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6월 히틀러는 왜 소련을 침공했을까?
서유럽 석권 히틀러 “동쪽으로 게르만족 터전 확장”
히틀러, 독일 경제 불황 위기 이용 집권
서구 전승국 유화적 대응 야욕 부추겨
독소불가침조약 체결 후 폴란드 점령
프랑스 항복 받아내고 전격 소련 침공
나치의 대중집회 장면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쟁으로 1941년 6월부터 1945년 4월까지 벌어진 독일과 소련 간의 전쟁을 꼽을 수 있다.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으나 소련의 스탈린은 느긋했다. 전쟁이 터지기 불과 일주일 전에 독일과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폴란드의 절반을 전리품으로 챙길 수 있다는 밀약을 이미 받은 터였다.
독소(獨蘇)불가침조약 체결 소식이 세계에 알려진 직후 어느 만평은 히틀러를 신랑으로, 스탈린을 신부로 묘사했다. 그동안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상호 비방하던 독일의 나치즘과 소련의 볼셰비즘이 갑자기 밀월 단계로 접어든 것이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두 이념의 결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이 암호명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으로 소련을 전격적으로 침공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히틀러는 왜 이 시점에 소련을 공격했을까? 다양한 루트의 사전 경고에도 불구하고 왜 스탈린은 독일 침공에 대비하지 못했을까? 이후 독소전쟁은 어떻게 전개됐을까? 양국의 충돌이 2차대전의 전체 전황과 이후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이 글은 바로 이러한 의문점에 대한 답을 구하려는 한 시도다.
역사적 배경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에서는 한동안 서방 전승국 중심으로 국제연맹 창설, 군축회담 개최 등 평화 재건을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로 대변되는 파시스트 정권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이들은 ‘영광스러운 민족국가’ 건설을 명분으로 내걸고 강력한 개인적 카리스마를 토대로 무자비한 독재권력을 구축했다. 국내 정권을 장악한 이들이 1930년대 중반 이래 주변국에 대해 노골적으로 침략 본성을 드러냈으나 서구 전승국들은 고립주의적인 분위기 아래 유화적인 대응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 기고만장한 이들의 침략으로 인해 세계는 재차 대(大)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독일군의 전격전 모습
양차 대전 기간 중 유럽에서 대두한 우익 성향의 독재체제인 파시즘(Fascism)은 전후 이탈리아에서 맨 먼저 출현했다. 종전 후 극도의 혼란에 처했던 이탈리아 상황은 파시즘 태동에 비옥한 토양이 됐다. 파시스트 체제의 첫 실권자는 무솔리니였으나 이를 극단으로 몰고 간 인물은 독일의 히틀러였다. 원래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무명(無名)이던 히틀러를 유력 정치가로 키워준 일등공신 역시 전후 독일사회의 극심한 혼란이었다.
독일은 패전국이었기에 종전 후유증은 더욱 심했다. 독일을 전범자로 규정하고 천문학적 배상금을 부과한 베르사유조약에 대한 불만이 엄청났다. 특히 전후 독일군에 강요된 대폭의 군비 축소는 군부의 불만을 초래했다.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는 극심한 초(超)인플레이션으로 의회주의의 기반인 중산계층이 무력화됐다. 전쟁 패배로 호엔촐레른 왕조가 몰락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탄생했으나 자유민주주의는 겨우 걸음마 단계였다. 집권한 사회민주당의 약체성으로 정국은 혼미했고, 설상가상 정권탈취를 노린 소요사태가 좌·우파를 가리지 않고 빈번하게 일어났다.
전후 독일의 불안정한 정세는 ‘외로운 늑대’ 히틀러에겐 호기로 작용했다. 제대 후 그는 제2의 고향이랄 수 있는 남부도시 뮌헨을 거점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우선, 과격한 민족주의자들을 모아 나치당을 창당(1920)한 후 베르사유조약 파기, 독일 민족 단결, 유대인 추방 등 과격한 구호를 외치며 세력을 키웠다. 하지만 뮌헨폭동(1923. 11.) 실패 후 히틀러와 나치당은 쇠락의 길을 길었다. 때마침 독일 경제도 점차 회생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가 안정되기 시작했고, 그와 반대로 나치당 같은 과격 정당의 앞날은 어둡게 됐다.
