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살기 시작한지 10년이 넘었는데, 이제서야 가 봤다, 잠실학생체육관. 실내 경기장 중에서는 우리나라에서 큰 축에 든다고 하던데...
예매를 하고, 배구협회에다 전화를 걸었다.
"OB게임 몇 시부터죠?"
"예정대로라면 한 2시 30분이나 40분 정도부터 시작할 겁니다만...별일 없으면 일찍 오시죠."
"네..."
그러지 않아도 조금 일찍 출발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예매한 거 교환해야 되고, 또 입장해야 되고...사람 떼로 몰릴텐데 그러면 아무래도 여유를 두고 가는 게 낫지 싶었다.
일요일 아침에 별일이 있을 리는 만무한 노릇이었지만 언제나처럼 늦잠을 자는 바람에 허둥대다 도착한 시간이 1시를 조금 넘은 즈음이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엄청난 인파는 보이지 않았고, 다행히 예매권은 금방 했고, 출입구도 한가했다. 좋다고 해야 하나...
표를 내고서 들어간 입구 정면에는 사람 키만한 배구공이 하나 놓여 있었고, 선수들과 팬의 낙서가 가득했다.
"세진 오빠 짱" "형두 오빠 최고" "석진욱이 젤 좋아"
그리고 그 좌우 통로를 따라, 신문 스크랩이 전시되어 있었다. 통로 처음에 놓여 있어서 젤 먼저 눈이 간 스크랩의 주인공, 하종화...고등학교 몇 학년 때였던가. 겨울방학을 맞아 제주에서 열린 백구의 대제전을 보러 갔던 그 해. 최고의 공격수로 떠올랐던 그 사람. 그게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라니. 당시 바로 눈 앞에서 바라본 그는 정말 잘 생기고 또 포근해 보이는 형이었다. 아마 지금까지 등장한 배구선수 중에서 두번째로 잘 생긴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옆에 김세진과 김상우 등 신흥강호로 떠오르기 시작한 즈음의 삼성화재팀 관련 기사들을 모아놓은 스크랩이 있었고...그 다음 스크랩이 바로 그의 것이었다. 장윤창...내 어린 시절의 우상, 최초의 스포츠 스타. 화려한 기교로 이름을 날렸지만 성실과 꾸준함으로 더 오래 기억된 사람.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스파이크를 내리꽂는 20대 초반의 모습, 그리고 약혼자와 함께 수줍게 웃는 20대 중반의 모습, 그리고 은퇴시합 바로 전의 기사. 그리고 너무나 슬픈 그 기사의 마지막 구절. "팀에서는 그를 장래의 감독으로 키울 계획도 고려하고 있다..."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올스타 본 게임전의 이벤트로 스파이크 해서 풍선인형을 쓰러뜨리는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형두...요새 새로 뜨는 스타인가 보다. 걔가 소개될 때부터 경기장은 소녀팬들의 함성으로 가득찼다. 입구가 한산했던 건 아무래도 올 사람들이 벌써부터 들어와 있어서였던 거 같았다. 담배 생각이 나서 다시 복도로 나왔다.
다른 스크랩들도 둘러 봤다. '사라져 간 팀들'이라는 제목 아래 붙어 있는 이름들이 보였다. 한국후지필름, 선경인더스트리, 서울시청...대부분이 IMF라는 강풍 속에서 사라져 버린 팀들이었다. 그 바로 뒤에 '전설'들의 모습이 보였다. 강만수, 장윤창, 김호철, 이종경 등등...한국 배구사상 최초의 전성기였던, 한국 배구의 클래식이라 불려 마땅한 시기의 스타들. 한장의 사진에 눈이 갔다. 젊은 시절의 장윤창과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강두태가 네트를 사이에 두고 있는 장면...
