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벌레 시 모음( 12편) : 홍해리, 복효근, 반칠환, 김종구, 구광렬, 한하운,
정수자, 황영숙, 위명희, 위선환, 강영은, 김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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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벌레 / 洪 海 里
몸으로 산을 만들었다
허물고,
다시 쌓았다
무너뜨린다.
그것이 온몸으로 세상을 재는
한평생의 길,
산은 몸 속에 있는
무등無等의 산이다.
자벌레 / 복효근
오체투지, 일보백배다.
걸음 걸음이 절명의 순간 일러니
세상에 경전 아닌것은 없다.
제가 걸어나온 만큼 만 제 일생이어서
몸으로 읽는 경전
한자도 건너 뛸 수 없다.
자벌레 / 반칠환
재면 잴수록 거리가 사라지는 이상한 측량을 했다고 한다.
나무 밑둥에서 우듬지까지, 꽃에서 열매까지 모두가 같아졌다고 한다.
새들이 앉았던 나뭇가지의 온기를,
이파리 떨어진 상처의 진물을 온 나무가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저이의 줄자엔 눈금조차 없었다고 한다.
저이가 재고 간 것은 제가 이륙할 때 열 뼘 생애였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늘그막엔 몇 개의 눈금이 주름처럼 생겨났다고도 한다.
저이의 꿈은 고단한 측량이 끝나고 잠시 땅의 감옥에 들었다가,
화려한 별박이자나방으로 날아오르는 것이었다고 한다.
별과 별 사이를 재고 또 재어 거리를 지울 것이었다고 전한다.
키요롯 키요롯- 느닷없이 날아온 노랑지빠귀 가 저 측량사를 꿀꺽 삼켰다 한다.
저이는 이제 지빠귀의 온몸을 감도는 핏줄을 잴 것이라 한다.
다 재고 나면 지빠귀의 목울대를 박차고 나가 앞산에 가 닿는 메아리를 잴 것이라 한다.
아득한 절벽까지 지빠귀의 체온을 전할 것이라고 한다.
자벌레 / 김종구
이게 도대채 몇 자나 되는 거야?
궁금증 많은 자벌레
한 자 한 자
세상을 재본다
제 몸이 한 자인줄 아는 자벌레가
풀잎 끝에서 오랜만에 허리 펴고
저것도 잴 수 있을까? 허공 바라보다
재던 치수 잊어버리고
아래로 내려오며 한 자 두자
다시 재고 있다
내 나이가 몇이더라
깜박 깜박 건망증도 심한
자아 (自我) 벌레
百을 접은 허리 접었다 폈다
열심히 뱃살을 튕겨본다
자벌레 / 구 광 렬
자벌레는 한 발자국이 몸의 길이다
한 발자국을 떼기 위해 온몸을
접었다 폈다 한다
자벌레라 불리지만 거리를 재지도
셈을 하지도 않는다
그런 그는 먹이를 지나칠 때도
사랑을 지나칠 때도 많다
그러나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다
한 발자국이 몸의 길이인 자벌레는
모자라는 것도 남는 것도
모두 다른 몸의 것이라 생각하며
몸이 삶의 잣대인 자벌레는
생각도 몸으로 하기 때문이다
자벌레의 밤 / 韓河雲
나의 상류에서
이 얼마나 멀리 떠내려 온 밤이냐
물결 닿는 대로 바람에 띄워 보낸 작은 나의 배가
파도에 밀려난 그 어느 기슬기에
살살개도 한 마리 짖지 않고......
아 여기서
나는 누구의 이름을 불러 보아야 하나
첩첩한 어둠 속에 부표처럼 떠서
가릴 수 없는 동서남북에 지친 사람아
아무리 불러보아야
답 없는 밤이었다.
자벌레의 길 / 정수자
생을 방전하듯 널브러진 복날 오후
한결같이 몸으로만 당기는 길을 본다
연초록 잔등에 실린 뜨거운 길을 본다
구부린 등 둥글게 환을 그릴 때마다
후광인 양 잠시 내려 출렁이는 하늘
아슬한 순례를 따라 풀잎들 휘어진다
허공을 여는 순간 흔적을 지우는 길
자로 재듯 오로지 몸만큼만 나아간다
한 생을 오체투지로 수미산에 이르듯
자벌레 / 황영숙
어린 신갈나무 줄기를 기어오르는 자벌레. 몸을 찢어져라 잡아 늘여 앞으로 내밀고 몸의 끝을 끌어당겨 한껏 오그려 머리와 꼬리를 맞댄다.