그러나 1929년 10월 터진 세계 대공황은 미국의 단기차관에 의존하던 독일 경제에 충격을 가했다. 경제구조가 무너지고 실업자가 넘쳐나면서 독일인들은 재차 나치당의 과격한 외침에 솔깃하기 시작했다. 경제 불황으로 조성된 위기 상황을 이용해 기사회생한 나치당은 빠르게 세력을 확장해 1932년 제1당 자리에 올랐다. 히틀러 자신은 대통령 선거에서 2위에 오르며 일약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정치가로 부상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견제로 잠시 주춤했던 히틀러가 드디어 1933년 1월 44세로 내각 수반으로 임명됐다. 그는 곧 대중의 열광적 환호 뒤에 감춰온 폭력적 본성을 거침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취임 직후 히틀러는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이라는 정치공작을 벌여 공산당을 비롯한 반대 세력을 무력화했다. 이어 돌격대 지도부에 대한 피의 숙청을 감행해 당내 도전세력 제거 후 총통에 취임(1934.8.)했다. 이제 강력한 공업국이자 잠재적 군사강국인 독일의 입법·사법·행정 삼권이 오스트리아의 미술지망생이던 히틀러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제 일찍이 『나의 투쟁』에서 천명한 목표들을 현실화하는 방향으로 점차 발걸음을 내디뎠다. 라인란트 진주(進駐)를 시작으로 오스트리아 합병(1938.3.), 체코 주데텐란트 합병(1938.8.) 등 독일 주변 영토를 야금야금 잠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파시스트들의 침략정책에 서구 전승국들은, 뮌헨회담(1938.9.)에서 엿볼 수 있듯이, 적극적인 대응보다 요구를 묵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당연히 독재자들의 침략 야욕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급기야 동유럽에 이해관계가 깊은 소련의 불만과 의구심을 초래해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여겨진 나치즘과 볼셰비즘이 손잡는 의외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독소(獨蘇)불가침조약이 체결(1939.8.23.)된 것이었다. 양 전선에서의 동시 접전이라는 고질적인 ‘방위 트라우마’를 해소한 히틀러가 폴란드 땅을 짓밟는 일은 이제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1939년 9월 1일 기어코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이날 독일군은 국경에 놓인 차단봉을 제거한 후 물밀 듯이 폴란드로 쳐들어갔다. 2차 대전이 불붙은 것이었다.
폴란드 국경을 넘은 독일군은 거침없이 진격했다. 폴란드군이 사투를 벌였으나 정신력만으로는 우월한 무기체계와 ‘전격전’이라는 창의적인 전투방식으로 무장한 독일군을 상대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 폴란드군은 동부전선에서 밀어닥친 소련 적군(赤軍)의 공격마저 막아내야만 했다. 독일군은 불과 3주 만에 폴란드의 서쪽 절반을 차지할 수 있었다.
독소(獨蘇)불가침조약을 풍자한 삽화
폴란드 점령 후 약 6개월 동안 재정비를 마친 독일군은 1940년 5월 서부전선에서 본격적인 공세작전을 펼쳤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부터 국경선에 구축한 마지노선을 과신하던 프랑스군의 예상과 달리 독일군은 특유의 기동전으로 개전 초반부터 프랑스군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독일군 기갑사단의 빠른 진격에 쫓긴 약 33만 명의 연합군 병력은 도버해협에 연한 벨기에의 한 항구도시로 내몰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른바 ‘덩케르크 철수’ 이후 전의를 상실한 프랑스가 항복(1940.6.22.)했다.
