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위력
많은 사람들이 ‘모두가 마음 편하게 살아가는 평등한 세상’을 꿈꾼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또 시대의 고금(古今)을 가릴 것 없이 민중들은 이런 세상을 꿈꾸었을 뿐 아니라 많은 사상가들도 ‘대동(大同)’이 되었든 ‘미륵서방정토’가 되었든 아니면 ‘천국’이 되었든, “이런 이상향을 건설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나름대로 방책을 제시하였으며, ‘혁명’을 통해 진정으로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보려고 실제 행동에 나섰던 이들도 많이 있었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 ‘진정한 평등 세상’이 이룩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평등 세상’은 역설 중에서도 가장 큰 역설이 아닐까 싶다. 인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이 꿈은 영원히 실현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 그래서 더욱 소중하고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될 꿈인지도 모르지만 ……
혹 부처님 시대에는 어땠을까? 그때는 뭔가 달랐을까?
아직까지도 인도의 빈농과 도시 하층 노동자들의 삶은 하루하루 끼니를 이어가고 몸을 가릴 옷 한 벌을 제대로 입기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다. 신분제의 틀이 점차 무너져 가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도 그 무거운 짐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어서 빈곤에서 벗어날 꿈조차 꾸기 힘든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 2,600년 전에는 얼마나 더 심했을까.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의 격차는 어느 정도나 벌어져 있었을까?
언젠가 세존께서 에카나라(Ekanala; 한 줄기 갈대) 마을 근처에 있는 다키나기리(Dakkhinagiri; 南山)에서 마가다 사람들 사이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바로 그때 씨 뿌리는 철을 맞아 밭을 가는 바라문인 까씨 바라드와자(Kasi Bharadvaja)가 쟁기 500개를 소 멍에에 매었습니다. 아침에 세존께서는 옷을 입으시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밭을 가는 바라문 바라드와자가 일을 하고 있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쌍윳따니까야』 1-7-3-11 (1) 까씨 바라드와자; 『수타니파타』 4. 밭을 가는 사람 바라드와자 경]
위 경전을 보면, 바라문 까시 바라드와자가 한꺼번에 쟁기 500개를 소 멍에에 매고 일을 해야 할 정도로 넓은 농지를 갖고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바라드와자는 부처님께 “오, 사문이여! 나는 밭도 갈고 씨도 뿌리며,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다음에 먹습니다. 그대도 밭을 갈고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다음에 먹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시비를 걸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오, 바라문이여! 나 또한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다음에 먹습니다.”는 대답을 하였던 사람이다. 위에 인용된 경전에서는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곧바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고 전한다.
‘쟁기 500개’를 동시에 사용한다는 것은 그 쟁기를 매게 될 소 500 마리, 소를 부리는 일꾼 500~1,000 명뿐 아니라 그 일을 도와줄 일꾼이 최소한 500명 투입된다는 뜻이니, 미국 남부의 대형 목화밭이나 거대 플랜테이션 농장을 떠올릴 정도로 그 규모가 컸을 것이다.
바라드와자처럼 대규모 농지를 소유한 사람들이 있으면, 하루 한 끼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려운 이들 또한 있게 마련이다.
“여기 어떤 사람은 신분이 낮은 집 - 짠달라(candalas; 죽은 소의 고기를 먹고 사는 가장 하천한 不可觸賤民) · 대나무 세공사 · 사냥꾼 · 수레 만드는 사람이나 청소부 집 -, 가난한 집에 태어납니다. 그의 집에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부족하고, 음식물과 옷을 힘들게 얻어 어렵게 생활을 해가고 있습니다. 그는 못 생겼거나, 보기 흉하거나, 기형이거나, 주기적으로 아프거나 애꾸눈이거나 손이 뒤틀렸거나 절름발이이거나 반신불수입니다. 그는 먹을 것 · 마실 것 · 입을 옷 · 탈 것과 꽃 장식물 · 향료 · 연고[크림]과 침구 · 집 그리고 등불을 얻지 못합니다.” [『쌍윳따니까야』 1-3-III-(1) 사람들]
위 이야기는 부처님께서 꼬살라의 빠세나디 국왕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네 부류의 사람들’ 에 대해 말씀하신 대목 중 일부이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대로 얻어 가지지 못하고 추위에 떨고 위생에 대해 신경을 쓸 수 없으니, 질병에 노출되기 쉽고 그래서 눈이 멀고 팔다리가 뒤틀리고 반신불구가 되기까지 하는 상황을 잘 보여준다. 아시아 · 아프리카의 수많은 사람들이 현재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으며, 비타민과 철분 등 기본 요소 결핍으로 어린 나이에 실명하고 팔다리를 잃어가고 있는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러면 이런 빈부 격차가 꼭 카스트 상 신분 차이때문에만 일어났을까? 우리는 당시 인도 사회가 바라문[司祭] - 크샤트리야[王族 · 戰士] - 바이샤[平民] - 수드라[奴隸]의 4 카스트가 확고하게 자리 잡은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을 것으로 여기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이 시절에도 역시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은 신분 계급과 관계없이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어떤 왕이 재산이 많고 곡식이 많고 금이나 은이 많다면 다른 왕족들은 그보다 먼저 일어나고 그보다 나중에 잠자리에 들며 그에게 봉사하려고 애를 쓰고 그를 기쁘게 해주려 하며 그에게 친절하게 말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하고자 하는 사제들이나 평민들이나 노예들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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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노예가 재산이 많고 곡식이 많고 금이나 은이 많다면 다른 노예들은 그보다 먼저 일어나고 그보다 나중에 잠자리에 들며 그에게 봉사하려고 애를 쓰고 그를 기쁘게 해주려 하며 그에게 친절하게 말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하고자 하는 평민들이나 왕족들이나 사제들도 있을 것입니다.” [『맛지마니까야』84, 마두라 설법의 경]
중국 고대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 “대개 백성들은 상대의 재산이 자신보다 열 배가 넘으면 그를 무시하고 헐뜯지만, 백 배가 넘으면 오히려 두려워한다. 천 배가 넘으면 그를 위해 기꺼이 심부름을 하고, 만 배가 넘으면 그 밑에서 하인 노릇을 하니, 이것이 만물의 이치다.”라고 했는데, 부처님 당시 인도에서도 큰 재산을 갖추기만 하면 설사 노예일지라도 바라문이나 왕족이 그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부처님 당시 인도는 이처럼 정치 · 사회 · 경제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고, 부처님을 비롯한 다양한 사상가들이 등장하는 것 또한 이런 변화의 급류를 타고 일어났던 것이다. 어쨌든 사회가 급변한다는 것은, 계급이나 계층의 상승과 추락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변화’는 ‘희망’과 ‘꿈’을 버릴 수 없게 하는 활력소이기도 하다. (《여성불교》 2009년 7월호 <붓다 시대의 삶>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