그게 한 걸음이다. 제 몸의 길이만큼씩 재며 간다. 온몸으로 훑어간다.
자벌레가 정수리까지 오르면 그 사람은 죽고 만다는 속설
누군가 저런 걸음으로 내 영혼에 와 닿는다면 혼절하지 않겠는지
자벌레 한 걸음 한 걸음 가고 있다
자벌레 / 위명희
보도블록 위에,
진한 얼룩을 남기며 짓뭉개진
몸뚱이 방금 전까지 온 길을 단념하고
온기가 남아 꿈틀대는 몸뚱이는
살아갈 날을 헤아리려 애쓴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 그건 모른다
삼켜야만 살 수 있는 위쪽인지
배설해야 가벼워지는 아래쪽인지
지금 그것을 가늠할 수 없다
휘파람새가 날아간 가로수 아래
가슴이 이겨진 벌레가 있다
지나간 삶의 퍼즐을 맞추려고
접은 무릎 위에 이마를 짚고
아무리 재어봐도 같은 제 맘만 믿다
발등을 내려찍힌 자벌레처럼
고통이 말라서 흙먼지로 바스러지는
생살을 젖은 눈으로 들여다보며
내려다보면 나이 서른아홉에 뭉텅
잘라낸 자궁처럼, 검게 말라붙은
어두운 곳에서 늘 따끔거리던 모래알
미끈거리던 분침 하나씩
흙바람에 쓸려간다
자벌레 구멍 / 위선환
쳐다보니
떡갈나무 잎사귀에
자벌레가 붙어 있습니다
그저 그러는구나 했다가 한참 뒤에 다시 보니
자벌레는 없고
가늘게, 길다랗게, 그리고 파랗게,
딱 자벌레만한 구멍이
떡갈나무 잎사귀에 뚫려 있습니다
자벌레가 하늘이 되는 방법이
그랬습니다
자벌레 / 강영은
모과나무에서 열매 하나가 툭 떨어진다
새파란 그것을 집어들자
꿈틀거리는 자벌레 한 마리 구멍 속에 박혀 있다
옆구리가 숭숭 새는 저 구멍은
달콤한 추억을 품고 있던 단단한 맷집의 살이었다
자벌레 한마리가 모과열매의 살을 파고 들었으리라 처음에는 속살을 파고드는
자벌레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겠지 그러다가 차츰 너를 갖고 싶다는 귓속말에
넘어 갔겠지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듣다 보면 진실같은 삶의 가증성에 옆구리가
새는 줄 몰랐을 거야 삶의 밀 도와 중력이 무한대로 뻗어 나간 슬픔의 블랙홀 안에
갇히게 되는 걸 몰랐던 거지 매너리즘의 일상성에 탐식 당하는 삶이란 그런거야
어쨋거나 자벌레가 도끼인 셈이지 열 번 찍어 안넘어 가는 나무가 없거든
무성한 잎사귀 아래
슬픔과 기쁨의 나날을 훔쳐보는 자벌레가 있다
단단한 모가지가 부러지지 않기 위해서는
바람의 굴삭기를 가진 자벌레를 조심해야 한다
간지러운 입술 속 부드러운 이빨을 가진
내 안의 자벌레가 가장 무섭다
자벌레 / 김일태
한 마리
웃 옷 명치부근에 붙어
기어가고 있다
무량한 세상
언제 다 재겠냐고
웃지 마라
너희들 가슴팍은 몇 뼘이냐 되냐
첫댓글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자벌레에 관한 다양한 시각 ....많이 도움되지요? 감사합니다.
속설에 자벌레가 머리에서 발끝가지 다 재고나면 자벌레에 재인 사람은 죽는다고 들었는데, 이 속설은 자기 삶을 다누리면 죽는다는 이야기 이겠지요? 한자를 재고 이리저리 세상을 굽어보고, 또한자 재고 이리저리 굽어보는 자벌레가 도인 같습니다.
자신의 키만큼만 길이를 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