이후 영국 침공에는 실패했으나 서부 유럽을 석권한 히틀러는 게르만족의 생활공간 확보라는 숙원을 실현하는 과업에 착수했다. 눈을 다시 동쪽으로 돌려 1941년 6월, 소련 침공을 결행한 것이다. 이제 20세기 최고의 악한으로 꼽히는 히틀러와 스탈린 두 독재자의 세기적 대결의 장이 펼쳐졌다. 이는 둘 중 하나가 사라져야 끝나는 ‘막장 게임’이었다. 과연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히틀러의 세계 정복 야욕이 베를린 함락 불러
역사적 전쟁 ‘바르바로사 작전’
불가침조약 2년도 안돼
소련 침공한 히틀러의 독일군
‘서부전선 영국 지원 차단’ 목적
초전 승리 불구 패배한 독일
추운 날씨·토질에 독일군 무력화
공업력 얻은 소련, 전세 역전 성공
애국심과 자신감도 ‘한몫’
소련으로 진군하는 독일군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체결한 지 채 2년도 되지 않은 불가침조약을 깨고 드넓은 소련 땅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는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작전이었다. 독일군이 동원한 병력만 30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여기에 약 4000대의 탱크와 2500대의 항공기까지 더해져 그 위세는 상상을 초월했다. 150년 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실패 선례를 잘 알고 있던 히틀러와 독일군은 대(對) 소련전을 늦어도 연말까지는 끝낼 수 있다는 판단 아래 모험을 감행했다. 숙원인 소련 정복을 달성하기 위함이었다.
히틀러는 이 역사적 전쟁에 ‘바르바로사 작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이번 싸움이 세계정복의 꿈을 실현하는 전환점이 되리라고 믿었으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는 초기 예상처럼 독일군의 신속한 최종 승리를 가져다주기는커녕 엄청난 살육전의 단초가 됐기 때문이다. 실제 1941년 6월 말 터진 독소전쟁은 1945년 4월까지 거의 4년 동안 이어지다 종국에는 독일군의 완패로 끝났다. 1942년 후반기 내내 벌어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 수세에 몰린 독일군은 후퇴를 거듭한 끝에 결국 베를린마저 함락당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히틀러는 왜 바르바로사 작전을 감행했을까? 왜 전통적으로 독일군이 두려워한 양 전선에서의 동시 전쟁이라는 모험을 시도한 것일까? 더구나 브리튼 전투 실패로 서부전선에서 광대한 식민지 자원을 보유한 영국이 건재한 상황에서 말이다. 그는 이 작전이 향후 자신과 독일국민을 파멸로 이끌 것이라는 점을 짐작이나 했을까? 아마도 히틀러는 크게 두 가지 판단에 이끌려 소련과의 전쟁을 결심했으리라 여겨진다. 우선, 그가 주장해 온 독일민족의 생활공간을 전격전 전술로 무장한 독일군의 우월한 전력을 이용해 단기간 내 차지할 수 있으리라 자신한 것이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현재 서부전선에서 완강하게 버티는 영국의 마지막 희망이랄 수 있는 소련의 지원 가능성을 아예 제거해 버림으로써 처칠 수상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낼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이었다.
크게 세 방향에서 소련 땅으로 진격한 독일군은 초전에 엄청난 승리를 거뒀다. 레에프 원수 휘하의 북부집단군은 울창한 삼림과 흩어진 늪지라는 자연장애물과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을 분쇄하며 진격, 8월 말경 발트 삼국을 관통해 레닌그라드를 고립시켰다. 룬트슈테트 원수가 지휘한 남부집단군은 소련군의 지연전을 극복하고 8월경 우크라이나를 초토화하면서 주도(主都) 키예프 포위전에 돌입했다. 복크 원수 휘하의 중앙집단군이야말로 기계화된 독일군의 위력을 한껏 발휘했다. 18일 동안 400마일 전진이라는 신기록을 세우며 광활한 러시아 중앙부를 가로질러 진격을 거듭한 독일군은 8월경 모스크바로 통하는 마지막 장애물인 스몰렌스크를 포위한 채 전열을 재정비했다. 만일 이대로만 전황이 이어졌다면, 독일군은 개전 시 히틀러가 제시한 대로 늦어도 그해 성탄절 이전에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름대로 막강한 전력을 보유했음에도 소련군은 마치 ‘눈사람’처럼 스르르 무너졌다. 영토 상실은 차치하고라도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로 고통당했다. 개전 후 두 달도 되지 않아 독일군은 북쪽으로는 레닌그라드, 중앙으로는 모스크바, 그리고 남쪽으로는 우크라이나와 캅카스 자원지대의 지척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이처럼 그런대로 사기가 높았던 소련 적군(赤軍)이 초전에 무기력하게 무너진 이면에는 독일군의 공격 징후를 경고하는 다양한 첩보를 철저하게 무시한 스탈린의 실책이 숨겨져 있다. 스탈린이 끝까지 히틀러를 신뢰(?)