리의 진실성에
뿌리를 둡니다.
올바름은
이와 같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랑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것이
올바름의 멋진
삶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음 속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잃었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회복하여
올바른 길로
서로를 안내하는
참된 사랑의 날
되십시오.
올바른 판단이란
하느님의 뜻과
사랑으로
깨어있는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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