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읽을말씀: 욘4:1-11
주제말씀: 욘4: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첫째, 우리의 성냄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지 판단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욘4:4)
니느웨에 내리기로 하셨던 하나님의 재앙이 철회(엄밀히 말하면, 유보)되자, 요나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이를 매우 싫어하고 성내기까지 했습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1절)
어째서입니까? 한 마디로, 죽기보다 싫은 일이 결국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3절) 무슨 일 말입니까? 하나님의 철회(유보) 결정으로 원수의 나라, 곧 니느웨(앗수르)가 망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2절 하)
그래서 차라리 자신을 어떻게 해달라고 했습니까? 자신의 생명을 거두시고 자신을 죽여주실 것입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3절)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무엇이라고 답변하셨습니까? 너의 성냄이 과연 내 앞에서 옳은지 판단할 것,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4절) 즉 그의 성냄이 하나님 앞에서 결코 옳지 않은 것임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내 감정을 표출하기에 앞서서 이 감정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인지를 먼저 판단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지금의 이 성냄이 하나님 앞에서 과연 옳은 것이며, 또한 지금의 이 불평이 하나님 앞에서 과연 정당한 것인지 등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요나의 성냄을 꾸짖으시거나 질타하시기보다는, 오히려 그로 하여금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도록 도우신다는 점입니다. 즉 은혜와 자비와 인애가 크셔서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2절 중)
그러니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혹 불평이 생기고 성이 나더라도, 이를 표출하기에 급급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이것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인지를 먼저 판단하고, 옳지 않으면 절제하고 회개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둘째,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깨닫고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 하였고 재배도 아니 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거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4:10,11)
하나님이 말씀(4절)을 듣고 요나의 태도가 바뀌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니느웨의 멸망을 보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성읍 동쪽에 초막을 짓고 눌러앉았습니다.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5절)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어찌 하셨습니까? 다양한 소재들을 동원하셔서 그를 교훈하시고 깨닫게 하셨습니다. 어떤 것들을 통해 그리 하셨습니까? 박넝쿨(6절), 벌레(7절), 뜨거운 동풍(8절) 세 가지입니다.
즉 박넝쿨을 하룻밤에 자라게 하셔서 그늘을 만들어주셨다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6절 상) 이튿날 벌레에 먹혀 시들게 하시고,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7절) 이내 그에게 뜨거운 동풍을 보내신 것입니다.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8절 상)
요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박넝쿨이 있을 때는 그렇게도 크게 기뻐하더니,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라.”(6절 하) 박넝쿨이 시들고 뜨거운 동풍이 불자 차라리 죽기를 구하였던 것입니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8절 하)
이때 하나님은 그에게 무엇을 다시 환기시키셨습니까? 그의 성냄이 과연 옳은 것인지, 즉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과연 옳은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9절 상)
그러나 그때까지도 요나는 어떠했습니까? 전혀 반성할 줄 몰랐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다고 박박 우기기까지 했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9절 하)
이쯤 되면 그를 버리실 법도 하신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하셨습니까? 그런 그에게라도 무엇을 친히 가르치셨습니까? 그가 하룻밤에 자란 박넝쿨을 아낀 것과 같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 하였고 재배도 아니 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10절) 하나님께서 이 큰 성읍 니느웨 백성들을 아끼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입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거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11절)
이를 통해 또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하나님은 깨닫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서라도 깨닫고 배우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아둔한 우리를 말씀으로 깨우치시되 우리의 다양한 환경을 통해서도 속히 깨닫게 해달라고 그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