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문제는 스탈린의 오판에 누구도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1939년 8월 독일과의 불가침조약 체결을 자신이 히틀러를 속여서 얻은 성과로 인식했던 스탈린이 일종의 자기 확증편향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당시 스탈린은 불가침조약 성사 덕분에 소련은 독일이 서쪽에서 동종의 자본주의 국가들과 긴 전쟁을 수행하느라 전력을 소진하는 동안 자국 군사력을 보강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처절한 대숙청 기간에 용케 살아남은 자들은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무오류의 존재인 스탈린에게 누구도 목숨 걸고 감히 간언할 수 없었으리라. 심지어 스탈린은 독일군이 침공을 시작한 이후에도 처음에는 이를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6월 22일 새벽 육군참모총장 주코프의 유선 보고를 받고서야 이를 수용했다. 이미 최전방에서는 소련군 주력이 빠르게 와해되면서 퇴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초전의 엄청난 승리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계획대로 단기간 내에 소련군을 완파하는 데 실패했다. 사실상 1940년대 초반의 소련은 볼셰비키 혁명 후 엄습한 내전과 기근, 당내 권력투쟁 등으로 만신창이가 됐던 1920년대의 모습이 아니었다. 전형적인 농업국이던 소련은 1930년대 초반 시동을 건 공업화 정책에 힘입어 빠르게 산업국가로 변모하고 있었다. 독재자 스탈린이 러시아인들의 모진 인내와 가혹한 희생을 담보로 추진한 공업화가 점차 그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광대한 영토와 엄청난 인구, 러시아인 특유의 인내력에 미흡하나마 공업력이 더해지면서 소련은 강력한 군사적 잠재 역량을 갖추게 됐다. 이러한 저력을 토대로 1942년 겨울에 얻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를 계기로 전세 역전에 성공한 소련군은 점차 독일군을 자국 땅에서 몰아내기 시작했다.
역사적 영향
소련을 단기간에 제압할 목적으로 시도한 독일군의 바르바로사 작전은 왜 실패했을까? 흔히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영원한 우군인 자연조건, 즉 독일군의 기계화 부대를 무력화시킨 겨울철 동(冬)장군과 봄철 토(土)장군의 활약이 실패 요인으로 꼽힌다. 이를 인정하더라도 자연적 요인에 러시아인의 애국심이 더해졌기에 궁극적으로 독일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개전 이전부터 독일군은 소련군과 일반 러시아인들의 결연한 저항 의지를 과소평가하는 우(愚)를 범했다. 전쟁 직전까지 스탈린이 벌인 ‘대숙청’으로 불안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터지자 대부분의 러시아인은 ‘대조국전쟁’이라는 스탈린의 민족주의적 호소에 기꺼이 동참했다. 게다가 1930년대 초반 이래 온갖 희생을 딛고 지속해 온 공업화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쟁이 길어지면서 독일군의 인적·물적 자원은 빠르게 고갈된 데 비해 소련군은 정반대로 시간이 갈수록 강력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소련군이 얻은 자신감이었다. 초전에 파죽지세로 공격해 오는 독일군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나, 마침내 1942년 후반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를 계기로 독일군의 불패 신화를 깰 수 있었다. 덕분에 독일군의 침공 첩보를 줄곧 부인하면서 전쟁 초반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를 초래한 원흉이던 스탈린은 어느새 대내적으로는 조국 방어의 화신으로, 대외적으로는 루스벨트·처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적 지도자로 올라섰다. 1943년 봄부터 동부전선의 전세는 차츰 소련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 나폴레옹은 실패했으나 자신은 성공해 독일민족의 번영에 절실한 ‘생활공간’을 확보하리라 믿고 바르바로사 작전을 벌였던 히틀러는 이제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 옛날 12세기에 십자군 원정 중 익사한 바르바로사 황제의 이름을 침공 계획의 암호명으로 택한 탓에 역사의 저주를 받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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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6월 히틀러는 왜 소련을 침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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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14 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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