다시 돌아간 경기장에선 여자 올스타전이 막 시작되던 참이엇다. 배구 안 보기 시작한 게 벌써 몇년인지...모르는 선수들뿐이었다. 배구계의 얼짱이라는 어느 선수도 첨 듣는 이름이었고...아, 그런데 그들이 보였다. 최강희와 구민정. 이도희와 장윤희가 사라진 여자 배구판에 그나마 아는 이름이 보여서 반가웠다. 남자 배구가 스파이크 보는 재미라면 여자 배구는 역시 랠리보는 재미다. 공격과 수비를 계속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서 배구에 집중했다. 점수제가 아닌 시간제로 진행되서 그런지 경기는 금방 끝났다. 그러다 보니 고딩때 같은 반 녀석이 생각났다. 배구보러 같이 갈 때마다 자리 바꿔가면서 여자선수들 '뒷태'를 살피던 녀석. 여자배구선수랑 결혼하고 싶다던(참고로 나보다 키 작았다) 그 녀석.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라면 한 그릇 먹고 다시 돌아온 체육관은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어느샌가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워밍업을 하고 있었다. 저편 네트 너머에 눈에 띄는 한 선수가 보인다. 벌써부터 자켓을 벗어붙이고 뛰는 그 사람. 긴 머리, 크지만 결코 싱거워 보이지 않는 탄탄한 몸매. 그 녀석이었다. 내가 직접 보러간 경기에서 우리팀을 아작내던 공포의 주인공, 이상렬...
이쪽 코트에선 스파이크 연습하러 점프하는 선수들 앞에서 부지런히 토스를 하는 선수가 눈에 띈다. 통통한 몸매, 조금은 벗겨진 듯 보이는 머리...이경석 세터. 1, 2회 대회를 연속으로 석권한 후 잠시 우승권에서 멀어졌던 고려증권이 다시 최강팀의 면모를 선보일 당시의 세터. 20대 후반에 들어서야 빛을 본 대기만성의 주인공.
그리고 대부분 몸이 불어 둔해진 선수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날렵해 뵈는 선수. 박삼룡이었다. 그 실력에, 그 용모에 왜 인기를 얻지 못했는지 참 신기하기만 했던 선수. 그리고 스파이크한 공이 네트를 넘기지 못하자 멋적은 듯 동료들에게 웃어보이는 박주점과 정의탁...
경기는 시작됐다. 그리고 예상처럼 졸전이었다. 끈끈한 수비의 대명사 홍해천이 리시브를 제대로 못하고, 전설의 세터 김호철의 토스웍도 예전같지 않았다. 속공에 있어서만큼은 한국에서 두번째라고 하면 혀깨물고 죽겠다고 할 박종찬이 타이밍을 못 맞춰서 오버타임이 되질 않나, 장윤창의 스파이크가 백테를 맞고 도로 들어오질 않나...간간히 터진 이상렬, 하종화, 임도헌의 강타와 이재필의 직선공격, 박삼룡의 영양가 만점의 스파이크, 이성희의 토스가 그나마 예전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되새겨 줄 뿐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이제 앞으로는 빨간색 소매를 펄럭이는 그 유니폼을 볼 기회는 없을 지도 모르기에 여기까지 온 것 아니겠는가. 언제 또 임도헌, 마낙길, 최천식, 하종화가 뛰는 모습을 볼 것이며, 장윤창이 유니폼을 입고 어설픈 스파이크를 하는 걸 보겠는가.
그리고 가장 반가운 장면은 그것이었다. 초반 계속된 범실로 점수차가 벌어지자 작전타임을 부른 진준택 감독님. 예전처럼 한 손은 주머니에 꽂고 다른 한 손으로 선수들 가르키며 지시하던 모습.
첫댓글 이상열은 현역으로 뛰어도 될듯하던데..백어택까지 성공시키고....정의탁은 그 특유의 시간차 공격을 여러개 성공시키두만...간만에 반가웠던 얼굴들 봐서 좋았음...그리고 아나운서 유수호씨는 차라리 해설가로...배구뿐만 아니라 농구도 많이 아시두만..
역시 찌라시덜이군..왕년의 실력 그대로였따카드만..암튼 좋았겠따..오빠야. 근데 내 메시지 씹은 거는 절대로 잊지 않겠다!!
"그리고 예상처럼 졸전이었다." --이 말이 무언가 핑하니 오후의 멍한 머리를 깨우네. 잘 읽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